작성자 : 그린그림 (ddcoin@empal.com) 추천: 4097, 수정: 1, 조회: 47419, 줄수: 6790, 분류: Etc. [중편] 절교(絶交) 18 인생 살면서, 3분의 1의 시간동안 한 새끼 꽁무니만 따라다녔다. 아침나절에 대령해서 수발들고, 점심때 달려가 수라상 차리고, 저녁때 쫓아다니며 밤놀이 뒤처리에 집 앞까지 배웅하는, 똘마니 인생 6년도 오늘부로 끝이다. 절교다. 이 대 한. - 절 교 ( 絶 交 ) - 내 이름은 장녹수. 방년 18세. 서울의 그저 그런 고교 2년생이다. 양친 부모 모두 건재하시고, 아래로는 중 3짜리 남동생이 있으며, 본인은 흔히 말하는 양아치 꼬붕이다. 친구 하나 잘 못 만나 인생 말아먹은 대표적인 케이스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사나이 장녹수, 오늘 부로 쪼잔시려운 양아치 생활 접고, 만인의 축복 속에 범생이로 등극하리라 다짐했다. 평소라면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 꾸깃해진 와이셔츠 다리고, 밥과 국을 퍼서 찬합에 담아 싸고, 어마마마께 앙탈부리며 얻어낸 돈을 들고 대한이 놈 집에서 행차하실 때까지 기다렸겠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나는 선언한 것이다. 대한이 놈과의 절교를. 1. 초등학교 5학년, 그 때부터 싹수가 노래서 쌈박질만 하고 다니던 이대한과 질긴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학교 앞 오락실 2층 화장실 변기 앞에서였다. 당시 나는 가히 오락의 신이라 해도 좋을 만치의 실력자로, 한 번 오락기에 붙었다 하면 당해낼 자가 없었다. 학업에는 일찌감치 관심이 없었기에, 학교보다는 학교 밖 생활에 더 충실함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어쨌든 거진 하루의 반 이상을 오락기 앞에 붙어 지내는 내게, 시간 날 때 가끔 들려서 손이나 푸는 정도의 고등학생 양아치 형님들이 이길 수는 만만의 콩떡으로도 없었다. 대개의 아이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어린시절에는 철도 없었고, 눈치도 없었다. 적당히 봐줬으면 좋았을 것을, 어쩌자고 주먹이 밥보다도 가까운 양아 형님들 앞에서 배 째라 베짱이 배포로 맞선 것인지…. 판을 거듭할수록 오락기 저편의 거친 숨소리가 더해지면서, 나중에는 차마 입에 담지 못 할 욕의 향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20연승 쯤 했을 때, 드디어 불 받을 대로 받으신 건너편 덩치 큰 양아 형님들 3명이 험악한 기세로 달려들어, 내 가녀린 몸뚱이를 끌고 가 오락실 2층 화장실의 더러운 바닥에다 던져버렸다. 장녹수 인생 12년이 허름한 오락실 바닥에서 이름 없는 양아치들에게 끝나는가 싶어서 겁먹은 나는, 부끄럽게도 큰 소리로 울어제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양심이 개 콧구멍의 코털만치도 없는 그 놈들은 시끄럽다며 더더욱 강도를 더해 패기 시작한 것이다.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당하는 다구리… 아니 집단 폭행에, 어리고 여린 내 몸은 너덜너덜 해지고 있었다. 입을 다물면 덜 맞았겠지만, 맞으면 맞을수록 왠지 모를 오기가 솟아올라서, 더해지는 아픔만큼 목소리의 톤을 높였다. 한참을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두드려 맞고 있을 때였다. 더 이상은 목소리도 쉬어서 잘 안나올 때 쯤, ‘억’소리와 함께 나의 등짝을 걷어차던 다리 한 짝이 사라졌다. 이어서 다른 구타도 멈춰졌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머리를 감싸 쥐던 팔을 풀고, 훌쩍거리느라 눈물 콧물 뒤범벅으로 더럽혀진 얼굴을 들어 올렸다. 널브러져서 신음하는 커다란 등치의 양아치 한 놈의 등 뒤로, 보기에도 무지 단단해 보이는 당구 큐대 하나를 들고 열나 잘생긴 놈이 하나 서 있었다. 검푸른 머리에 창백한 피부, 새빨간 입술. - 여기까지 들으면 여자 같은 얼굴이라 생각하겠지만 천만의 말씀. 반듯한 이마와 쭉 뻗은 콧대, 날이 선 눈 줄기 위로 있는 짙은 눈썹이, 굵으면서도 섬세하게 자리 잡아 ‘핸썸한 남성의 표본은 이런 것이다’ 싶은 얼굴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강직한 어깨와 날씬한 허리가 기다란 다리위에 자리 잡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호리호리한 느낌인데도, 기도랄까 박력이 온 몸에서 흘러나와, 마치 동물의 왕국에 나오는 야생사자 같았다. 키는 그다지 크지 않았는데, 옆에 서서 긴장한 채 서있는 양아치들 보다 머리하나가 더 작았다. 그런데도 내 눈에는 꼭 그가 거인처럼 커 보였다. 갑작스레 등장한 그를 쳐다보는 동안 내 몸에서는 알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났다. 머리 속에서 종이 울리고, 가슴이 쿵쾅거리면서 얼굴이 따땃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와, 멋있다!’ 전혀 이런 생각을 할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보는 순간부터 넋을 놓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양아치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맞고 뻗은 놈조차도 감탄을 하며 그 면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홀려있던 침묵의 시간은, 그 멋진 남자가 뒤돌아섬으로써 막을 내렸다. 얻어맞고 뻗어있던 양아치 한 놈이, 그제야 아픔을 호소하면서 신경질을 낸 것이다. 돌아서던 그의 넓은 어깨를 거칠게 붙들고 뭐라 뭐라 욕을 하는 찰나에, ‘퍽’소리와 함께 양아치가 바닥에 처박혔다. 후려친 큐대를 어깨에 맨 채로 나머지 양아치들을 노려보자, 놈들도 위기감을 느끼고 긴장한 채 거리를 좁혔다. 짧은 욕설과 함께 주먹을 동시에 뻗은 양아치들! 마치 액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주먹을 슬쩍 흘려보내며, 그는 두 놈의 명치 끝으로 큐대를 강.하.게. 찔러 넣었다. 억 소리도 못 내며 무너져 내리는 두 양아!! 오우, 원더풀! 판타스틱! 정말 멋졌다.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다. 동생 희빈이가 좋아하는 만화영화의 주인공이 튀어나온 것 같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스파이더 맨을 만난 것 같았다. 그는 쓰러진 양아치들을 지긋이 바라본 뒤, 내 쪽으로는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뒤돌아 가기 시작했다. 멍하니 있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나서 그의 뒤를 쫓았다. 왠지 이대로 그냥 보내면 안 될 것만 같았다. “형!”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한 쪽 눈썹을 치켜세운 채 나를 돌아보는 그. 정말 오빠 부대 빠순이들의 기분을 십분 이해한다. 그 순간 나는 그녀들의 심정과 일치했다. 스쳐가는 눈빛만 맞아도 좋아~!!!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고 꾸벅 90도 인사를 했다. 그런데 그 순간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있었으니, 새빨간 피 한 방울. 휘둥그레 바닥을 쳐다 보다 그제야 온 몸이 아프다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이 얼얼하고, 등이 뻐근하고, 팔다리가 욱신욱신 쑤시면서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갔다. 스르륵-하며 바닥으로 주저앉아 버렸는데 그 와중에도 코피 흐르는 내 몰골이 어떻게 비춰질까 근심스러웠다. 아프고 처량함에 눈물이 나서, 최대한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 봤다. 하지만 그는 잠시 눈을 찌뿌렸을 뿐 별다른 반응 없이 등을 돌렸다. 순간 나는 이대로 놓치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그의 길다란 다리를 붙잡았다. “형, 형아! 가지 마세요. 훌쩍.” 겨울에 시골 할머니가 군고구마 찌어주면서 해줬던 이야기, ‘이수일과 심순애’에서 떠나가는 이수일의 다리를 붙드는 심순애가 된 양으로, 아니 그 보다도 더 애절하게 그의 다리를 두 손 맞잡아 붙들었다. 그는 잠깐 동안 멈칫하다가, 나를 쳐다보며 그 무거운 입을 열었다. “씨발, 안 놓으면 죽인다.” …경악스러운 심정으로 그의 화사한 얼굴과 빨간 입술을 봤다. 저 예쁜 입에서… 저 예쁜 입에서…… 저 예쁜 입에서…. 충격으로 손의 힘이 약해지자, 그는 재빨리 다리를 빼내곤 나를 노려봤다. 그러다가 갑자기 강력한 킥으로 내 머리를 날려버렸다. “바지 더러워졌잖아, 이 거지같은 새끼야!” 커헉! 피를 토하며 (실제론 그냥 코피로 얼굴이 범벅이 됐을 뿐이지만…) 흔들리는 시야 사이로 그의 늠름한 뒷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간신히 집으로 돌아갔을 때, 엄마는 금쪽같은 아들이 병신같이 얻어터지고 들어왔다며 광분해서는 옷걸이를 들고 마구 패기 시작했다. 이열치열도 아니고, 이매치매 라니…. (ㅠ.ㅠ) 그 멍을 더해서, 덕분에 온 몸이 보기에도 아프게 시퍼래졌지만, 엄마는 절대로 학교를 쉬게 해 주지 않았다. 온 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면서, 펄펄끓는 열을 해가지고 좀비처럼 반의 구석으로 기어갔다. 시각적으로 이토록 화려하니 뭐라 할 만도 하건만, 울 어무이의 당부 전화가 있었는지, 담임 선생님은 그저 안쓰러운 눈길로 쳐다볼 뿐이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내가 책상에 퍼질러 끙끙 대며 수업 방해를 하는 대신 양호실의 편안한 침대위에서 요양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나는 침울하게 땡큐─써(Sir) 를 중얼거리며 교실을 나와 학교 동쪽 구석에 있는 양호실로 향했다. 초등학교 양호실답게 아담을 넘어서 좁아터진 그 곳은 철제 침대 하나에 소파 하나, 책상 한 개, 의자 한 개의 심플한 가구배치 만으로도 꽉 차 보였다. 게다가 양호 선생님의 출장으로 잠시 비워진 탓에 양호실은 리틀 양아치들로 북적 거렸다. 초봄인지라 아직 날씨가 조금 쌀쌀맞기도 해서, 밖보다 따스하고도 비어있는 양호실로 속속들이 땡땡이 파가 모인 것이다. 초등학생치고는 다들 한 덩치해서 조금 주눅이 들었지만, 너무나 간절히도 눕고 싶었기에 그 좁은 방구석으로 발을 디밀었다. 일순 모두의 눈이 집중되었다가, 내 면면에 쓰여 있는 ‘나 정말 아프다’ 표정과 온 몸을 알록달록 수놓은 보라빛 피멍을 보고는 신경끄고 다시 제 할 일들만 했다. 살짝 안도의 한 숨을 쉬며 쉴 곳이 있나 둘러보는데, 의외로 침대 쪽은 한산했다. 그래서 약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침대로 가서 걸터앉았는데, 뭔가 엉덩이 밑으로 뭉클한 것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헉!’ 소리와 함께 주위가 침묵에 잠겼다. 직감적으로 ‘아, 어제에 이어 오늘도 똥 밟았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울고 싶은 마음으로 살짝 엉덩이를 들어서, 내가 깔아뭉갠 면상을 봤다. 거기에는 어제 나의 심장에 종을 달아주고 휘날레로 강력한 킥을 안겨준, 멋진 그 놈이 계셨다. “!!!!” 심장마비가 어떨 때 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순간에 정확히 내 심장은 멈췄다. 내가 방금 전에 깔고 뭉갠 조각같은 코를 쓰다듬으며 야차처럼 인상을 굳혀가는 그를 보면서, 나는 산 채로 심장이 뜯기는 기분이었다. 악연. 악연. 그런 악연이 없었다. 그가 전날의 일을 기억했는지 어쨌는 지는 모르겠지만, 악에 받칠대로 받친 귀기스러운 눈 빛으로 나를 기절할 때까지 팼다는 사실은 기억한다. 결국 골로 갈 뻔한 나는, 양호실에 기절해서 뻗어 있다가 담임 등에 업혀서 병원으로 실려갔다. 팔 한짝이 똑 뿌러지고, 옵션으로 갈비뼈에 금이 갔다. 그래도 어린 탓인지 회복이 빨라, 그럭저럭 2주째 되는 날엔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다행히 어디가 확실히 부러지자 엄마도 더이상의 패널티는 주지 않았다. 2주동안 집과 병원에서 피둥피둥 대며 구르는 동안, 나름대로 심리적 안정감도 들었다. 도대체 왜 그 형이 우리학교 양호실에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일을 계기로 이제는 정신차리고 공부해서 효도해야겠다는 기특한 생각도 하게 됐다. 팔은 불편했지만 기분만은 날아갈 것 같아서 룰루랄라 하며 학교로 향했다. 그날따라 밥도 맛있었고, 친구들의 따스한 배려도 받을 수 있어서, 유치원 때 생일잔치 이래로 이만큼의 따스한 배려를 주위로부터 받은 적이 있었던가 싶을 만큼 뭉클함도 느꼈다. 체육시간에는 처음으로 공식적인 땡땡이를 인정받아 더더욱 업그래이드된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엑설런트 하고 만사 오케이에, 베리베리 땡큐였다. 그렇게 산뜻한 마음으로 미적대던 빈 교실을 떠나, 여타의 수업받는 교실들을 몰래 숨어 구경하다가 학교 탐방에 나설 때 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스무스했다. 들뜬 기분과 호기심에 충동적으로 옥상에 기어 올라가지만 않았어도, 계속- 아마 오늘날 까지도 만사에 베리베리 땡큐하지 않았을까 싶다. 새파란 하늘과 신선한 바람이 부는 싱그러운 봄의 옥상에는 시커먼 덩치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유백색 연기를 흩날렸다. 그 중심에 떡하니 앉아, 햇빛을 받아서 청색으로 빛나는 검은 머리의 미남은 상당히 나른하고 따분하단 표정으로 짧아진 담배를 물고 있었다. 2주 전과는 또다른 매력적인 표정에, 그 본색을 앎에도 나의 머리속에서는 또다시 벨이 울렸다. 그렇게 멍하니 그를 훔쳐보다가 문득 정신을 들고 보니…. 씨발, 눈 맞았다. 순식간에 쪼그라든 심장 탓에, 부들거리는 몸뚱이를 어떻게든 추스려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의 표정을 살피면서 뒷걸음질 치다가, 휙 소리 나도록 몸을 돌려서 뛰었다. 문과는 가까운 거리였기에 안심하며 문고리를 잡아채는 순간, 머리가 뒤로 확 재껴졌다. 그 길다란 다리로 얼마나 빨리 뛰었는지, 10여미터는 떨어져 있던 거리가 무색하게도, 그는 바로 내 뒤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함께 있던 덩치 두 명도 놀라서 일어나 쫓아왔다. 사나이 장녹수의 가늘고 짧았던 인생 12년이, 이번에는 학교의 초라한 옥상에서 접히는 것인가. 두려움 가득 찬 눈으로 그와 마주 했다. 꺾여진 목이 아프고, 쏘아보는 눈 빛에 부러진 팔이 아파왔지만, 바들바들 떨면서도 그 눈길은 피하지 않았다. 첫만남 때 느꼈던 것과 같은 정도로 그것은 충격적이었다. 비록 이제, 머리속에서 벨소리보다는 경고음이 흐르고, 얼굴이 따땃해지기 보다는 창백해졌지만, 쿵쾅거리는 가슴의 고동 소리만은 같았다. 차갑고 새까만 그의 눈동자 속에 자리잡은, 겁에 질린 내 모습을 직시했다. 마치 그 곳에서 눈을 떼면 바로 목이 떨어질 것 처럼 필사적으로 그 눈동자 만을 쳐다 봤다. 빛마저도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끝 없이 깊이 잠기게 될 것만 같은, 천연의 흑색 눈동자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또 한번, 나는 바보처럼 넋을 놓아 버렸다. 떨리던 몸이 점차 진정되며, 동요없이 빛나는 어두운 눈동자가 어쩐지 포근하게 느껴져서, 또 어쩐지 귀엽게 느껴져서… 나는 미소짓고 말았다. 그러자 그의 짙이 눈썹이 위로 휘어지며, 잡고 있던 머리채 그대로 바닥에다 처박아버렸다. 진짜 ‘악’ 소리 나게 아팠다. “이게 한참 야리더니, 비웃어?! 재수없는 새끼!!” 비웃는 게 아닌데-. 정말 비뚤어 졌다, 이사람. 생긴 건 근사한데, 목소리는 좀 가늘다. 그래도 시원하게 가슴을 뚫어 오는 기분 좋은 미성이다. 얻어터지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다니, 나는 변태 였구나. 거친 시멘트에 쓸린 얼굴이 쓰라려서 부채질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당장 지탱할 팔이 오른쪽 밖에 없으니 패스하기로 했다. 무거운 몸을 짚고 낑낑 일어서려는데, 갑자기 배쪽으로 강하게 걷어 차는 발에 채여서 멀찍이 날라갔다. 퍽 소리 나도록 땅에 부딪혔을 때는 너무 아파서 배가 끊어지는 줄 알았다. 뼈 붙은 지 얼마 안 됐는데, 무식하게 다른데로 찰 것이지. 크윽. 진짜, 진짜, 눈물 나게 아프다. 뒷골도 막 땡긴다. 게다가 또 코피도 터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진짜 장씨 가문 장손, 장례 치르게 생겼기에 과감히 벌떡 일어섰다. 어금니 ‘악’ 물고, 두 눈 부릅뜨고, 한 주먹 불끈 쥐고 상대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재빨리 내 머리하나 위에 있는 놈의 머리통을 향해 헤딩했다. 갑작스런 이 기습에 그도 놀랐는 지, 미쳐 피하지 못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난 돌머리다. 솜주먹에 다리도 짧아서 잘 안올라가지만, 머리 만은 우리 엄마와의 강한 물리학적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단련되서, 강도가 세다. 무쇠머리는 안돼도, 차돌머리 정도는 되는 것이다. 그런 내 머리에 직통으로 맞았으니, 지가 아무리 쌈닭이라고 해도 인간인 이상 피를 보게 돼 있다. 퍽. 소리와 함께, 들어간 마이 슈퍼 파이널 어택 헤딩 샷은 잘생긴 그의 코를 새빨갛게 짓이겨 놨다. 뚝. 하고 흐르는 한 줄기의 피. “쌤통이다.” 히죽거리며 말한 그것이, 기억하는 그날의 내 마지막 대사였다. 죽도록 얻어 맞고 또 뻗어버린 나는, 전에 나갔던 갈비뼈가 깨끗하게 다시 부러지고, 오른 손과 왼쪽다리에 금이 가버려서, 채 붙지도 않은 왼 손과 함께 다시 기부스를 해야 했다. 광분을 넘어서서 히스테리성 발작까지 일으키신 어마마마는 퇴원하자 마자, 깁스한 내 손 붙들고 경찰서로 달려갔다. 그 전에도 꽤 찾아가서 귀찮게 한 듯, 경찰관 아저씨들은 엄마를 보고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양 손 기부스에 한쪽 다리마저 절고 있는데다가 채 지워지지도 않아서 퍼렇고 노랗게 남아있는 멍들을 뒤집어쓴 나의 자태에 입을 떡 벌렸다. 단순히 애들 싸움질에 (초등학생이니까) 치맛바람 거칠다고 뒷담화를 나누셨을 그분들도 나의 모습에는 놀랐는지 정색을 하고는, 요즘 학교 정말 무섭다느니, 애들이 더 독하다느니 하면서, 이것 저것 열심히 캐물었다. 진짜, 정말 이상하게도 나는 경찰을 향해 그에 대한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물론 실제로도 이름이며, 나이며, 다니는 학교라든가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지만, 그 외에 그의 인상착의 라든가, 오락실 2층 화장실에서 뼈 부러졌을 때 주범이라던가, 아무래도 주로 노는 곳이 그 때 그 오락실 2층의 당구장 같다라던가, 낮에는 우리학교 옥상에 올라와서 노는 것 같다든가의 제법 수사(?)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에 대해선 입을 싹 다물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얻어터지고서 기억도 못하는 똘팍이라고 엄마한테 히스테리성 구타를 당하면서도, 나는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후환이 두려워서 그러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NO’ 다. 이미 몇 번 죽을 만큼 아프게 맞아 보고, 뼈도 똑똑 부러져 봐서 그런지, 폭행 쪽으로는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 원래 맷집도 좀 있고, 싸움은 못해도 뚝심은 있다. 아픔 자체만 생각하면 오싹할 만큼 두려울 수 도 있겠지만, 싸움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엷어졌다. 그리고 ‘그’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졌다. 그렇다. 그렇게 볼 때마다 맞았는데도, 나는 그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보고 싶었다. 내가 바라봤던, 나를 바라봤던 그 새카만 동공만이 머리 속에 박혀버려서, 자꾸 보고 싶기만 했다. 그 동공에 비춰진 순간부터 나는 그에게 맞설 용기가 생겼다. 그리고 바로 그 때 부터 나는 그의 영혼에 나의 영혼을 부딪히고 싶어 했다. 그것은 마치 심장이 내리는 명령같이 계속 되풀이 되며 내 마음을 잠식했다. 어마마마께서 열심히 사골을 끓여서 먹인 덕분인지, 역시 내가 어린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신기하게도 금이 간 뼈는 또다시 2주만에 제꺽 제자리에 붙었다. 덕분에 오른손이 풀려나서, 약간 절기는 해도 왼쪽다리와 함께 학교에 나갈 수 있게 됐다. 실로 기특한 내 뼈다구 들이었다. 어쨌든 나는 학교에 다시 나간다는 사실보다도, 그를 찾을 수 있게 됐다는 데 더 기쁨을 느꼈다. 이상하게도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간질간질 해져서 나도 모르게 헤죽거리며 웃게 된다. 그럼 울 어무이는 뭐가 불만이신지, 머리를 내리치시는 것이다. 바보같이 웃지 말라면서. “한 번만 더 뼈 부러뜨리고 기어들어오면, 앗싸리 내가 직접 남은 뼈들 몽창 부러뜨려 줄테니, 그리 알아!! 도대체가 고추 달고 태어났으면, 때리고 들어오면 들어왔지 터지고 기어오면 안돼는 거 아냐?!!” 엄마는 도끼눈을 하고서, 살벌한 경고를 날리고는 10000원 짜리 지폐를 손에 쥐어 줬다. 삥 뜯겨서 맞을라 치면, 앗싸리 얌전히 쥐어주고 들어오란 지엄하신 분부셨다. 용돈으로는 너무 파격적으로 강한 가격에, 잠시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초등학교 때라니까!) 도대체 이걸로 떡볶이를 먹으면 얼마나 먹을 수 있을까 따위를 계산하다가, 학교 안가냐며 화내시는 엄마를 피해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간 학교에서 만난 선생님과 반 친구들은 생각 이상으로 반가웠다. 지난 번에 팔 부러졌을 때보다 이번이 좀 더 부상정도가 심해서, 학교를 나온 것은 거의 3주 만이었다. 금 간 뼈는 2주만에 붙었지만, 부러진 쪽도 있고, 안정을 위해서 엄마와 의사선생님이 내리신 결정이었다. 덕분에 공부 안해서 좋았지만, 너무 심심해서 죽을 뻔 하기도 했다. 원채 나는 한자리에 머무르는 것은 질색이다. 기본적으로 여기저기를 쑤시고 다녀야 하는데, 갈비뼈랑 다리가 금가서 싸돌아 다니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누워 있으려니 엉덩이에 종기가 날 지경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심심한 중에 학교를 다시 나오니, 해방감 마저 들었다. 친구들과 조금 과격하다 싶은 환영 장난을 치고서, 점심시간을 기다렸다가 도시락을 후다닥 해치우고는 아침에 엄마가 준 10000원 짜리를 챙겨 들고 옥상으로 행했다. “형들은 학교 안다녀요?” 소박한 나의 질문에 앗뜨거라 하면서 담배들을 집어던졌다. 멤버는 예전에 봤던 덩치 큰 형 2명이랑, 내가 누워 있는 내내 곱씹고 돌려씹고 계속 씹어 보던, ‘그’였다. 어쩐지 허둥대는 그들의 모습이 묘하게 어려보여서, 나는 깔깔대고 웃었다. 황당하단 눈빛들 사이로, 놀랐다는 듯이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리는 그의 눈과 마주쳤다. 안녕, 반가워. 그리웠어. 그의 눈동자에만 살짝 인사를 던지고, 다시 한 번 그들을 향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형들은 왜 맨날 우리 학교에 있어요?” “……………여기 다니니까.” ……………………………헉? 나는 웃고 있던 얼굴 그대로 굳었다. 그런 나에게, 죽도록 매혹적인- 속된 말로 뿅가는 웃음을 지으며, 손에 있던 담배를 입에 물리고, 그가 손가락 다섯개를 펴 들었다. “5학년이다. 12살. 이름은 이대한. 웃으면 죽여버리겠어.” 2. “장녹수, 내가 THIS라고 했지. 너, 내가 88피는 거 봤냐? 어?” “미안~, 미안. 아침에 엄마한테 깨지고 돈 뺏겨서 모잘라서 그랬어. 미안해. 헤헤.” “아, 씹. 모자라면 삥땅이라도 뜯어서 사와야 될 거 아냐. 내 이름 대면 되잖아.” “아잉~ 대한아. 아무리 그래도 삥땅만은 못 뜯겠어. 내가 원래 마음이 약하잖아.” “야! 내가 콧소리 내지 말라고 했지!! 덩치도 큰 사내새끼가 내시같이 굴지 말란 말이야!!” “알았어, 알았어. 오케바리. 내가 똘빡이잖아. 기분 풀어. 안마해줄게. 응?” 초등학교 5학년 봄, 학교 옥상에서 거국적인 인사를 마친 대한이와 나는 그 후로 뜨거운 사이가 됐다. …는 것은 나의 희망 사항이고, 중학교 2학년 말 가을까지 근 4년 간 나는 단지 그의 꼬붕이었을 뿐이었다. 대한이는 행상을 하시는 홀아버지 밑에서 자라서, 가족과 같이 있는 시간보다는 타인과 지내는 시간이 더 길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한동안 술독에 빠져 계시던 대한이 아버지는 대한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행상을 꾸려서 8도를 돌아다니기 시작하셨다. 대한이는 혼자 사시는 외할머니께 맡겨 둔 채로, 정기적으로 생활비와 학비 같은 것을 붙이는 것으로 그의 의무를 끝내 버렸다. 외할머니가 아무리 대한이 에게 잘해도, 나이도 있으셔서 드러누워 있는 날이 더 많으신 데다가 귀도 어둑해져서, 대한이와는 대화 자체가 소원해졌다. 어린 대한이는 점차 집을 싫어하게 되서, 결국은 밖으로만 내돌게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또래보다도 거칠고, 좀 더 일찍 사회의 어두운 면에 눈을 떴다.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대한이 친구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바람나서 집나간 어머니에 알콜 중독자 아버지를 둔 유병우가 그랬고, 사장 아버지에 집도 유복하지만, 노름에 미친 어머니 덕에 일찌감치 가정생활은 파토난 한상식이 그랬다. 병우와 상식이는 바로 5학년 봄에 옥상에서 봤던 덩치 큰 두 명의 정체다. 대한이와 마찬가지로, 둘 다 나와 동갑이다. 그런 그들과 어울리면서 나 역시 양아치의 길로 나서게 됐지만, 우리 집은 양친 부모 모두 멀쩡하신 데다가 괴팍한 엄마와 소심한 아빠는 싸우지도 않고 알콩달콩 잘만 살고 있었다. 유일한 집 안의 근심거리라면 양아치 장남인 나, 장녹수 라고 할까. 처음에 어울릴 때는 별로 이런 내 가정배경에 신경 쓰지 않았지만, 추석이나 설날 같은 명절 때가 되면 대한이들에게 어김없이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그런 때일수록 뭉쳤고, 나는, 당연히 그럴 수 없었다. 게다가 내가 그들과 어울리는 것은 속된 말로 속셈이 있어서니까…… 대한이 뿐만 아니라 병우, 상식이에게까지 꼬붕 취급 받으면서도 끈질기게 양아치 생활을 연명하는 이유는 물론 대한이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초봄, 그 오락실의 화장실 이래로, 나 장녹수는 대한이에게 홀라당 반해 버렸기 때문이다. 대한이의 키는 그 사이 또 자라서, 중 2인데도 밖에 나가면 다들 고등학생이나 심지어 대학생으로 봤다. 내가 4년 전에 아리까리 형이라 불렀던 것은, 내 눈이 삐어서가 아니라 단지 이 녀석들이 또래보다 무식하게 커서 였다. 게다가 풍기는 분위기들이 뒷골목의 형님들 같았다. 속들이야 아직 애티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제일 겉으로 삭아 보이는 것은 병우였다. 병우는 덩치도 우리 중에서 제일 크고, 힘도 제일 쎘다. 하지만 매사가 덤벙덤벙 하는 데다가 수다스럽기까지 해서 그다지 듬직해 보인다거나 하진 않았다. 중학교 1학년 때 이미 키가 180에 가까웠으니, 녀석은 이제 다 자란 것이다, 라고 믿었지만 그 후로도 더 커서 지금(고 2)은 거의 2미터에 육박하고 있다. 생긴 것은 꼭 고릴라 같이 생겨서, 머리도 늘 올 백으로 쳐 올리고 빨간 머리로 염색했다. 유치하게 만화를 좋아해서 그 중에서도 ‘슬램덩크’라는 만화에 반 미쳐서 농구를 하겠다고 꼴깝을 떨기도 했었다. 평소에는 해실해실 대지만, 싸움 한번 붙으면 헐크로 변한다. 아주 무식하게 싸우는 편이다. 우리 패거리 중에서도 제일 말썽꾼에 사고쟁이였다. 얼굴에도 나 문제아에요 하고 써붙이고 다녔다. 그런 병우는, 빌어먹게도 나랑 제일 친했다. 유난히 날 따른 달까. 그래서 내가 대한이 다음으로 이뻐하는 녀석이다. 상식이는 언제나 오렌지 족처럼 굴었다.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맨날 이상한 말투로 잘난 척을 해댔다. 뭐, 실제적으로 우리들의 물주이기도 했다. 생긴 것도 기생오라비처럼 얄상하게 생겨서, 짙은 쌍꺼풀의 두 눈에 입술도 두꺼워서 보기에도 느끼했다. 그래도 여자들은 그런 것이 좋았는지, 중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놈은 우리 중에서 제일 먼저 딱지 뗐다. 생긴 것만큼 발랑 까져서, 진짜 진짜 재수 없었다. 대한이한테도 느끼하게 들러붙곤 했다. 그래서 언제나 나랑 티격태격 하는 앙숙이었다. 그나마 싸울 때의 모습은 너무나 깨끗한 무술의 교본을 보는 것 같아서 훨씬 나았다. 물론 이 녀석한테도 여러 번 얻어맞았었다. 그렇게 미운 정이 붙어서 같이 다니지만, 지금도 재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대한이는, 나의 그레이트 히어로 이 대한은, 어렸을 적의 그 미모가 날이 갈수록 업그레이드 되어가고 있었다. 무식하게 피워대는 담배에도 불구하고, 그의 피부는 뽀얗고 투명했으며 잡티 하나 없었다. 커 갈수록 아름다운 얼굴엔 점점 조각 같은 날카로움이 더해지고, 적당히 얇은 붉은 입술이 묘하게 선정적인 분위기를 냈다. 그 야성적인 분위기도 여전했으며, 거친 분위기는 세련미를 더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압도감과 매혹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그의 서늘하고 시원한 목소리는 성장이 빨라서인지 1차 변성기가 지나, 한 옥타브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그가 그 청량한 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너무 좋아서 소름이 돋기도 했다. 대한이의 몸이 전체적으로 선이 굵어지면서, 여자들이 미친 듯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를 쫓아다니던 23살짜리 누님의 말을 빌자면, 강한 ‘수컷’의 페로몬을 풍기고 있다나. 그나마 다행히도 고슴도치 저리가라 할만치의 뾰족뾰족한 그의 성격이 있었기에, 추종 여성들의 하렘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수틀리면 여자고 남자고 안 가렸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서 나는 정말 필사적으로 그의 순결을 지켰다. - 도대체 왜 중 2 짜리의 순결 따위를 걱정해야 하는지 아이러니 하지만… 순진하게 다가가는 여학생이든, 얄딱구리한 눈빛으로 유혹하는 20대 아줌마들이든, 갖가지 편법을 동원해서 그에게서 떼어 놨다. 그것은 아직 대한이가 성에 눈 뜨기 전이라 가능했던 일이었다. (ㅠ_ㅠ)V 대한이가 싸움을 할 때면, 처음 봤을 때의 그 야성적인 모습 그대로 투기를 온 몸에 발산 시키기 시작한다. 귀기스러운 눈빛으로 눈꼬리가 매섭게 치켜 올라가고, 얼굴은 무표정이거나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힘으로 제압하는 병우나, 냉정하게 기술로 승부하는 상식이와는 달리, 그는 조용히 살기를 일으켜서 가장 효과적이고 위압적으로 상대를 제압했다. 그런 대한이들과 또래의 여타 패거리들이 아예 상대가 되지 않는 덕분인지, 대부분 우리가 붙게 되는 상대는 고등학생 들이었다. 아무리 대한이랑 상식이, 병우가 날고 기어도, 아직은 어렸기에 종종 크게 당할 때가 많았었는데, 그 대신 같은 상대에겐 절대 두 번 지지 않았다. 그렇게 하나하나 깨부수고 다니다 보니까, 이쪽 동네에서는 우리를 건드리는 놈들이 없었다. 물론 그 싸움에는, 있는 건 깡 밖에 없는 나도 끼어 있었다. 덕분에 중학교 1학년 때 기억은, 이리 가서 깨지고 저리 가서 깨지고 하면서 대한이 꽁무니를 쫓아다녔던 것 밖에 없다. 그러자니 느는 것은 맷집과 잔소리뿐이랄까. 그래도 덩치 큰 놈들과 어울려 다녀서 그런지, 나도 또래 애들 보다는 훌쩍 커져서 돌아 다니다 보면 고등학생이냐는 소리도 심심찮게 듣게 됐다. 엄마는 애늙은이 양아치 새끼가 됐다며 볼 때마다 갈궜지만. “대한아, 정신 차려. 집에 다 왔어.” 술에 취한 대한이를 데리고, 외할머니와 함께 사는 그의 집까지 바래다 주는 것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대한이 덩치는 나보다 제법 커서 업고 있으려면 무지하게 힘들었지만, 그래도 내게 안심하고 몸을 맡기는 것이 기뻐서 그를 바래다 주는 일은 늘 즐거웠다. 게다가 외할머니께서는 걸음이 불편하셔서 문을 여는데는 시간이 꽤 걸리기에, 벨을 눌러 놓고 기다리는 시간 동안 그를 담벼락에 살짝 기대어 놓고 감상하는 것도 숨겨진 재미였다. 물론 처음부터 이렇게 대한이와 가깝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첫 만남부터가 피 튀기는 것이었으니, 한동안은 모진 갈굼과 폭력에 시달렸다. 하지만 장씨 가문의 장손, 장녹수. 어렸을 때부터 뚝심과 근성하나는 끝내주는 녀석이었다. 무작정 대한이를 쫓아다니고 쫓아다니고 쫓아다녀서 (거의 스토커 수준이었다), 결국은 ‘장녹수’란 이름을 대한이에게 입력시키는데 성공하고 꼬붕으로까지 격상된 것이었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대한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드나들며 지난 4년간을 시중들어 왔다. 싸움터까지 쫓아다니면서 그를 돌보는 나를 보고, 변태라느니 호모라느니 따위의 말 들을 해댔지만, 그래도 끝내 밀어내 버리지 않는 것을 보면 흐뭇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마치 야생 맹수를 길들이는 기분이랄까. 그래서 아무리 꼬붕 노릇을 해도, 나는 기쁘기만 했다. 진한 눈썹을 꿈틀거리며 뭐가 불만인지 미간을 찌그리는 것을, 손가락으로 쫙쫙 펴 줬다. 감겨진 속눈썹이 평소보다도 진하고 길어보여서, 보고 있자니 꼭 여자애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의 눈 같았다. 하지만 담배를 많이 피워서인지, 술을 많이 마셔서 인지 안색이 좋지 않았다. 흠, 뭔가 보신을 해먹여야겠는데… 엄마한테 해달라고 해볼까… 따위를 생각하느라,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난 후에야 알았다. 대문이 열리지 않았다는 것을. 낡은 초록색 대문을 아무리 두들겨도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무엇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잠든 대한이를 벽에 잘 기대어 놓고서, 거칠고 성길게 이어놓은 시멘트 담을 비교적 수월하게 넘었다. 집 안은 고요했다. 불도 켜져 있지 않았고,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낡은 나무 마루 아래로 할머니의 신발이 있었다. “할머니, 주무세요?” 조심스럽게 어두운 집안을 더듬어서 불을 밝혔다. “!!!!!” 믿을 수 없었다. 거실 바닥에 작고 거친 손을 늘어뜨린 채, 쓰러져 계신 할머니를 볼 때까지도… 할머니의 조금은 걸진 목소리가 나오던 목이 더이상의 숨소리를 내지 않는 것을 느꼈을 때 까지도… 난, ‘사람은 죽.는.다.’ 는 진리를. 믿을 수 없었다. . . . . 대한아. 대한아. 대한아. 대한아. 밖에 있는 대한이를 집안으로 업고 들어와서 방에 눕혔다. 그리고 집으로 전화해서 엄마와 아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깨끗한 이불을 찾아서 안 방에다 펴 놓고, 할머니의 시신을 옮겨 드렸다. 너무나도 차갑게 굳어버리신 할머니는 아주 무거웠다. 허겁지겁 도착하신 엄마와 아빠께 대한이와 할머니를 부탁드리고, 약국으로 달려가서 술 깨는 약을 사왔다. 늘어져 있는 대한이를 일으켜서 술깨는 약을 억지로 먹여봤지만, 대한이는 쉽게 깨지 않았다. 그래서 대한이를 업고 마당에 있는 수돗가로 데려가서 찬 물을 들이 부었다. 9월이라서 저녁에는 꽤 쌀쌀했기에 감기에 걸릴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그것이 내가 그 당시 할 수 있었던, 최선의… 가장 최선의 방법이었다. 추운 듯 부르르 떨고는, 험악한 표정으로 눈을 찌푸린 채 나를 노려보는 대한이의 눈을 바라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침착한 표정으로 할머님의 죽음을 알렸다. 까맣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말도…안돼.” 나는 그 눈을 절대 피하지 않았다. “말도, 안돼!” 그의 살기 띈 눈동자가, 나에게, 부정하라고 명령했다. “말도 안돼!!! 거짓말이야!!! 개새끼!!! 거짓말이야!!! 그렇지?!!! 나쁜 새끼!!! 가만, 안 두겠어!!!” 퍽!!!! 4년 만에 처음으로 대한이를 때렸다. “할머님, 돌아가셨다. 안방에 모셨어. 정신 차렸으면 일어나. 빨리 아버지께도, 연락 드려야 되니까.” 씹어 내듯이 내뱉었다. 나는, 내가 냉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혼이 나간 채로 그렇게 주저앉아 웅얼거리는 대한이 자식의 팔을 붙들고, 안방의 할머니 시신 앞으로 끌고 갔다. 질질 끌려가서 방문 앞에 쓰러진 대한이는 천천히 두 눈 감으신 할머니의 얼굴을 바라 봤다. “… 할머니? … 거짓말이지? 이런 거… … 이러…지마. 할머니. 내가 잘 못 했어. 할머니. 이러지 마. 이러지 마. 내가 잘 못 했어. 잘 못 했어요. 할머니… 내가 잘 못 했어. 대한이가 잘 못 했으니까… 내가 다 잘 못 했으니까… 제발… 날… 혼자 두고 가지 마,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 제발…눈 떠봐. 응? 제발… “ 통 곡 ( 痛 哭 ). 너무나 아픈 대한이의 통곡 소리에…. 난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결코 대한이 보다 크게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그래도 대한이 만큼 아팠다. 장례 준비는 아빠와 엄마가 거의 다 해 주셨다. 아무리 어른스러운 척 나대도, 대한이나 나나 중학교 2학년의 어린애였으니까. 평소에 대한이를 역병 환자 보듯이 했던 엄마도, 대한이가 안쓰러웠는지 꼼꼼하게 이것저것 챙겨줬다. 장례 절차의 대소사와 사망 신고 같은 서류 처리 문제, 그 밖에 유산상속이라던가의 복잡한 재정적인 것 까지 하나하나 처리해 주셨다. 대한이가 식사를 잘하나 잠은 잘자나 하는 것까지 살폈다. 나는 진짜 우리 엄마랑 아빠가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내가 대한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안절부절하며 옆에서 지켜보는 것밖에 없었으니까. 그래서 찾아오는 이 하나 없는 쓸쓸한 빈소에 앉아서도, 난 슬픔 보다 걱정이 더 컸다. 대한이가 잘못 될까봐. 장례식 준비를 하는 동안에 대한이는 인형처럼 이리저리 이끄는 대로 몸만 옮겨 다닐 뿐이었다. 영혼은 빠져나가고 껍데기만 남은 것처럼. 대한이가 운 것은 그 날, 그 통곡이 마지막이었다. 입관하고 화장을 치루고 강에 회가루를 뿌릴 때 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장례식 돕는다고 찾아 와있던 상식이랑 병우가 독한 새끼라고 아무리 욕해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마치 감정이 죽은 것처럼, 울지도 웃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그런 무표정의 그를 보는 동안 내 마음은 천갈래로 찢어지는 것 같았다. 화장터에서 돌아와서 병우들과 함께 대한이를 집으로 들여보내고, 나는 제사 음식들을 싸서 뒤따랐다. 그런데 대한이 집 앞에서 웬 허름한 차림의 키 큰 아저씨가 하나 서성 대고 있었다. 그는 말쑥하게 차리면 꽤 근사할 듯한 면상이었지만, 거친 수염 투성이에 머리는 까치집 산발을 하고 있어서 노숙자 이미지를 풍겼다. 영 안어울리는 꾸깃해진 회색 정장 웃도리와 검은 면바지는 어디서 빌린 것인지 짧아 보였다. 문득 나와 마주친 표정은 무뚝뚝한 듯 했지만, 초조한 기색이 보였다. 피곤함이 잔뜩 묻어있는 붉게 충열된 눈이, 내가 아는 검은 눈과 똑같아서, 나는 그가 누군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왜 안들어가세요?” 흠칫 놀라는 그가 얄미웠다. “장례식 끝났어요. 너무 늦으셨네요.” 잔뜩 일그러뜨리는 그의 얼굴이, 내가 아는 그것과 너무 닮아서 더는 야멸차게 대할 수 없었다. “저랑 같이 들어가세요. 저는 장녹수라고 합니다. 대한이 친구에요.” “………. 나오는 길이었다.” “그럼, 좀 더 있다 가시죠.” 가타부타 하기 전에 재빨리 팔 한짝을 붙들고서 문을 열고 들어섰다. “꺼지라고 했지, 씨발!! 어디라고 들어와!!!” 거친 노성과 함께 뭔가가 날라와서 얼굴을 강타했다. “앗! 녹수다!” 당황한 병우의 외침이 들렸다. 후두둑 떨어지는 것은 제사상에 올렸던 사과 였다. 그나마 배가 아니라서 다행이구나. 아니, 칼이 아니어서 다행일지도. “녹수야, 코피 난다.” 법썩을 부리며 다가오는 병우 얼굴을 밀어제끼고, 키득대는 상식이에게 들고 온 비닐 봉지를 건내 주고, 대한이 아버지라 추정되는 인물을 잡아 끌었다. “씹, 그 인간을 왜 들여!!” 화내며 소리지르는 대한이를 보고 있자니, 지난 며칠 간의 마네킹 얼굴에서 벗어난 것 같아 감격스러웠다. 비록 코피가 흐르고 있어서 스타일은 안 살았지만, “밥 먹자.” 근엄하게 선언하고, 밥상을 차렸다. 제사 음식이 많이 남았어서 좁은 반상 대신에 신문지를 마루에 펴고 음식들을 쭉 늘어 놓았다. 거기에 전기 밥통에 밥만 해서 얹어 먹었다. 대한이는 벽에 기대고 앉아서, 마루 끝에 엉거주춤 앉아 있는 자기 아버지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대로, 아들의 살벌한 시선을 무시한 채 묵묵히 음식들을 안주 삼고 제사술을 마셨다. 병우와 상식이는 언제나 그렇듯 마이 페이스로 음식들을 먹느라, 부자 사이의 껄끄러운 분위기 따위는 신경도 안썼다. 나는 대한이 옆에 앉아서 코피를 틀어 막고 과일을 깎고 있었다. “어디서 뭘하다가 이제서야 온 거야?” “……어선에 올랐었어. 조금 멀리 나가 있었어서 오늘 새벽에 부산에 들어와서야 알았다.” “요즘 야쿠자는 어부도 해?” “그 일은 손 씻은 지 오래 됐다. 철없던 시절 잠깐 실수한 것뿐이야. 너 낳고 나서는 그런 일, 근처도 간 적 없다.” “어, 아저씨. 야쿠자였어요?” 아야, 삑사리 나서 손을 베어 먹었다. 눈치코치도 없는 병우 새끼, 없어도 없어도 저렇게 없을까. 저 진지한 부자 회담에 그렇게 껴들어야겠냐? 뭔가 들떠서 이것저것 물으려는 병우의 입에다 통사과를 집어넣어 틀어막았다. 진작에 이렇게 했어야 했어. 아니면 둘 만 남겨두고 다 퇴장 시킬 걸 그랬나? “새벽에 올라오셨으면, 많이 피곤하시겠네요. 자리 펴드릴까요?” “여기가 니네 집이야? 누구 마음대로 저 인간을 여기서 재워!” “야, 모처럼 상봉한 두 부자간에 진솔한 대화 좀 하라는 니 꼬붕의 배려다. 이 눈치없는 대한아.” “깐죽대지 말고 그렇게 잘 알면 병우 챙겨서 너나 얼렁 가버리려라, 한 상식.” “넌 왜 맨날 대한이한테 꼬이면 나한테 푸냐? 그렇게 이 형님이 만만해 보이디?” “닥치고 몽땅 다 꺼져! 다 꼴도 보기 싫으니깐!” “………내가 일어서마.” 의도와는 달리 부자 상봉자리를 파토낸 내 입과 상식이 주둥이를 꼬매버리고 싶을 정도로 무안했지만, 그렇다고 냉큼 자리를 파해버리는 대한이 아버지의 뒷꼭지 또한 곱게 보이지 않았다. 내 기분이 이렇게 더러운데, 대한이는 시궁창에 쳐박힌 기분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대한이는 내가 들고 있던 과도를 낚아 채서 슉-소리 나게 던졌다. 순간 아찔했지만, 다행히 과도는 아저씨가 앉아있던 마루 끝 기둥에 박혀서, 근친 살인 시도는 미수로 그쳤다. 경악하고 있는 우리들에 비해서, 당사자인 아저씨는 미동도 안한 채 돌아섰다. “어디가?! 또 어디 가냐구!!! 할머니도 죽었어! 씨발, 이제는 진짜 나 혼자란 말이야!” “머리 그만큼 굵었으면 됐다. 너 혼자 충분히 잘 살 수 있어.” “………뭐?”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뱉어서, 대한이도 우리도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그 의미가 입력이 되질 않았다. “내게!” 고통스럽기까지한 노성. “매달리지 마라!! 니 에미랑 똑같은 얼굴로! 나한테, 매달리지 마!” 믿을 수 없을 만큼의 냉정한 얼굴로 그는 차갑게 일갈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낡은 가방에서 굵은 종이 뭉치들을 꺼내어 과도가 박힌 기둥 옆에 얹어 놨다. ‘돈은 계속 부치마. 건강해라.’ 라고 덧붙인 뒤, 그는 뒤도 안돌아보고 초록색 대문을 나갔다. 그렇게, 대한이를 버리고 가버렸다. 대한이는 넋이 나간 듯이 앉아 있었다.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그가 나간 대문을 향해 망부석 마냥 굳어 앉아 버렸다. 나는 대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꺾어지는 골목길 끝으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얼핏 보였다. 뛰어가서 거칠게 그의 팔을 잡아챘다. 하지만 곧 흠칫 하며 물러서야 했다. 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서 온통 눈물에 젖어 있었다. 급기야는 어디가 불편한지 가슴을 움켜쥐더니, 계속 컥컥대면서 양복 주머니를 거칠게 뒤져 작은 약병 하나를 꺼내 입에 털어넣었다. 어느 정도 안정을 차렸을 때, 아직까지 멍하니 서 있는 나를 향해 창백한 얼굴을 돌렸다. 붉게 충혈된 두 눈만 아니라면, 방금 전까지 울던 사람이라곤 볼 수 없을 만큼 그의 얼굴은 침착하고 냉정해 보였다. “너는, 똑똑해 보이니까 알겠지? 대한이한테는 이런 거, 말하지 마라.”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나는 알겠다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대한이, 잘 부탁한다.” 나는 아까보다도 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제일 빨리 끄덕여 댔다. 멀미가 날 정도로. 그런 나를 보며 그는 처음으로 활짝 웃고는,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약간은 불안한 걸음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박혀 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의 장례날이자 아버지가 떠난 그 날 이후, 대한이는 몇날 며칠을 술독에 빠져 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훌쩍 사라져 버렸다. 나는 미친듯이 대한이를 찾아 다녔다. 병우, 상식이와 함께 서울 시내 유흥가란 유흥가는 하나하나 다 뒤지고 다녔다. 혹시 공원 같은 데 쓰러져서 동사하진 않을까, 혹시 시비 붙었다가 칼맞고 뻗어있는건 아닌가, 하는 살벌한 걱정들이 끊임없이 맴돌아서, 도저히 학교나 집에 붙어 있을 수가 없었다. 경찰서에도 끊임없이 들락거리며, 부탁하고 애걸했다. 밤에는 유흥가들을 뒤지고, 새벽에는 공원 같은 데를 뒤지다가, 한 낮에야 대한이네 집으로 들어가서 눈을 붙였다. 그렇게 미친 듯이 대한이만 찾아서 돌아다니니까, 처음에는 날 붙들고 말리시던 엄마나 아빠도 나중엔 그저 제발 밥이나 제 때 먹으라며 돈까지 쥐어주셨다. 하긴 깝죽대기의 일인자인 상식이나, 단세포 낙천가인 병우 조차 날 보면 안쓰러운 눈으로 눈치를 볼 정도였으니… 진짜 미친 놈처럼 보이긴 했나보다. 하늘의 도우심으로 압구정동의 한 유명 나이트에서 대한이를 봤다는 소식을 입수하고, 그 근방 여관이란 여관은 다 뒤졌다. 아무 여자 집에서 지내는 거면 어쩌나 싶었지만, 다행히, 보기에도 요란한 나이트 주변의 러브호텔 스위트 룸에서 술에 취해 뻗어 있는 대한이를 찾을 수 있었다. 술과 담배 냄새에 찌들어 버린 방의 창문을 열어서 환기시키고, 젖은 수건으로 반 쪽이 되어 버린 대한이 얼굴이랑 몸을 닦아 준 뒤, 옷을 갈아입혔다. 그리고 병우와 상식이에게 연락해서 장소를 알렸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한 병우에게 대한이를 업히고, 방구석에서 찾은 종이뭉치 안에서 남은 돈을 꺼내 모텔비를 치뤘다. 아저씨가 남기고 간 종이뭉치에 얼마가 들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달 동안 대한이가 미친 듯이 썼던 것이 틀림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상당한 양의 돈이 남아 있었다. 상식이랑 병우에게 대한이를 부탁해서 먼저 집으로 들여보낸 뒤, 나는 은행에 남은 돈을 입금시키고 대한이 앞으로 통장을 만들었다. 그런 뒤, 대충 시장을 보고 대한이 집으로 향했다. 난생 처음 끓여보는 해장국이 제법 맛있게 되서, 이번에는 꿀물을 타보기로 했다. 따뜻한 물에 꿀을 풀어서 젓고 있는데, 방에서 ‘쿠당탕’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 보니, 어느새 일어난 대한이가 병우를 후려치고 있었다. “깼냐? 해장국 끓여 놨으니까 밥부터 먹자.” 시큰둥하게 내뱉자, 씩씩거리며 병우를 밟던 대한이가 나를 향해 살기어린 눈빛을 던졌다. “또, 니 새끼야? 씨발, 니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니가 내 엄마야?!! 어?!!” 악을 쓰면서 내게 한걸음 한걸음 다가 왔다. 쫄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래도, 나는 그의 붉어진 두 눈을- 저 날의 그 아버지와 똑같이 붉게 충혈된 그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오랜만에 보는 예쁜 그의 검은 눈동자가 조금은 탁해져 있어서 화가 났다. 그래서 들고 있던 수저로 그의 얼굴을 때렸다. 밥 풀 때 쓰라고 만든 것이지만 엄연히 쇠성분이 들어간 그것은, 그의 멋진 얼굴에 붉은 생채기를 남겼다. “니 다리, 오늘부로 내가 접수한다. 흥부가 되어주마.” 그리곤 못된 말을 하는 입에다 펀치를 날렸다. 암만 꼬붕이라도 싸움터에서 굴러온 게 4년이다. 병신 아닌 이상 싸우는 법 정도는 알게 된다. 그래봤자 대한이에게는 턱도 없다는 걸 알지만, 어차피 이기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내 목표는 오로지 다리뿐이니까. 대한이 다리만 부수면 된다. 미저리가 된 심정으로 집요하게 대한이 다리만 공격했다. 죽도록 얻어맞는 와중에도 대한이 다리만을 쳐대는 나에게 동조된 것인지, 멍하니 퍼져 있던 병우와 상식이도 달려들어서, 결국은 대한이의 왼쪽 다리 한짝 부러뜨리는데 성공했다. 대한이 다리는 전치 4주 진단이 떨어졌다. 초등학교 시절 나보다야 느렸지만, 어쨌든 상당히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나는 아예 대한이 집에 들어앉아서, 대한이에게 갖은 구박을 다 받으며 병수발을 들었다. 대한이도 처음에는 보기만 해도 화내고, 듣기만 해도 성질내다가, 결국은 어느 정도 수그러져서 예전과 거의 같아졌다. 심리적으로도 많이 안정이 된 것 같았다. “어? 담배 어디서 났어?” “병우꺼.” “아씨, 나쁜 놈. 그렇게 주지 말라니까.” “잔소리는…” “그거 피지마. 상처 덧 나.” “무식하기는. 담배 좀 핀다고 붙을 뼈가 다시 떨어지냐? 니 잔소리로 쌓이는 스트레스가 더 안좋아.” “그래도 피지마. 자꾸 그러면 이번에는 팔을 똑 따버린다?” “까불지 마, 변태새끼. 너, 기분 나뻐.” “아직 니가 진짜 변태의 진수를 못 봤구나. 대한아.” 크흐흐 웃으며, 마루에 앉아 있는 대한이 옆으로 가서 담배를 낚아채고는 거만한 자세로 마당에 비벼 껐다. 그리고는 대한이 품에 파고들어서 마구 부비적댔다. “절루가- 새꺄. 아- , 징그러운 놈.” “네, 네. 저는 대한 군의 영원한 딸라이에용~” “너, 콧소리 내지 말라고 했지!!! 씹 새끼! 아우, 소름 돋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병원 가자, 병원.” 흥얼거리며 일어나서는 대한이 결좋은 대한이 머리를 쓸어 올려 주고, 외출 준비를 했다. 잘 먹여서 인지, 제법 다시 살이 올라와 있는 대한이는 이제 완연히 어른 분위기가 났다. 그동안 아팠던 만큼, 방황했던 만큼 더 멋있어 졌다. 누가 저 녀석을 중학생으로 볼까…. 어쩐지 입 안이 썼다. 할머님 장례식 이후 한 달- 폭주 했던 대한이의 방황도 끝나고, 다리도 완치되서, 어느새 계절은 늦가을이 되었다. 출석율이 아슬아슬한 학교에 같이 등교하려고, 대한이를 기다리며 마루에 앉아 마당 한 켠에 있는 감나무를 바라봤다. 감나무에는 빨갛게 익어서 보기에도 먹음직한 감들이 잔뜩 매달려 있었고, 그 아래로 몇몇은 떨어져서 썪고 있었다. 대한이 할머니 생각이 났다. 할머니는 이른 아침에 내가 대한이를 지금처럼 기다리고 있을 때면 언제나, 우유 한 개를 건내 주셨다. 간혹 조그만 애들용 싸구려 비닐 지갑에서 쌈짓돈을 꺼내서 차비하라며 손에 쥐어 주기도 하셨다. 저녁 때 대한이를 데려다 주면 수고 했다며, 우리 손주 돌봐줘서 고맙다며, 꼭 등이나 허리를 두들겨 주시곤, 닿지 않는 손을 들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여름에는 시원하라고 등목을 해주셨다. 손주 보다도, 내 등이 더 이쁘다며 대한이보다 찬 물 한 바가지씩은 꼭 더 해 주셨다. 가을에는 저 감나무에서 감을 따는거 도와줘서 고맙다시며, 몇 개 남기지도 않고 우리 식구 가져다 먹으라고 다 주셨다. 겨울에는 고구마를 소쿠리로 삶아서, 시큰둥한 대한이 보다 내가 더 잘먹어서 좋다고 좋아하셨다. 그리고 봄에는…… 봄에는…… 뭐였더라? 뭐… 였더라? “녹수야?” 눈물이 흘렀다. 콧물도 흘렀다. 온통 얼굴이 범벅이 되서 축축한데, 나는 그저 빨간 감만 자꾸 자꾸 입에 넣었다. 대한이는, 감나무 아래 쭈구리고 앉아서 그렇게 눈물 콧물 흘리며 히끅 거리는 나를 조용히 안아 주었다. 그 커다란 품이 또 서글퍼서 나는 결국 엉엉 큰소리로 울어버렸다. 할머니가 두고 가신 감나무 아래에서…. “대한아 여행가자.” “뭐?” “이번 신정 때 정동진으로 해돋이 여행가자. 병우랑 상식이도 같이.” “………” “싫어?” “그때 클럽에서 파티 하잖아. 끝내주는 기집애들로만 초대했다고 꼭 오라던데?”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뭐.” 웃으면서 옥상에서 일어났다. 클럽에서 초대 했을 정도면, 흠, 무지하게 예쁜 애들만 오겠네. 뭐, 대부분은 우리보다 나이가 많겠지만…. 좋겠지. 새해 첫날을 어여쁜 누님 동생들과 함께 한다면. 운 좋게 외국영화에서 처럼 옆사람이랑 뽀뽀도 하고 그렇게 되면 더 좋구. 클럽 파티란, 대한이가 가출했을 때 돈 풀어가며 놀다가 만난 또래 부자 친구들이, 비정기적으로 모여서 유명 클럽 하나를 하룻밤 동안 전세 내서 노는 것을 말한다. 이 클럽의 회원 대부분이 정/재 계의 잘나가는 집 자식들이다 보니, 파티 규모가 장난이 아니다. 파티에는 회원 말고 비회원도 들어 갈 수 있는데, 회원이 초대하거나 한 장에 500정도 하는 티켓을 사면 끼어 준다. 초대 받는 경우는 파티의 질을 업 시켜 줄 만큼 외모가 눈에 띄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끼리끼리 노는 부자집 아그들 모임에, 잘생기고 이쁜 애들이면 불러서 같이 놀아 준다는 얘기다. 지난 11월에 있었던 수능 해방 기념 파티에 초대된 대한이를 쫓아서 입구까지 가봤는데, 들어가는 애들 모두 진짜 끝내주는 애들뿐이었다. 평범하게 생겼다 싶은 것은 다 부자회원들이고, 나머지는 영화배우보다도 잘생기고 예쁜 애들만 있었다. 당연히 나는 파티에 초대된 적이 없었다. 대한이도 이번 달에 참석할 크리스마스 파티가 세 번째다. 오히려 상식이가 이 전에도 초대를 받아서 몇 번인가 다녀 봤다고 한다. 상식이 같은 경우는 회원 제의도 겸했던 것이라는데…. 그런 거 보면, 이 재수네 집이 잘살긴 잘사나 보다. 정말로 의외였던 것은 저 띨빵한 병우까지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머리속이야 어떻든 간에, 내가 보기에는 겉모습도 별로인 것 같은 데 말이다. 부자란 것은 정말 알 수가 없는 종자들이다. 솔직히,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무척 실망했다. 신정 여행은 꽤 오래전부터 계속 생각해 왔던 일이었다. 이번 신정은 꼭 대한이랑 같이, 정동진에서 맞이하고 싶었는데… 그래서 엄마를 조르고 졸라 미리 허락을 받아두고, 틈틈히 아껴뒀던 돈으로 여행 경비도 준비 했다. 차표 구하기 힘들지도 몰라서 미리 예매까지 다 해둔 상태였다. 아아… 실망, 실망, 대~ 실망이다. 표, 어쩌지? …………… 갑자기 오기가 났다. 어차피 대한이랑 같이 신정도 못 보내는 거, 혼자서라도 꼭 정동진에 가야겠다. “야, 니들 신정때 해돋이 보러 여행 안갈래?” “웬 해돋이?” “어… 그냥, 다같이 새해 첫 날 햇님 반짝하는 거 구경하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흠, 괜찮을 것 같은데? 가자.” “나도 갈래. 재밌겠다.” “너네, 파티 있다고 하지 않았어? 대한이는 파티 간다 던데…” “그럴 거면 뭘 물어보냐? 소심하긴. 어차피 24일 파티에도 가는데, 연달아 파티만 가는 것 보다야 햇님 구경이 더 재밌겠지.” “나도. 녹수랑 같이 해돋이 갈래.” 기뻤다. 내가 생각해도 의외일 정도로, 난 너무 기뻤다. 물어보기라도 할까 해서, 병우와 상식이에게도 슬쩍 물어봤던 거였다. 뭐, 당연히 대한이랑 파티나 가겠지 하고 내심 기대도 안했는데, 둘 다 선뜻 가겠다고 대답했다. 그게 너무 의외였고, 반가웠다. 사실 그 둘하고 같이 어울려 다니기는 했지만, 친구라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붙어 다녔는데도, 그만큼 함께 쌈박질하고 다녔는데도…. 난, 단지 그들이 대한이 친구라서 어울린 것뿐이었고, 그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제의를 해보기는 처음이었고, 그들이 쉽게 응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런 느낌이 우스울 진 몰라도, 갑자기 하늘에서 친구 두 명이 뚝 하고 떨어진 기분이었다. 사실, 대한이를 쫓아다니면서 나는 내 모든 사생활을 포기했다고 봐도 좋았다. - 진짜 그렇게 말한다면 대한이야 코웃음을 치겠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에 올라와서 까지, 나는 반 친구들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왕따라던가 은따라던가 하는 건 아니었고, 단지 그들에게 신경 쓰거나 접근할 만한 심리적인 여유가 없었다. 같은 반 애들도 내가 일견하기에 거친 대한이들과 어울려 다니니까,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었다. 언제나 대한이만을 생각했으니까, 외롭다거나 쓸쓸하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 부럽기도 했었다.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대한이도, 내 ‘친구’는 아니었으니까. 곧바로 여행 계획을 세우는 상식이가 예전만큼 재수없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잔뜩 들떠서 필름을 6통이나 사자고 하는 폼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어 버렸다. 그랬다가 머리통이 울릴 정도의 반격을 당했지만. 의외의 면들도 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듯 보이던 병우가, 상식이와 내가 기대감에 차서 써놓은 온갖 필요없는 물품 항목들을 하나하나 기각 시키고, 딱 필요할 것 같은 것만 골라서 분배 시켰다. 감탄해서 바라보는 내 시선에, 바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보여서 점수가 깎였지만. 제일 중요한 기차표야, 내가 미리 준비해 놨으니 문제 될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음하하하핫! 대한이 몫의 표는 그 날 저녁에 암표로 팔아보자고 합의를 봤다. 생전 처음으로 세워보는 여행 계획에 우리들은 완전히 들떠버렸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브의 저녁, 대한이를 데려다 주러 클럽 앞까지 왔다. 입구에서 보이는 엄청난 미모 군단에 대한이를 합류시키고 헤어진뒤, 압구정 거리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화려한 압구정 밤거리는 몹시 추웠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었다. 여기저기서 울리는 경쾌한 멜로디에 맞춰 허밍하다가, 각종 행사들을 하는 가게 앞을 기웃거렸다. 과연 크리스마스 이브라 그런지, 여기저기서 연인들의 달콤한 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구세군 상자도 있었다. 조금 고민을 때리다가, 주머니를 뒤적여서 천 원짜리 한 장을 집어 넣었다. 딱 천 원 만큼 좋은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 키득 거리면서 거리에 있는 가판대 들을 구경했다. 선물이라… 그러고 보니 대한이한테 한 번도 선물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생일상이야 할머니 도와서 꼬박꼬박 차려 줬지만, 선물 같은 것은 뭔가 계집애 같은 짓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굳이 하지 않았었다. 대한이에게 들어오는 선물을 카드 빼고 넘겨 준 적이야 많지만…… 아, 나는 나쁜 놈이구나. 어쨌든 그런 선물들은 굉장히 다양했는데, 먹는 것 부터 시작해서(쵸콜렛이나 비싼 술), 꽃, 향수, 반지, 시계, 구두, 정장까지 가격대도 천차만별이었다. 흠. 대한이는 선물 종류부터 중학생과는 어울리지 않는 구나. 하긴 대한이는 나만큼이나 무취미했다. 오락도, 영화도, 스포츠나 음악까지 취미가 없었다. 아침에 학교 갔다가, 적당히 땡땡이치다가, 돌아다니면서 싸움질 하다가 술을 마시는 게 다였다. 좋아하는 게 없으니, 선물할 만한 것도 별로 없었다. 그래도 생각난 김에 뭔가 해야겠다 싶어서, 돌아다녀 봤다. 마음에 들었다 하면 너무 비싸서 살 수가 없고, 살만하다 싶으면 괜찮은 것이 없었다. 결국은 주머니 돈과 안목을 타협해서, 지포 라이터 하나를 샀다. 여행 경비 하려고 모아놨던 돈에서 빼 낸 거라 조금 걱정되기도 했지만, 이왕 마음먹은 것 사 버리자. 헤헤. 선물을 전하고 싶은 마음에 조금은 조급해져서, 클럽 입구로 돌아가 서성였다. 아직 2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으니까 나오려면 한 참 멀었겠지만, 혹시나 싶어서 그 앞을 기웃거렸다. 뜻밖으로 만난 것은 대한이가 아니라 상식이었다. “어? 장녹수, 여기서 뭐해?” “당연히 대한이 기다리지. 그러는 너는 왜 나와 있냐?” “잠깐 바람 쐬러. 근데 너, 진짜 미쳤구나? 이 추운데서 계속 기다렸던 거야?” “아니. 대한이 데려다주고 돌아다니다가 그냥 와 본 거야. 병우는?” “안에서 끝발 날리고 있지. 그 자식은 원래 술 발 오르면 물찬제비로 변하잖냐.” “그래?” 요 며칠 여행 준비다 뭐다 하면서 많이 친해져서 인지 평소보다도 상식이가 반가웠다. 가벼운 크림색 니트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갈색 바지를 입고 서 있는 모습이 스타일 좋고 세련된 대학생 모델 같았다. 새삼 이 녀석이 정말 나와 동갑인가 싶을 정도로 그 모습이 자연스러워서, 조금 샘이 났다. 옆에서 싸구려 모자 점퍼를 뒤집어쓰고, 청바지에 낡은 운동화를 신고 있는 나와 비교하자니, 한 숨이 나왔다. 나도 키는 꽤 큰 데 말이야…. 말이 끊겨서 인지 한동안 피던 말보로를 끄고, 상식이가 물끄러미 쳐다봤다. “왜?” “너는 대한이가 그렇게 좋냐?” “뭐?” “대한이가 그렇게 좋아 죽겠냐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뭘 묻나 했더니. “그래, 좋아 죽겠다. 그 녀석은 내 인생의 중심이다. 됐냐?” “병신 새끼.” 갑자기 거칠게 내뱉었다. 그리곤 나를 노려봤다. 나는 어이없으면서도, 그런 상식이의 눈을 마주 봤다. 상식이의 입가가 비틀렸다. 명백한 비웃음. “너, 대한이가 어떤 자식인지 알아? 알고서나 그러는 거야?” 기분이 나빠졌다. “그자식이 너에 대해서 뭐라고 그러는 지, 알고 있냐? 응?” “그만… 해.” “저 안에서, 너는 발끝도 못 디미는 저 안에서, 기집애들 옆에 끼고 지분거리면서, 너에 대해 뭐라고 그러는 지, 알아?” “그만해, 한상식! 그딴 거 알고 싶지 않아!!” “‘초등학교 때부터 스토커 처럼 징하게 붙어오는 새끼가 있는데 말이야-’” 노래를 읊조리듯이 그는 시작했다. “‘나는 그 새끼가 나를 쳐다 볼 때면, 먹은 게 솟구쳐 오르고-’” 즐겁게 눈을 접고서, 입꼬리를 늘어뜨린 채로… “‘그 새끼 목소리로 나를 부를 때면, 귀가 썩는 것 같고-’” 마치 세상에 더 없는 즐거움이 없다는 듯이, “‘그 새끼 손이 나를 건드릴 때면, 온 몸에 소름이 돋아서-’” 더 없는 기쁨은 없다는 듯이, “‘죽이고 싶어서 죽겠는데, 그러려면 그 새끼 몸에 손을 대야 돼서, 참고 있어.’” 막힘없이, “울고 싶지? 근데 그러면 안돼. 왜냐면 그는 이런 말도 덧붙였거든.” 아아, “‘한 번은 그 새끼가 우는 걸 봤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역겨웠는지,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어.’” 그렇게, “‘나는 그 새끼가 징그러워서 미치겠어.’” 고백을 끝냈다. 그는 미친 듯이 킬킬 거렸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서있었다. 한참을 웃어제끼던 상식이가 갑자기 웃음을 멈추더니, 처음과 같이 나를 노려봤다. “보여줄까? 대한이? 그래도 볼래? 보고 싶어?” 나는 대한이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병신 새끼.” 상식이가 가져다 준 웨이터 복장을 클럽 뒷문 옆의 직원 휴게실에서 갈아입었다. 체격이 고교생 정도는 되던 나는, 나름대로 그 옷이 잘 맞았다. 추운 밖에 있다가 들어간 클럽 내부는 그 훈훈함에 잠시 머리가 몽롱해 졌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화려해 보였다. 실내장식도, 가구도, 사람들도. 전체적으로 50~60평 정도 되는 홀을 기준으로, 고급스러운 휘장으로 감쌓인 칸막이 자리들이 반 타원형으로 있고, 가운데에는 스테이지가 있었다. 스테이지에서는 브루스를 추는 쌍쌍들이 몇몇 있었고, 대부분은 휘장안에서 무언가 은밀한 행위들을 즐기고 있었다. 간간히 내가 입고 있는 것과 같은 웨이터 복을 입고 대기해 있다가, 서빙을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조용한 분위기였다. 그래서인지 여기저기 할짝 대는 소리들이 더 음란하게 들렸다. 처음 맡아보는 달콤한 향이 홀 전체를 가득 메웠는데, 그것은 이 홀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이끌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것은 처음 몇 시간뿐이야. 그 다음은 저거지.” 상식이의 손 끝으로 휘장이 채 가려지지 않은 칸막이 안이 보였다. 잘 차려 입었었을 드레스와 턱시도가 위 또는 아래만 벗겨진 채 섞여서 정신 없이 물고 빠는 광경이 들어왔다. 예쁜 여자 두 명이 남자의 페니스를 물고 서로 장난 치고 있었고, 남자는 두 손을 양 쪽으로 나누어 여자의 가슴을 애무했다. 그 남자는 슬램덩크를 좋아하는 병우였다. 키득거리며 상식이는 나를 데리고 어느 휘장 앞으로 갔다. 커다랗고 모양 좋은 가슴을 가진 아름다운 여자가 대한이의 중심 위에서 삽입된 채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잠깐씩 멈출 때는 옆에 있던 핏 빛 와인잔을 들어서 머금어 보이는 여유도 보이다가, 대한이가 참지 못한 듯 재촉하면 깔깔대며 엉덩이를 흔들었다. 그렇게 감미롭게 율동을 타다가, 어느샌가 자세를 뒤집어 버린 대한이에 의해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거친 신음을 토해 내면서 절정을 보낸 뒤, 대한이는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여자는 그래도 상관 없다는 듯이, 그의 결좋은 흑청색 머리칼을 손으로 감싸 안고, 그의 붉은 입술 위를 혀로 할짝였다. 잠자면서도 그 혀에 응해서 딥 키스를 하는 대한이 위에서 여자는 고운 손으로 대한이의 페니스를 쓸어 올렸다. 서서히 다시 반응 하는 몸 위에 올라타서, 그녀는 또 한번의 율동을 시작했다. 오르가즘의 묘성을 내던 그녀와 나의 눈이 마주 쳤다. 마치 아침 햇살처럼 아름다운 그녀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 지더니, 눈썹을 치켜 올리곤 거칠게 일어섰다. 옆에 있던 가운 비슷한 것을 대충 걸친 뒤, 대한이를 내 버려 둔 채로 내게 성큼성큼 걸어 왔다. 짝! “교육이 덜 되 있군. 손님과 눈 마주치지 않는 게 수칙 1번이야. 여기서는 개처럼 엎드리라는 얘기 못 들었어?” “누님, 그만. 사정이 있어서 내가 들인 녀석이야. 실례 했어.” “뭐야, 한 상식. 넌 니 파트너 내팽겨 치고 이딴 거 데리고 장난 놀아? 여기가 애들 놀이터인 줄 알아?” “미안, 미안. 하지만 누님도 보고 싶어 했잖아. 이녀석이 대한이 ‘그 거’야.” 차가운 얼굴로 내 뺨을 갈긴 ‘누님’이라는 여자는, 상식이의 그 말에 나를 진귀한 것 보듯이 살펴보기 시작 했다. “생각 보다는 멀쩡하네? 난 곱추 쯤 되는 줄 알았어.” 우습다는 듯이 나를 평했다. 그런 그녀를 스쳐 가서, 아직 페니스를 내놓고 있는 대한이에게 옷을 입혔다. “얘, 너 진짜 호모야? 네가 저 ‘대한이 표 미저리’ 맞아?” 혹시 몰라서, 대한이 바지 주머니 속에 차비를 넣었다. 메모지를 꺼내서 주소도 써놨다. 망설이다가 옆에 있던 물잔에 손수건을 꺼내 축여서 립스틱 투성이의 입가만 닦아 준 뒤에 일어섰다. “상식아, 괜찮으면 있다가 대한이 좀 바래다 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직원 휴게실에서 다시 옷을 꺼내 갈아입고, 벗은 웨이터 복을 얌전히 개어 놓았다. 문가에는 어느새 따라 온 상식이가 기대 서있었다. “소감이 어때?” “피곤해.” “내 말이 맞았지?” “그래.” “그럼 이제 대한이한테서 손 떼는 거냐?” 빙글 빙글 웃으면서 던진 질문에, 신경이 몹시 거슬렸다. “뭐야, 뭘 그렇게 야려? 내가 그랬냐? 대한이가 그랬다니까? 니가 징그럽다구….” 퍽!!! 나불대는 주둥이를 향해 대가리를 박았다. “이 병신 새끼가! 죽었어!!!!” 강력한 킥이 배를 뚫었다. 컥- 소리나게 아팠지만, 그 얄미운 다리를 온 몸으로 붙들었다. ‘미저리’라… 기억하냐, 한 상식? 대한이 핵주먹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기어이 그 다리를 부러뜨린 나다. 휘청이던 상식이가 넘어지면서, 둘이 엉켰다. 나는 있는 힘껏 그 새끼 종아리를 물어 뜯었다. 마치 내가 도사견이 된 것 처럼. 눈 앞의 상식이 다리가 먹음직한 닭다리라도 되는 것 마냥, 있는 힘 없는 힘을 다짜서 물어 뜯었다. 상식이는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도, 휴게실 구석에 있던 술병을 집어서 내 등에 내리쳤다. 척추뼈가 나갈 것 같았지만 상관 없었다. 나는 아픈 만큼 그 새끼 종아리를 더더욱 꽉 물었다. 결국 등에 병조각들을 꽂은 채로 상식이에게서 떨어져 나갔지만, 내 입에는 찢겨진 바지조각과 함께 상식이의 종아리 살점이 달려 있었다. 놀라서 달려온 직원들이 나와 상식이를 떼어놓고, 나를 끌고 나갔다. 마찬가지로 소동을 알고 모여든 회원들 사이에서 황당하단 표정으로 서 있는 여자를 향해, 온통 피 칠갑을 한 얼굴을 들어 미소 지었다. 아마 진짜 미친 놈 처럼 보였겠지. 그녀의 얼굴이 밀랍처럼 하얘진 것을 보면 말이다.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다. “녹수야?!! 어떻게 된 거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다가 내 얼굴을 알아 본 병우가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 왔다. “그 새끼 완전히 돌았어, 씹 새끼. 아악!” “어, 어? 둘이 싸운 거야?” “병우야.” “응?” 키 큰 병우 귀로 힘겹게 손을 뻗어서 입가로 가져왔다. “대한이 뻗어 있으니까, 나중에 집에 좀 데려다 줘. 나 여기 왔었다는 말은 하지 말고.” 혹시라도 대한이란 이름이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갈까봐 소리를 최대한 낮췄다. 그리고는 뒤 돌아서 상식이를 째려보고 말했다. “병원 가자.” 상처는 제법 커서, 출혈이 심했다. 상식이는 다리를 꼬매고 나는 등을 꼬맸는데, 너덜 너덜 해진 정도나 출혈 정도를 비교해 볼 때, 내 쪽이 훨씬 더 심각했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나를 욕하는 상식이를 뒤로하고, 피로한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늦은 시각인데도 거리에는 아직 캐롤 송이 흐르고 있었다. 웬지 추워져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는데, 손 끝에 닿는 것이 있어서 꺼내 보니 예쁘게 포장된 지포 라이터였다. 찰칵. 후우. 생전 처음 피워보는 담배는 쓰고, 씁쓸했다. 그 파티 이후, 나는 일체 대한이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화가 난 것도, 토라진 것도 아니었다. - 내가, 대한이에게 화낼 리 없지 않은가. 다만 정리할 시간이 필요 했을 뿐이었다. 선을 그을. 확실히 나는 대한이에게 선을 그을 필요성이 있었다. 나로 인해 그를 망가뜨리지 않도록. 그딴 식의 폭주는 두 번 다시 사양이다. 짐을 싸놓고 잠시 전화기를 노려봤다. “한 상식, 내일 늦지 마라.” “장 녹 수! 이 미친 개새꺄!! 니가 지금 그런 말이 나오냐? 사람 물어 병신 만들어 놓고, 어딜 가자고?” “사내자식이 엄살은, 쯧. 오기 싫으면 말구. 난 꼬맨 등에 배낭 메고 갈 거다. 안 오면 나야 좋지. 오붓하게 병우랑 둘이 갈란다.” 찰칵. 뭐라 뭐라 악을 쓰는 것을 그냥 끊었다. 이 정도면 신경 쓴 거지, 뭐. 밤 11시에 맞춰서 청량리 역으로 나갔다. 시계탑 아래에서 나이키 백을 바닥에 놓고 걸터앉아 졸고 있는 병우와 그 옆에서 샐쭉한 표정으로 팔짱끼고 서 있는 상식이가 보였다. 피식 웃고는 다가갔다. “늦지 말라고 전화 해 놓구서, 제일 늦게 오고 있냐?”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한 모금 빨아서 깊게 들이 쉰 뒤, 상식이를 향해 뿜어 줬다. “이게 어따대고… 어? 너 담배 안 피지 않았나?” “진화하는 생물이지, 인간이란 것은. 안 오신다더니?” “병우가 사정해서 나온 거다. 누군 오고 싶어서 온 줄 알아? 나도, 니 놈 얼굴 보기…” 꼭 한마디가 많지, 네 놈은. 종알대는 와중에 쓰윽 하고 녀석의 헐렁한 바지를 들어 올렸다. 단단히도 매 놨네. “멀쩡하네.” “뭐, 뭐, 뭐 하는 거야? 이 변태 새끼가!!!!” 얼굴이 빨갛게 된 채 바둥거리는 모습이 귀여워서 웃다가 한대 맞았다. “출발하기 전에 사진 찍자. 너 찍고 싶어 했잖아.” “내, 내가 언제!!!” “병우야, 일어나. 사진 한 방 찍고 들어가자. 낭만적인 밤 기차 여행 아니더냐.” “어, 녹수야. 언제 왔어?” 눈가를 부비적대는 모습이 영락없이 덩치만 커다란 어린애 모양이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일으켜 세웠다. “어디서 찍을래? 아, 그 전에 이거부터 처리하자.” 하며 남은 차표를 꺼냈다. 그러자 갑자기 난감한 표정을 짓는 상식이었다. “왜?” “대한이도 왔어. 내가 같이 갈 거냐고 다시 물어보니까, 간다고 그래서. 지금 대합실에서 자고 있어.” 대답은 병우가 대신했다. “그래?” “어.” “그럼 대한이도 깨워서 데려와. 사진 찍자.” “어? 어… 녹수야. 니가 안 가?” “난 상식이랑 명당자리 찾을게. 부탁해용~ 병우군.” 으헥~ 소름 돋아 하며 가는 병우를 보고 있다가, 담배를 한 모금 빨아 피웠다. “안 어울려, 그거. 피지 말지?” “어디서 찍을래?” 빙긋이 웃으며 상식이에게 물었다. “…화났냐?” “왜?” “………………” 짧아진 담배를 비벼 끄고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 봤다. “여기가 명당인가 보다. 플래쉬는 챙겼어?” “응.” 손을 들어서 찡그리고 있는 상식이의 미간을 펴 줬다. “그럼, 포즈 연구 좀 하자.” 오랜 만에 보는 대한이를 향해 웃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아, 오랜만이라기엔 그런가? 고작 일주일이구나.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에 멋진 몸이었다. 내 그리운 검은 눈동자도 여전했다. 그래서 조금 슬퍼졌다. 상투적인 인사말을 하고서, 상식이와 함께 연구했던 포즈들로 사진 찍을 것을 건의 했다. 대부분 기각당하고, 가장 평범하고 가장 무난한 일자 서기로 결론짓고, 지나가던 아낙에게 부탁해 시계탑 아래에서 첫 사진을 찍었다. 낯선 이방인의 사진술이 못 미더웠는지, 상식이는 몇 번이나 다시 설 것을 종용하고는 돌아가며 찍었다. 다양한 포즈 실험의 피험체를 나와 병우가 맡았다. 추락하는 발레리나 포즈에서 생각하는 네로와 메롱, 체험 삶의 현장 등등 이름도 오묘한 여러가지 것들을 찍느라고 하마터면 기차도 놓칠 뻔 했다. 대한이는 그런 우리들 노는 꼴을 그저 지켜 볼 뿐이었다. 부산을 떨며 여기 저기 사진을 찍어 댔던 상식이는, 결국 출발도 하기 전에 청량리 역에서만 필름 한 통을 다 썼다. 쫓아다니면서 부추기고, 응해준 나도 나지만… 이 녀석이 나랑 동갑이 맞구나 싶어서 어이없기도 했다. 우리처럼 신정 맞이 해돋이 보러 가는 사람이 많아서, 기차는 북적 북적 댔다. 대부분 연인들인 듯이 보였지만, 우리처럼 친구 팀도 보였다. 연인이든 친구 팀이든 간에 여자들은 전부 대한이 쪽을 한 번씩 돌아봤다. 상식이랑 병우도 꽤 많은 눈총의 대상이 됐다. 나는 패스. 병우는 기차여행이 처음인지 신기하다며 의자를 여러번 뒤집었다. 덩치 큰 놈이 그러니까, 통로에 서서 기다리던 사람들도 뭐라 못하고 쫄아 있길래, 병우를 달래고 앉혔다. 상식이는 이제 피사체를 풍경으로 바꿔서 창 밖을 향해 플래쉬를 터뜨렸다. 까맣기만 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구만. 대한이는 그런 상식이 옆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다. 잠깐 그 모습을 보다가, 낮에 삶았던 계란들이 생각나서 꺼내 들었다. 기차여행에는 삶은 계란이 최고라며 엄마가 권한 것이었다. 그 계란 들을 곱게 까서, 병우랑 상식이에게 나눠 주고, 대한이 손에도 하나 슬며시 쥐어 줬다. 대한이는 눈을 뜨고 손에 쥔 계란을 바라보다가 한 입에 먹었다. 건네준 물병의 물을 마시고는 담배를 꺼내다가 멈칫하고는 집어 넣었다. “왜 왔냐고 안 물어 보냐?” 계란을 까던 손을 잠깐 멈추고, 그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내 아름다운…. 그냥 실없이 웃어 주고, 하던 일을 계속 했다. 정동진은 생각 보다 멀어서, 처음에는 혈기 왕성하던 병우나 상식이도 병든 닭 꼴로 졸기 시작했다. 병우 머리에 가져온 수건을 말아서 벽에 기대어 주고, 읽던 책을 접었다. 둘러보니 기차 안의 대부분 사람들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의식적으로 대한이 쪽으론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래도 맞은편의 어두운 창에는 의자에 나른하게 기대어서 나를 쳐다보는 대한이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차창에 비춰진 그의 눈과 마주치면서, 그도 내가 보는 것을 본다고 생각했다. 결코 그럴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생각보다 밤기차는 적막하고 조용했으며,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갑자기 시간이 늘어난 것인양, 기차는 아무리 달려도 정동진에 도착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처음으로 정동진 행을 결정한 것을 후회했다. 끝이 없을 것 같던 기차의 종착역에 다가섰다. 짐을 챙겨서 내리는 동안, 나는 진이 다 빠졌다. 차라리 잠을 자 둘 것을… 하지만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았다. 신경도 곤두서 버렸다. 나는 화나지 않았어. 기차역에서 바닷가가 바로 보였다. 정동진 해변은 너무 작아서, 한 눈에 다 들어왔다. 실소가 났다. 그래도 좋았다. 그 좁은 기차에서 해방 된 것만으로도 기뻤다. 병우와 상식이도 흥분해서는 날뛰어 다녔다. 상식이는 내리자 마자 카메라부터 챙겨서, 기차에 매달려 한 컷 찍는 것으로 정동진 첫 사진을 정했다. 그리고는 사방 팔방 돌아다니며 찍어대기 시작했다. 전생에 찍사였음이 틀림 없다. 같이 기차를 타고 온 사람들 말고도, 해변은 먼저 온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혀가 내 둘릴 정도로 꽉꽉 찬 인해에 난감했지만, 이쪽은 뭐라해도 중학생으로는 안보이는 덩치 세 명 프러스 일반인 한 명인 것이다. 파워면에서 압도적이라 볼 수 있다. 병우에게 인상 팍팍 쓰라고 주문 하고 앞세워서, 척 보기에도 명당자리인 바위 언덕으로 갔다. 각자 최대한 폼나게 자리 잡고 앉아서, 찍사로 변신한 상식에게 열심히 봉사했다. 새벽이라서 아직 어두웠지만, 밤이라기엔 분위기가 틀렸다. 동트기 전의 바다라는 것은 모든 혼란을 머금고 있는 카오스 그 자체였다. 한 밤의 달빛과 새벽녘의 별빛을 함께 담아내며 거칠은 본색을 숨기듯 짙은 밤의 색으로 뒤덮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호기심에 들여다보도록 유혹한다. 마치 태고의 어머니라 주장하듯이 자신의 폼으로 돌아오라고, 다시 한 몸으로 엮이자고, 사람의 혼을 빨아들인다. 지난 크리스마스이브 밤에 배운 담배 한 개비가 없었다면, 난 틀림없이 그 부름에 응했을 것이다. 너무나도 편안해 보였기에… “담배, 언제부터 폈냐?” 꿈꾸는 듯 했던 밤바다와의 대화는, 의식을 가로지르는 낮으면서도 시원한 울림을 가지는 목소리에 깨어졌다. 목소리의 주인을 잘 알기에,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지난 주 부터.” - …새끼가 있는데 말이야 “무슨 일 있냐?” - 그 새끼가 나를 쳐다 볼 때면……. “아니?” - 그 새끼 목소리로 나를 부를 때면…… “근데, 왜 그래?” - 그 새끼 손이 나를 건드릴 때면…… “피식. 그냥 사춘기라서 그래.” - 죽이고 싶어서 죽겠는데…… 참고 있어. “………………그래?” - 한 번은 …역겨웠는……간신히 참았어. “그래.” - ‘나는 그 새끼가 징그러워서 미치겠어.’ 바다 쪽에 시선을 고정 시켰다. 지금이라도 궤도 수정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밤바다는 파도소리마저 삼키고 있어서 안타까웠다. 너무나 예뻐서 좋아했던 대한이의 눈동자를 닮은 바다가, 내가 아무리 불러도 답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슬펐다. 확-! 헉. 갑자기 잡아당겨져서 놀랐다. 돌아보니 대한이가 잔뜩 굳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 왜 갑자기 날 무시하냐?” “무시하다니…? 아냐.” “웃어? 아니야? 하! 아니야?” “…………그만… 두자.” “뭘 그만 둬, 이 씹새끼야! 좆도 아닌 게 계속 날 무시하는데, 뭘 그만둬?!!” “아니야, 나 너 무시한 적 없어. 그냥- 그냥, 잠깐…… 잠깐 머리를 식히려던 것뿐이야. 알잖아, 내가 어떻게 널 무시하냐?” “무슨 머리를, 왜 식히는데?” “그냥… 나라고 언제까지 네 뒤만 쫓아다닐 수 없잖아. 앞으로 할 일 같은 것도 생각하고…” “그러니까, 왜, 갑자기, 그런 걸 생각하냐고?”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해야 되지? ‘니가 날 역겨워 해서, 좀 떨어질려고 한다’? 제기랄. 난감함에 그의 눈을 피해, 입술을 깨물었다. “너도… 냐?” 그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 표정이 너무나 괴리감이 들어서, 순간 나는 대한이가 어디가 아픈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너도, 그 인간처럼, 날 버리고 갈 거야?” “!!!!!!!”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아냐!! 대한아, 그런 게 아냐!!” 아저씨는- 대한아, 아저씨는 그런 게 아냐!! 나도, 나도 그런 거 아냐!! “너… 널 버리다니, 아니야. 내가 어떻게 널 버려. 내 세계의 중심이 너인데…” 힘없게 중얼 거렸다. 미안. 알고 있었으면서……… 대한이가 날 아무리 미워하고, 싫어해도, 결국은 내치지 않는다는 것을… 그만큼 외롭기 때문에, 옆에 있는 사람은 절대로 내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교활하니까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없고, 아버지가 없는 틈을 파고 든 것이었다. 그런 것에 대한이가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치만, 그치만- 대한아. 이번에는 너무 아팠단 말이야. 전해 오는 그 말들이 날 너무 아프게 했단 말이다. 나도…… 사람이니까. 심각하게 날 붙들고 서 있는 대한이의 팔을 떼어냈다. 대한이는 흠칫하며, 안색이 창백해졌다. 마치 광장 한가운데 버려진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아잉~대한아. 내가 없는 게 그렇게 싫었어~? 알았어, 녹수가 이제 다시~는 대한이 한테서 안 떨어질께~!!!” 대한이의 얼굴이 확하고 굳었다가, 화르륵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눈이 평균치 각도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나는 쬐끔 불안감을 느꼈다. 나름대로 재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와아~!!!!” 때마침 터지는 함성에, 위기를 모면했다. 대한이의 눈동자와 같은 밤바다에 실금 같은 빛줄기가 가로 질렀다. 열광하는 사람들의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분홍 빛 주황 빛으로 요란 벅적 하게 하늘을 물들이며 등장을 알렸던, 거룩하신 햇님이 마침내 등장했다. 기다렸던 시간이 허무하리 만치 가뿐하게 떠올라서 순식간에 정상에 자리잡았다. 그 소박한 등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밀레니엄 햇님 제 1호의 출현식을 열렬히 환호했다. 어디 박혀 있었던지 안보이던 병우와 상식이가 환호성을 지르며 다가왔다. “녹수야, 대한아, 봤어?!!!” “응, 너도 잘 봤냐?” “보러 오길 잘 했어. 좀 허무하기도 했지만, 보러오길 잘했어, 핫핫핫!!!” “시끄러운 녀석. 병우 니가 옆에서 난리 부리는 바람에 카메라가 흔들렸잖아!!! 모처럼, 끝내주게 자리 잘 잡고 있었는데… 타이밍도 좋았는데…” “자, 자. 모두들 나한테 감사하도록 해. 이 몸이 주관하신 여행이니 말이지.” “진짜네, 베리베리 땡큐다. 녹수야.” “닥쳐, 유병우!!!” “상식아, 저기 기찻길에서 사진이나 찍자. 다양한 포즈의 영감이 팍, 팍, 오지 않냐?” “흥, 이래서 초보자들은 안 된다니까. …어서 가자.” 귀여운 자식들. 신나서 달려가는 상식이와 병우를 먼저 보내고, 대한이 쪽으로 고개를 향했다. “가자, 대한아.” “………….워.” “응?” 대한이는 고개를 숙인채 내 옆으로 스쳐지나가면서 재빠르게 속삭였다. 약간은 어색한 얼굴에 홍조를 띄우고. “못 들었으면, 됐어.” 그리고는 상식이들이 뛰어간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 가기 시작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면서 그런 대한이의 뒤를 따랐다. 3. 뜨겁고 숨막히는 여름의 기운에 불쾌지수는 상승세를 타고 끝없이 뻗쳐 올라 임계점에 다달았다.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내기도 지겨워져서 냅두고 있자니, 옷 입고 걸어다니면서 샤워하는 기분이었다. 거리는 바글바글 대는 사람들의 열기로 가득차서, 꼭 찜통 속에 들어 앉은 것 같았다. 솔직히 이런 기분에서는 살 끝만 닿아도 살인 날 것 같았다. 7월 중순 정오에 땡볕아래에서 신촌 거리를 걸으며,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기묘한 옷차림과 형형 색색의 인간들 틈바구니 속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도…도와 주세요.” ….내가 살 끝만 닿아도 살인 날 것 같다고 했던가? 부들거리는 하얀 손으로 황급하게 내 반팔티를 잡아당기는 고운 미성의 소녀를 바라봤다. 오우, 뷰티풀!!! 세상은 정말 넓구나. 이 불볕 더위와 작렬하는 태양에도 불구하고, 도자기처럼 하얗고 투명한 우유빛 피부, 만지면 부드러워서 녹아버릴 것만 같은 찰랑찰랑한 숏 커트의 머리카락, 얇으면서도 정갈한 눈썹, 커다랗고 맑은 너무나도 깨끗한 브라운 아이즈, 체리 빛 으로 촉촉하게 젖어서 키스하고 싶게 만드는 앙증맞은 입술의 절정 미소녀가 나의 때꾸정물 반팔티를 황송스럽게도 그 미려하고 날씬한 손가락으로 붙잡고 있었다. 그 모습이 햇볓에 녹아들어서, 갑자기 세상에 뚝 떨어진 천사가 아닌가 싶었다. 클럽의 미녀들을 떼거지로 데려다 놔도, 나는 이 소녀의 손을 들어 주겠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 저, 이… 이상한 사람들이 자꾸 쫓아와서 그러는데, 잠시만 저랑 같이 걸어주시면 안될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얼굴을 붉히며 그 호수같이 맑은 눈에 눈물을 그렁거리는 천사를, 사나이 장녹수가 그냥 넘어갈 리 없잖은가!!! “누가 쫓아온다는 거죠?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아뇨, 저, 한 두명이 아니라, 저 쪽에….”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시커먼 교복을 입은 덩치 큰 양아치들 대 여섯 명이 2미터 쯤 뒤에서 이 쪽을 힐끔 힐끔 보고 있었다. 과연, 사람 없고 외진 곳으로 들어갔으면 당장에라도 덥쳤을 듯한 분위기였다. 겁 먹을만 하구만. 근데, 이 아가씨는 뭘 믿고 날 찝었을까? 나역시 힘없는 고삐리 인데 말이다. “가시죠.” 방긋 웃어줬다. 원래 난 미모에 약한 타입인 것이다. “저, 고맙습니다. 요 앞에 버스 정류장 까지만 부탁드릴게요.” 이제는 조금 안심한 듯이 침착한 듯한 그녀를 에스코트 하며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녀에게서는 달콤한 꽃향기가 났다. 향수는 아닌 듯 하고, 흠, 정말 좋군. “근데, 왜 저를 부르셨어요? 조금 더 듬직한 사람 고르시지.” “충분히 듬직해 보이세요. 그리고 어쩐지…” 그녀는 말을 끊고 잠시 나를 들여다봤다. 그 천연 갈색의 눈동자에 내가 비추자, 나는 빨려들 것 같았다. 그녀와 나는 잠시 그렇게 눈을 맞추었다. “어쩐지… 뭐요?” “상냥해 보여서….” 그녀의 얼굴이 확- 소리가 들릴 정도로 붉어졌다. 덩달아 나도 얼굴을 붉혔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걸음을 옮기려는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사… 사실은, 다른 사람들은 뭔가 말을 붙이기가 무서웠는데, 그 쪽은,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이렇게 사람이 많고 더운데도, 천천히 주위사람들을 피해서 걸어 가고 있더라구요. 그런 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지기도 하고, 뭔가 어른스럽기도 해서… 기…기댈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랄까…” 그랬나? 사우나하는 기분이었는데? 뭐면 어떤가. “그랬어요? 하하. 아닌데. 속으로 꿍시렁 거리느라 그랬어요. 덥다고 짜증내느라, 걸음이 늦어졌던거에요.” “그… 그랬나요? 그래도, 이렇게 도와주셨으니까….” “그쪽 분이 부탁했으면, 어떤 남자라도 도와 줬을 거예요.” 그 말에 그녀의 얼굴은 완전히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런. 나, 작업한건가? “아, 저, 다 왔네요. 그럼.” 서둘러 말했다. 버스 정류장엔 사람이 꽤 있었기에, 나는 그녀를 남겨두고 돌아섰다. “잠, 잠깐만요. 이름이라도…” “아닙니다.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목례를 한 뒤에 재빨리 벗어났다. 조금 오버 했나 싶어서, 아쉬운 마음도 들었지만…. 서서히 오던 길을 돌아가다가, 시장이라도 볼까 해서 아까 버스 정류장 뒤의 백화점 쪽으로 몸을 틀었다. 저녁엔 부대 찌개를 할까 하면서 메뉴를 생각하며 골목길로 접어들었는데, 아까의 검은 교복들이 보였다. 뭔가 찝찝한 마음에 교복들이 사라진 길을 따라 갔다. “니가 송유진이지?” “누… 누구세요? 이… 이러지 마세요.” 퍽!!! “뭐, 뭐야?!!! 이 새끼!!!” 말하는 도중인 녀석의 입에다 펀치를 박아주고, 들고 있던 야구 빠따를 뺏어서 등을 후려쳤다. 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근차근 밟아줬다. 덤비는 녀석들이 다가 올 때마다 한대씩, 쓰러진 녀석을 후려쳐 줬다. 그녀를 잡고서 협박을 하길래, 이미 뻗어버린 녀석은 치워버리고 방심하던 옆의 녀석을 잡아다가 빠따로 머리를 갈겼다. 죽지 않도록, 안면의 콧대만 정확하게 노려서 날려줬다. 그렇게 또 한녀석을 잡아 놓고 짓이겨 주니까, 마침내 꼴 같지 않던 인질극을 때려 치고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이미 두녀석은 보낸 상태에다 빠따까지 있겠다, 상대할 만 했다. 상대가 많을 때는 한 번 밀리면 끝장이니까, 될 수 있으면 일 대 일로 붙겠끔 위치를 조정하고 열심히 패줬다. 마지막엔 힘이 좀 딸려서 몇 대 맞았지만, 그럭저럭 마무리 짓고서 공주 구출극을 끝냈다. 뻗어 있는 녀석들의 상태를 살펴 보고, 중상까지는 아니다 싶어서 걱정 털고 일어섰다. 나중에 귀찮아지면 곤란하니까 말이다. “괜찮아요?” 아직도 정신이 없는 듯,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바들바들 거리는 폼이 너무 안쓰러워 보였다. 당하기 전에 온 것 같은데, 아닌가? “어디 다쳤어요?” 간신히 머리만 흔드는 그녀의 옆에 가서 머리를 짚어 봤다. 그녀는 놀란 듯 흠칫 했지만, 떨기만 했을 뿐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다. “놀랐나 보네요. 집에 데려다 줄게요. 일어설 수 있겠어요?” 손을 내밀자, 한 참을 바라보던 그녀가 잡고 일어섰다. 휘청 거렸지만, 그럭저럭 일어섰다. 걸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 같아서, 택시를 잡았다. 오늘 장은 다 봤군, 김치 찌개나 해야겠다. “…. 입술… 다쳤는데…” 창 밖을 보는데, 그녀가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돌아보니 여전히 창백한 낯이었지만, 많이 안정이 된 듯이 나를 향해 근심스러운 얼굴을 지었다. 나는 어쩐지 안심이 되서 빙긋이 웃어줬다. 아, 그러고보니 쓰리기도 하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왈칵 울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했다. “왜…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그녀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는, 내 품에 안겨 들었다. 그리고는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허, 참. 하도 서럽게 울어서, 그녀를 안고서 등을 토닥여 줬다. 몸도 작아서 안기 딱 좋은 사이즈였다. 음, 가슴이 없는게 흠이구나. 울던 그녀를 달래고 있을 때 그녀의 집 앞에 도착했다. 부자 동네였다. 하긴 부티나게 생기긴 했었다. 그녀의 집은 대문도 크고 담도 끝이 잘 안 보였다. 상식이네 집보다도 커 보였다. 상식이네도 무지하게 잘살아서, 딱 한번 그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무지하게 넓고 크고 비싸 보이는 집이었다. 그렇지만 웬지 휑하니 삭막해 보이기도 해서, 없는게 없었던 그 집에 두 번 다시 놀러가진 않았다. 그녀를 내려 주고서 그대로 가려는 것을, 그녀가 하도 끈질기게 붙잡아서 집까지 끌려 들어갔다. 얼추 대한이 일어날 시간 됐는데… 어제 새벽까지 마시고 잤으니까. 아, 해장국 끓여 놓을 것을…. “유진아! 괜찮아? 송명고 자식들이 너 데리고 있다고…” “응, 이 분이 구해줬어.” “어?” 넓찍한 정원을 가로질러서, 화려한 반 투명 유리 대문을 밀고 들어서자 웬 멀대같이 큰 놈이 뛰쳐나왔다. 키는 대한이 만한 듯 했지만 덩치는 좀 더 작았고, 얼굴도 말끔하니 잘생긴 모범생 스타일이었다. 열심히 그녀를 붙잡고 안부를 묻다가, 그녀의 대답에 그제서야 나의 존재를 눈치챘다. 민망해라. “저, 그만 가보겠습니다. 그럼.” “안돼요!!! 치료 받으시고, 식사하고 가세요!!!”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요. 가봐야 됩니다.” 기다리진 않겠지만, 속쓰리며 일어설 대한이를 혼자 냅둔다는 것은 말도 안되지. “당신,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네?” “우진아, 너 이 분 알아?” 난 너같은 놈 모르는데? 왜 대뜸 반토막 말이냐. “어디서… 봤더라?” “흔한 얼굴이니까요.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기다려요. 이름도 말씀 안해주시고…” “뭐, 유진이를 구해줬다는데 사례를 해야겠지? 난 송우진이다. 당신은 대학생인가?” “이만, 물러가도록 하죠.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후회하기 전에 말입니다.” “우진아, 너 왜그래? 저, 화내지 마세요. 쟤가 원래 말투가 저래요. 버릇없이 자라서… 사과드려, 빨리.” “미안하게 됐수다. 칫. 쪼잔하게.” 빠직. “많이 늦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차갑게 일별하고 말리는 유진 씨를 뒤로 하고 나왔다. 아까까진 좋았는데 말이야. 뒷 끝이 안좋군. 서둘러서 초록색 대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는 이미 대한이가 일어나서 마루에 앉아 있었다. 시큰둥하니 담배를 빨고 있는 모습이 싸구려 츄리닝 바지에 나시 티 차림이라도 꼭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이제 막 고등학교 1학년이 된 대한이는 완전히 성인으로 보였다. 그나마 있던 볼살도 빠져서, 애 티 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클럽에서도 파티가 있을 때마다 불러 제낄 정도이니, 대한이의 미모는 이미 그 중에서도 탑을 넘어선 것이었다. 분위기만으로도 먹고 들어간다랄까. 클럽의 잘난 여자들도 목매고 매달릴 정도였다. 성격도 과묵해져서, 예전 보다는 많이 부드러운 인상을 주었다. 그 대신 전신에, 자연스럽게 미묘한 살기랄까 긴장감이 맴돌고 있어서, 무슨 조직의 보스 같은 느낌을 줬다. 보스는 보스구나. 이 근방 학교들 일진의 짱이니까. 내가 보기엔 하나도 쓰잘데기 없는 그 짓거리를 대한이가 맡게된 것은, 자의라기보다는 타의였다. 중학교 때부터 유명했던 우리 패거리가 몽땅 다 같은 학교로 진학하자, 당연하다는 듯이 3학년 일진들이 몰려들어서 입학식 치르자마자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 다음은 다른 학교 일진들이 달려들고…. 이런 식으로 1학기는 거의 학교간 파벌 싸움으로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별 반응이 없던 대한이도, 자꾸 귀찮게 들러붙자, 아주 작정을 하고 서울 강북 일대를 쓸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각 학교의 일진들을 통합시키고 거기의 두목이 된 것이다. 젠장. 이러다 진짜 깡패의 길로 나서면 어쩌지? 그것만은 결사적으로 막아야겠다. 이번엔 다리 부러뜨리는 걸로는 안 될 테니, 아예 식물인간으로…… 헉. 내가 무슨 망발을. 상식이와 병우는 이 짓거리에 재미를 붙였는지, 진짜 조직의 간부 흉내를 내고 다녔다. 나쁜 자식들. 그 살벌한 싸움터에, 대한이를 그 나쁜 놈들만 믿고 맡길 수 없어서 진짜 울며겨자먹기로 따라다녔다. 중학교 때까지야, 고등학생 애들하고 붙어도 이렇게 본격적이진 않았었는데… 학생의 탈을 쓴 폭력배들 중 1등급짜리들은 조폭 저리가라 할 정도로 막 놀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몹시 위험했다. 본격적인 각종 무기의 등장과 치졸한 편법으로 한 때 위기를 맞았던 우리들은, 곧바로 그에 따른 대응책에 익숙해져서 철저히 반격했다. 약 5개월간을 그 짓 꺼리만 하다 보니, 이제는 부엌칼보다 사시미가 더 정겹고, 피냄새가 향기로울 정도였다. 그렇게 싸움이 커지면서, 혹시라도 큰 사고 날까봐 - 죽기라도 해봐라, 그럼 당장 쇠고랑 아닌가! 나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대한이만은 절대 안 된다!! - 싸운 뒤에는 꼭 뒤처리를 하는 것이 버릇이 됐다. 어디 중상자는 없나, 배때기 뚫리고서 죽어가는 놈은 없나. 뒤에서 나보고 완전히 미친놈이라고 떠들어 대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무서운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 물론, 미친놈이라고 하는 데는 다른 이유도 많지만…. 나도 잘 안다. 난 대한이한테 미친 놈 맞으니까. 남들이 뭐라건, 나는 여전히 대한이 꼬붕이었다. “대한아. 벌써 일어난거야?” 담배를 마당에다 비벼 끄고 일어나서 길쭉하게 기지개를 펴는 대한이의 모습이 흡사 동물의 왕국에 나오는 사자 같았다. 아, 이 생각은 예전에도 했었구나. 대한이는 키도 무럭무럭 계속 자라서, 거의 190 가까이 되고 있었다. 우리 패거리는 거의 다 키가 컸는데, 내 키도 평균치는 훨씬 웃도는 180은 됐지만 4명 중 제일 작았다. 키는 남자의 자존심! 2미터 근처에서 노는 병우야 괴물이니까 뺀다 치고, 상식이한테도 뒤진다는 것은 정말 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상식이는 거진 대한이 만큼 커졌다. 아니, 원래 비슷했나? 에이씨. 왜 맨날 똑같이 먹는데 나만 작을까? 아니, 나도 작은 건 아니지만, 왜 얘네들은 이렇게 크는 걸까? 나만 빼고 키 크기 운동이라도 하나… 아냐. 아직 고 1이니까, 나도 좀 있으면 엄청나게 자라지 않을까? “어디서 맞았냐?” “어? 별거 아냐. 그냥 시비가 좀 붙어서. 좀 만 기다려. 내가 계란국 끓여줄게.” “이 근방에 아직도 찝적대는 놈들이 남아있었나?” “아니. 신촌 근처에서 양아치들하고 잠깐 시비가 있었던 것뿐이야.” “음.” 웬일로 내 얼굴도 신경쓰나 했더니, 쯧. 계란국을 끓여서 차려주고, 비디오라도 빌려 올까 하고 어슬렁거리고 나갔다가, 입가가 땡겨서 약국에 들렸다. 슈퍼 옆에 있는 약국의 약사 아줌마와는 지난 5개월 동안의 전적 덕분에 엄청나게 친해 졌다. 처음 갔을 때는 생뚱맞게 대했는데, 근 5개월을 그러고 다니니까 한번은 진지하게 학교폭력 근절 대책 위원회란 곳의 전화번호를 소개시켜 주시기도 했다. 그런 것을 보면 내가 확실히 양아치처럼 생기진 않은 것 같다. ………설마, 왕따처럼 생겼나? 또 맞았냐며 걱정 어린 눈빛으로 봐 주시면서도, 약 값은 몽땅 다 받는 약사 아줌마께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밤이 되도, 덥기는 마찬가지라서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슬슬 대한이 밥 다 먹을 시간이라서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중학생 애들이 삥 뜯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오늘, 무슨 날인가?” 중얼거리며 여자애면 구해주고, 아니면 말자, 라고 결심했다. 피해자는 남자애였지만, 나는 드물게 분노하며 삥 뜯던 녀석들을 죽도록 패버렸다. 원래 여자와 아이는 안 때리지만 오늘은 예외다! 얻어맞고 있던 녀석은 내 하나 뿐인 동생, 장희빈이었다. “어여 먹어라. 많이 아퍼?” “괜찮아.” 얼굴에 피딱지를 얹은 두 형제는 패스트푸드 점에 나란히 앉아서 궁상맞게 피자를 뜯었다. 약국에서 나오는 길이라, 가지고 있던 소염제랑 연고로 녀석의 얼굴에 고루 발라 줬다. 아까 그 새끼들을 더 밟아 줄 걸 그랬다. 내일이라도 다시 찾아서… “형은 안 먹어?” “응, 형은 배불러. 희빈이나 많이 먹어.” 이렇게 이쁜 녀석, 때릴 때가 어딨다고!! 다시 이를 빠드득 갈았다. 희빈이는 두 살 아래 동생으로 나와는 정반대이다. 머리도 좋고, 엄마 아빠한테도 잘하고, 선생님한테도 사랑받는 우리 집의 막내둥이, 귀염둥이 내 동생인 것이다. 어렸을 적부터 공부도 잘해서, 무슨 경시대회에 나가서 상도 많이 타오고, 백일장 같은데 나가서 상도 받고, 효자상도 받고, 저축상도 받았다. 다만 몸이 좀 약해서, 운동을 못했을 뿐이다. 대신에 취미로 치는 피아노는 진짜 수준급이다. 그래서 어렸을 적에 나는 내 동생이 세상에서 제일 천재인 줄 알았다. 나와는 달리 성장 속도는 제 또래보다도 조금 떨어져서, 체격이 작은 편이다. 그래도 그렇지, 나쁜 새끼들. 우리 이쁜 희빈이를 때리다니! 불쌍한 녀석. 형이 대한이 꼬붕만 안됐어도, 맨날 옆에서 지켜줬을 텐데. 열심히 피자를 먹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학교 공부는 잘 돼?” “응. 재밌어.” “하하, 아유, 기특한 녀석!” “아퍼, 형.” 너무 이쁜 나머지, 안고서 부비부비를 해버렸다. 이런, 얼굴 쓰리겠다. 난 닭대가리였어. “괜찮아, 이제 안 아퍼.” “진짜? 우리 희빈이, 왜 이렇게 이쁘냐, 응?” “뭐하냐?” 희빈이를 데리고서 서로 다정하게 쓰다듬고 있는데, 재수 원단의 상식이가 불쑥 나타났다. “보면 모르냐? 피자 먹지. 그러는 넌 여기서 뭐하냐?” “대한이 집에 가다가 들렸어, 하나 사갈려고. 병우도 밖에 있다. 근데, 그 못생긴 꼬마는 누구냐?” “이 자식이!!! 누가 못생겼다는 거야!!! 우리 희빈이가 어디가 어때서!!!!” “못생겼잖아, 삐쩍 꼴아가지고. 어? 너, 얼굴 왜그래?” “우리 희빈이가 왜 못생겼어!!! 이렇게 이쁘기만 하구만!!! 사과해!!!” “대한이가 때렸냐?” “아, 씹. 얼굴 건드리지 마, 땡겨. 우리 희빈이한테 사과하라니깐!!!” “무슨 일이야? 어? 녹수다!” 그렇게 좁은 것은 아니었지만 넓지도 않는 패스트푸드 점에 2미터짜리 공룡, 병우가 들어서자 슬금슬금 주위에서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씨, 우리 희빈이도 있는데. 쪽팔리게 시리. “녹수야, 얼굴이 왜 그래? 대한이가 때렸어?” ……왜 다들 대한이가 때렸다고 생각하는 거지?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희빈이는 갑작스러운 거인들의 등장에 겁먹은 듯이 보였다. 난리 부르스를 추는 병우 덕에 먹던 피자는 깨끗이 포기하고, 2개 더 주문 해서 포장했다. 그대로 먹다가는 섬세한 희빈이 신경에, 채하고 말 것이다. 주문을 기다리는 동안, 내 옆에 꼭 붙어 앉아서 창백하게 굳어 있는 희빈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남은 피자를 먹던 병우가 그 때서야 희빈이를 발견하고 물었다. 오질라게 둔한 놈. “야, 너 누구야? 왜 녹수 옆에 그렇게 붙어 있어?” “혀…형, 동생인데요.” “니가 녹수 동생이라고?! 녹수야, 너 동생 있었어?!!” “집도 있고, 부모님도 있다.” “부모님 있는 건 알고 있었지. 재작년에 뵈었었잖아. 우와. 하나도 안닮았네? 어? 얘도 얼굴 다쳤네?” 병우는 피자 먹던 그 드러운 손을 들어서, 우리 이쁜 희빈이의 얼굴을 만지려고 했다. 희빈이는 그 손을 피해서 더더욱 내 옆구리로 파고 들었다. 물론, 나는 희빈이를 옆에 끼고, 그 손을 쳐냈다. “새끼, 무지 감싸네.” 뭐가 불만인지, 싹퉁머리 없이 음식점에 앉아 담배를 꼬나물고 있던 상식이가 잔뜩 비꼬았다. “혹시 둘이 같이 대한이한테 맞고서 쫓겨난 거야?” 풀죽은 병우가 물었다. 아유, 단순한 놈. “아냐, 병우야. 대한이가 나를 왜 때려. 내가 우리 이쁜 희빈이 삥뜯고 있던, 나쁜 놈들 혼내 주느라 그랬어.” 다정하게 웃으면서 중간과정 빼먹고 결론만 말했다. 병우는 곧바로 화색이 돌아서, ‘응, 그랬구나’ 하며 다시 피자를 들었다. 한 조각을 들고 머뭇거리더니, 희빈이 앞에 내밀었다. 희빈이는 그 손을 보다가, 앗, 하면서 그제야 ‘고맙습니다’ 하고 피자 조각을 받았다. 병우도 헤헤 웃으면서 피자를 들고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조금 안심을 했는지 희빈이도 살짝 미소짓고는 피자에 입을 대었다. 그리고는 서로 사이좋게 피자를 먹기 시작했다. 나는 생중계로 현대판 미녀와 야수를 보는 기분이었다. “근데 쟤는 왜, 니 코 앞에 와서 삥을 뜯겼다냐?” 삐딱선을 탄 상식이가 삐딱하게 물었다. 하지만 핵심적인 질문이었다. “우리 희빈이, 형아 찾아서 온 거야?” “그놈의 우리 희빈이, 우리 희빈이.” 저 새끼가 진짜! “응, 엄마가 언제 들어 올거냐고 그래서. 안들어온 지 일주일 넘었잖아. 너무 오래 안온다고, 또 무슨 일 있나 싶어서….” “너, 일주일 동안 대한이네서 잔 거야?!!” “왜 신경질이야. 방학도 했고, 요근래 주위 잠잠하니까 대한이 또 술마시러 다닌단 말이야. 그래서 그랬지.” “미친 새끼! 등신 새끼! 아우 씨발, 변태 새끼! 너는 등신 중에 상등신이다!!!” “그만해. 희빈이 앞에서 욕하지 마.” “지 동생 보기는 부끄럽냐? 알긴 아냐? 니 ‘이쁜 우리 희빈이’가 지 형이 상 등신 변태라는 거?” “상식아, 그만해. 너 왜 그래? 녹수 동생이 놀랐잖아.” 지가 성질내고 혼자 흥분해서 씩씩대던 상식이는, 죄 없는 희빈이를 쫙 소리 나게 째려보고, ‘아우, 씨발!’ 하고는 피자집 문을 박차고 나갔다. 참, 녀석. …………이 씨발 나쁜 새끼!!! 재수 원단 같으니라고!!! 우리 이쁜 희빈이 앞에서, 날 물먹여?!!! 저건 꼭 잘나가다가 삐딱선이야!!! …하는 마음이 안 든 것은 아니지만, 저 녀석이 표현은 저래도 날 걱정한다는 뜻이라는 것은 알고 있기에,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병우한테 피자 두 판을 모두 쥐어 주고, 나는 희빈이 손을 붙잡고 집으로 향했다. 헤어질 때 쯤엔 둘이 완전히 친해져서, 희빈이 입에서 ‘병우형’이란 말까지 나왔다. 원래 낯가림 심한 편인데… 확실히 병우는 애들 같이 순수한 면이 있어서- 랄까, 철이 없다랄까-, 희빈이 하고 말이 잘 통해 금방 친해졌다. 나로썬 따라 잡을 수 없는 소재인 ‘슬램 덩크’ 라던가, ‘반항하지 마’던가, ‘철권3’라던가… “형, 병우 형은 재미있어.” “그래? 그래도 같이 놀면 안돼.” “왜? 형 친구잖아.” “착하고 좋은 놈이지만…………우리 희빈이 한테, 나쁜 물 들이면 안돼니까. 그럼, 형아처럼 되는 거야.” 병우에게 순수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플레이보이에 깡패란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순수한 만큼 본능에 충실한 녀석이니까. 내 스스로도 내가 나쁜 놈 같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희빈이는 대한이만큼 소중하다. 희빈이 손 붙잡고 오랜만에 간 집에서 어마마마께 애교를 잔뜩 부리는데, 생각지도 않던 물건을 얻었다. 그것은 바로 핸드폰. 물론 대한이나 상식이, 하다못해 병우마저 갖고 있던 그 물건을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와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손아귀에 떡하니 떨어진 것이라 놀랐을 뿐. 물건에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흔한 씨디피도 없는 내게 핸드폰이라니… 별로 달갑지 않았다. 어차피 내 친구라곤 대한이, 병우, 상식이 뿐인데, 맨날 같이 붙어 있으니 쓸 일도 없었다. “엄마, 됐어. 소자는 필요 없으니까, 우리 예쁜 희빈이나 주세용~ ” “넌 필요 없지만, 우리가 필요해. 너도 그걸로 떨어져있을 때, 대한이한테 걸면 되잖아. 너보고 요금 내라는 것도 아니고, 충전시켜서 가지고만 다녀.” “귀찮아서 싫은데.” “칵-!!! 너 그럼 대한이고 뭐고, 다 못 만나!!! 집에 가둬 둔다!!!!” “칫, 네네. 알겠사옵니다.”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크기의 그 물건이 신기해서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엄마 말대로 대한이에게 걸었다. 단축키는 당연히 대한이가 0번이다. 어, 그러고 보니 대한이에게 전화를 해 본 일이 없다. 거짓말 아니라, 진짜 5년 동안 한 번도 걸어 본 역사가 없다. 헤~. 어쩐지 즐거워 졌다. 심장이 콩탁콩탁 뛰는 가운데 신호음이 갔다. 한참이 지나도 안 받길래 끊으려고 하는데, 귓가에 매력적인 중저음의 목소리가 울렸다. < 누구? > 우와, 멋있다! 바로 내 옆에서 말하는 것 같아! 왜 여자들이 그렇게 대한이 전화번호를 알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 누구야? > “나양~ 녹수!” < ……… 무슨 일이야? > “히히히 ” 딸깍, 뚜- 뚜- 뚜- “어? 대한아? 대한아?” 화났나? 근데 목소리 들으니까 더 보고 싶다. 침대에서 뒹굴다가 벌떡 일어났다. 11시. 차가 끊겼다. 젠장. 바이크라도 사야겠다. 아, 운전할 줄 모르는 구나. < 여보세요? > “녹수다.” < ……. 뭐야. > “핸드폰 샀어. 아직도 화났냐?” < 씨발 새끼.> “나 집에 들어왔어. 너 대한이네 안가서 몰랐지?” < ……. 끊어. > “어, 번호 가르쳐줄게.” < 병신아, 요즘엔 액정에 다 뜨잖아! > “아이~ 왜 그러실까, 한사장님 께서.” 뚜- 뚜- 뚜- 뚜- 아직도 삐졌군. 마지막 타자. 다음은 너다, 유병우. “병우야, 나 녹수.” < 어? 녹수야, 웬일이야? 전화를 다하고? > “역시 너 밖에 없어, 병우야.” < 하하, 뭘. 동생은 잘 들어갔어? 다음에 같이 바에 가려고 하는데… > 찰칵. 도대체가 도와주는 놈이 없군. 아침 일찍 대한이네 들려서 아침상 차려주고 핸드폰 자랑할려고 했지만, 전날 둘이 술을 마셨는지, 대한이와 병우 둘 다 정신을 못차렸다. 쯧. 혀를 차고는 그 파워로 북어를 때려서 시원한 북어국을 끓여 놓고, 어젯밤 결심한 것을 하러 나갔다. 오토바이 교본 책을 사서 뒤적이며 걸었다. 병우랑 상식이, 대한이 까지 몽땅 다 바이크 쪽으론 관심이 없어 했기에, 탈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주 이동수단은 택시였으니, 별 불편도 없긴 했지만. 도대체 어디서 그런 돈이 나는 것인지…. 뭐, 상납금 아니면 클럽 누님들이 주는 용돈이겠지만. 어라? 깡패 아니면 호스트인가? 하아. 역시 안돼. 나중에 운전 면허도 따 둬야 겠다. 그럼 훨씬 편할 텐데. 밤에 술취한 대한이 뒷좌석에 눕혀놓고, 나는 운전하고. 히히. 딱이다 딱. 지금 배우면 안되나? 바이크 상가에서 가격대를 알아보고, 모델 들을 골라봤다. 생각보다 가격이 엄청나게 비쌌다. 스쿠터로 목표 수정할까 하다가 중고 쪽으로 기대를 걸어봤다. 안되면 겨울 한탕 더 뛰어서라도 마련해야지. 중고라고 대한이가 타기 싫어하려나? 돌아오는 길에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봤다. 제일 만만하고 기술 없이 할 수 있는 것이 서빙이라, 커피숍이랑 호프집등을 알아봤다. 여름방학이라 그런지 알바 대기자 수가 꽤 많았다. 게다가 나는 얼굴도 깨진 상태이니… 좀 더 기다려 봐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나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주인들은 쉽게 고용을 결정했다. 힘쓰는 일을 할 남자가 필요 했던 것이다. 보수가 서빙만 하는 쪽 보다는 훨씬 쌨다. 지원자가 많다지만 대부분 여자들 뿐이라서, 쉽게 고용이 된 것이었다. 물론 구인대상은 대학생이나 성인을 원한 거였고, 나는 당연히 위장취업했다. (^_^)V 이만하면 나도 꽤 건실한 청소년이구나 라고 중얼거리며, 점심때 일어난 대한이들에게 해장국을 대령했다. “내일 여행 간다.” “어디로?” “클럽에서 유럽으로 뜨자고. 몸만 오래.” “흐응. 언제 돌아오는데?” “8월 말.” 길다. “이번엔 좀 기네? 한, 한 달은 못보겠다. 병우랑 상식이도 가는 거야?” “어? 나는 이번에 안 가, 아빠가 발작 일으켜서. 연합도 돌봐야 되고. 상식이랑 대한이만 가.” “아버지 또 쓰러지셨어? 내가 가 있어 줄까?” “하하, 아니. 어떻게 매 번 그러냐. 됐어, 고마워. 녹수야.” 웃어 보이지만, 힘이 없어 보이는 병우의 머리를 쓸어 올려 주었다. 병우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였는데, 간신히 치료하고 나서 얼마 안가 간에 염증이 생기셨다. 수술하고도 몇 번 발작을 일으키신 적이 있어서, 그 때 며칠씩 가서 간병했었다. 아저씨는 아주 걸걸하고, 호탕하신 성격이다. 병우 만큼 크진 않지만, 연세에 비해 풍체가 있으셨다. 과일상을 하고 계시는데, 예전에는 여행가였다고 하신다. 이곳 저곳 여행 다닌 얘기를 해주시는 재미있는 분이시다. 클럽의 단골 초대 손님이 된 병우나 상식이, 대한이는 매년 썸머와 윈터 휴가제에도 같이 가게 됐다. 그래서 방학때면 외국으로 떠날 수 있는 것이었다. 공부는 못하지만, 머리 좋은 대한이는 덕분에 영어에 숙달됐다. 불어나 독어도 회화 수준은 될 정도였다. “여권이랑 비자신청은 했어?” “응 ” “잘갔다 와.” “그래.” 밥 상을 치우고, 참외를 깎았다. 실한 참외가 통통하게 살이 올라서 제법 먹음직 스러웠다. 길게 반 잘라서 반원 모양으로 썰고, 한 쪽씩 집어서 대한이랑 병우에게 건넸다. 대한이는 마루에 걸터 앉아 참외를 먹었다. 시선은 마당 한 구석의 감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한이가 최근에 웃는 것을 본 게 언제인지 생각이 안났다. 하긴 계속 싸움의 연속이었으니, 언제나 싱글거리던 병우까지도 삭막한 표정을 짓고 다녔었다. 문득 대한이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뭐 하는 거야?” “헤헤. 웃어보라구. 본 지 하도 오래돼서 까먹었어. 이제 또 오랫동안 못 볼 텐데.” 대한이 입가를 양쪽 검지 손가락으로 죽 늘어뜨렸다. 한동안 인상 쓰던 대한이가 결국은 쿡, 하고 웃었다. 아아, 기쁘다! “니들…. 지금 뭐하냐?” 모처럼 만의 해피 무드를 한 방에 날리는 것은 음침하게 물어보며 들어오던 상식이었다. “어, 상식아. 이제 와?” 병우가 쪼르르 달려가서 상식이가 들고 온 엄청 굵은 수박 한 통을 받아 왔다. 마당의 수도에 찬 물을 받아서 담궈 놓고, 부엌의 그늘에 가져다 놨다. 상식이는 병우 옆에 앉아 마루에 깎아 놓은 참외를 들어 먹고 있었다. “여행 갔다가 선물 꼭 사와라. 대한이도 그 새로 산 비디오 카메라로 많이 찍어주고.” 상식이는 이제 카메라에서 비디오 캠코더 쪽으로 영역을 넓혔다. 내가 보기에도 그 편이 필름 현상 값이 덜 아깝지 않는 가 싶다. 그러고보니 형편 없는 상식이의 사진들이 생각났다. 중학교 2학년 때 여행갔던 정동진에서 찍은 무려 6 통의 필름 중, 흔들리지 않거나 촛점이 안 맞거나 플래쉬가 터지지 않았거나 하는 사진의 예외는 10장 내외 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상식이가 손을 대지 않은 낯선 이방인들의 작품이 거의 단체 사진인 덕에, 제대로 된 사진 대부분이 단체 사진이란 것이랄까. 정말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상식이는 자신의 귀엽고 어설픈 면면을 보여 줬었다. “선물 같은 소리 하시네. 미쳤냐? 내가 너같은 변태의 선물까지 챙기게? 그럴 돈 있으면 테잎이라도 하나 더 사겠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여행 갔다 들어 올 때면 선물 사들고 오는 놈은 상식이 뿐이었다. “밥은 먹었어? 챙겨 줄까, 해장국 있는데?” 고개도 돌리지 않고, 깎아 둔 참외만 우걱우걱 입에 쳐 넣는다. 배고프면 그렇다고 할 것이지. 남은 밥이랑 해장국을 담아서 내고, 김치 하나 썰어 줬다. 퉁명스럽게 돌아 앉아서 퍼먹는게, 역시 상식이는 귀여운 놈이다. 그 앞에서 키득거리며 보고 있으려니 밥 풀을 떼서 던진다. 저녀석은 고1 맞다. “갑자기 웬 핸드폰이야? 여자라도 생긴거야?” 근데 왜 입만 떼면 저런 것일까. “엄마가 방울 달아 준거야. 부를 때 제깍 오라고. 그리고 대한이랑 떨어져 있을 때 이걸로 전화하래.” “흥, 얼마나 집에 안들어 가면. 아예 집에서 내놨구나?” “보여줄까?” “됐어, 어린애냐?” “이거봐라, 작지?” 손바닥에 쏙들어오는 예쁜 하얀색 핸드폰을 들어서 코 앞에서 흔들었다. 상식이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더니, 의기양양하게 자기 것을 꺼냈다. “내께 더 좋은 거야.” 봐라, 얼마나 귀여운가. 이 유치한 자식아, 대한이 잘 부탁한다. 다음날 대한이와 상식이가 출국하고, 병우는 병우대로 병원하고 아지트를 들락거리느라 바뻤다. 나는 아르바이트에 목숨 걸고, 점심때는 커피숍으로 저녁때는 호프집으로 새벽에는 편의점으로 출근했다. 편의점 같은 경우는 전날 저녁에 시장보고 지나는 길에 발견했는데, 마침 새벽 타임에 남자 종업원을 구하고 있었다. 거기까지 해서 대충 한 달 계산 해보니, 그럭저럭 빠듯하게 바이크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가지 더 구해야 될까나. 그나저나 바이크가 있어야 실습을 해 볼 텐데 말이다. 이론 책은 열심히 봤지만, 실물을 못보고 하자니 머릿속에 들어 오지도 않았다. 커피숍이나 호프집에서는 주로 물품이나 병을 날랐는데, 무지하게 힘들었다. 게다가 취직한 곳이 매우 잘나가는 가게여서, 그 물량도 장난이 아닌 것이다. 커피숍은 점심때, 호프집은 저녁때 피크를 맞아서, 사람과 음식과 병들에게 깔려서 마치 전신을 한 바탕 두둘겨 맞은 기분이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새벽타임 편의점일이 편했다. 앉아서 쉬고 있다가, 가끔 오는 손님들이 요구하는 몇가지만 제대로 하면 됐으니까. 새벽타임이라 그런지, 재고 정리도 그리 많이 안해도 되서 정말 좋았다. 편의점에서 아침 쯤에 퇴근을 하고 집으로 기어들어가서 점심때까지 잤다. 그러면서 든 생각은, ‘ 어쩌면 대한이랑 같은 시간대에 깨 있을 지도. 헤헤헤.’ 였다. 난 정말 이대한 표 미져리로 태어났나보다. 찰칵.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오늘 따라 유난히 힘들었다. 커피숍에선 오전 물량이 착오로 오후에 배달 되서 분류하고 쟁겨놓고 하다보니, 커피숍에서 새로 만든 메뉴의 재료들 까지 도착해 근 5시간을 짐만 날랐다. 호프집으로 오는 도중에, 차가 막혀서 저녁도 못 먹고서 들어 갔는데, 맙소사. 이번에는 꽉꽉 찬 맥주 박스가 트럭 가득으로 하나 와 있었다. 그나마 다른 알바생이라도 있었으면 이렇게 경악이나 안하지. 저 잘나가는 호프집의 악덕 주인은 남자 종업원은 단 한 명, 즉 나 하나만 뽑아 놓고, 나머지는 늘씬하고 쌔끈한 아가씨들로 뽑았다. 그렇다고 도와 줄 것도 아니면서!!! 내 어디가 힘맨으로 보인단 말인가!!! 내게 병우나 할 법한 막노동을 시키다니…. 이래서 시급이 쎈 거였어. (ㅠ_ㅠ) 밥 한 숟가락 못 먹고서, 근 8시간을 막노동 했더니 손가락 마디에도 힘이 안 들어 갔다. 헥헥 거리며 더이상 시키면, 뭐라 말하든 가만 안있겠어, 란 애절한 눈 빛으로 악덕 업주를 바라봤다. 그래도 새끼 손톱 만큼의 양심은 있었는지, 피크 타임 때 빼고 30분 동안 쉬어도 좋다는 간사스러운 아량을 보였다. 이리 휘청, 저리 휘청 하면서 흔들 흔들 가게 뒤의 쓰레기통 들 사이에서 컵라면을 하나 뜯어먹고서, 너무 감격에 겨워 울 뻔 했다. 금새 동이난 컵라면이 너무 아쉬워, 핥아먹고 또 핥아먹어서 결국에는 원 제조 상태의 용기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순백의 컵라면 통을 바닥에 내려놓고 미련스럽게 바라보다가, 담배 한 개피를 꺼내 입에 물었다. 가게 뒷 쪽 골목 사이로, 예쁘고 멋지게 차려 입은 신사 숙녀들이 지그제그로 오가는 것이 보였다. 가게 맞은편의 새파란 광고판에 빛이 번져서, 옆으로 누워서 본 사람들의 실루엣이 어딘지 멋스러웠다. 그대로 옆의 전신주로 시선을 옮겨 복잡하게 얽힌 전선들을 봤다. 굵고 가는 선들이 하나의 전신주로 모여들어 보기 흉하게 튀어 나왔다. 마치 전신주 안에 더이상 들어갈 곳이 없는데도, 집요하게 그곳 만으로 향하다 결국은 튕겨 나온 듯한 그 모습이, 어쩐지 대한이와 나의 관계 같아서 기분이 나빠졌다. 은 백색의 지포라이터를 손에 쥐고 주황 빛 불빛에 이리 저리 돌려가며 비추어 보았다. 그 것을 보고 있자니, 2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이 생각이 났다. - 초등학교 때부터 스토커 처럼 징하게 붙어오는 새끼가 있는데 말이야… - 나는 그 새끼가 징그러워서 미치겠어 지금도…. 그렇게 생각할까? 그는… 쓴 웃음과 함께 폐 속 깊이 머금었던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상식이 말이 맞다. - 병.신. 슬슬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데, 어디선가 굉음이 들려왔다. 바이크의 폭주음인가? 이 근방에도 폭주족 같은 것이 있었구나. 가게 뒷 문을 열고 들어서니, 우루르 하며 10 여명의 덩치 큰 남자 아이들이 들어 왔다. 척보기에도 10 대 양아치인 이들이 아까 폭주음의 주범일 것이다. 주방 뒤로 돌아가서 남은 병들을 정리하는데, ‘쾅’ 소리와 함께 또다른 양아치 무리가 들어왔다. 가게 안 분위기가 갑자기 싸늘해 졌다. 좁은 홉프집의 통로에서 무리들은 좌우로 퍼져서 마주 보고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꼭 ‘황야의 무법자’ 같은 분위기랄까, 아무튼 그런 배경음이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내심 웃겨서 혼자 큭큭 거리는데, 주인이 찾았다. 혹시라도 싸움나면 말려주기를 바란다는 당부의 말이었지만, 주인 아저씨가 보기에도 -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도, 내가 썩 믿음직 스럽게 보이진 않았다. 막말로 그 누가 날뛰는 10 대 양아치들의 패싸움을 홀연단신으로 말릴 수 있단 말인가. 난 대한이가 아니었고, 대한이라 하더라도 혼자서 20명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냥 딱 까놓고, 가게 문 빨리 닫아 버리는 게 그나마 피해를 줄이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낯이 익은 인물 하나가, 그 폭풍전 고요의 한 복판에 떡하니 서 있었다. “송우진.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여기가 어디라고 와. 니 눈엔 이 바닥도, 니 집 뒷 동산으로 보이냐?” “네가 송명고 꼴통 윤길상이냐?” “그렇다, 이 씹새야. 며칠 전엔 우리 애들이 신세 잘~ 졌다. 아주 골고루 다져놨드만. 좇같은 새끼.” …. 그건 내 얘기인 듯 하군. “네가 우리 똘빡 송유진 잡아 오라고 시켰냐?” “그려! 니가 하도 뭣 모르고 날뛰어서 그렸다! JS 황태자면 다냐? 부자면 부자답게 끼리끼리 놀 것이지, 왜 거지같이 남의 밥 그릇을 탐내냐?!!” “쳐!” 그 한마디를 시작으로 나의 일터가 개박살 나기 시작했다. 현란한 기술로 너무나도 빠르고 깔끔하게 길상이란 놈을 때려잡은 송우진은, 쓰러진 놈을 발로 굴려서 바의 구석아래에 밀어넣고 남은 싸움을 구경했다. 그러다 주인 아저씨의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고, 지갑에서 수표를 몇 장 턱턱 꺼내더니 그 손에 쥐어 주었다. 순식간에 죽을 상에서 하회탈 웃음으로 변모하는 아저씨의 얼굴을 보며, 과연 돈이란 위대하구나 싶었다. 나야 아르바이트에만 지장 없다면, 어떻게 되도 상관 없었기에 아예 자리 잡고서 싸움 구경을 했다. “당신!!” 싸움이 끝나갈 무렵 일어나서 문 쪽으로 향하던 녀석과 우연히 눈이 마주치자, 그가 외쳤다. “당신, 며칠전 그녀석이지?!! 유진이 구해 준!!!” 성큼 성큼 다가와서, 다짜고짜 삿대질을 해대는 송우진은 여전히 무례했다. “당신 아냐?! 그, 신촌에서 유진이 구해준 그 놈!!’그쪽 분이 부탁했으면, 어떤 남자라도 도와 줬을 거에요’ , 그 새끼 맞지?!!!” 잔뜩 흥분해서 씨근덕 거리며 소리를 질러 댔다. 아씨, 쪽팔리게. 귀찮아서 대꾸도 안하고 모르는 척 했다. “야! 너 왜 대답 안해?! 너, 그 새끼 맞지?? 아후!! 드디어 찾았네. 내가 그동안 너때문에 유진이 쨍알 거리는 것 듣느라고, 잠을 못 잤다, 잠을!!! 너, 오늘 딱 걸렸어!!!” 씩씩 대며 걸어오는 폼이 잘못하면 한 대 맞을 것 같았다. 미간을 모으며 갈등했다. 패고 튈까, 맞고 버틸까? 아르바이트 비도 못받았는데 이대로 튀면 영원히 못 받을 수도 있겠지? 그래도 그냥 맞자니, 저 새끼 하나면 상관 없지만 뒤에 패거리들이 문제다. 1 대 10 이면, 벅차군. 무기도 없고… 따위를 계산 해봤다. “무서워서 입이 붙었냐? 왜 대답도… 큭!!!!” 옆에 있던 병으로 일단 머리를 갈긴 뒤에, 팔을 꺾어서 뒤로 잡고, 무릎을 꿇린 뒤, 길죽한 모가지에 깨진 병을 최대한 가까이 갔다 댔다. 음, 아주 쪼끔 피 볼 정도 까지만. 웅성거리던 가게가 쥐죽은 듯이 조용해 졌다. “노… 녹수야. 그…그러지 마라!! 그럴 필요 없다! 배상 해준데! 아니, 배상 해줬어!” 하고 더듬거리는 가게 아저씨의 말은 귓등으로 흘려버리고, 긴장한 패거리에게서 등 뒤를 확보 했다. 흠. 이제 대화가 좀 되겠군. “왜 그렇게 애타게 날 찾았는데? 버르장 머리 없는 양반.” 목에서 아주 약간 병 조각을 떼어 줬다. 말은 해야 하니까. “유진이가 당신 그냥 보냈다고 맨날 징징 짜잖아…. 요. 밥도 안먹고, 찾아 올 때까진 굶을 거래…요. 물도 안마시구…” “근데 날 그렇게 살벌하게 몰아 세우냐? 난 또 내가 무슨 죽을 죄라도 누명쓴 줄 알았잖아. 사람 간 떨리게 시리.” “유진이 징징 짜는 소리에 돌아 버릴 뻔 했으니까 그랬지!…요. 일부러 그런건 아니야… 요.” “흠. 그럼 이거 풀어주면…… 나를…. ~ 때릴거양?” ………………… 휘잉. 나름대로 센스있다고 생각했는데, 닭살이 우두둑 돋아 오른 녀석의 팔을 보고 있자니 미안해졌다. 무안하기도 했다. “대답해 봐.” “안 때릴게요.” “진짜?” “네.” “쟤네들도? 저기 무서운 형들도?” “네.” “정말? 진짜? 정말?” “그렇다니까!!!…악…요.” “잠깐 기다려봐. 아저씨!! 저, 아르바이트 짤르지 마세요?” “그… 그래.” “O.K. 교섭 성립!” 방긋 웃고는 녀석을 앞으로 밀면서 일어섰다. 엎어져서 목에 쪼끔 피를 흘리는 녀석은, 나를 아주 잡아먹을 듯이 째려봤다. “안 때린다며.” 그리고 그 얼굴을 향해, 방실 방실 웃었다. 왜, 옛 말에도 있지 않은가.’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 다음날 오전, 아직 눈꼽도 안떨어지게 피곤했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나갔다. 바이크를 대기해 놓고 기다리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자니, 대한이 생각이 나서 나도 모르게 꼭 끌어 안았다. “뭐, 뭐야?!!!” “흠, 역시 이쪽이 더 가늘어. 우리 대한이는 더 듬직하면서도 단단하고 야들야들하고 섹시한데.” “이… 이… 벼… 변태…!!” “어서 가자. 이 몸을 님이 기다리신다잖니.” 생전 처음 타보는 바이크는 생각보다도 훨씬 재밌었다. 일부러인지 평소보다도 무리하게 달리는 녀석이 얄미워서 등을 꼬옥 껴안아 줬다. 빠른 스피드 감에 주변이 다 이그러졌다. 바람을 타는 기분이랄까. 점점 더 바이크를 배우는 것에 기대가 됐다. “당신, 정체가 뭐야?!!” “장녹수.” “뭐하는 인간이냐구!!!” “학생.” “어느 학교? 신촌 소재 대학 학적부란 학적부는 다 뒤져봤는데, 당신 없었어!!” “그걸 어떻게 다 찾아?” “돈으로!” “와! 니네 집 진짜 부잔가 보다.” “말 돌리지마!!! 당신, 짜가 대학생이지!!! 사실은 재수생이나 백수지?!!!” “나 학생 맞아. 고등학생.” 끼이이이익-!! 사고 날 뻔 했잖아. 속도를 잇바이 내다가, 그렇게 세우면 어쩌냐구. 에이씨, 이녀석 한테는 배우지 말까보다. 난 절대 안전운전 지향자란 말이다. “………….뭐라고?” 딴 생각을 하는데 하도 음침하게 물어봐서, 상큼하게 대답해 줬다. 막말로, 난 상큼한 나이 아닌가! “고등학교 1학년 3반 45번 장녹수~ ” “이… 이… 사기꾼 새끼!!! 나보다도 어리잖아!!! 아씹!!! 싸가지 없는 새끼!!!!” 나, 내 입으로 대학생이라고 사기치고 다닌 적은 맹세 하건데 알바 구할 때 빼곤 한 번도 없었다. 쉴 새 없이 날 욕하는 것을 보니, 상식이랑 붙여놓고 스트레오로 들으면 모르는 사람은 나를 다시 없을 후레자식으로 보겠다. “우진아.” “형님이라고 햇!” “뭘 새삼스럽게 그러냐? 자기도 원래 반토막 말 밖에 안하면서. 그날 부로 우린 야자 튼 거야.” “아악~!! 송. 유. 진!!! 도대체 왜 이런 개 싸이코 자식을!!! 아아아악!! Shit!! Damn it!!!!” “진정해, 우진아. 그렇게 혈압 올리면 모가지에서 또 피튄다.” “Fuck!! Son of Bitch!!! 아아아악!! 도대체, 왜!! 이런 변태, 개 싸이코를 !!!” “넌 참 반응이 특이하구나. 새로운 욕의 장을 열고 있어. 부자라서 그런가?” “악~!! 송유진!! 도대체 왜!!” 놀리는 재미가 있는 녀석이다. 두 번째로 방문하는 그들의 저택은 저 번보다는 심리적으로 안정감 있게 살펴서 그런지, 건물 자체의 품격과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길다랗게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정원수들도 마음에 들고, 지난 번엔 못 본 테라스 가든 옆의 조그만 연못도 아담하니 예뻤다. 꼭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부자집 같았다. 나나, 대한이, 병우가 이런 집에서 자랐다면 오늘날 우리가 요모양이진 않았겠지. …. 아, 상식이는 요모양이구나. 하하, 어쨌든 내가 이런집 아가씨의 상사병 대상이라니. 그 아가씨도 참. 취향이 별나다. 나름대로 그 날, 공주와 기사의 시츄에이션에서 그녀는 공주역에 충분히 어울렸지만, 솔직히 내가 기사역을 하기에는 좀 많이 떨어지지 않나? 그런 상황에서 한 눈에 반하다는 게 가능한 것인가…. 가능하구나. 나도 대한이한테 첫 눈에 반했었으니까. 그 어린 나이에도. 그래, 처음 봤을 때 부터 언제나 동경하던 분위기를 가진 여자였다. 깨끗하고, 조용하고, 정숙하고, 수줍어 하는 난초같은 이미지에, 그린 것 같은 귀여운 얼굴에 날씬한 몸이 천사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볕 더위로 어질한 머리에, 천사가 내려왔구나 싶었었다. 그 날 거리에 가득 차있던 사람들 중에서 나를 골라 준 그녀의 하얀 손이, 겁에 질려 내게 매달렸다. 나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마주 친, 천연의 갈색 눈동자에 빨려 들 것 같았다. 다정한 햇빛을 머금은 듯한 옅은 브라운의 동공에 지친 내 모습이 비추어진 지며, 나는 그 안에서 안주하고 싶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날 이래로, 생각도 해 본 적 없었으면서. 그런데도 그녀를 떠올리는 순간- 언제나 내가 깊게 빠져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는 검은 늪에서, 구원받은 느낌이었다. 나를 받아 줄 것 같은 대지. 더이상 밑도 끝도 없는 발버둥을 치지 않아도 좋을, 어두운 진창에 얽혀서 숨쉬는 것 조차 힘들지 않아도 좋을… 나도. 나같은 놈이라도. 땅에 디딜 수 있는 것일까? 걸음이 멈추었다. 나는 경악했다. 지금 나에게 하늘에서 내려준 동아줄이 놓여 진 것인가? 있을 것이라 믿지 않았던, 구원의! 더이상 뻗어도 닿지 않을 섬을 향해 손을 내밀지 않아도 된다고! 이제는 반사되는 마음에 꺾이고, 다치지 않아도 좋다고! 나를 받아 주겠다고, 다정하게 안주시켜 주겠다고! 영원히 갈 수 없는 땅 대신에 새로운 대지를 내 옆에 내려 준 것인가! 아아… 나 같은 놈이라도! 나같은 병신에 미친 변태 새끼라도! 두근. 심장이 울기 시작했다. 그의 앞에서조차 오랫동안 울리지 않던, 굳어있던 나의 심장이 아직 살아있음을 알렸다. “이 방이야. 너 온다는 소리 안했으니까, 보면은 좋아서 벌떡 일어날껄?” 단아한 회색 방문 앞에 멈추어 섰다. “고마워.” “뭐가?” 나는 어쩌면 내 심장에 새로운 주인을 주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런 예감이 들고 있었다. 현재 주인의 부재한 틈을 타서, 그동안 밑에 억눌린채로 쌓이고 고였던 그 무엇인가가 일제히 심장을 향해 노크하기 시작했다.’ 너의 새로운 주인을 영접하라-!’ 심호흡을 하고 문고리를 열였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아니, 어쩐지 초췌해진 모습에서 느껴지는 그 가냘픔이 청초함을 더해 주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가 안쓰러우면서도 남자의 말이 사실이었다는 것에 감사했다. “또 만났네요.” 새하얀 레이스 침대에 누워 있던 그녀는 그 천연의 갈색 눈을 커다랗게 뜨고서 나를 쳐다봤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몇 번인가 눈을 깜박이다가, 어느샌가 그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아… 아…. 어… 어떻게…” “우진이가 저를 찾아 왔어요.” “우진이가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부드러운 표정을 이끌어 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눈에 얽힌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커다랗고 맑은, 새로 찾은 나의 안식처를 바라 보았다. 거울을 만들어 내듯이 내 모습을 비추고 있는. 그녀 또한 어느새 눈물을 멈춘 채로 나의 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눈동자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았다. “야, 됐지? 쟤 찾아 줬으니까, 이제 그만 지랄해라? 응?” 이 낭만적인 순간을 믿을 수 없을 만큼의 무신경으로 갈라버린, 악독한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그래. 고마워, 우진아.” 쯧쯧, 내 공주님은 아량이 넓구나. 하지만 난 그렇지 않거든. 나갈 생각은 않고, 오히려 내 옆에 털썩하니 주저 앉아버린 그 녀석을 멀뚱히 바라봐 주었다. “우진아, 붕대는 괜찮아?” “응?” 내 말에 문득 우진이 쪽으로 시선을 돌린 그녀는 의아함을 가득 담아서 우진의 목에 감긴 붕대를 바라봤다. “그거, 웬 붕대니?” “쳇. 네 이상형이 벌여 놓은 짓이다. 이 꼬라지가.” “우… 우진이가 협.박.하니까 너무 무서워서 그랬지…” 그녀를 향해 가련하게 더듬었다. 사실 맞을까봐 무서웠어. 맞으면 아프잖아? “어?” “네? 협박이라니요? 우진이가 협박을 했나요?” 놀란 그녀가 창백해진 채 외쳤다. 미안. “네. 어찌나 무서웠는지. 열 명도 넘는 사람들을 데리고 제가 일하는 가게에 와서…… 가게를… 다 부수고, 협박을 하는데…. 다행히 사장님께서 넓은 아량으로 저를 해고시키시진 않으셨어요. 휴. 이번에 짤렸으면 정말, 정말……정.말. 곤란했을 텐데 말이죠.” “어?!” 나는 사실 그대로 말한 거라고. 뭐, 정황 설명이 약간 빠지긴 했지만. “송.우.진!!” “어?!!!” 우진은 제법 매섭게 쏘아보는 유진 씨와 샐쭉한 표정의 나를 기가막히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분개하기 시작했다. “나, 난, 억울해!! 야, 송유진, 저 새끼가 어떤 새낀지 알아?!! 이 모가지 붕대, 저 새끼가 한거야! 병을 깨서 내 목에다가!!” “글쎄, 유진 씨. 제가 조금 주먹을 썼습니다만, 안 그랬으면 전 그만 우진이 손에 성치 못 했을 겁니다. 세상에 갑자기 병을 깨더니 제게 들이대는 거에요. 너무 무서운 나머지 몸부림을 치다가 그만, 우진 군의 목에 파편이 약.간. 스쳤습니다. 동생 분이 너무 과격하시더군요. “ “뭐…뭐라고?!!” 흥분으로 파닥거리는 우진을 무시한 채, 유진 씨는 안쓰럽고 미안한 표정으로 나를 살폈다. “정말 죄송해요. 버릇 없이 자라서. 많이 다치시진 않으셨어요?” “네, 다행히도.” “뭐야?!! 야, 송유진! 너 지금 내 말은 안 믿고, 저 변태 말만 믿는 거야?!! 저런 개 싸이코 사기꾼 새끼 말을?!! 앗! 참, 그렇지!! 송유진, 저 새끼, 대학생 아니라 고딩이야!! 그것도 우리보다 어려!!! 1학년이래!!!! “ 폭로했다고 뿌듯해하는 우진을 속으로 비웃으며, 놀란 유진 씨의 얼굴을 이쪽으로 향하게 하고 눈을 맞췄다. “제 이름은 장녹수. 현재 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입니다. 하지만 결코 유진 씨를 속이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전, 제가 대학생이라고 속인 적, 없어요.” 유진 씨는 내가 고등학생이란 말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 얼굴을 붉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브이. (^_^)V “저, 저, 여우같은 새끼!!! 아악!!! 송유진! 넌 속고 있는 거야!! 아악, 원조 제비 같은 새끼!!!” 우진은 몹시 격분하면서 단단해 보이는 주먹으로, 거칠게 내 멱살을 틀어 쥐었다. “송우진!!! 지금 뭐하는 거야?!! 당장 그 손 놓지 못 해?!! 나쁜놈!!!” “나쁜 놈?! 내가 나쁜 놈이라고?! 이 새끼가 아니라 내가 나쁜놈이라고?!!!” 거의 반 광란 상태로 내 멱살을 흔들며서 악을 쓰던 그가, 갑자기 뚝 하고 멈췄다. 흔들리면서, ‘ 유진 씨 옆에 있는 꽃 병으로 이녀석을 후려치면 안되겠지, 한 대 맞으면 그때 시작할까?’ 따위를 생각 하던 나는 의아함에 우진을 봤다. 우진은 나를 향해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장녹수. 너, 그거 아냐?” “뭘?” 교활하게 웃으며 멱살을 풀은 손으로 내손을 덥썩 잡았다. 그리고는 냅다 유진 씨의 잠옷 바지 사이로 내 손을 꽂았다. “!!!!!!!” “꺄아아아악!!!” “크하하하하핫!!!” 유진 씨가 비명을 지르고, 우진이 승리의 함성을 내지르는 중에도, 유진 씨의 ‘페.니.스’ 를 만져 버린 나의 머릿속은 돌처럼 굳어져 움직이질 않았다. 찰 칵. 후 우. 아직까지 훌쩍이는 유진 씨의 옆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진짜, 이래서 담배가 좋아지질 않는다. 씁쓸할 때만 피우게 되니 말이다. 우진의 폭로 이후 정신이 든 후에 제일 먼저 한 일은 담배를 꺼내서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는 단순 동작이었다. 꽤 익숙하게 입에 가서 매달린 담배 한 가치는, 사실 하나도 익숙해 지지 않는 물건 중에 하나다. 언제나 주머니 한 켠에 지포라이터 하나와 담배 한 갑을 넣고 다니긴 하지만, 그것은 습관과도 같은 것이다. 실제로 한 갑 가지고서 한 달 넘게 가지고 다닌적이 있으니까. 남들과 같은 의미의 기호식품은 아닌 것이다. 조금 감당하기 벅찰 정신적 공황상태에 이르면 하게 되는, 무의식적인 항복 선언이랄까. 내 쪽과는 반대편으로 등을 돌린채, 끌어 안은 무릎 사이에 고개를 박고 끊임 없이 흐느끼고 있는 유진 씨를 바라봤다. 저렇게 울다가는 탈수증이라도 걸릴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30분은 넘게 저러고 있었던 것 같으니까. 우진이란 폭로맨은 아까 그렇게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깔깔대고 웃다가, 핫, 하고 정신을 차리고는 엄청나게 버벅 대면서 문을 닫고 나갔다.’ 미… 미안하다, 유진아.’ 라고 들릴 듯 말 듯 하게 덧붙이면서. 담배 연기에 한 숨을 묻어 내쉬고는, 물고 있던 담배를 화병에 던져 넣다. 그리고 침대 위로 올라가서 유진 씨 옆에 털썩 누웠다. 움찔 대는 유진 씨의 옆에 누워서, 다리 사이로 살짝 보이는 붉어진 얼굴을 훔쳐 봤다. 계속 그렇게 보고 있으려니 웃겼다. 나는 어차피 변태다. 유진 씨가 남자라는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대한이도 남자였는데. 이 사태에 놀랐기보다는 당혹해 했던 내 자신이 흥미로웠다. 나는 유진 씨를 상대로 뭔가, 육체적으로 깊은 단계까지 생각했던 것인가? 여자는커녕 남자는 물론이고 대한이한테조차, 성적인 흥미를 가져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대한이한테 성적인 흥미라니! 내가 대한이를 상대로 자위라도 하겠는가 말이다! 아무리 대한이 입술이나 허리가 섹시하니 뭐니 해도, 그건 여자들에게 어필하겠다란 의미지, 내 거시기가 불끈 한단 뜻은 아니었다. 실제로 2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 그 클럽 파티 때 여타 적나라한 섹스 라이브도 봤고, 대한이 페니스까지 보고 만지기까지 했건만, 육체적으론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물론, 정신적으로는 크게 타격을 입었지만. 꿈 속의 영웅이 더럽혀진 기분이랄까. 게다가 내가 열렬히 숭배하는 그가, 나를 지렁이 보듯이 한다는 직격탄까지 맞았으니. 생각해보니 이상할 정도로 나는 그쪽으로는 담백했다. 발랑까지다 못해 그룹 섹스까지 해대는 병우나 상식이, 대한이들과 어울리면서도, 고백하건데 나는 자위조차 해 본 적 없었다. 다들 나보고 대한이를 쫓아다니는 변태라고 했고, 나 역시 병적이다 싶을 정도로 그를 쫓아다니게 되니까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대한이를 상대로 불순한 마음을 먹은 적은 맹세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한이가 남자라는 사실이 별로 문제 될 게 없었다. 그에게 바라는 것도 별로 없었다. 그냥 지금처럼 나를 징그러워하거나, 미워하지 말고, 나한테 좀 사근사근히 대해주고, 많이 예뻐해주면 좋겠고, 제일 친하고 기대고 싶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나는 굳이 말하자면, 이 대한의 광 팬이나 광신도였다. 음. 변태 맞구나. 어쨌든, 내가 쇼크를 먹었다는 사실이 재밌었다. 내게 유진 씨는 단순히 대한이의 대신이 아니라, 이성적인 의미로 다가왔다는 것일까? 나는 유진 씨와 섹스가 하고 싶었던 것일까? “미… 미안해요. 소…속일 생각은 없었어요. 진짜에요.” 누워서 멍하니 생각을 하는데,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유진 씨가 사과했다. 목소리가 다 갈라져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문 밖에서 엄청나게 불안한 표정으로 기다리던 우진이와 마주쳤다. 우진이는 내가 방 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얼굴을 확 구겼다. “물.” “뭐?” “물 가져와. 유진 씨 목소리 다 갈라졌다. 수건도.” 그리고는 방문을 닫고 다시 들어갔다. 내가 갑자기 나간 것 때문에 놀랐는지, 유진 씨는 고개를 들고 멍하니 있었다.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코에는 콧물이 흐르고. 아아. 아무리 예쁘다지만 말이야, 그렇게 얼굴이 엉망이어선 매력적이지가 않잖아. 성큼성큼 걸어가서 티셔츠를 벗었다. 흠. 새로 입은 것이라 냄새는 나지 않았다. O.K. 흰색 티를 돌돌 말아서 유진 씨 얼굴을 살살 닦아 줬다. 유진 씨는 놀랐는지 꼼짝도 안하다가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히끅 거리는 그 모습이 뒷골이 뻐근하게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입술을 가져다 댔다. 부드러운 입술. 아… 입술이란게 이렇게 부드러운 거였구나. 맞부딫친 입술의 감촉을 즐기다가 떨어져 나왔다. 첫키스였다. 긴장된 마음으로 유진 씨의 얼굴을 바라봤다. 딸국질도 멈춘채 숨도 안 쉬고 있었다. 그러다가 핫, 하고 정신을 차리더니 순식간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유진 씨의 얼굴이 너무나 빨개서 그 열기가 이쪽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나도 덩달아 얼굴이 달아 올랐다. “순서가 엉망이 됐네요. 유진 씨, 나랑 사귈래요?” 미소지으면서 그를 바라 봤다.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에야말로. “야, 이 변태 새끼야!! 뭐하는 짓이야!!” 갑자기 잡아당겨져서 쿠당 하고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배를 강타 당했다. 정신없이 밟아대는 통에 반격이고 뭐고 할 틈도 없었다. 젠장. 이래서 선빵이 중요하다니까. “그만둬!! 그만둬!! 때리지마!! 때리지 말란 말이야!!!” 유진 씨가 새되게 소리지르면서 우진이를 밀치고 나를 감쌌다. 욱씩욱씬대는 맨살에 감겨 있는 그의 흰 손이 좋았다. 목 가를 간지르는 그의 향기로운 머리카락도. “야!! 너, 진짜 미쳤냐? 저 새끼가, 널… 까…까…깔고 있었잖아!!!” 그말이 그렇게 어렵냐. 하긴 틀린 말은 아니지. 침대위에서 웃통을 벗어제끼고 유진 씨를 깔고 있었으니. “아냐! 이, 이, 나쁜 놈! 노… 녹수 씨는 나한테, 그… 그런…” 새빨간 얼굴로 둘 다 버벅 대는 꼴이 이쯤에서 부상자가 나서야 겠다. “프로포즈 중이었어. 유진 씨한테 나와 사귀자고 하는.” “………… 뭐?” “장래 매형 될 분을 쥐어 패다니, 역시 싸가지가 바가지야. 송우진.” 충격이 컸는지, 우진은 말을 잃고 창백하게 유진 씨를 돌아봤다. 유진 씨 역시 입을 떡 벌린채 앉아 있었다. 귀엽네. “싫어요, 유진 씨? 나랑 사귀는 거?” 그말에 정신이 들었는지 갑자기 고개를 미친듯이 좌우로 흔들기 시작했다. 멀미나겠다. “싫다구요? 그럼 말지 뭐.” 나는 즐거운 기분으로 반문해 봤다. 장녹수, 너 진짜 나쁘구나. 저 얼굴 어디가 싫다는 얼굴이냐. “좋아요! 좋아요! 사귀어도 좋아요!! 무르지 말아요, 녹수 씨!!” 필사적으로 말하는 통에, 나는 어쩐지 가슴 속이 뜨거워 졌다. 좀 울컥 하기도 하고. 그래서 유진 씨 얼굴을 붙잡고 또 키스 해버렸다. 이번에는 살짝 혀도 넣어 봤다. 유진 씨 입 안은 미끈하고 축축하고 기분탓인지 달콤했다. 바짝 마른 입술을 한 번 핥고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가서 혀를 찾았다. 뒤로 물러나려는 그것을 붙잡고, 이리저리 굴렸다. 혀를 빨았다가 놓아주고, 조심스럽게 내 혀를 건드려 오는 그의 것을, 위로 또는 옆으로 방향을 바꿔가며 얽혀갔다. 츕 츕 소리를 내면서 한참 동안 서로의 혀와 입술을 탐하던 우리는, 마지막으로 베이비 키스를 하고 떨어졌다. 그리고 다정하게 서로의 눈을 바라 보았다. 두 남자의 키스 씬을 목격한 우진 군은 옆에서 돌이 되어버렸다. 나의 검은 심해는 갈색의 대지로 뒤 덮혔다. 아르바이트는 계속 하고 있었다. 이제는 유진 씨를 태울 오토바이를 사고 싶었으니까. 지금은 집의 자가용으로 통학을 하고 있지만, 내가 바이크를 사고 나면 직접 데려다 주기로 했다. 게다가 무슨 무슨 대기업의 후계자이자 폭주족 리더도 겸하고 있는 우진이에게서 바이크를 실습으로 배웠으니까, 이제 돈만 모아서 사기만 하면 됐다. 면허야 내년에나 딸 수 있겠지만, 걸리지 않으면 되겠지. 그래도 완전히 익숙해 질 때까지는 유진 씨를 태우지 말아야지, 위험하잖아? 유진 씨는 나보다 한 살 위인 고등학교 2 년생으로 유명 사립 고교를 다니고 있었다. 우진이와는 이란성 쌍둥이 형제로, 유진 씨가 5분 먼저 태어나 형이었다. 예쁘고, 착하고, 밝고 사려심도 깊은데다가 총명하기까지 한 우리 유진 씨는, 희빈이와 닮은 점이 많았다. 공부를 좋아하는 것이나 피아노를 잘 친다는 것, 좋아하는 색깔, 음식 까지 비슷해서, 나는 내가 브라더 콤플렉스가 있는 녀석이었던가 의심스러웠다. 브라더 콤플렉스라 하니, 확실한 본보기가 바로 옆에 있었다. 우진이는 그 증세가 아주 심한 녀석으로, 유진 씨 말이라면 겉으로는 튕기면서도 꼭 다 들어주었다. 나와 희빈이 만큼이나 서로 안닮은 이 쌍둥이의 동생은, 스포츠 만능에 성적우수, 용모 단정한 재벌집 아들내미였지만, 성격이 개차반이었다. 자기네 학교의 일진회와 이 근방 폭주족들의 리더도 겸업하는 바쁜 녀석이기도 했다. 우리 쪽 연합에 들어 있진 않았는데, 전에 송명고가 우리 연합이라서 한동안은 나를 스파이 보듯이 했다. 게다가 우리학교가 연합회 본부라는 것을 알고는, 내가 상식이냐는 둥, 병우냐는 둥,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래서 그냥 꼬붕이라고 말했더니, 믿을 수 없다며 정체를 밝히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다가 유진 씨한테 한 대 맞기도 했다. 씩씩대다가 이번에는 작전을 바꿔서, 바이크로 꿰어내고 자기네 파로 들어오라는 둥 헛소리를 해댔다. 시큰둥하게 귓딱지를 파내고 돌아서다가 나를 바이크 뒤에 매달고 달려서 죽을 뻔 했다. 열 받을대로 받은 나는, 틈을 봐서 올라타 녀석의 모가지와 급소를 쥐어짜주고 그 비싼 바이크를 쓰러뜨려서, 달려있는 넓은 판대기-카울-를 떼어다가 녀석의 옆구리에 박아버렸다. 하이바도 쓰고 있겠다, 질질 끌고 가서 아직 채 서지도 않은 바이크 바퀴에 가져다가 몇번이고 박치기 시켜줬다. 우진이는 결국 갈빗대가 나가서, 이후로 다시는 찝적대지 않았다. 볼 때마다, 더럽고 치사한 미친 변태 새끼라고 욕은 했지만, 다행히 유진 씨한테 일러 바치진 않았다. 아르바이트 시간이 연달아 있어서, 나는 유진 씨와의 데이트를 위해 밤시간 호프집 알바를 접었다. 제일 노른자위 자리이긴 했지만, 유진 씨가 방학 중 보충수업과 과외등으로 낮시간엔 바빠 시간이 없었기에, 깔끔하게 접었다. 까짓 바이크, 면허도 내년에야 딸 수 있으니 겨울에 더 일해서 좋은 걸로 사야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조금은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데이트 비용을 늘릴 수 있었다. 데이트는 밤에 이루어 졌다. 좀 야하게 들릴 수도 있었겠지만, 감시자가 맨날 따라 붙어서, 우리는 키스 정도의 진도 밖에 못 나갔다. 브라콤의 대가 송우진은, 절대 나같은 미친 놈에게 유진을 맡겨 둘 수 없다며 갖은 이유를 다 붙여서 따라다녔다. 거참, 난 키스도 그때가 처음이었단 말이다. 나에게 호모끼는 그리 없었는 지, 유진 씨가 아무리 예쁘고 좋았어도, 그 이상 진도가 나가긴 힘들었다. 난 혹시 불감증이나 불능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으니… 머리털 나고서, 키스하고 싶었던 사람은 유진 씨가 처음이었다. 그 키스를 하다보면, 못견딜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발기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17년 만에 처음으로 자위를 해보기도 했다. 물론 유진 씨를 생각하면서. 그 행위에 끝내주는 쾌감이 들었지만, 어딘지 죄의식도 느껴져서, 나는 내가 불능이 아니라는 것에 감사하고 그쳤다. ………역시 불감증인가? 유진 씨와의 만남은 육체보다도, 정신적으로 충만함을 안겨줬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감정의 기복이 심해지고, 충동성이 강해졌다. 만남의 횟수가 쌓여갈 수록, 무언가 가슴 속의 빈 구멍이 채워져 갔다. 그것은 내가 가슴에 구멍이 있었는가도 깨닫지 못했을 때 벌어진 일이라서, 그 충격과 감동은 더욱 컸다. 그가 나에게 관심을 주었다. 그가 나에게 배려를 주었다. 그가 나에게 신뢰를 주었다. 그가 나에게 애정을 주었다. 그가 나에게 가슴을 내 주었다. 어쩌면… 그래, 이것이 어쩌면. 모처럼 밤이 아닌 낮에 그와 만날 수 있었다. 주말에 과외가 빠지게 되서, 그의 낮시간이 비게 된 것이다. 나는 당연히 커피숖을 하루 쉬었다. 그 동안 유진 씨를 만나면서도 외모에 그다지 신경써 본적이 없었지만, 오늘 만은 조금 신경 써 보고 싶었다. 아침에 목욕탕에 가서 때빼고 광낸 후에, 옷을 고르고 골라서 제일 단정해 보이는 걸로 입었다. 유진 씨는 신경쓰지 않는 듯 했지만, 나는 내가 양아치처럼 보일까봐 두려웠다. 이것도 신선한 감정이었다. 나는 내가 남에게 어떻게 보이던지 상관없었다. 그런데, 유진 씨에게만은, 유진 씨 앞에서만은, 부끄럽지만, 잘 보이고 싶었다. 반듯한 사람으로, 제대로 자란 놈으로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생전 안보던 교과서도 꺼내 보고, 영어책 같은 것도 들여다 봤다. 나중에 대학에도 가보고 싶었다. 대학생이 되면, 훌륭한 놈으로 보일 것 같았다. 처음에 유진 씨도 내가 대학생인 줄 알고 좋아했다잖은가. 하지만 학습 기초가 바닥인 나는, 들여다 봐도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조금 많이 실망했다. 우리 엄마가 이런 내생각을 안다면, 기뻐서 삼일 연짱으로 동네 잔치를 벌일 텐데. 안그래도 요즘, 옛날보다 양아치 질 안하는 것 같다고 엄청 좋아했다. 한 번은 유진 씨를 집에 데려갔다가, 진짜 동네 잔치 할 뻔 했다. 내 친구- 친구는 아니지만- 중에 이렇게 착실하고, 공부잘하는 사람이 있다니, 하고선 유진 씨를 붙들고 좋아라 좋아라 하다가, 결국엔 상다리 부러질 정도로 음식을 차려왔다. 사양하고 사양하다, 나중에는 거의 울면서, 그 많은 음식을 다 먹은 유진 씨는 그 날 급탈로 병원에 실려 갔었다.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의 나를 보는 것도 오랜 만인 듯 했다. 언제나 대충 대충 보고 싶은 부위를 보고 말았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꼼꼼히 살펴 봐야 겠다. 그사이 키가 또 자랐는지, 예전 보다도 더 커 보였다. 어깨도 더 넓어지고, 팔 다리도 길어졌다. 조금은 말라 보이기도 하다. 말끔하게 면도한 턱이 조금은 뾰족해 보이고, 쌍커풀 없이 눈꼬리가 아래로 쳐진 눈이 우울해 보였다. 그나마 콧대가 곧고 길게 뻗어 있어서, 얼굴의 균형을 잡아줬다. 아직 젖살이 남아있는지 뺨에서 턱으로 이르는 선은 부드러웠다. 평범한 인상. 아니, 평범보다는 조금 음침해 보이려나? 알고보면 나도 명랑소년인데 말이다. 거참. 염색도 안한 머리가 자라, 덥수룩해 보여서, 엄마 방의 젤로 살짝 정리해 봤다. 너무 바르면 양아치 같으니까 조심해서 양을 조절했다. 그리고 흰색 반팔 폴로 셔츠를 입고, 싹싹 다려둔 베이지색 엷은 면바지를 걸쳤다. 기분은 어색 했지만, 보이기는 나름대로 모범 대학생 같았다. 손수건도 깨끗하게 빨아서 뒷주머니에 넣고, 가죽으로 된 지갑에다 돈도 채워 넣었다. 돈 같은 것은 평상시에는 그냥 주머니에 쳐 넣고 다니지만 말이다. 그러고 거울을 보니 끝내주게 잘생긴 것은 아니어도, 제법 멋져 보였다. 헤헤. 마지막으로 어제 미리 사둔 구두를 닦고 또 닦아서, 번쩍번쩍하게 했다가, 너무 빛나는 것 같아서 발로 밟았다. 앗, 이러면 안돼나? 햇빛이 쨍쨍했다. 8월의 햇살은 따사롭다 못해 날카로워서, 사람을 말려가고 있었다. 전철 역에서 나오자 마자 흐르는 땀 때문에, 모처럼 꾸미고 온 게 망가질 까봐 조바심이 났다. 주말인데다가 극장 앞이라 사람들이 넘쳐 났다. 약속시간이 여유가 있어서 어딘가 들어갈까 하다가, 그냥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티켓을 미리 예매하고 서 있는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주위가 온통 연인들로 가득 찬 것 같았다. 쌍쌍이서 만나 영화를 고르는 모습에서, 보기에도 달콤한 기운이 폴폴 느껴졌다. 어쩐지 부끄러워서 시야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이런 날이었던 것 같다. 신촌에서 그를 처음 만난 날이. 밝게 빛나는 갈색 머리카락의 하얀 얼굴, 아담한 몸집의 유진 씨가 노란색 니트 반팔티와 푸른색 짧은 반바지를 입고 갈색 샌들을 신은 채 나타났다. 옆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물빠진 칠부 청바지에 검은색 나시티를 입고 멋들어진 선글라스 까지 낀, 모델 같은 스타일을 자랑하는 송우진도 있었다. 유진 씨는 여전히 여성스러워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꼭 두사람이 연인이라고 생각 할 것 같았다. 칫. 괜히 멋내고 나왔네. 우진이 녀석하고 비교되잖아. 선남 선녀같은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걸어오자, 극장 앞의 사람들 시선이 쏠렸다. 둘 다 내 가까이에 서서, 미쳐 이쪽을 못 봤는지 두리번 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웃겨서 잠깐 지켜봤다. “뭐야, 이 새끼. 아직도 안나온 거야? 역시 매너 꽝이구만. 야, 송유진. 약속시간 보다 기본 20분은 먼저 나와있어야 한다며! 지금 5분 전이다.” “아니야, 내가 20분 먼저 나와야 된다는 얘기였어. 원래 녹수 씨는 딱 맞춰서 다녀.” “흠, 오늘은 20분 먼저 와 있었어요. 유진 씨.” 슬쩍 뒤에서 끼어들었더니, 두사람 다 확 놀라서는 유진 씨는 휘청거리기 까지 했다. 재빨리 유진 씨 허리를 잡고서 고정 시켜주고, 미소지었다. “노…녹수 씨?!” “변태?!!!” “오늘은 유난히 멋지네요.” 유진 씨는 그 말에 얼굴이 빨개 졌다. 웃기는 것은 그 옆의 우진이도 같이 얼굴을 붉혔다는 것이다. 많이 놀랬나? “노… 놀랐잖아!! 왜, 왜 갑자기 뒤에서 그렇게 쑥 나타나! 매너없이!” “유진 씨, 그렇게 놀랐어요?” 소리친 것은 우진이었지만, 유진 씨에게 물었다. 나쁜 새끼, 감히 오늘의 데이트를 초치려 들다니, 무시해 주겠어!! 오늘은, 오늘 만은, 나도 양보 못 해! 말 씹은 것에 대해 뭐라 뭐라 할 줄 알았더니, 자기도 지 잘못을 아는지, 얌전히 있었다. 대신에 살벌하게 노려봤지만. 헹! 이다. “아뇨. 저, 녹수 씨, 맞아요?” “하하. 그렇게 이상해요? 나름대로 신경 쓴 건데.” “아니요, 아니요!! 너, 너무, 평소랑 달라서… 그. 더, 멋있어요.”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의 머리를 슬쩍 올려 줬다. 나역시 가슴이 뛰었다. “오늘, 유진 씨도 멋져요.” “꼴갑들 하고 있네.” 빠직! 순간 손에 힘줄이 팍 솟았지만, 참았다. 무시다, 무시! 오늘의 작전명은 무시! 저 새끼는 사실 송우진이 아니라 한상식이었어. “들어 갈까요? 표 예매 다 해 놨어요.” 즐거운 마음으로 유진 씨 어깨에 손을 얹고서 극장으로 향했다. “야, 나는!” 외치는 우진을 무시한채. 유진 씨와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콜라 두 잔은 입에 물고, 한 손엔 팝 콘을 들고서 자리를 찾은 뒤, 유진 씨 좌석을 내려줬다. 그리고 옆에 안착. 아직 상영시작 하려면 조금 남아 있어서, 실내가 밝았다. 콜라를 홀짝이는 유진 씨 얼굴이 붉어진 채, 시선을 불안하게 딴 데로만 향했다. 한 손을 그 어깨에다 두른 채, 옆으로 숙여서 그의 얼굴과 마주했다. 마치 키스하기 직전의 포즈로. 그는 필사적으로 눈을 피했다. 섭섭해서 퉁명스럽게 물었다. “우진이, 안 데려와서 화났어요?” “아, 아뇨! 그런거 아니에요.” 점점 더 뜨거워지는 그의 얼굴에 난, 또 나도 모르게 입술을 가져갔다. “이, 이, 나쁜 변태 새끼가!!!” 에휴. 어떻게 들어왔는지 씩씩 대면서, 결정적인 순간을 방해한 것은 역시 송우진이었다. 오늘 작전 명은 무시! 지만, 순간적으로 화낼 뻔 했다. 그것을 꾸욱 눌러 참고, 자세 풀고 똑바로 앉은 뒤 한마디 했다. “쳇.” “우진아! 어떻게 들어왔어?” “아슬아슬하게 남은 한 표 구해서! 저 변태새끼가 이제 아주 지능적으로 놀아요!!” 매진 되라고 일부러 인기 있는 걸로 골랐는데. 운도 지지리도 없지. 유진 씨도 그렇게 티나게 살았다고 할 건 없잖아요. 흥. 나는 토라져서 영화만 봤다. 왼쪽에는 유진 씨가, 오른쪽에는 우기고 우겨서 자리를 바꿔 앉은 우진이 있었다. 영화는 무슨 가족 영화 비슷한 것였는데, 꽤 슬프고 감동적이었다. 나는 울고 있는 유진 씨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손수건을 꺼내서 눈가를 닦아 줬다. 그런데, 또다른 사이드에서도 누군가가 훌쩍이는 것이다. 숨 죽인다고 죽이면서 우는데, 그래도 다 들렸다. 틀어막고 있어서인지, 나중에는 히끅 거리기 까지 했다. 한심스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나는 팝콘 살 때 얻어온 휴지 조각을 건네 줬다. 순간 숨을 멈췄는지 아무소리도 안났다가, 거칠게 그것을 뺏어서 코 푸는 소리가 들렸다. 참, 재밌는 형제라니까. 사실 어둠을 틈 타서 뭔가 야시꾸리한 짓을 해 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는데, 너무 재밌게 보고 있는 유진 씨에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얌전히 영화만 보다 나왔다. 유진 씨는 영화가 진짜 재밌었는지, 아까 까지의 일을 다 잊고서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서, 우진이가 한 눈 파는 사이에 재빨리 뺨에 키스했다. 순식간에 하얀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유진 씨는 진짜, 나를 좋아하나 보다. 그래서 내자신이 무슨 영화배우라도 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나의 말 한마디에, 행동 한가지에, 쉽게 달아오르는 그의 얼굴이 나를 너무 행복하게 했다.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개?” “유진 씨, 식사하러 안 갈래요?” 재빨리 녀석의 대사를 컷트하고, 화제를 돌렸다. 눈썹을 찡그리며 째려봤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오늘의 작전은 ‘무시’ 인 것이다. 그렇게 일식 집에서 식사하고, 한강 둔치로 갔다. 아! 이 얼마나 정석 다운 데이트란 말인가! 저 녀석만 없으면…. 우진은 몇 번의 따돌림과 무시를 해대는 데도, 기를 쓰고 쿠사리를 놓으면서 쫓아 다녔다. 진짜 브라콤이다, 저녀석! 그러면서도 나에게 변태라고 하다니! 유진 씨는 유진 씨 나름대로 신경도 안쓰고…. 아, 슬프다. 오늘은 꼭, 하려고 했는데. 강가라서 그런가, 바람을 쐐러 나온 꽤 많은 사람들이 삼삼 오오 짝지어 거닐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 헌팅 분위기였다. 다행히 우리에겐 유진 씨가 있어서 직접적인 태클은 안들어왔지만, 목표가 우진이인 듯 한 여자들이 계속적으로 눈웃음을 던지고 있었다. 이대로 이녀석이 홀려서 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녀들을 바라봤다. 좀 더 강하게 유혹해 보지 않으련? 그 말에 호응하듯이, 어떤 여자가 용감하게 이쪽으로 다가왔다. 외모에 꽤 자신이 있는 듯, 깔끔하게 챙겨입은 미니스커트가 도발적으로 보이도록 자세를 잡고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잘했어, 여자! 이제 우진이 놈을 끌고 가 줘, 부탁이다! “저, 그쪽 분, 아까부터 절 보시던데, 마음 있으시면 저랑 같이 얘기 좀 하실래요?” 어라? 그녀가 찍은 것은 나였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 해졌다. 유진 씨와 우진이가 동시에 나를 째려봤다. 아냐, 난!! 우진이를 꾀어가라고 본 거 였어! “뭔가, 오해가…” “이, 나쁜 새끼!!!” 젠장! 언젠가 말했지만, 선빵이 중요하다. 나를 붙들고 우진이가 흥분해서 패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맞고 있었다. “바람둥이 새끼!! 그럴 줄 알았어! 이, 나쁜 변태 새끼! 니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기술이고 뭐고 다 떠나서, 나를 바닥에다 눕혀놓고 작정하고 패는데, 등이 막혀 있으니 그 충격을 고스란히 다 받았다. 맞으면서도, 지금같은 경우에 반격을 하면 내가 나쁜 놈이 되는 거겠지? 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꼬리치러 온 여자는 갑작스러운 사태에 꼬리를 재빨리 말고 도망쳤다. 이런, 제기랄. 유진 씨 좀 말려줘요. 내 마음 속의 외침을 받았는지, 한동안 멍하니 있던 유진 씨가 나섰다. “그만해, 니가 왜 그래! 녹수 씨 때리지 마! 때려도 내가 때릴꺼야!” 그 말에 움찔 하면서 주먹질을 멈춘 우진은, 입술을 꼭 깨물더니 나를 내버려 둔 채 일어섰다. “그래, 때려도 니가 때려야지. 니 애인이니까.” 맞기는 내가 맞았는데, 더 아픈 얼굴로 녀석이 웅얼거리고는 돌아섰다. 계획대로 유진 씨와 둘 만 남게 됐지만, 상황이 뭔가 얄딱구리하게 됐다. 이 상황에서도 이런 생각하는 내가 우습지만, 그래도 오늘은 꼭, 하려고 결심했으니까… 그래서 일부러 이렇게 준비도 했었는데. 아씨. 나쁜 새끼. 엉망 진창이잖아. 한숨을 쉬고는 벌떡 일어났다. 아직까지 내 옆에 앉은채, 멍하니 우진이가 간 쪽만 바라보는 유진 씨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두 눈을 마주쳐서 확실하게 말했다. “유진 씨, 나, 한 눈 팔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기다려요. 우진이 꼭 데려올테니.” 그리고는 우진이가 사라진 방향으로 달려갔다. 무시 작전은 철회다. “송우진!” 부르니까, 잠깐 멈추더니 계속 해서 간다. 쯧, 일부러 데리러 왔더니만. “야, 송우진!” 이젠 아예 뛰기 시작했다. 진짜 나쁜 놈, 나는 니 놈한테 맞느라고 체력이 다했단 말이다!! “너 그대로 가면, 오늘 유진 씨 덮쳐 버린다!!!” 그렇게 말하고서 빙글 뒤돌아 갔다. 체력낭비는 질색이다. 효과도 직빵이잖아? 봐라. 번개보다도 빨리 뛰어서 되돌아 온 녀석이 헉헉대는 것을 보고는 유진 씨에게로 걸어갔다. “뭐야.” “뭐가?” 유진 씨가 보이는 곳까지 오자, 뒤에서 따라오던 녀석이 먼저 말을 걸었다. “오늘 계속 무시했으면서.” “알면 좀 일찍 가지 그랬냐. 그렇게 난리 부르스 추고 나가는데, ‘나 잡아 주세요’잖아. 완전히.” 픽, 웃고서 슬쩍 보니 녀석 얼굴이 빨개졌다. 지도 찔렸나보지. “…지… 진짜, 오늘 유진이랑 하… 할려고 그런거야?” 조금 황당한 기분에 돌아봤다. 부끄럽게시리, 그런 걸 대 놓고 묻냐? “그러면 안돼?” “둘 다 남자잖아!!!” 순간 입이 턱, 하고 벌어졌다. 여보세요? 너 지금까지 쫓아다니면서 뭘 봤냐? 키스 씬도 지겹게 봐 놓고서, 아니 그전에 유진 씨 반 나체로 깔고 있다고 뭐라 그러지 않았나? 뭔가 참, 또 의외의 면을 많이 보여주는 구나. “나보고 변태라며. 뜻도 모르고 한 말이었어? 나, 호모잖아. 남자 좋아하는. 그래서 변태라고 한 거 아니냐고.” 내 대답에 그가 창백해졌다. 내가 호모인지 아닌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내가 좋아한 사람이 남자이니 호모가 맞겠지. 호모라고 변태라 하는 것은 너무 하겠지만. “유… 유진이라서, 좋은 거 아니야? 남자면, 다 괜찮았던거야?” “넌 여자면 다 좋냐? 유진 씨가 좋아. 유진 씨가 처음이야. 내 첫키스도 유진 씨랑 그 날, 방에서 한 그거고.” “처음…. 이었어?” 뭐가 충격인지, 충격받은 얼굴로 그가 중얼거렸다. 이상한 놈. 길게 한 숨을 쉬고는 녀석의 머리를 뒤로 넘겨주고, 손을 잡았다. 움칠 하면서 손을 빼려고 하는 것을 단단히 잡고, 유진 씨에게 갔다. 멀리서 본 모양인지, 어느새 유진 씨가 먼저 곁에 와 있었다. “데려왔어요.” 빙긋 웃고는 유진 씨 손도 붙잡고서, 오늘의 마지막 데이트 코스, 남산타워로 향했다. “여긴, 왜?” 남산 타워 아래 팔각정에는 연인들이 너무 많아서, 조금 조용한 장소로 옮겼다. 그래도 남산타워는 보이니까. 서울시내 야경도 다 보이고. 우진이를 가운데 세워 놓고, 유진 씨와 내가 나란히 섰다. 아까까지 어색해서 말도 안하던 이 둘은, 내가 이끄는 대로 움직였지만 이 야릇한 포지션에 의문을 나타냈다. 둘 다 둔하군, 쯧쯧. 준비 해뒀던 상자를 꺼냈다. 붉고 고운 천으로 감싸인 그 곳에서 백금링에 조그맣게 다이아가 박혀있는 커플링을 꺼냈다. 그 중 하나를 내 손가락에 끼고, 나머지 하나를 들었다. 그리고 유진 씨와 마주 섰다. 유진 씨의 두 눈은 커질 대로 커져서, 그 맑은 갈색 눈이 혹시라도 빠지지 않을까 걱정 될 정도였다. “쑥스러워서 저녀석 없는 데서 할려고 했는데, 눈치가 없네요, 둘 다. 할 수 없이 증인 세웁니다. 유진 씨, 오늘 내 생일이에요.” 더이상 커지지 않을거라 생각했던 두 눈이 더 커졌다. 헛, 유진 씨, 진짜 위험해요. “생일빵은 저녀석에게 받았고, 유진 씨 한테는 이거 낀 모습을 선물받고 싶었어요. 싸구려지만, 받아 주시겠습니까?” 그의 눈이 크게 흐려 졌다. 한 방울, 두 방울. 영롱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그의 눈에서 이슬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나쁜 놈이다. 소중한 사람이 우는 것이 기분 좋다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 기분이 너무 좋아서 날아갈 것만 같았다. “유진 씨? 싫으면 말구요.” 처음 프로포즈 때 처럼, 짓궃게 덧붙였다. 그의 갈색머리가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내게 매달려 왔다. 열렬한 키스. 처음 받아 보는 그의 키스에 나는 정신이 나갈 것 같이 황홀했다. 아아, 이것이 ‘발기’ 군. 성급히 들어오는 그의 혀를 맞 감으며, 점점 진해지는 쾌락에 몸을 맡겼다. 어느새 자세가 바뀌어, 그가 내 품 안에 완전히 들어 와 있었다. 조금 숨을 고르고, 그의 두 눈을 마주했다.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그 눈동자가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숨을 삼켰다. 심장의 고동 소리가 귓가를 울리며, 숨소리 조차 정확히 유진 씨의 가슴과 공명했다. 부드럽게 미소짓는 그의 입술에, 그의 아름다운 두 눈과 마주한 채, 천천히 나의 마르고 거친 입술을 얹었다. 그렇게 몇번을 깃털처럼 가볍게 입을 맞추고, 높아지는 고동소리에 응해 그도 나도 정신을 놓을 정도로 키스에 열중했다. 그의 향긋한 혀와 얽혀서 넣고, 빼고, 이를 박으며, 우리는 키스만으로 완벽한 일체감을 느꼈다. 아아. 나의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 나를! 나만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 내가 비춰질 때면, 나는 내가 새로 태어난 것만 같았다. 다른 세계에 있는 것만 같았다. 너무 기쁘고, 벅찬 행복에 가슴이 뿌듯해져 왔다. “당신은 하늘이 내게 주신 선물입니다. 새롭게 다시 태어나도 좋다고, 허락하신 면죄부 같아요.” “난… 나는, 녹수 씨. 난, 정말…” 그가 나를 바라보며 울먹였다. 들어주고 싶지만, 나는 아직 말해야 할 것이 남아 있다. 내게 있어서 금단의 언어였던 것. 절대로 말할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그 것. “사랑합니다. 유진 씨.” 나는 유진 씨를 향해 고백했다. 유진 씨는 입술이 하얗게 되도록 깨물고는, 그렁그렁한 눈물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외쳤다. “나도… 나도… 사랑해요! 사랑해요! 정말, 사랑해요!! 녹수 씨! 사랑해요!!” 유진 씨는 그렇게 힘겹게 한 자 한 자 외치고는 엉엉 울었다. 그의 손에 반지를 끼워 주고, 나도 울었다. 너무 기뻐서 울었다. “유진 씨! 미안, 많이 기다렸어요?” “아니오, 오늘 부로 아르바이트 끝난 거에요?” “오늘 부터는 매일 매일 쏠게요. 나 부자 됐으니까. 아, 우진이 데리고 와요. 같이 먹지, 뭐.” 남산에서 고백하고 2주가 지난 오늘, 드디어 알바가 끝났다. 이제 일주일 후면, 학교도 개학이다. 이번에 학교에 가면, 꼭 열심히 공부 해야지 하던 차였다. 알바비로 학원 등록하고, 나머지는 저금해서 이번 겨울 알바금하고 합해, 대망의 바이크를 사려는 계획이었다. 헤헤. 유진 씨 손가락에 반지를 보면서, 기분이 끝내줬다. 그 후, 역시 진도는 안나고 있지만, 우린 이미 하나였다. 얼마나 좋은가, 건전한 동성 교제…… 이긴 개뿔이. 솔직히 그 때 이후, 유진 씨를 보면 불끈 하곤 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고- 사실 고1이면, 결코 늦었다곤 생각치 않지만-, 완전히 성에 눈 뜬 나는, 유진 씨와 무지하게 하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될 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요즘의 키스는 그 수위가 점점 더 높아지고 있었다. 하아, 부족하단 말이다. 이제 키스만으론. 그 날의 고백 이후, 우진이는 우리들의 데이트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래서 몇 번인가 타이밍을 노려, 유진 씨를 응응 할 뻔 했지만, 아직은 서로 쑥스러웠다. 우리가 만난 지 이제 막 한 달이 넘어 가고 있으니까, 나와 유진 씨의 기준으론 그 사이 진도도 엄청나게 빠른 거였다. 이 여름, 우린 정말 뜨겁게 불타 올랐다. 룰루 랄라 하며 생각하는데 유진 씨의 얼굴이 어두웠다. “유진 씨? 무슨 일 있어요?” “녹수 씨, 부탁이 있어요.” 진지한 얼굴에 나도 웃음기를 거뒀다. “우리 우진이 좀 말려주세요. 아무리 말려도, 이제, 누구 말도 듣지 않고, 완전히 변해버려서. 나 어떻게 해야할 지… 흑.” “무슨… 우진이가 왜요?” 미간을 모았다. 뭔가 귀찮은 예감이 들었다. “갑자기 집을 나가서 들어오지도 않고, 자기 패거리들이랑 돌아다니면서 닥치는대로 싸우고 있어요. 그저께는 칼에 찔렸다고 병원에서 전화오고, 달려가보니까 그상태로 병원에서 나가 술 집에서 쓰러져 있었어요. 아버지 노발대발 하시고, 어머니도 우시기만 하는데… 저도 쫓아 다니며 말려봤지만, 무섭게 내쳐버리고…. 방법이 없어요. 말을 안 들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왜, 그런 일을… 이제서야 말해요!!!” “처음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그 날, 그 일 때문인 것 같아서, 녹수 씨 미안해요.” 아, 그 일- 지 앞에서 형이 호모랑 헐떡거렸다고, 씨발놈, 냅다 날 패고 도망 갈 건 뭐냔 말이야. 하긴. 나도 좀 심하긴 했었다. 그 자식이 유진 씨한테 마음 있는 거 뻔히 알면서 ‘우리 서로 사랑한다 그러니까 증인 좀 돼달라’ 한 것 까진 괜찮았는데, 그 앞에서 다이나믹 왕 섹서블한 키스쇼를 한 게 문제였다. 유진 씨와 내가 서로 사랑을 고백하고 눈물을 흘릴 때, 정신이 든 그 자식이 사람들이 달려올 정도로 비명을 지르더니, 나를 패기 시작한 것이다. 한 참을 그렇게 패다가, 말리던 유진 씨까지 밀치고 울면서 도망쳤다. 그건 혹시라도 지가 헤까닥해서 제 형한테 껄떡 댈까봐, 내가 쐐기 박아준 거였는데. 호모를 넘어서 근친상간의 벽까지 넘을 뻔 한 것을 막아줬더니, 적반하장. 울고 있는 유진 씨를 달래고서, 꼭 우진이를 쥐어패서라도 데려다 줄 거라고 약속하고, 집으로 바래다 줬다. 그리고 지금 쳐박혀 있다는 강남 오피스텔에 찾아갔다. …… 진짜 부자구나. 유진 씨네. 난생 처음으로 들어가보는 삐까번쩍한 오피스텔 정문 앞에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가, 결심하고서 들어갔다. 경비실에 출입 신고를 하고서 위로 올라갔다. 미리 얘길 들었는지 경비가 열쇠를 주고, 현관 비밀 번호를 알려줬다. 금상첨화로 내가 올라간다고 알리지도 않았다. 아저씨, 센스 굿. 들어선 넓직한 거실에는 온통 섹스 흔적으로 가득차 있었다. 술과 담배, 정액의 비릿한 향이 어울러져서 몇몇은 약까지 했는지 벌거벗고 삽입한 채, 퍼질러 자고 있었다. 그 놈들 중에 우진이 얼굴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퍼져 있는 여자, 남자들을 하나 하나 끌고서, 발가 벗긴 채로 복도에 내보냈다. 물론 옷가지랑 구두도 같이. 침실로 보이는 방에는 아직 정사 중인 놈들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호모커플이었다. 그리고 더 놀랍게도 위에 타고 있는것은 우진이었다. 헉헉 대며, 보기에도 여릿하게 생긴 이쁘장한 소년을 박고 있길래, 뒷통수를 잡아채서 인사했다. “안녕, 송우진? 배때기 뚤렸다며?” 으득 하는 소리가 들릴만큼 이를 악물더니, 나를 죽일 듯이 째려 봤다. 그리고는 그대로 밑에 있는 새끼를 박아댔다. 목이 꽤 아플텐데도 내게서 눈 한번 안 돌렸다. 쯧. 녀석이 다쳤다는 배의 커다란 상처에다 손을 쑤셨다. 마침 박고 있던 상황이라, 손가락은 상처사이로 쿡하고 소리나게 박혔다. “끄아아아악!!!” 비명을 지른 것은 오히려 밑의 놈이었다. 피가 줄줄 새서, 정액으로 얼룩진 그의 배와 페니스에 잔뜩 묻은 것이었다. 시끄러운 가운데, 우진이 머리채를 잡고 뒤로 질질 끌었다. 깔리던 녀석도 황급히 지 몸을 빼내며 도와 줘서, 나는 쉽게 우진이를 바닥에다 내리 꽂을 수 있었다. 우진이는 상처가 고통스러웠는지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울고 있었다. 예쁘장한 녀석을 밖으로 내보내고, 다시 우진이를 들어 침대에 옮기는데, 팔꿈치로 내머리를 찍었다. 상당히 위험스러웠지만, 이미 고통으로 힘이 빠진 녀석이다. 그냥 맞아줬다. 골이 울리는 가운데, 놈을 침대위에 올리고 시트를 찢어서 터진 상처를 단단히 감싸줬다. 설마 출혈과다로 죽기 전까진 대화가 끝나겠지. 찰칵. 후우. 피가 묻은 손가락 탓인지, 담배맛도 쇠맛이다. “Let’s 대화. 말해 봐라. 왜 지랄이냐?” “……………” “유진 씨 때문에? 니가 먹을려고 했는데, 내가 가로채서?” 움찔 하면서 째려 본다. “그딴 식으로 표현하지마. 천박해.” “후우. 나 원래 천박해. 새꺄. 유진 씨 앞이라서 입조심 했던 거지.” “나쁜 새끼.” “형이라고 불러줄까? 우진형? 내가 어떻게 해줄까?” “다 필요 없어. 너 꺼져.” 얼굴이 창백하다. 많이 아픈가….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올려 줬다. 처음의 그 단정한 머리가 아니라서 유감이다. “형. 형아. 니가 죽어도 솔직히 말하면, 난 상관없어. 유진 씨가 걱정되서 그렇지. 오늘 온 것도 유진 씨 안색이 말이 아니라서 말이야, 니 새끼를 집에 처넣겠다고 약속하고 왔거든. 그러니까, 말해 주라. 응? 내가 어떻게 해줄까? 참고로 내 의견은, 그냥 니가 이대로 출혈과다로 골로가고, 나는 유진 씨랑 남아서 서로 위로 좀 해주다가 베리베리 해피엔드 했으면 좋겠거든?” “씹새끼!!! 죽이고 싶으면 죽여!!! 죽이고 꺼져버려, 이 개새끼!!! 이… 씹새끼!!! 내가!! 내가!!! 내가 먼저!!! 흑….” 갑자기 눈씨울을 시뻘겋게 하더니, 마구 소리지르다가 운다. 애새끼가 따로 없구만. 떼쓰고 앉아있냐? 그나저나 저렇게 혈압 높이면 진짜 죽는거 아닐까? 곤란하네. 아까 내가 배 쑤신 걸 나간 녀석이 봤는데… “…. 헉… 헉… 내가… 먼저… 흑.” 그래, 니가 먼저 사랑했지. 그런데 니가 자아정체성을 고민하는 동안, 진짜 이 변태가 나타나서 가로챘다. 내가 들었던 얘기 중에 제일 썰렁하다. “쌍둥이는…” 한참을 헐떡이다가, 울다가 하던 녀석이 점차 안정을 찾더니 입을 열었다. “쌍둥이는 배 속에 있을 때 하나였었어. 그런데 하나님의 실수로 둘로 갈라진 거야. 둘은….” “고백이라면, 유진 씨에게 해.” “끝까지 들어!!” 점차 기운을 잃어 가는 것을 보고 좀 초조해 졌다. 짜증도 났다. 그냥 이대로 119 부를까? “둘은 갈라졌지만 서로 하나야.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존재지. 서로가 서로의 반쪽이야. 그러니까 이어져 있어. 기쁘거나 슬프거나 모두 같이 느껴.” 고백은 유진 씨에게 직접 하라니깐. “유진이는 널 사랑해.” “알아.”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난 이란성이지만, 유진이의 쌍둥이야.” 유진 씨 만큼은 아니지만, 엷은 갈색의 눈동자가 나를 담았다. “나도, 널 사랑해.”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내가, 먼저였어.” 손을 들어서 얼굴을 가렸다. “내가, 먼저 사랑했단 말이야. 그 날, 우리 집 입구에서 처음 본 날부터! 그래서 내가 다시 찾았어. 내가 다시 찾고, 내가… 다시 찾았는데….” 나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너를 다시 찾았다는 걸, 그 기쁨을 유진이랑 나누고 싶었어. 유진이도 널 좋아하는 걸 알았으니까!! 내가 바보였지! 내가! 내가 등신이야!! 나눠선 안 되는 거였는데!! 너만은 나누고 싶지 않았는데! 완전한 내 것이었으면 했었는데!” 그가 한참을 울었다. 나는 담배를 들 힘조차 없었다. “……니가, 유진이랑 같이 있는 것도 참을 수 있었어. 유진이가 나의 분신이니까. 니가 날 어떻게 대하든, 유진이는 또 다른 나이니까, 괜찮았어. 니가 유진이에게 잘 해주면, 그걸 내가 받는 거라고 생각했어. 유진이를 향해 다정하게 웃으면, 내게 웃는 거다. 유진이를 안아주면, 나를 안아주는 거다. 유진이에게 키스하면, 나에게 키스하는 거다. 가슴은 아팠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참을 수 있었어. 그 날, 니가 유.진.이.에게 사랑한다고만 안했으면! 둘 만 이어주는 반지를 주지만 않았다면! 그렇게 날 떼버리지만 않았어도!!! 난 지켜볼 수 있었단 말이야!!! 참을 수 있었단 말이야!!! 유진이를 미워하지 않았단 말이야!!! 이 나쁜 새끼야!!!” 그가 내게 달려들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남았는지, 내게 달려 들어서 거칠게 입을 맞췄다. “니가 유진이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릴 때마다, 난 그 머리칼을 죄다 뽑고 싶었어! 예쁘다며 두 눈에 입을 맞추면, 그 눈깔을 뽑아버리고 싶었다구! 네게 키스하는 그 입술을 뭉개버리고 싶었어! 네게 안기는 그 몸뚱아리가, 증오스러웠어!!!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스러웠어!!!” 그는 나의 손을 가져다, 완전히 발기한 그의 것에 갖다 댔다. 그리고는 스스로 비벼가며 신음했다. “하… 아… 아. 녹수야… 아… 아. 학.” 허리까지 흔들면서 그는 나의 손에서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아… 아…노…녹수야, 제발. 아… 학… 아…흑… 아…” 마침내 절정에 달아 내게 그의 정액을 뿌리고 쓰러졌다. 119를 부르고, 그의 피투성이가 된 몸을 닦아 주었다. 정액으로 흥건해진 배를 상처에 닿지 않도록,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닦아냈다. 한 톨도 남기지 말자. 그가 꿈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이마에 얼룩진 피를 닦고, 땀으로 뭉친 머리카락을 넘겨 줬다. 그리고 그의 이마에 살짝 입 맞추며 속삭여 주었다. “꿈이야. 우진아. 이건 꿈이었어. 넌 여전히 유진이를 사랑해. 장녹수는 이 세상에 없어. 그는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어. 깊고 깊은 심연에 갇혀 있어. 그게 너무 갑갑하고 외로워서, 그의 주인이 안 볼 때 잠깐 대지에 기댄 것뿐이야. 그는 아주 비겁하고, 비열하고, 교활해. 너와 유진이를 속였어. 대지의 인간이라고. 땅에서 살 수 있다고. 하지만, 그는 늪의 생물이야. 주인이 부르면, 꼬리치며 돌아갈 거야. 너희들은 잊고. 꿈이었다고 해 버리고. 주인한테 섭섭해서 꾸었던 백일몽이라고. 그러니까, 아프지 마라. 망가지지 마라. 그냥 꿈의 한자락이라고 생각하고 묻어야 돼. 그렇게 생각해야 돼. …………………… 미안 하다.” 그것은 그에게 하는 동시에 내 자신에게로의 고백이었다. 핸드폰 벨이 울렸다. 나는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왜 걸었는지도. “여보세요?” < 녹수야? 나야, 병우. > “어, 병우야. 잘 지냈어?” < 응, 왜 이렇게 요즘 보기 힘들었어? 알바도 이제 안한다면서. > “하하, 나 보고 싶었구나? 이제 개학하면 또 지겹게 볼텐데, 뭘.” < 사실은, 오늘이다? 대한이 온데!! 이따 파리발 5시 비행기로!!! 놀랐지? 미안! 상식이가 가르쳐 주지 말랬어, 깜짝 놀래켜 주라고!! > “에엣! 오늘이란 말야? 아씨, 나쁜 새끼. 대한이 오면 배고플거 아냐!! 밥도 오랫동안 못 먹었을 텐데! 이제 준비 시작해도 빠듯하잖아!” < 미안, 미안. 그럼, 이따 4시 반에 인천공항에서 보자. 알았지? > “응.” 찰칵. 불을 붙였다. 하얀 연기 속에다 내 한숨과 지난 추억을 묻었다. 드디어, 주인님이 오셨네. 헤헤. 우진이와의 일이 있은 뒤, 나는 방에 틀어박혀서 머리 속을 정리했다. 나는 그들을 이대로 끊어 버리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유진 씨와 다시 만나던 날 그 방 문 앞에서 난 유진 씨를 이용하려고 했었다. 방학 동안은 내 세계의 중심이 부재중이었으니까. 게다가 그때 나는, 나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대한이의 태도에 어딘지 지쳐가고 있었다. 그에게 뭘 바랐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자꾸만 내 자신의 어딘가가 고장이 나고 있었다. 그런 내게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나를 애타게 찾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신기했다. 꿈같았다. 구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잠깐 동안의 꿈을 꾸자. 대한이 생각 따위는 한 톨도 하지 말고. 그렇게 결심했다. 그렇게 내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나의 몸과 마음이 자유로웠다. 눈 앞의 유진 씨가 너무나 생생하고 아름다웠다. 우진이가 너무나 친근하고 귀여웠다. 두 사람 모두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온 마음과 몸을 개방시켰다. 원했던 만큼, 마음먹었던 만큼 표현했다. 생각보다도 너무나 짜릿했다. 대한이가 없는 나의 세상이. 우스울 정도로 사는 게 쉬웠다. ……… 행복…. 했다. 우진이가 그런 고백을 하지 않았다면, 난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내 자신을 속여왔다는 것을…. 교활하고 잔인한 내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대한이가 돌아오는 즉시 까맣게 그들을 잊었을 것이다. 대한이는 여전히 내 마음의 중심이었으니까. 그토록 아름다운 그들을 순식간에 지워버리고, 나의 자리로 돌아갔을 것이다. 아무리 내가 처음으로 느껴본 ‘사랑’ 이었어도. 아무리 처음으로 가져본 ‘사랑’ 이었어도. 미련없이 대한이 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우진이가 내게 욕정했다. 그리고 내게 토로했다. 자신의 추악하고 두려웠던 부분을, 터뜨려서 폭로했다. 그렇게 나에게 부딪혔다. 나는 내 자신을 깨달았다. 우진이가 부딪혀온 그 순간부터, 내 마음 속을 들여다보던 거울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내가 그동안 대한이 옆에서 기대어 바란 게 무엇이었을까. 유진 씨에게 느꼈던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우진이가 내게 느꼈던 욕정이었을까. 왜 나는 대한이를 맹목적으로 따라다녔던 것일까. 왜 그가 나의 세계의 중심이 되었던 것일까. 내 안에서 견고하게 자리잡았던 검은 심연의 늪이 요동쳤다. 대한이에 대한 불신이 일어났다. 이단이었다. 명백한 혁명이었다. 지금도 껴져있는 내 손가락의 반지는 지난 여름날의 흔적이었다. 그것이 꿈이 아니었다는 증표. 나에게 ‘사랑’이 존재했다는 흔적. ‘사랑합니다, 유진 씨.’ ‘나도… 나도… 사랑해요! 사랑해요! 정말, 사랑해요!! 녹수 씨! 사랑해요!!’ ‘나도, 널 사랑해.’ 반지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결심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장을 봤다. 오랜만에 보는 거니까, 한 상 크게 올려야겠다. 시간이 되려나. 파리발 서울행 비행기의 도착을 알리는 문구가 떴다. 나는 그것을 뚫어져라 봤다. 아직, 안 늦었어. 돌아가라. 장녹수. 마음 속의 외침이 끝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나는 갈등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병우를 피해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서 있었다. 미안하다, 병우야. 지금은 혼자서 그를 맞이하고 싶어. 나를 위해, 그를 위해, 유진 씨를 위해, 우진이를 위해. 지금은 아파하고 싶어. 아직 갈등하고 싶어. 빨리… 그가 보고 싶다. 공항은 그들이 나타난 순간 묘한 흥분에 휩싸였다. 면면들이 다 연애인은 저리가라할 외모에다, 풍기는 기운도 고급스럽다는 것이 느껴졌다. 일행은 여자 다섯, 남자 다섯 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유독 큰 키를 자랑하며, 눈이 가는 두 사람이 있었다. 조명이 닿자 청색으로 빛나는 검은 머리에, 황금색 선글라스를 얼굴에 쓰고, 검은색 반팔 드레스 셔츠와 은색의 고급 양장 바지, 수제화로 보이는 연회색 구두를 걸친, 장신의 남자는 단연 돋보이는 미모를 가졌다. 그의 얼굴엔, 짙고 적당히 엷은 눈썹에 속 쌍커플져서 길쭉하게 뻗은 눈 아래로 흑요석보다도 검고 깊은, 맑은 눈이 있었다. 날카로운 콧날이 높게 뻗어 있고, 보기좋게 뻗어있는 입술과 촉촉해 보이는 장미빛이 어울어져, 남자의 색향을 남겨 놓았다. 그의 넓은 어깨와 곧은 등줄기 밑으로, 햇 빛에 적당히 그을려 건강미를 더한 근육들이 보기 좋게 셔츠밑으로 감춰지고, 길쭉한 다리가 단정하면서도 세련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큰 키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완벽한 발란스를 유지하는 몸에는, 도시적이면서도 어딘가 위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 옆으로, 다갈색 머리카락이 깔끔하게 넘겨져서 푸른 빛깔의 선그라스에 눌려있고, 아몬드 모양의 크게 쌍커플 진 두 눈과 곧게 뻗은 콧날, 딱 보기좋게 도톰한 입술을 가진 남자가, 연바이올렛 색 나시티에 검은 건빵바지, 역시 수제품으로 보이는 갈색 샌들을 신고서, 주위를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누군가를 찾은 듯이 반갑게 손을 흔들고, 옆의 남자에게 말을 건 뒤 그와 함께, 다른 일행들과 떨어져서 걸었다. 마중 나온 남자 역시 평범한 외모가 아니었다. 질 좋은 염색을 한 듯이, 붉은 기 도는 오렌지색 머리카락이 올백으로 넘겨지고 주황색 선글라스에 그의 깊고 째진 눈이 웃음으로 반달 지어졌다. 키가 2미터는 되어보이는 데다가, 덩치도 그에 맡게 커서, 거인 같은 이미지를 주었다. 하지만 등줄기와 허리의 형태가 보기 좋게 뻗어있어서, 다른 장신의 남자들과 마찬 가지로 모델같은 이미지를 풍겼다. 회색 여름 양복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갈색 가죽 샌들을 신은 그는, 다갈색 머리의 남자와 신나하며 포옹했다. 그 모습에 어쩐지 어린애 같은 천진스러움이 담겨있어서, 보기 좋았다. 다갈색 머리 쪽은 웃으면서, 누군가를 찾듯이 두리번 거렸는데, 붉은 머리 쪽이 갑자기 기가 죽어 뭐라고 하자, 얼굴이 멀리서 보기에도 확 굳어졌다. 당황한 듯이 뭐라고 따지는 다갈색 머리를 말 없이 서있던 검은 머리가 제지 시키고, 트레져 백을 밀며 유유히 공항을 빠져 나갔다. “쳇, 조금만 더 있다 가지.” 그 화려한 삼총사를 2층에서 구경하던 나는, 쫓아가서 놀라게 해 줄까 하다가 관뒀다. 재밌는 구경했으니 됐다. 대한이는 더 멋있어졌다. 이국의 향취까지 흡수한 듯이 보이는 그는, 로마제국의 황제라고 우겨도 좋을 것 같았다. 정말 어떻게 볼 때마다 더 멋있어 질 수가 있는 것인지. 그는 끝없이 진화하는 미모군주다. 정작 10년 후의 모습이 어떨지, 심히 걱정스러울 정도다. 저녀석, 사실은 17살이 아닌게 아닐까. 아니면 진짜 미의 혹성에서 내려온 용사라던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퍼질러 있다가, 퍼뜩 그들보다 먼저 집에 도착해야 한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아씨, 쪽팔리게 늦으면, 몰래 보러 온 것을 들킬 지도 몰랐다. 택시를 잡아타고, 아저씨에게 따따블을 외치며 기운을 돋구어서, 대한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키득거리며, 아까 오전에 눈에 불똥 튀기며 만들어 놓은, 장녹수표 진수성찬을 펼쳤다. 불고기에 갈비찜, 산낚지 볶음, 치킨셀러드, 모시조개 된장국에 잡곡을 섞어 만든 영양밥까지. 핫핫핫! 물론 어제 미리 요리를 다해서, 반쯤 익혀 놓은 것들이었다. 개학이 내일인데, 당연히 어제 아니면 오늘 돌아오는 것이지. 쯧쯧, 한상식, 이름값을 못하는 구나. 대문 쪽으로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긴장한 채 기다렸다. 두근 두근. 그러다가 끼익 하는 낡은 대문 소리에, 나도 모르게 뛰쳐나가 소리 질러 버렸다. “짜자자 잔~!!! 놀랐지?!!!” “우왓!! 뭐야, 이 새끼!!! 왜 그렇게 놀래켜?!! 아씨, 미친 새끼!” “아앗! 녹수야 아까 왜 안왔어!!” “카하하핫! 놀랐지?! 복수다, 이 놈아! 병우한테, 니가 오늘 아침까지 알리지 말라고 했다면서!!! 앗싸! 병우야, 미안~!! 대한아, 놀랬지?!!! 그지?!!” “…… 이럴 줄 알고 있었어.” 피식 웃으면서 대꾸하는 대한이를 보려니, 정말 돌아왔구나 싶어서 감격스러웠다. “뭐야, 기껏 사람이 놀래켰는데 반응이 그리 시큰둥하면 못 써. 이쪽은 너 보고 싶은데도 공항도 안나가고, 참고 기다렸단 말야!” 라고 말로는 투정 부렸지만, 그의 얼굴에 살짝 어린 미소에 기분은 날아 갈 것 같았다. 헤헤헤, 웃고는 상식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손을 내밀었다. “야, 선물!” “없어, 새꺄! 뭐가 이쁘다고 너 같은 변태새끼 한테 선물씩이나 하냐? 씨발, 하나도 안 변했어, 진짜. 대한이만 인간으로 보이냐구.” 투덜대는 상식이를 보니, 욕소리도 반가웠다. 역시 오리지날이 좋구나. “어, 진짜 없어? 정말 내 선물 없어?” “그래.” “진짜? 나 그럼 무지하게 섭섭한데, 진짜? 상식아, 진짜양~?” “아, 씹!! 콧소리 좀 내지마!!! 너 진짜 안어울려!! 에이, 옛다!! 먹고 떨어져라!!!” “헤헤헤, 그럼 그렇지. 땡큐다, 한사장.” “아유, 내가 왜 저런 걸. 아유!” 조그만 선물 백을 풀어 보니 퍼퓸 세트였다. 유럽에서 산 거라 무지 비싸보이고, 예뻐 보였지만, 바보같은 한사장, 내가 향수를 쓰냐? 엉? 하여간, 선물 센스하고는. “방에 내가 한 상 차려놨다. 어서들 가서, 씻고 먹거라.” 대한이와 상식이 트레져 백을 받아다가 마루에 올려 놓으며 말했다. 역시 그말에 다다다 달려가서 문을 열어보는 것은 병우였다. “우와!!! 녹수야, 업그래이드 됐구나!! 상식아, 대한아, 이거 봐봐!! 녹수가 그동안 신부 수업 했나봐!!! 우와!!” 감격해 하는 병우를 보니, 어제 그토록 지지고 볶느라 죽을 똥을 싼 것이 헛 되지 않았다. 역시, 너밖에 없다. 유병우! “후식으로 과일 샐러드도 있지! 에헴!” “헉. 니 놈이 드디어 미쳤구나. 대한아, 너 인제 큰일 났다. 업그레이드 변태가 돼버렸어.” “한상식, 방금 그 발언으로 식사권을 포기한 것으로 알겠어.” “대한아, 너는 좋겠다. 어쩌면 이렇게 유용한 변태가 붙을 수 있니.” 나불대는 상식이 입을 틀어막고, 대한이를 향해 웃었다. “방학 동안 알바해서, 나 돈 많아서 그랬어. 너 오랜만에 한국음식 먹여 줄라고.” “먹자.” “잘먹겠습니다. 녹수야, 너 짱!!” “그려, 그려. 병우도 짱이다. 대한아, 이리와서 앉아.” 대한이가 자리에 앉자, 집안이 꽉 찬 것 같았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많이 차렸네?” “응, 어서 와.” “……………” “왜?” 툭. 대한이는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뭔가 조그만 꾸러미 하나를 내게 던졌다. 포장지를 풀어보니, 그것은 반투명한 하늘색 큐빅에 청녹색 에메랄드가 박혀 있는 열쇠고리 였다. “핸드폰에 달아도 된데. 끈 이어서.” 무뚝뚝하게 말을 마치고, 황급히 고기에 젓가락을 가져다 대는 대한이의 얼굴이 희미하게 붉어 졌다. 난생 처음이었다. 대한이한테 선물을 받아 보기는. “핸드…폰? 아, 그래. 정말… 예쁘다. 대한아, 너무 예뻐! 진짜 너무 예뻐! 고마워! 정말 기뻐!!” “싼거야.” “그래도, 진짜. 고마워. 나, 소중하게 갖고 다닐거야.” 큐빅 고리를 꼬옥 손에 쥐었다.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진짜 감동했다. “야!! 내가 준 게 더 비싸! 내껀 안 기쁘냐?! 하여간, 비교되게 꼭 저래, 재수없게. 씹.” “그려, 그려. 상식아. 센스 꽝인 니 선물도 감사해 미치겠다. 나, 감동먹어서 눈물날라 그래.” “변태새끼가, 말 뽄새 하고는! 그게 왜 센스 꽝이냐! 너도 좀 꾸미고 다니라고 해준, 절정 코디지! 혹시 알어?! 냄새 좋다고 대한이가 니 목에 코박을지!!” “참내, 대한이가 왜 내 목에 코를 박냐? 이래뵈도, 내가… 앗? 젠장. 저 새끼랑 말하느라고 밥, 국 다 식었어!! 밥이나 쳐먹어, 새꺄!” 식은 국과 고기들을 다시 뎁혀서 차렸다. 하여간 저 놈의 상식이 때문에. 쫙 째려보자, 지도 잘못을 알았는지 닥치고 잘 먹고 있다. 엄마한테 부탁해서 얻은 수정과로 입가심까지 다 시킨 뒤에, 배불러서 헐떡거리는 상식이와 병우를 바라봤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같이 부대낀게 5년이다. 편한 잠자리 같은 내 친구들. 병우는 언제나 말없이, 상식이는 언제나 욕하면서 나를 돌봐준다. 그들도 내심 불안할까? 이 밸런스가 언제 깨지느냐는 전적으로 대한이에게 달려 있었다. 내가 메달리고, 대한이가 내치고, 병우가 무시하고, 상식이가 욕하고. 완벽한 사각형. 수박을 잘라서, 씨를 빼고 깍둑 썰기해서 투명그릇에 담아 얼음이랑 같이 띄우고, 내왔다. 시원하다고 잘 먹는 병우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상식이 머리도 한 번 넘겨 줬다. 대한이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마루에 앉아서 수박냉채를 입에 넣었다. 맛있게 먹길래, 한 그릇 더 해서 줬다. 대한이는 다 먹진 않고 반 남겼는데, 병우가 대신 와서 먹었다. “얘들아, 나 또 준비한 깜짝 선물 있는데?” “허억. 이제 그만. 더는 못 먹겠다. 아무리 맛있어도 더는 안들어가.” “미안, 녹수야. 나도 더는 못 먹겠어.” “………” “걱정마라, 먹는거 아니니까.” 조금은 흥미를 보이는 그들에게 웃어주고, 일어섰다. 마루로 나가서 그 앞에 서려니 무지 쑥쓰러웠다. 허참, 나는 무대 공포증이 있나보다. 하지만 꼭 해야 된다. 나는 기대를 가지고 대한이를 바라봤다. 대한이도 나를 바라봤다. 우리의 두 눈이 마주 쳤다. 꽤 오랜만에 이렇게 서로 마주 보는 구나. 그의 검은 심연 같은 두 눈에 나의 모습이 비쳤다. 아름다운 눈이다. “나, 애인 생겼어. 아주 이뻐.” 얼굴을 붉히고, 활짝 웃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너무 기쁘고 행복했다. 자랑스러웠다. 이틀 전부터 머리통을 싸매고 고심하다가 내린 결론이었다. 내 세계의 중심은 여전히 대한이였지만, 그것만은 확실했지만, 나는 유진 씨를 택했다. 내 사랑을 택했다. 아마도 내가 진짜 호모가 됐다는 것을 알면, 대한이는 더 이상 나를 옆에 오지도 못하게 할 것이다. 그는 나를 경멸하고 두드려 팰 것이다. 어쩌면 병우나 상식이조차 합세해서 나를 반 죽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이 자리가 이들과 마지막 만남이 될 지도 몰랐다. 그래서 정말 많이 갈등했다. 그래도 ‘애인이 생겼다’라고 하면, 애인이 남자라는 것을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라면, 그들이 나를 축복해 줄지도 몰랐다. 난생처음으로 그들이 모두 합세해서, 나에게 축하의 말을 던질 지도 몰랐다. 그리고 솔직히 축하받고 싶었다. 내게 있어 ‘친구’라 부를 수 있는 것은 그들뿐이었으니까. 물론 대한이는 단지 ‘친구’ 보다는 훨씬 더 소중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소중하고 좋아하는 대한이가 축하해줬으면 좋겠다. 그럼 꼭 신에게 축복을 받은 기분 일 것이다. 진상을 밝힌 다음에는 죽도록 맞고서, 두 번 다시 못 보게 되더라도 말이다. 미소지으며, ‘축하한다’ 고 짧게 한마디만 해줘도 좋을 것 같았다. 아니, 그냥 미소만 지어도 좋겠다. 내 웬수같은 친구 상식이의 축복이 받고 싶었다.’만세, 드디어 변태 해방이다, 축하한다 대한아.’ 라는 말이나 ‘아, 씹. 드디어 니가 정신 차렸구나. 이번엔 어떤 재수 없는 새끼 아니면 년이냐?’ 라도 듣고 싶었다. 병우가 하하하 웃으면서, ‘녹수야 정말 잘됐다. 같이 자다가 모르는 거 있으면 내게 물어봐.’라며 등 두들겼으면 좋겠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뭐야, 그래도 조금쯤은 기대했는데. “저, 축하 안 해 줘?” 조금씩 내 얼굴의 웃음이 굳어갔다. 그들은 축하는커녕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시큰둥한 표정도 아니었다. 놀란 것만은 분명했다. “아, 놀랐구나!!! 것 봐, 내가 깜짝 선물이라고 했잖아!” 다시 밝게 소리쳤다. “씨발! 뭐야!!!!” 상식이가 얼굴이 시뻘개져서 외쳤다. “씨발 변태새끼!!! 너, 죽었어, 왜 그딴 뻥을 쳐!!” 그가 정말 화내며 외쳤다. 그러자, 그제서야 병우도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녹수야, 지금 건 좀 심했어. 나, 나는, 순간 진짜인 줄 알았잖아. 심장마비 걸리는 줄 알았네, 하하” 대한이도 말 없이 노려봤다. 턱이 경직된 것을 보니, 화가 난 것 같다. 어, 다들 오해했나? 나는 당황했다. “진짜야! 내가 왜 거짓말을 해! 이름은 송유진이고, 나보다 한 살 더 많아. 그리고…” “닥쳐!!!” 상식이가 비명처럼 외쳤다. 비명 같았다. 그만큼 새되고, 절박하고, 뭔가를. “상식…아? 왜 그래. 다들 왜그래?” 아직, 나는 중요한 말은 하지 않았다. 이런 반응은 그 말을 하고 나서야, 나올 줄 알았다. 아직, 나는 내가 진짜 변태였다는 것을 알리지 않았다. 절교 당할 것까지 각오하고, 오늘 마음 정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래도, 애인 생겼다 그러면 축하는 받을 줄 알았는데! “뭐…가 생겼다고?” 대한이가 음산하게 물었다. 그것은 싸움터에서 싸우기 직전에 내뱉는 것과 비슷한 억양을 갖고 있었다. “대한아, 진짜, 왜들 그러는 거야? 병우야?” 하지만 병우 역시 눈을 크게 뜬 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뭔가 잘 못 됐다. 시야에 그늘이 졌다. 대한이가 어느새 내 앞에 서 있었다. 그 눈에 새겨진 눈빛이 너무나 시리고 차가워서, 나는 소름이 끼쳤다. 그의 눈을 보면 언제나 기뻤는데, 왜 소름이 끼칠까? “다시 한 번 말해봐. 잘 못 들었어.” 부드러운 어조 였지만, 어딘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아직, 말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인가? 벌써? 어떻게? “말해 봐, 녹수야.” 그가 다정하게 말했다. 거의 부르지 않는 내 이름을 부르며.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 섰다. 뭔가 이상하다. 설마 그렇게 될리는 없겠지만. 나는, 대한이 앞에서 달아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지만, 이건 명백한 싸움 전의 공기다. 대한이가 내 목덜미를 낚아챘다. 그리고 이를 갈면서, 한 자 한 자, 또박 또박 물었다. “장녹수, 니가 지금, 나, 이대한을, 5년 동안, 가지고 놀았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내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 뭐? “대한아. 무슨 말이야? 난, 난, 정말 모르겠어. 네가 왜 화를 내는 건지.” “그럼, 다시 한 번 말해봐. 뭐가 생겼다고?”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내 손에 껴진 반지. “사랑하는 사람, 애인. 유진 씨.” 빠악!!!! 마당에 쳐박혔다. 나는 일어서려고 했지만 바로 대한이 발에 밟혔다. 손이 부러졌다. 제길. 커억. 대한이는 내머리를 잡고서 마루로 질질 끌고 갔다. 그리고 마루 모서리에 계속해서 내얼굴을 박았다. 코뼈가 뿌러졌어도 멈추지 않고 계속 박았다. 그러다가 싫증이 낫는지 다시 마당으로 던져서, 구석에 있던 삽 끝으로 내 등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다리도 부러졌다. 갈빗대는 예전에 나갔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장독대로 가서 뚜껑채로 들어 내게 던졌다. 척추뼈가 안나가게 온 힘을 다 끌어서 몸을 틀었다. 간신히 반신불수는 면했다. 그 후는 아예 작정을 했는지, 집안에 있는 물건이란 물건은 내게 가져다 찍고 후려쳤다. 깨진 거울이 온 몸에 박혔다. 최대한 몸을 사렸지만, 연타로 패는 덕분에 유리가 살 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대한이는 자기 손까지 다치는데도, 기를 쓰며 유리를 밀어 넣었다. 차라리 빨리 죽었으면 싶을 정도로, 계속해서 괴롭히던 그가 드디어 부엌칼을 들었을 때, 오락가락 하던 정신을 놓았다. 깨어났을 때 달력은 사흘이 지나 있었다. 대 수술 후에 혼수 상태에 있다가 간신히 깨어난 것이다. 여러모로 다행이다. 죽지 않아서. 대한이가 감방에 안 가도 되니까. 유진 씨를 다시 볼 수 있으니까.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통곡했다. 기가 쎄던 엄마였는데, 그렇게 우는 것을 보니까, 우리 엄마도 여자였구나 싶었다. 앞으론 속 썪이지 말아야 겠다. 아빠랑 희빈이도 울었다. 다 큰 사람들이 울기는. 죽은 것도 아닌데. 유진 씨가 보고 싶다. “크… 큭….크… ?” 어라? 목이 왜 이러냐. “노…녹수야. 엄마 알아봐? 응? 알아 보겠어? 말하면 안돼. 목이 졸려서, 성대가 부었대. 당분간은 말하기 힘들 거야.” 목까지 졸랐냐? 대한아. 진짜 나 죽이려고 했구나. ……… 이정도 되면, 대한이 감방에 벌써 들어가 있는 거 아냐? 살인미수로. 대충 부러진 것은 의외로 갈빗대랑 오른쪽 손목뼈, 왼쪽 다리뼈, 콧뼈 뿐이었다. 이빨도 거의 다. 나머지는 거의 다 금갔지만. 게다가 유리 박혔던 게 치명적으로, 출혈과다로 바로 죽을 뻔 했단다. 그나마 다행인게 척추뼈가 무사한 거랑, 신경들이 다 살아있다는 거였다. 이 정도면, 한 6개월 아니 1년이상은 병원에 뻗어 있어야 할 것 같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부엌칼 난도질 만은 병우랑 상식이가 결사적으로 막아서, 둘을 패버리고 남은 힘을 다해 내 목을 졸랐단다. 대한아, 어쩔려고. 에이, 씨. 목소리가 안나오니, 의사전달이 안돼서 불편하구만. 지금 온 몸이 깁스한 상태라서 어떻게든 말을 해야겠는데, 아, 궁금해 미치겠다. 목소리는 이틀이 더 지나서야 나왔다. 아주 쇠된 소리지만, 물을 수 있다는 게 어딘가. “… 헤.대… ㅎ, 한…이…” “그 새끼 이름은 왜 불러?!!! 그 살인마 새끼!!! 그 악마같은 새끼를!!!” 반응을 보아하니, 벌써 붙잡혔겠다. “어…ㅎ… 떻…게…” 엄마는 그런 나를 보고 울었다. 내가 깨어 났을 때 처럼 울었다. “미안해, 미안하다, 녹수야. 엄마랑 아빠가… 힘이 없어서… 돈. 돈이 없어서… 흐흑. 돈이!! 하아…” 대충 상황을 요약하자면, 내가 실려가고 수술실에 누워 있는 동안 구치소에 있던 대한이는, 열나 유명한 변호사가 와서, 내가 죽을지 살지 모르는 수술비와 함께, 돈이 없어서 허덕이는 엄마 아빠에게 치료비 전액 지원과 사망시 혹은 피사망시 피해 보상비를 지급하겠다는 내용으로, 합의 보게 해서 빼냈다고 한다. 도대체 그 열나 유명한 변호사는 누가 보냈고, 치료비랑 피해보상비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대한이가 무사해서 기쁘면서도, 그게 또 궁금했다. 엄청나게 좋은 시설에서 비싼 치료비를 들여 성심 성의껏 치료 받은 결과, 놀랍게도 2개월만에 통원치료 허락이 떨어졌다. 콧대도 해넣었고, 이빨도 새로해서, 옛날보다 미남이 된거 아닌가 하고, 헤헤 거렸다가 엄마한테 맞았다. 입원해 있는 동안 유진 씨가 날 잊어버렸으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 예쁘고 큰 두눈에 눈물을 그렁거리며 우진이를 옆에 끼고 나타나서 매일 같이 왔다 갔다. “유진 씨, 너무 걱정 말아요. 병신은 안 돼요. 옛날하고 똑같아 진데요. 가죽이 좀 상해서 그렇지.” “흐아아앙, 녹수 씨. 많이 아파요? 많이 아파요? 어떻게 해… 흐흑…” “울지마, 니가 운다고 쟤가 덜 아프냐? 시끄럽게 굴지 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우진의 눈 가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렇게 나를 사랑해주는 쌍둥이의 간호를 받으면서 빠르게 회복했다. 병우와 상식이는 대한이와 함께 자취를 감췄다. 그 변호사가 빼낸 이후 어딘가로 사라진 것이다. 뭔가 또 내가 모르는 게 있는 것 같았다. 뭐든 간에 클럽과 관련있겠지. 틀림없이. 셋 다, 아직 어린데… 그들이 걱정됐다. 특히 대한이가. 통원치료 받고서 돌아오는 길에, 제일 궁금했던 곳에 먼저 들렸다. 대한이의 집. 그리고 우리 넷이 언제나 모여서 놀던 곳. 할머니의 감나무가 있는… 우리들의 고향이, 버려진 흉가가 되어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그대로, 집은 온통 어질러져 있었다. 하다 못해, 그 날 먹었던 음식물까지 썪은 채로 방치돼 있었다. 절뚝거리면서도, 나는 하나하나 치워나가기 시작했다. 나를 후려친 장독대의 뚜껑과 유리 조각 들을 살살 쓸어 담고, 방의 동물들 오물과 부엌의 썪은 쓰레기들을 쓰레기 봉지에 담아서 버렸다. 그리고 천천히 정리해서, 모두 다 했을 때 쯤엔 해가 져 있었다. 몸이 불편하니까 아무래도 시간이 오래 걸렸던 것이다. 마당에 앉아서 지친 몸을 쉬고, 집에 전화를 했다. 엄마는 노발대발 했지만 끝끝내 나는 내가 어딨는지 말하지 않았다. 유진 씨한테 러브 콜을 하고, 보일러를 보러 갔다. 오랫동안 그냥 뒀지만, 아직 늦가을이라서 그런지 고장나지 않았다. 쌓여 있는 세금 고지서를 보고, 남아있던 여름 아르바이트비를 털어 박았다. 완전히 밤이 되어서 조금 쌀쌀하기에 보일러를 키고, 방을 덥혔다. 환기를 시키고, 마루 끝에 앉아 있는데 말라비틀어진 감나무가 보였다. 올해는 감도 열리지 않았다. 죽어버렸나 보다. 할머니 제사가 한 달 전쯤이었을 텐데…. 제가 아파서 못챙겼네요. 할머니 죄송. 그러고서 지포 라이터를 꺼냈다. 갑자기 퍼뜩 생각나는 게 있어서, 집을 뒤져 후레시를 찾았다. 그리고 여기저기 마당을 구석구석 뒤졌다. 제발. 제발. 입으로 되뇌이면서, 마루 밑을 뒤졌다. 아, 하나님. 진짜 감사합니다. 베리베리 땡큐에요. 마루 처마 끝에서 큐빅이 달린 열쇠고리를 찾았다. 대한이가 처음으로 준 선물. 큐빅을 통해 하늘의 달을 봤다. 만월이었다. 그 안에 청록색 에메랄드가 보였다. 그래, 생각난 김에 모두 해치워야겠다.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압구정동의 ‘클럽’ 앞으로 갔다. 10시 넘어서, 클럽 안으로 눈에 익은 여자가 들어가고 있었다. “대한이 좀 만나러 왔습니다.” “꺅. 뭐… 뭐야? 너!!” “안녕하세요?” 그녀는 2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 날 밤의 그녀였다. 역시 잘 찍었다. 오늘이 할로윈이니까 파티를 하겠지. 나는 그녀를 향해 씨익 웃었다. 검은 관 같은 방이었다. 큐빅 형태의 문양이 블랙 앤 화이트로 나누어져서 방의 분위기를 이 공간 처럼 보이게 했다. 비싸 보이는 검은 쇼파 하나, 침대 하나. 그게 가구의 전부였다. 여기 저기 온통 쓰레기 천지다. 쓰레기의 반은 술이고 반은 담배 와 콘돔. 한 숨을 쉬며 하나하나 주워 모았다. 쓰레기 봉투도 안 보이길래, 눈에 보이는 적당한 편의점 봉투를 들어 담았다. 아, 오늘은 청소의 날이로고. 아무래도 안되겠어서, 밖에 나가 장을 봐 왔다. 냄비들랑 밥그릇, 수저도 사왔다. 어차피 술마셨을 테니, 해장국으로 메뉴를 정하고 밥을 해서 얹었다. 냄비 밥이라 맛있게 됐다. 김치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새벽 3시다. 쿠당. 깔깔대는 여자소리와 함께 진한 술 냄새가 풍겼다. 흠. 진솔한 대화를 위해 손님이 나갔으면 했다. “안녕, 대한아.” 그녀가 술취한 대한이에게 키스를 하고, 막 옷을 벗기려는 찰나에, 슬쩍 인사를 던져봤다. “꺄악!! 너, 너, 누구야?!!” “대한이 친구인데요, 오늘 밤은 그냥 돌아가 주시지 않겠습니까?” “뭐… 뭐야, 니가 뭔데…” 그녀 가까이로 다가갔다. 두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부탁합니다.” 한손에는 부엌칼을 들고 부탁했다. 대한이는 완전히 술에 떡이 되서 해롱해롱. 덕분에 조용한 해후가 됐지만, 아주 얼굴이 반쪽이 됐구나, 너. 머리를 쓸어 올려주고, 벽장을 뒤져 낑낑대며 편한 옷으로 갈아 입혔다. 수건에다 물을 적셔서 얼굴이랑 손, 발을 닦아주고 기다렸다. 대한이가 일어날 때 까지. 찰칵. 후우. “잘 잤어, 대한아?” 그가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눈가를 찌푸렸다. “밥 먹자. 해장국 끓여 놨어.” 미소 지으며 연기를 뿜었다. “너, 장 녹수야?” “응.” 그가 영 움직일 생각을 안하길래, 내가 밥과 국을 퍼서 옮겼다. 숟가락을 쥐어 주니까 그제서야 먹기 시작했다. 한 그릇을 다 먹고 나서, 배고픈 표정이길래 더 떠다 줬다. 대한이는 콧잔등을 찌푸린채 퍼먹었다. 이번에도 다 먹었다. 물까지 떠서 갔다 주니, 마신다. “안 죽었어?” “죽을 뻔 했어.” “죽었다고 했는데…” 그가 여전히 멍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뺨을 감싸서 들어 올렸다. 겨우 찾았다, 내 예쁜 눈. 내 심연. “누가 그래? 상식이가?” “병우도.” “둘 다 어딨어?” “왜?” 그의 눈이 순식간에 다시 차가워 졌다. 마치 그 날 처럼. 하지만, 나는 겁먹지 않았다. “둘 다 찾아 와야지. 학교 안 갈 꺼야?” “……… 안 가.” “가자.” 그가 아주 기이하단 눈으로 나를 쳐다 봤다. 곧바로 사납게 인상을 일그러 뜨리며 나를 밀쳤다. “또, 죽여 줄까? 장녹수? 내가 그렇게 우스워?!! 날 갖고 노는게 그렇게 재밌어?!!” 아프다. “……… 도대체…” 바보 같은 자식! 난 아직 환자란 말이다. “도대체 왜 그게 널 갖고 노는 거야?!! 친. 구. 를 걱정하는 것이 그렇게 잘못이야?!! 챙겨주는 게 그렇게 잘못이냐고!!! 소중하니까 당연한 거잖아, 잘해주는 것은!!!” 그가 찬 물을 뒤집어 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좋아!! 어차피 나도 작정하고 온 거야! 너도, 상식이도, 병우도 모두 절교야!!! 씨발, 이제 됐어!!! 도대체가 5년 동안이나 친구라고 쫓아다녔는데, 나한테 좀 잘 해주면 안되냐고!!! 잘난 이대한!!! 내가 애인 생긴 게 그렇게 잘못이야?!!! 씨발, 절교당할 거 각오 하고, 내 애인 남자라고 밝힐라 그랬는데!!! 어쩌면 이해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랬더니 반 죽여 놓고!!! 씨발, 이제 다 절교야!!! 니들 두 번 다시 신경 안쓰고, 두 번 다신 같이 안놀꺼야!!! 어디 가서 술독에 빠져 죽든지 말든지!!! 부자새끼들 꼬랑지 핥아가며 뒷처리를 해주던지 말던지!!! 어디서 대신 칼받이 노릇 해주고 와서, 그 돈으로 노름을 해먹든지 말든지!!! 니들 몸 팔아가며 내 병원비를 대주던지, 말던지!!!! 이제 다 상관없어. 잘 있어라, 이 씹새끼야!!!” 외치고 절뚝거리면서 걸어 나왔다. 문득 손에 걸리는 게 있어서, 그걸 잡고 대한이 새끼 얼굴에 집어 던졌다. “이딴 거 필요없어, 개새끼야!!! 먹고 떨어져라!!!” 하늘 빛 큐빅이 대한이 이마에 맞고서 떨어졌다. 대한이에게 절교를 선언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오랜만에 가는 학교를 가려고 준비했다. 오늘은 오는 길에 학원을 끊어야 겠다. 이제부터는 정말 모범생으로 살 것이다. 우리 예쁜 유진 씨랑 둘이서 알콩달콩하게!! 그래도 5년들인 습관이란 것이 무섭다. 학교 가는 길이면 자동적으로 대한이 집에 들르게 되는 것이다. 뭐, 어때. 어차피 아무도 없는 것. 저 감나무나 살려놔야겠다. 저게 어떤 건데 저렇게 죽일라 그래. 나쁜 새끼. 초록색 대문을 쾅 소리나게 열었다. 익숙한 크기의 인간 실루엣이 마루에 앉아서 교복을 꿰차고 멍하니 담배를 피고 있었다. 대한이다. 그 나쁜 새끼는 여위었지만, 여전히 잘생기고 멋있어서, 앉아 있는 그 꼬라지가 너무나도 그림 같이 아름다웠다. 제기랄. 그래도 안돼. 너 따위와는 두 번 다시 상대도 안할테다!! 나쁜놈!!! 그러면서도 나는 부엌으로 들어가서 아침 상을 차리고 있었다. 습관이란 것은 정말 무서운 것이다. 대충 그제 사다 놓은 재료로, 간단히 국이랑 밥을 해서 대한이 옆에 탁, 하고 내려놨다. 대한이는 시큰둥하게 나를 바라보더니 툭하고 한마디 던졌다. “절교라며?” 나는 입을 삐죽이면서 반격했다. “학교 안간다며?” “풋. …………하하하핫!” 대한이가 입가를 일그러뜨리더니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처음봤다. 저렇게 웃는거. 헤, 웃으니까 어려보여서 좋네. 난 또 병신처럼 행복해졌다. “웃지마, 나쁜새끼야.” 4. 봄이로세. 니나노, 닐리리야! 젠장, 좋긴 뭐가 좋아. 나의 애인씨가 고 3 이 되었다. 지난 가을, 겨울은 내가 투병 생활을 하느라 그렇다 치고, 드디어 꽃피는 춘 삼월이 되어서 기분도 싱숭생숭, 달링과 함께 에헤라 디야 침대 한 판 땡겼으면 좋겠지만… 나의 애인님은 지금 고 3 이 된 것이다. 저주 받을 이름이여, 이름하야 수.험.생. 하지만 이 내 몸은 뒤늦게 깨달은 육욕의 참맛을 깨달아, 몸달아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 내이름은 장 녹수, 우리 유진 씨의 스위트 달링이며, 아직 버진이다. “뭘 또 그렇게 면상 구기고 있냐, 장녹수, 이 미친 변태새끼야.” 이 새파란 봄날에 전혀 안어울리는 인사를 던지면서 교실로 들어선 것은, 재수없는 한상식이다. 작년 가을에 살해당할 뻔 했던 나를 방조하고, 2개월 넘게 어둠의 세계에 몸담고 있다가, 환자 몸으로 내가 개지랄을 떨어서, 다시 사회로 복귀시킨 빌어먹을 놈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를 보고 미안하다고 괜찮냐며 울먹이기까지 했던 새끼가, 채 이틀도 안지나서 개싸가지 한상식으로 복귀했다. 집도 부자인 놈이 왜 저렇게 사는 지, 정말 모르겠다. 건들대며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길래, 그 꼬라지가 얄미워서 나의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섹스가 하고 싶어.” “컥-!!!!!!!” 상식이는 갑자기 내게서 도도도도 하며 멀어지더니, ‘ 내게 가까이 오지마!!! 쳐다보지도 마!!! 이 미친 변태새끼!!!’ 라고 외치며 달려 나갔다. 흥. 그래봤자 지가 어딜가, 자리가 여긴데. 신비롭고, 불가사의 하게도, 분명히 출석일수 미달인 대한이, 상식이, 병우와 나까지 4명 모두 진급했다. 정말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다. 실상은 연합 애들의 대출이었지만, 뻔히 다 알면서도 넘어가 주는 선생님들의 넓은 아량이 신비로울 뿐이다. 게다가 우리 네 명을 한 반에 묶어서 진급시켜, 문제거리를 한 군데로 모아버리는 긴밀함도 보였다.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학교가 주위의 일진 연합회의 본부다. 즉 교복입은 깡패들의 집합체인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 대부분이 매우 거칠고 위험한 녀석들이다. 다른 학교보다도 유난히 문제아들이 많았다. 물론 그 중 탑은 단연 대한이, 상식이, 병우, 이 세명이다. 지난번 내 살인미수 사건 때문인지, 대한이는 이제 경찰에서도 주목을 받는 인간이 됐다. 하아. 정말 이대로 조폭이 되면 어쩌지? 하여간 그 놈의 클럽이 문제라니까. 국내에서 손에 꼽는 재벌집들의 자제분들이 만든 그 개싸이코 집단은, 일견하기에는 놀고먹자 파였지만, 실상은 미리부터 한국 정재계를 장악하려는 통합 커미션 조직이었다.’파티’ 자체는 그냥 놀기 위해 하는 것이지만, 일단 그런 교류를 통해서 서로 친목을 도모하고 뒷공작도 같이 펴자는 아주 치졸하고 음험한 모임인 것이다. 대한이가 잡혀 들어갔을 때 나온 변호사는 클럽에서 보낸 사람이었다. 여러모로 자신들의 ‘개’로써 유망해 보이는 대한이에게 투자를 한 것이다. 내 입원비나 치료비(대한이는 내가 죽은 줄 알고 있었어서, 그게 우리 엄마, 아빠한테 주는 위자료인 줄 알았다.) 같은 것도, 대한이나 병우, 상식이가 그 새끼들의 뒷처리를 하면서 모아 보냈다. 더군다나 호스트 짓까지 시키는데, 나한테 겁먹었던 ‘크리스마스 이브 밤의 여인’이 그 장소를 알려줬다. 나는 너무 열받아서 그 여자를 패버릴뻔 했다. 어쨌든 그 곳으로 찾아가 대한이를 설득(?)하고, 상식이랑 병우도 추가로 찾아서 데려왔다. 상식이는 그나마 있는 집 자식이라서, 호스트 짓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병우와 같이 클럽 산하 조직에 들어가서, 지저분한 뒷처리를 하고 다녔다. 병우는 아예 칼받이로 내보내, 배가죽까지 뚤리고 왔다. 나쁜 새끼들, 병우가 잘 못 됐으면, 클럽 새끼들 파티 할 때 아예 불질러 버릴라 그랬다. 안그래도 그 조직 인지 뭔지 하는 개새끼 집단의 아지트로 가서, 입구 막고서 석유 뿌리고 불까지 붙였었다. 몸도 다 안나았는데 맞짱 뜰 수도 없고, 맞짱 뜬다 해도 몽땅 다 나보다 싸움도 잘하는 전문 꾼들인데다가(하지만 다 내또래였다), 숫 적으로 쨉도 안됐어서 생각한 방법이었다. 클럽 새끼들 개가 되서 사느니, 내가 깨끗하게 인간으로 죽여버리자고 결심하고 한 짓이기도 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난 조폭 꼬라지 되는 것은 못 본다. 대한이든, 상식이든, 병우든. 석유 뿌리고서, 지포라이터 들고 확성기에 대고 상식이랑 병우 내놓으라고 법썩을 떨었다. 그 황당한 짓거리에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상관 없었다. 내 주위로는 이미 완벽하게 바리케이트를 쳐 놨으니까. 처음에는 대꾸도 안하다가, 내가 진짜로 불 질러 버리니까, 안에서 마구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확성기 들고서, 상식이랑 병우를 이 층에서 밀라고 해 줬다. 그럼 불 꺼주겠다고. 왜 이층이냐면, 일층은 내가 창문을 다 막아놨으니까. 불이 점점 커져서, 조금 걱정하고 있을때, 이층 창문이 열리고, 그리운 상식이가 병우를 안고서 뛰어 내렸다. 그 길로 병우 죽을 뻔 했지만, 나온게 어딘가. 그래서 대충 119에 전화하고, 준비했던 소화기들로 상식이랑 함께 불을 끄고, 병우 들쳐 업고 그 자리에서 튀었다. 대한이 모르게 했었지만, 클럽이랑 조직 애들이 따져서 금방 알았다. 그는 별로 화내거나 하진 않았지만, 드물게 굳은 표정으로 날 째려봤었다. 나는 해맑게 웃어줬다. 그리고 다음날, 조직으로 홀로 갔다. 싱글거리며 들어가서, ‘맞짱 뜨고 다 잊자’고 했다가 집단 다구리… 아니 폭행을 당했다. 하지만 역시 어린애들이라 그런지, 그냥 울컥 몇 대 때리다가 말아서 뼈는 더 안 상했다. 이후로는 거기서도 완전히 미친놈으로 찍혔다. 그러고도 클럽애들은 대한이랑 병우, 상식이들을 초대했다. 대한이들도 아무렇지도 않게 클럽에 가서 어울렸다. 속 없는 새끼들. 그래도 전처럼 ‘개’ 취급은 안하니 다행이었다. “녹수야. 뭐라고 했는데, 상식이 저러고 나가?” “섹스하고 싶다고 했어.” “헤엑! 상식이랑?!!” 바보같이 되묻는 병우의 머리를 흩으러 뜨리고 뺨을 양쪽으로 잡아댕겼다. 내가 아무리 변태라지만, 매져냐? 저딴거랑 몸을 섞게. “아야, 아퍼. 녹수야.” 그게 귀여워서 또 머리를 한 번 부비부비 해주고는 잘 쓸어서 정리해줬다. 병우 머리는 새로 염색해서 예쁜 오렌지 색이 됐다. “애인이 같이 안 자줘? 내가 끝내주는 애 소개시켜 줄까? 여자애지만…” “병우야, 나는 우리 이쁜 유진 씨한테밖에 안 서. 마음만은 고맙다.” “어, 녹수야. 젊어서 그렇게 편식하면 안돼. 그… 유진 씨가 예쁘다고 하지만, 여자보다는 못 할 거 아냐.” “우리 유진 씨는 어떤 여자보다도 예쁘고, 귀엽고, 섹시해. 내 눈엔 말이지.” “진짜? 꼭 한 번 보고 싶어. 왜 안 데려와? 바쁘면 우리가 가서 봐도 되는데…” “음, 안 그래도 조만간에 소개 시켜 줄라고 하고 있어.” 유진 씨랑 사귄지 벌써 반 년이 다 되가는데도, 대한이들한테 얼굴 한 번 못 보여 줬다. 상식이야 애저녁에 변태를 더 보고 싶지는 않다고 못을 박았고, 대한이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오직 내 친구 병우만이 궁금해 할 뿐이다. 하지만, 병우는 상식이나 대한이가 귀찮아하는 연합회의 자잘한 일들을 하느라 바뻐서, 시간이 거의 없었다. 유진 씨와 나도 점점 만나기 힘들어지는 판에, 친구들 소개시켜 줄 여유가 있을리 없다. 그리고 얘네들이 워낙 멋있어서, 솔직히 유진 씨한테 보여주기 꺼려지기도 했다. 비교되지 않느냔 말이다, 나하고. (ㅠ_ㅠ) 우리 유진 씨는 지난 겨울에 생일이 지나서 19세로 한 살 더 먹게 됐지만, 여전히 여느 여자들 저리가라할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그 뭐랄까, 색끼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피부는 여전히 우유빛에 볼에는 핑크빛 홍조가 돌고, 촉촉히 젖은 눈망울에 붉은 입술이, 보고만 있어도 불끈 달아오르게 만들곤 했다. 아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나의 대지, 내 영혼, 마이 스위트 하니. 흑…. 우진이도 여전했다. 대한이 만큼 큰 키에, 늘씬한 몸, 단정한 외모임에도 불구하고 싸가지 없는 언행까지. 그 오피스텔 사건 이후로 서먹해지지 않을까 했는데, 내가 거의 죽을뻔 했던 덕에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자연스러워졌다. 우린 둘 다, 그 사건 자체를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린 듯이 굴었다. 하지만 유진 씨와 셋이 만날 때면,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좀 더 조심하게 되고, 좀 더 난폭하게 대하기도 하고, 좀 더 상냥하게 대하기도 하게 된다. 차라리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해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뭐라 하겠는가 말이다. 그저 시간가면 잊혀지려니, 해야지. 유진 씨와 우진이 생일에는 눈이 내렸다. 12월 12일. 외우기도 좋은 날 태어난, 쌍둥이 선물을 고르려고 머리 터지게 고민했다. 병원 왔다갔다 하느라 아르바이트도 못해서, 자금도 딸렸다. 하지만 엄마한테 부탁해서 3부 이자로(ㅠ_ㅠ) 돈을 빌려, 커플용으로 나와 있는 회중 시계를 샀다. 반 타원형의 그것은 나란히 갖다 대면 꼭 맞는 홈이 있고, 그것을 서로 맞추면 오르골 음이 나왔다. 은색 스탠으로 외장이 감싸여 있고, 뚜껑 안쪽으로는 이니셜을 새길 수 있었다. 뭔가 새기겠냐는 점원의 말에, 그냥 고개를 저었다. 약속시간에 맞춰서, 예약했던 레스토랑으로 갔다. 자리에 있는 것은 유진 씨 뿐으로, 얼굴을 붉히면서 ‘ 우진이가 둘 만의 시간을 보내라고 ‘ 하며 말을 흐렸다. 우진의 배려였다. 나는 빙긋 웃고, 옆에 앉는 척하며 그에게 살짝 키스했다. “장미와 향수는 내년에 할게요. 올해는 키스만으로 용서하세요.” “괘…괜찮아요. 그런 거. 오늘 만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전 행복해요.” 그렇게 말하고 더더욱 붉어지는 그의 얼굴을 즐겁게 바라보다가, 그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늘 하는 그 동작에 별 반응이 없는 그를 위해, 돌아오는 손에는 선물상자를 내보였다. 놀란 그에게, 풀어보라고 재촉했다. “아, 이건…” “실은 커플 시계지만 두 사람 서로에게 반쪽이니까, 하나씩 지니고 있으라고 골랐어요. 우진이 것은 유진 씨가 전해줘요.” 유진 씨는 한참을 들여다보다, ‘정말 고마워요.’ 하고 말하곤 생긋 웃었지만, 뭔가 기대하던 반응이 아니라서 나는 좀 실망했다. “마음에 안 들어요?” “아니오.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너무 예뻐요. 정말.” “흠?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걸로 바꿔 줄게요.” 그 말에 그가 우울하게 얼굴을 돌렸다. 나는 당황했다. 시계를 싫어하나? “유진 씨, 왜 그래요?” “나, 난, 나빠요. 우진이한테 미안해요.” 순간 나는 철렁했다. 설마 유진 씨가 눈치 챈 걸까? “우진이 선물인데, 녹수 씨가 우진이 생각해서 선물해 준 건데, 주고 싶지 않아요. 둘이 한 짝이라면, 녹수 씨가 갖고 있었으면, 그렇게 생각해서.” 웅얼거리듯이 말하고, 유진 씨는 고개를 숙였다. 손에는 시계를 꼭 쥔 채로. 놀랐다. 유진 씨가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는데. 허, 참. 기분이 너무 좋았다. 역시 이래서 유진 씨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니까. 슬쩍 포크를 떨어뜨리고, 아래로 내려가 유진 씨의 얼굴과 마주했다. 손을 뻗어서 고개를 숙이게 하고는 진한 키스를 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으니까. 키스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의 입술을 빨아 올렸다. 할짝이고 다시 아랫 입술을 살짝 물었다. 그는 조바심이 난 듯이 혀를 내 입술 끝에 댔다. 그 혀를 맞아서 기꺼이 그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부드러운 그곳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자극해서, 그는 신음을 삼키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좀 더 고개를 올려서 혀를 빨다가 빼자, 그가 갑자기 ‘아앙’ 하며 내게 달려들었다. 그 신음 소리가 너무 짜릿하게 자극적이어서, 나는 완전히 흥분했다. 식탁이 들썩이도록 키스를 하다가, 주문 한 음식을 들고 웨이터가 나타나서야 멈출 수 있었다. 단정하게 입은 슈트가 온통 구겨진 채로 식탁아래서 기어나와, 나는 흘려내린 머리를 쓸면서 포크를 집어올렸다. 그리고는 인상이 기괴하게 굳어 있는 웨이터에게, 뻔뻔스러운 얼굴로 포크를 부탁했다. 유진 씨는 목까지 빨개져서, 고개도 못 든채 바들바들 떨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냥 우진이 줘요. 우리한테는 이거 있으니까.” 하면서 커플링을 낀 손을 들어 보였다. 유진 씨는 아까와 비교도 안되게 기뻐했다. 유진 씨를 집 앞에 데려다 주고 돌아섰다. 쌀쌀맞은 겨울 밤하늘을 바라보며 정류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우진이였다. 내 앞으로 달려와서 숨을 골랐다. 나는 픽, 웃으며 인사말을 던졌다. “오늘 고맙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칠게 내 입술에 맞댔다. 강하게 집어넣은 혀로 구석구석 내 안을 헤집었다. 뽑아낼 듯이 내 혀를 빨다가, 살짝 물었다가, 도망가려는 나의 혀를 다시 붙잡고서 당겼다. 숨도 못 쉴 정도의 키스를 하며, 맞닿은 우진의 얼굴이 젖어 있다는 것을 알고, 나는 그의 머리를 쓸었다. 우진이 신음했다. 그리고 내 몸을 더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자신의 중심을 내 것에 대고 비볐다. 옷 위로 닿았음에도, 확연히 단단해진 그의 페니스가 사정하는 것이 느껴졌다. 헐떡이면서 떨어져 나가, 곧바로 내 발 밑으로 무너져 내렸다. 갑자기 그 오피스텔로 옮겨 간 것 같았다. “가!!!” 그가 흐느끼면서 외쳤다. 제기랄. 나더러 어쩌라는 거냐. 그의 머리를 잡아챘다.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낮게 으르렁댔다. “씨발, 어쩌라는 거야. 아예 무시해 줄까? 응? 두 번 다시 너한테 신경도 쓰지 말까? 그랬으면 하는 거야? 그렇게 해줘?” “나랑, 해!” “뭘 해, 이 씹새끼야. 내가 뭘로 보여. 나, 니 분신의 애인이야. 니 친구이기도 해. 이딴 식으로 굴지 마. 확실하게 해 줄까? 난 유진 씨를 사랑해. 니 녀석도 좋아. 하지만, 친구로써야.” 그를 밀쳐버리고 일어서서, 거칠게 담배를 입에 물었다. “또 그 때처럼 발광하고 싶으면 해 봐. 이번에는 유진 씨가 뭐라 하든 절대 찾지 않아. 그 길로 끝이다.” “…………나쁜 새끼…. 나쁜. 새끼……. 나쁜…. 흑…” 차가운 겨울 길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외투도 안 입고 덜덜 떨면서 울고 있었다. 씨발. 입고 있던 코트 자락을 열어서 녀석을 끌어안았다. 덩치도 큰 사내새끼가 울긴 왜 우냐고. 담배를 뻑뻑 피면서, 녀석이 울음을 멈출 때까지 그렇게 주저앉아 끌어안고 있었다. 문득 울음이 잦아든다 했더니, 녀석이 내 목에 입술을 박았다. 할짝거리며 목에다 키스를 하다가, 강하게 빨아올렸다. 읏. 짜릿했다. “헤헤. 너 쪼가리 생겼다.” “축하한다. 니가 처음이야.” 그가 일어섰다. “선물, 고마워.” “생일 축하해. 유진 씨랑 같이 태어나 줘서 고맙다.” “나쁜 새끼. 말을 해도, 꼭.” 그리고는 뒤돌아서서 가버렸다. 그 후에, 다시 원래의 송우진으로 돌아가서 나를 갈군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정서가 무지 불안한 녀석이다. 보는 눈도 없고. 옆에서 의자에 앉아, 길죽한 다리를 책상위로 길게 빼고 졸고 있는 대한이를 봤다. 나는 여전히 대한이 꼬붕이었다. 아침이면 가서 밥 차려주고, 저녁때면 대한이를 들쳐 업고 들어가는 일과도 그대로였다. 단지, 잠깐 짬 날 때면 유진 씨한테 전화를 한다거나, 주말에 대한이 아침에 잠든 틈에 데이트를 한다던가 하는 것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실생활에서는 유진 씨랑 사귀기 전이랑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대한이도 그래서 별 반응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궁금한 건, 그것이었다. 도대체 왜 내가 ‘애인 생겼어’란 말을 했을 때, 그리 광분해서 날 죽일 뻔한 것일까? ‘장녹수, 니가 지금, 나, 이대한을, 5년 동안, 가지고 놀았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대한이는 그렇게 말했다. 상식이는 비명을 질렀고, 병우마저도 안색을 굳혔었다. 그것은 꼭… 마치- 마치- 내가,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입술을 자글자글 씹고 있냐? 설마 또 섹스니 뭐니 했다간 입을 아예 꼬매 버릴테다.” 어느새 자리로 돌아온 상식이를 빤히 쳐다봤다. “상식아.” “왜 불러, 이 새꺄.” “나도 눈이 있어.” “뭐야?” “나도 눈이 있는데, 설마 너랑 섹스하고 싶다고 그러겠냐? 이 똘빡아.” 막 상식이의 욕 퍼레이드가 시작 되려는 순간, 옆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무슨 소리야?” 문득 잠에서 깬 대한이가 눈썹을 찡그린 채로 물었다. 흠, 왜 대한이는 저렇게 찡그리는 것도 멋있을까. 그래도 미간에 주름 잡히지 말라고 손가락으로 펴 줬다. 대한이는 언제나 차갑게 굴면서도, 내가 자기를 건드는 것은 그냥 냅둔다. 그게 좋아서 심심할 때면 꼭 여기저기 만져보는 것이지만. 싱글싱글 웃으면서 그러고 있으니까, 대한이도 다시 심드렁하게 표정을 바꿨다. “아유, 저 미친 변태 새끼. 대한이한테서 떨어져, 새꺄. 대한아, 그 새끼 밀어버려!” “너는 입이 시궁창이야, 상식아. 욕 없으면 대화가 안되지? 말빨이 딸려서. 훗.” “아악! 저 변태가 뭐라는 거야!! 내가 왜 말빨이 딸려!!” 뭐라뭐라 하려던 차에, 핸드폰이 울렸다. 내 핸드폰 벨소리는 최신 가요니 뭐니 이딴게 아니고, 그냥 기본음 1번을 썼다. 유진 씨 핸드폰도 기본음 1번이었다. 헤헤. “유진 씨?” < 녹수 씨? > 갑자기 상식이가 엇, 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냐, 재수없게. “무슨 일이에요? 이런 시간에?” < 저, 오늘 괜찮아요? 과외선생님께서 급한 일이 있다고 오늘 과외시간 비거든요. 오랜만에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교실인 것도 잊고서, 나는 흥분해서 벌떡 일어났다. 안 봐도 내 입은 가로로 쫙 찢어졌을 것이다. “제, 제가 갈까요?!!” < 후후, 아니에요. 아무래도 제가 먼저 끝날 것 같으니까, 학교 앞으로 갈게요. 녹수 씨 학교, 보고 싶어요. > “나는요? 나는 안보고 싶어요? 우리 못 만난지 일주일이나 됐는데.” 조금 삐진 것처럼, 목소리를 깔고서 투정 부렸다. < 무… 물론, 보…고 싶어요. 나, 정말, 보고 싶어요. 녹수 씨를… > 안봐도 훤하다. 얼굴이 온통 빨갛게 달아올랐겠지. “나도 보고 싶어요, 유진 씨. 너무 보고 싶어서, 학교 앞에 가서 데모라도 할까 하고 있던 참이에요.” < 그런, 그러지 말아요. 나, 오늘 만날 수 있으니까. > “응, 알았어요. 이따 만나요.” < 네, 녹수 씨. > 앗싸!!! 오늘 드디어 만난다!! 그동안 유진 씨가 너무 힘들어해서 걱정했는데, 오늘 집에 데려가서 백숙이라도 할까? 흥얼거리는데, 상식이가 여전히 그 재수 똥인 표정으로 노려봤다. 그리고는 불쑥 팔을 걷어부치고는 내게 내미는 것이다. “이 닭살 좀 봐라! 씨발, 진짜 닭 되는 줄 알았잖아! 변태 커플은 원래 그런 거냐? 웬 유진 ‘씨’? 웬 존댓말? 허, 참!! ‘데모라도 할까 하던 참이에요’? 우웩~ ‘나는 안보고 싶었어요?’ 우욱~ 미친다 미친다 하더니, 정말 헤까닥 돌았구나, 너?” “상식아. 남의 전화통화 엿듣는 것은 몰상식한 짓이야. 넌 왜 그렇게 늘 이름값을 못하는 거냐?” “엿들어?!! 대한아! 우리가 엿들은 거냐?!! 지가 생중계 지랄을 떨고선, 우리가 엿들었데!!” “대한이 좀 본받아. 대한이는 듣고도 모른척, 보고도 안본척 하잖아. 넌 왜 지랄이냐? 나한테 맘있냐?” “끄아아악!!! 이 변태새끼가 이젠 누구까지 호모로 보이나!! 아, 씹!!!” 매점에 갔었는지 한가득 주전부리 꺼리를 들고서 들어오던 병우가, 미쳐 날뛰는 상식이를 붙잡고 말렸다. “뭐야? 상식이 또 왜그래?” “유진 씨한테 전화 받는거 보고 저런다. 병우야, 나 빵 하나만~” “어? 드디어, 그 유진 씨한테서 전화가 왔구나! 뭐래?” 빵을 뜯으면서 병우 얼굴을 흐뭇하게 봤다. 상식아 잘 봐라, 저것이야 말로 진정한 친구의 자세 아니겠냐? “응, 나 보고 싶다고 오늘 우리 학교 앞으로 온데. 병우야, 드디어 유진 씨를 볼 수 있다!” “진짜? 나 무지하게 궁금했는데, 잘됐다! 그럼 오늘 둘이 같이 자는 거야?” 헉. 누가 병우 아니랄까봐, 갑작스럽게 얘기가 그리로 튀냐? “아니야, 병우야. 우리 유진 씨를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얼마나 순결하고 깨끗한 사람인데. 안된다. 안돼.” “유병우!! 너마저 저 변태새끼한테 휘말리지 마!! 정신 챙겨, 이 자식아!!” 상식이는 분노로 포효했다. 그런 상식이를 바라보면서 크림빵을 씹었다. 후후훗. 니가 뭐래도 사랑의 힘은 위대한 것. 나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드디어 오늘 유진 씨를 보게 되는 것이다. 문득 스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이 좋은 기회인 것 같다. “대한아, 오늘 괜찮아? 유진 씨랑 같이 저녁 먹어도? 너 싫으면, 그냥 딴 데로 빠지고.” “난 싫어!!!” 재빨리 외치는 상식이는 제끼고, 아까부터 말없이 창 밖만 보는 대한이에게 물었다. “상관없어.” 어쩐지 토라진 듯한 그 목소리에 기분이 좀 묘했다. “내가 맛있는 걸로 사줄게. 대한아, 먹고 싶은 거 없어? 집에 가서 만들어 줄까?” 대한이의 머리를 이쪽으로 돌리고서 물었다. 손으로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면서, 아름다운 그의 검은 눈을 들여다봤다. “고기.” 나는 활짝 웃었다. 끝날 시간이 다되서 가슴이 두근반 세근반 뛰기 시작했다. 유진 씨가 우리 학교 앞에 오다니!! 게다가 대한이와 같이 저녁을 먹는다. 유진 씨와 대한이, 내게 있어서 제일 소중한 두사람이 오늘 만나는 것이다. 어쩐지 긴장이 됐다. 시댁에 인사드리러 가는 새색시 마음이랄까. 아니 본가에 색시를 인사시키러 가는 새총각 마음인가? 아, 오늘 머리 감고 나올걸. 왠지 평소보다 더 별로인 것 같은데… 아씨 어쩌지? 교복도 땟꾸정물이 흐르고. 교문으로 걸어가는 대한이를 보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설마, 유진 씨, 대한이한테 반해버리는 건 아니겠지? 옆에서는 쪼잘대면서도 결코 먼저 가지 않는 상식이와 기대감에 가득차서 흥분한 병우가 모델처럼 걷고 있었다. 저것들도 겉만 보면 멀쩡하단 말이야? 아악, 아무래도 나 오늘 내무덤 판 것 같다!! “늦었어! 돌머리 변태새끼야, 이런 깡패 학교 앞에 유진이 혼자 세워두고 이렇게 늦장부리면 어떡하냐?!!!” “우진아, 왜 그래? 아니에요. 녹수 씨, 많이 안 기다렸어요.” 아아, 날씨도 화창한 봄날에 교문 앞 맞은편 담벼락 앞에 다소곳이 서있던 유진 씨는, 청초함이 더더욱 돋보였다. 갈색 머리카락 아래로 하얀 얼굴이 홍조를 머금고 미소지었다. 유진 씨 학교 교복인 흰색 칼라 셔츠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오렌지 빛 베스트를 받쳐입고, 그레이 교복바지를 입고 서있는 모습이, 마치 교복 카달로그에서 방금 튀어나온 것 같았다. 교복을 입은 모습이 남학생이라기보다는, 여학생이 오빠 옷 훔쳐 입고 나온 것 같이 앳되 보였다. 담벼락에 기대서서 팔짱을 끼고 이쪽을 째려보는 우진이도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평소와는 달리 어딘지 얌전한 귀공자 같아 보였다. 물론 스타일도 끝내줬다. 왜 같은 교복인데도 아롱이 다롱이라고, 내가 걸치면 어딘지 불쌍한 고학생 분위기가 나는 청색 칼라셔츠와 흰색 베스트, 곤색 바지도, 대한이 몸에 붙으면 패션쇼에 나온 양복처럼 되는 것일까. 더더욱 대한이 옆에서 초라해 지는 나였다. 에휴. 그래도 모처럼 본 유진 씨가 너무 예쁘고 귀여워서 내 얼굴은 미소로 한가득 했다. “빨리 나오려고 했는데 미안해요. 친구들 데리고 오느라 좀 늦었어요. 유진 씨 보고 싶어해서요.” “씨발, 니눈에 유진이만 보이지, 맨날? 옆에 떨거지들은 뭐야?” 우진이의 싸가지 없는 말에, 순식간에 떨거지가 된 상식이가 열받아 외쳤다. “떨거지? 하! 야, 장녹수 이 미친 변태새끼야, 니 눈깔 수준이 저거냐? 어디서 기생오라비 깔판을 데리고서, 씹. 싸가지도 만땅이네.” “뭐야?! 그러는 니 새끼 면상은 기생오라비 아니면 기생 딱깔이냐?! 저 새끼 친구면, 나보다 나이도 어린 게, 아씹. 끼리끼리 논다고, 진짜 싸가지 없는 새끼들!!” 오리지널 대 아마 간의 욕난무전이 일어나고 있었다. 정말 실로 도움이 안 되는 새끼들이라 볼 수 있다. “닥치지 않으면, 두 놈 다 아웃이야.” 그러자 나를 향해 동시에 욕을 하려는 그 새끼들의 주둥아리를 잡아챘다. 내가 조용히 하라 그랬지!! 나 화났어!!! “닥.쳐.” 그리고 손을 뗐다. 아씨 더럽게 침묻었잖아. 인상을 팍 쓰다가, 유진 씨를 향해 생긋 돌아섰다. “유진 씨, 소개할게요. 이쪽에 멋지고 잘생긴 쪽이 내가 얘기했던 대한이고요, 여기 이 듬직하고 멋진 친구가 병우에요. 대한아, 병우야. 우리 유진 씨. 내 애인이야. 나보다 한 살 위. 저 쪽은 우진이, 유진 씨 쌍둥이 동생.” “야! 나는 왜 빼먹어!!” “쟤는 한상식이에요. 아주 몰상식한 놈이에요. 별로 안 친해요.” 귀찮다는 듯이 덧붙이자, 유진 씨가 쿡 하고 웃었다. 아, 예뻐라. “와, 안녕하세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예쁘시네요. 진짜 웬만한 여자들 보다 미인이에요.” 사근사근히 말을 붙이는 병우가 이뻐서, 등을 쓰다듬어 줬다. 병우가 똑바로 서있으면 손닿기가 좀 힘드니까. 대한이는 옆에서 시큰둥하니 무표정하게 쳐다보다가 고개만 까딱했다. 저 정도도 엄청난 예의를 차렸다고 볼 수 있다. “예쁘긴, 칫. 기집애같이 생겼구만. 기집애들이 더 낫지.” 저 새끼는 제끼자. 갑자기 우진이가 앗! 하며, 사납게 외쳤다. “장녹수! 너 그냥 꼬붕이라며!! 이 거짓말장이 새끼! 이럴 줄 알았어!! 유진아, 저새끼들 깡패야!! 것도 진짜 질 안 좋은 진짜 깡패!! 이 대한, 한 상식, 유 병우, 쟤들이 서울 강북 바닥 싹쓸이한 연합회 대가리들이란 말이야!!! 너도 알지? 송명고!!! 너 납치할라고 했던 그 학교가 얘네 연합 소속이라니까!!” 둔탱이 송우진. 나 죽을 뻔하고 뻗어 있을 때 얘기도 못 들었냐? 그 장본인이 대한인데, 어떻게 내가 대한이랑 모르는 사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냐? 그리고 알았어도 속으로만 되뇌일것이지, 꼭 본인들 앞에서 그렇게 까발려야 겠어? 그것도 홈그라운드 앞에서? 대체 뭘 믿고 그러는거냐? 하여간 눈치 없는 우진의 그 발언으로, 분위기가 순식간에 남극 빙산 아래로 곤두박질 쳤다. 상식이를 필두로, 대한이와 병우까지 얼굴을 굳히고는 전투모드로 들어갔다. 아, 씨발. 있다가 조용히 얘기 좀 해야겠다. 송우진. 유진 씨도 의외의 얘기에 놀랐는지, 긴장한 얼굴이었다. 그 불안한 얼굴에 가슴이 불편해져서,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밥 먹으러 갈까요, 유진 씨? 대한이가 고기 먹고 싶다는데…” 그 말에 유진 씨가 대한이를 쳐다보고, 대한이도 유진 씨를 흘낏 노려봤다. 유진 씨는 더더욱 긴장했다. 움찔하면서 얼굴이 창백해진 채, 내 팔을 꼭 붙들었다. “고기, 싫어요? 내가 맛있게 하는데 아는데. 아니면 내가 구워줘도 좋고.” “좋아요! 좋. 좋아요. 가요.” “송유진!!” “우진이, 넌, 싫으면 가도 좋아. 나…난, 녹수 씨랑 밥먹을거야.” 그렇게 말하고는 내 팔을 더더욱 꽉 잡았다. 울 것 같은 그 얼굴에 한숨을 쉬고는, 팔에서 손을 풀게 하고 그 손으로 끌어당겨 가슴에 안았다. 그리고 그의 갈색 머리에 입을 맞췄다. “추워요? 아직 추운가… 그럼 집으로 갈래요?” 그 말에 머리를 붕붕 흔들면서 외쳤다. “나, 나. 녹수 씨랑 밥먹으러 갈 꺼에요!! 갈 꺼라구요!! 집에 가기 싫어요!” 그리고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아아, 사랑스러운 내 애인님. “밥 먹으러 가는게, 그렇게 좋아요? 왜 이렇게 울까.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엉망이네. 오늘은 내 제일 친한 친구들도 있는데. 유진 씨, 울지 말아요. 나 계속 유진 씨 예쁘다고 자랑해왔는데, 이렇게 울면 예쁜 얼굴이 못 생겨지잖아요.” 꼬옥 껴안고서 그렇게 속삭여주자, 유진 씨가 대뜸 얼굴을 떼더니 손으로 얼굴을 박박 문대기 시작했다. 진짜, 귀여워 죽겠네. “지랄, 생 쑈를 하고 있네, 둘이서. 아, 씨발. 대패로 밀고 싶다. 이 닭살을. 느끼해 미치겠어.” “하하, 유진 씨. 우리 무서운 사람들 아니에요. 울지 마세요.” “왜 울고 난리야, 아 쪽팔려. 야, 송유진. 너 어디가서 내 형이라 그러지마. 씹. 대로변에서 이게 웬 개쪽이야.” 니들이 문제야, 니들이!!! 속으로는 이가 박박 갈렸지만 기껏 화기애애 해진 분위기로 가는데, 내가 참았다. 대한이도 평정을 되찾아서 무표정한 얼굴로 이 쪽을 보고 있었다. “고기 먹으러 가자.” 그를 향해 미소지으며 말했다. 지글지글 타는 돼지고기 들을 솜씨 좋게 뒤집어서, 미리 사온 팽이버섯을 위에 얹었다. 주위로 마늘과 파 몇개를 올려놓고, 익은 고기는 타지않도록 그릇 두 개를 비워서 양쪽으로 나누어 올려놨다. 상추꼭지를 따고 하나를 들어서 깻잎과 겹쳐, 고기와 버섯, 마늘을 넣고 먹기 좋은 크기로 둥글린 뒤에 유진 씨 에게 건넸다. “괜찮아요, 녹수 씨. 내가 싸서 먹을게요. 그건 녹수 씨가 먹어요. 계속 싸주느라 안먹고 있잖아요.” “유진 씨 먹는 거 보면 배불러요. 그러니까 먹어줘요.” “아, 씹. 정말 밥 맛 떨어지게 만드네. 이리 내놔. 내가 먹을란다!” “이거 왜 이러시나, 한사장. 이 안에는 내 사랑도 같이 싸놨어, 그래도 먹을 테냐?” “아악. 미치겠네! 야, 장녹수! 너 왜 이렇게 느끼해졌냐?!! 그냥 평범한 변태로 머물러 있으면 안 되겠냐? 왜 자꾸 진화하냐고!!” “저, 잘 먹을게요.” 폭주하려는 상식이를 말리기 위해서인지, 재빨리 받아먹는 유진 씨였다. 체하면 안 되는데. 그래서 이번에 싼 쌈은 대한이한테 줬다. 물론 대한이는 주는 대로 다 먹는다. “맛있어? 더 싸줄까?” “응.” 헤벌쭉 해져서, 열심히 쌈을 싸서 먹였다. 병우는 아예 숨도 안 쉬고 먹고 있었다. 저 체격을 유지하기 위해선 꽤 많은 양이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병우는 우리 중 제일 식탐이 강하고, 먹기도 잘 먹는다. 내가 해 주는 밥도 아주 잘 먹어서, 내가 제일 이뻐한다. “병우도 싸줄까?” “응. 녹수야, 네가 싸주면 더 맛있어.” 아유, 귀여운 놈. 병우한테 줄 쌈을 싸고 있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져서 돌아보니 우진이가 입이 댓자로 나와서 째려보고 있었다. 샘도 많지. 에휴. 병우 쌈을 싸주고서, 우진이도 하나 싸서 출혈 서비스로 입가에 가져다 댔다. “뭐, 뭐야. 유진이나 해 줘.” “아- 해봐라. 응?” 조금 머뭇거리다가 얼른 받아먹는다. 그려 그려. 흐뭇한 얼굴로 또 새로 고기를 시켜서 굽고, 쌈을 쌌다. 나는야~ 쌈맨이다. “야, 나는 왜 안 줘! 한 바퀴 다 돌렸으면 나도 줘야 될 거 아냐! 누군 입이고, 누군 주둥이냐?” “그럼 욕만 하는 니 주둥이가 주둥이지, 입이냐? 왜, 녹수표 쌈이 그리도 먹고 싶어?” “됐어, 이 치사한 새끼야. 더럽고 치사해서 안 먹어.” 삐지기는. 그러게 왜 아까부터 그렇게 떽떽 거리냐고. 얄미운 상식이 주둥이에 넣을 쌈을 쌌다. “옛다, 먹어라.” “나도 넣어 줘.” “자, 아- 해.” “암, 히히, 변태새끼가 손 맛은 좋아가지고.” 상식이를 끝으로 녹수표 쌈 투어가 끝났을 때, 갑자기 내 앞으로 쑥 하고 쌈 한개가 나왔다. 새빨개진 얼굴로 유진 씨가 쌈을 들고서 내 입가에 내밀고 있었다. 나는 ‘고마워요.’ 하고는 맛있게 받아먹었다. 내가 먹어본 쌈 중에 제일 맛있었다. 그 후로 또 유진 씨랑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쌈 싸먹었다가 상식이한테 욕 먹었다. 가게를 나선 뒤, 제법 어둑해 졌기에 어떻게 할까 망설였다. 이대로 그냥 집으로 들여보내기는 싫었다. 그것은 유진 씨도 마찬가지였는지, 가게에서 나오자마자 주위를 둘러보면서 뭔가 궁리하는 모습이었다. 아, 키스하고 싶다. “유진 씨, 시간 괜찮으면 여의도 가보지 않을래요? 벚꽃 많이 핀 데 알아요.” 얼굴을 빠르게 끄덕였다. 기쁜 기색이 역력해서, 나는 순간 진짜 키스할 뻔 했다. 두 손 꼭 쥐어 참고서, 대신 유진 씨 머리를 쓸어 올렸다. “대한아, 어떻게 할래? 가는 길에 도시락도 사서 갈 건데. 저녁이라서 사람도 별로 없을 껄?” 대한이는 잠깐 유진 씨 쪽을 흘낏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과일 사줄까?” “오렌지.” “유진 씨는 먹고 싶은 과일 없어요?” “괜찮아요.” “야! 나는 곁다리냐? 왜 나한텐 안 물어 봐?!” “하여간 재수없는 새끼. 맨날 대한이만 챙기는 것도 눈꼴 시린데, 앗 씨발. 난 안가! 병우 너도 가지마!” “싫어, 난 녹수랑 꽃놀이 갈 거야.” “다 저녁때 무슨 꽃놀이야!! 늙은이야?!! 아씨, 저 변태 늙은이, 꼭 지 같이 놀아요. 쳇.” 쳇쳇 거리는 상식이야 욕하던지 말던지. 대한이와 유진 씨를 양 옆에 끼고서 택시를 잡았다. 오! 양손에 꽃이로고! 대한이를 앞에 태우고, 유진 씨를 뒤에 앉혔다. 오붓하게 둘이 앉는데, 갑자기 우진이가 밀고 들어와서 앉았다. “야, 장녹수! 너 진짜 이럴 꺼야?! 나더러 저 새끼들이랑 같이 따라 오라는 거냐, 어?! 송유진, 너는 왜 가만히 있어? 니 동생 니가 챙겨야지!” 그리고 그 긴다리를 좁은 시트에 구겨놓고 씩씩댔다. 택시 안에 남자 넷이 앉아서, 순간 타이어가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기사 아저씨는 살벌한 우진이의 기세에 눌려서 뭐라 말도 못하고 차를 출발 시켰다. 병우한테 전화해서 여의도 어디쯤이라고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상식이 잘 달래서 데려오라고 덧붙였다. 가는 길에 잠깐 내려서, 도시락 10개와 음료수, 오렌지를 산 뒤에(카드 긁었다), 전에 찍어 놨던 여의도 근처 호수 공원으로 갔다. 병우와 함께 먼저 도착해 있던 상식이에게 욕먹으면서, 대충 호숫가 벤치에 자리를 잡고 도시락을 늘어놨다. 불고기 덮밥이랑 돈까스 튀김, 함박 스텍 등 가지가지 먹음직스러운 도시락 옆에 캔맥주를 놓고 보니, 진짜 소풍 온 기분이었다. 저녁 노을 지는 호수와 만개 하진 않았지만 제법 많이 피어 있는 벚꽃들이 어울러 져서, 도원경이 따로 없었다. 게다가 좌청룡 우백호라고, 옆에는 내사랑 유진 씨와 대한이까지 있으니, 그 옛날 주자왕이 부럽지 않았다. 우하하핫! “입이 아예 찢어지는 구나, 찢어져. 그렇게 좋냐?” “그럼 안 좋냐? 풍류를 모르는 구나. 쯧.” 술이 들어가선지 온 몸이 새빨게 진 유진 씨 앞에서 재롱 부리는 병우를 흐뭇하게 지켜 보는데, 옆에서 상식이가 투덜댔다. 우진이와 대한이는 묵묵히 호수를 보면서 맥주를 마시다가, 가끔 도시락 들을 집어먹었다. 텁텁할 것 같아서 아까 사 온 오렌지를 꺼내 들었다. 두터운 오렌지 껍데기를 요령껏 벗겨가며 흥얼 거리니까, 냉큼 뛰어온 병우가 달라고 떼를 썼다. 병우는 술 먹으면 더 어려지는데, 덩치는 산만해서 그러는게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 넘겨받은 오렌지를 통째로 아구아구 씹는 게, 정말 거인족의 후예구나 싶었다. 두 번째 오렌지를 까고 있는데, 병우가 다시 유진 씨에게 뛰어가서 뭐라뭐라 속닥거리니까. 이번에는 유진 씨가 달려와서 애교를 부렸다. “나, 나도 줘요. 나도, 먹고 싶어요.” 푸핫! 얼굴에 피가 몰려서 코피 쏟을 뻔 했다. 몸까지 붉으스름하게 물들어서, 눈은 흐릿하게 젖어 있고, 입술이 더 할 수 없이 색정적으로 빛나는 유진 씨는, 더운지 셔츠를 풀어헤쳐 버려서, 그 사이로 가늘은 목과 여린 쇄골이 보이고 있었다. 내게 바싹 기대어 온 몸이 축축 늘어지면서, 술향기 가득 나는 입술로 허스키하게 속삭이는 것이, 너무나도, 너무나도 선정적이었다. 그래서 그만 서 버렸다. 제기랄. 날아갈 뻔한 이성을 다잡으려 애쓰는데, 유진 씨는 한 술 더 떠서, 내 손에 들려 있는 오렌지를 손 채로 들고 깨물기 시작한 것이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살짝 살짝 닿는 혀의 부드러운 감촉에, 정신이 혼미해 질 지경이었다. 점점 차오르는 열기에, 나도 모르게 유진 씨를 쓰러뜨리려는 찰나, “오렌지, 까 줘.” 서늘한 중저음이 머리를 꿰 뚫었다. “어? 아, 아, 미, 미안. 대한아, 지금 까 줄게.” 나는 당황해서 재빨리 유진 씨에게 잡힌 손을 빼낸 뒤에, 새 오렌지를 꺼내서 까기 시작했다. 아직 흥분한 탓에 고개도 들어 올릴 수 없었다. 얼굴이 화끈화끈하고 손이 조금 떨려서, 껍질이 잘 까지지 않았다. 간신히 다 까냈을 때 쯤에야, 몸이 진정 됐다. 후우. 이번 껀 진짜 엄청나게 위험했다. 고마워, 대한아! 나를 진짜 변태로 만들지 않아줘서! 대한이에게 오렌지를 건네 주고 있는데, 헤롱거리던 유진 씨가 내 등을 잡아당겼다. “노…녹수 씨, 나… 기분이 많이 안 좋아서, 욱…” 그대로 내 등을 향해 오바이트 했다. 나는 재빨리 유진 씨를 부축이고 등을 두들겼다. 얼굴이 새하얗게 되서 한참을 토해내던 유진 씨는 기진맥진해서 쓰러졌다. 유진 씨 몸을 추스린 뒤 벤치에다 눕혀 놓고, 토사물이 묻은 유진 씨의 옷을 벗겨 냈다. 내 옷과 함께, 비닐 봉지에 싸 두고, 우진이가 허겁지겁 사온 휴지를 물에 축여서 얼굴을 닦아줬다. 안색이 너무 안좋아서 걱정됐다. 잠깐 살펴 보다가 숨소리가 고르다는 것을 알고 안심했다. 우진이에게 유진 씨 옆에 있어 주라고 한 뒤에, 토사물들을 처리하고, 자리를 정리했다. 뭐라고 투덜 댈 줄 알았던 상식이는, 의외로 아무말 없이 대한이와 병우 옆에 서 있었다. 대한이도 관심없다는 듯, 멀거니 호수를 바라보며 담배를 피고 있었다. “미안, 유진 씨가 저렇게 술에 약한 줄 몰랐네. 나 유진 씨 바래다 줄 께, 괜찮지?” “응, 녹수야. 내가 대한이 데려다 줄게. 걱정말고 가 봐.” 뭔가 어색해 하면서 대꾸하는 병우를 보고, 미소 짓고 돌아섰다. 유진 씨를 업고서 택시를 잡아타고 오는 길에, 술깨는 약을 사서 먹였다. 칭얼 대는 입술에 살짝 입맞춤하고, 내 가슴에 기대 있는 갈색 머리를 쓸어올렸다. “이대한하고, 무슨 관계야?” 앞 좌석에 앉아, 한참을 침묵하던 우진이가 입을 뗐다. 의아해서 그 뒷통수를 응시하고 있자, 다시 한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쩐지 바람난 남편 추궁하는 기분이 드는 것은 기분탓이겠지? “친구.” “거짓말.” 웃기지 말라는 듯이 내뱉었다. 표정은 안보이지만, 뭔가 상당히 꼬여있는게 느껴졌다. 우진이는 뭔가 계속해서 말을 하려다가, 더이상 하지 않았다. 집 앞에 도착하고, 유진 씨를 업고 들어가던 우진이 잠깐 기다리라고 해서, 돌 담에 기대서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 밤이 되어서, 봄인데도 좀 쌀쌀했다. 아까 베스트 까지 벗어 던져서 그런지 으슬으슬해졌다. 그래도 밤공기 사이로 봄내음이 맡아져서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개나리, 진달래, 벚꽃. 노랗고 빨갛고 예쁜 것들이 만발하는 이 계절이, 나는 좋았다. 무언가 몸 속 가득히 생생함이 느껴져서, 봄이 되면 유난히 더 들뜨게 되는 것 같았다. 그린색의 향취를 담은 봄나물 들을 캐고, 그것을 손질해 살짝 데쳐서, 초고추장과 갖은 양념에 버무려 먹으면, 봄기운이 몸 안으로 퍼지면서 뭔가 순화되는 것 같았다. 깨끗하고 싱그럽게…. 마치 유진 씨 처럼. 아까까지의 시간들이 꼭 꿈만 같았다. 유진 씨와 우진이가 대한이, 상식이, 병우랑 같이 식사를 하고 공원에 놀러 갔다는 것이, 억지로 이어 맞춘 그림 같아서 뭔가 실감이 나질 않았다. 황홀한 꿈처럼 아름다웠다. 뭔가 너무 완벽하게 행복해서, 불안할 정도로. 좀 시간이 걸리길래 그냥 갈까 하던 차에, 끼익 현관 문소리가 나면서 우진이가 나왔다. 왼쪽 뺨에 생채기가 나 있었다. 눈썹을 찡그리고 그 곳을 응시하자, 그냥 피식 웃고는 내 어깨에 손을 두르고 바이크로 향했다. “왜 이렇게 차? 추워?” “부모님께 맞은거냐? 유진 씨랑 너, 술마셔서?” “별거 아냐. 전에 일도 있고 하니까, 불안해서 그러는 거지.” 오피스텔. “어디 가려고, 안 피곤해?” “응. 바이크는 관두자. 너 무지 추워 보여.” 그렇게 웃고는 조금 머뭇거리면서, 점퍼를 벗어서 어깨에 덮었다. 나는 추운게 사실이었기에, 얌전히 그 옷을 껴 입었다. 체격은 비슷했는데, 다리길이가 틀려선지, 팔이 쏙 들어가고 어깨선이 조금 아래로 내려 갔다. 흠. 따뜻하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선 큰소리로 푸하하 웃던 우진이는 나중에 얼굴까지 시뻘개져서 큭큭 댔다. 그렇게 웃긴가? “너, 어려 보여. 처음으로 어려 보인다.” “내가 원래는 동안이야, 다들 몰라줘서 그렇지.” 시큰둥하니 대꾸하니까, 또 웃어제꼈다. 정말, 정서 불안정이라니까. 택시를 잡아타고서 내린 곳은, 작년 여름의 그 오피스텔이었다. 어째 이렇게 될 것 같더라니. 어차피 매듭지어야 할 일이었다. 나와 유진 씨, 우진이를 위해서. 하지만 왜 오늘일까. 모처럼 좋은 기분이었는데 말이다. 끝마무리가 계속 안좋다. 우진이는 묵묵히 앞장서서 걸으며, 간혹 내가 제대로 따라오는지 뒤돌아 봤다. 기억에 남아 있던 것과 정말 같은 장소일까 싶을 정도로 깔끔하게 치워진 오피스텔은, 넓다란 거실에 세련된 그레이 쇼파와 테이블이 있고 바스룸과 침실의 흰 색 문이 보였다. 털썩 쇼파에 주저 앉아서 우진을 봤다. 우진은 한 켠에 꾸며진 미니 바에서 위스키를 꺼내, 얼음과 함께 가져왔다. 익숙한 동작으로 잔에 얼음을 채우고, 갈색 액체를 채워 내 앞에 내려 놓았다. “용건.” 짧게 말했다. 우진이는 한 번에 들이키고, 나를 노려봤다. “나랑 자. 오늘. 여기서.” “대화 끝이야. 그럼.” “나, 끝내 주게 잘 할 수 있어. 원하면 내가 백 대줄게. 나랑 한 번만 하자.” 마치 날씨 이웃집 개 얘기하듯이, 침착한 어조로 섹스하자고 말하는 우진이에게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 거칠게 교복 바지를 뒤져서 담배와 지포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생각 좀 정리하자. 튈지, 팰지. 탁! “담배 피지 마! 재수 없어! 너, 그거 기분 그지 같을 때만 피우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나쁜 새끼!! 지 몸이 금덩이야? 한 번만 하자는데, 꼭 그딴 식으로 굴어야겠냐구!!!” 방금 전까지의 침착함이 거짓말처럼, 그는 벌떡 일어서서 담배를 가로채고 악을 썼다. 그리고 입술을 악문 채 씩씩 대다가 숨을 고르더니, 새빨개진 눈시울을 내게 돌리고 도도하게 쳐다봤다. “유진이랑 사귀는 거,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내 앞에서 둘이 무슨 지랄을 떨든 상관없다구. 주둥이를 처박든, 사랑스러워 죽겠다고 서로 눈꼴 시렵게 쳐다보든, 관심 없어졌어. 그냥, 난 너랑 자고 싶은 것뿐이야. 한 판 땡기고 뒤돌아서서 안녕하고, 별거 아닌 놈이었어, 하고 널 버려버리고 싶어. 그냥, 그 뿐이야. 그 다음은 계속 친구인 척, 아니 친구로 남으면 돼. 너 따위는 그저 미친 변태새끼일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나도, 이런 지저분한 감정, 빨리 잘라 버리고 싶단 말이다.” 내 앞의 위스키까지 가져다 원 샷 해버렸다. “……질질 끌지 않을게. 절대로. 그러니까… 응? 녹수야.” “나, 니가 생각하는 그저 그런 미친 변태새끼 맞아. 송우진. 그러니까 그냥 접어. 깨끗이 잊으라고.” 우진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그건 언젠가 봤던 진짜 살.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퍽! 쿠당!! 그가 들고 있던 글라스 채로 내게 던졌다. 씹, 관자놀이에 정통으로 맞았다. 그대로 쓰러져서 골이 울리는 가운데, 우진이 내 위로 올라타서 멱살을 틀어잡았다. “너, 이대한하고 무슨 사이야?” 나는 순간 황당했다. 대한이 얘기가 여기서 왜 갑자기 나오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친구.” “거짓말!!” 눈살을 찌푸렸다. 아야. 찢어졌나보다. 제기랄. “……무슨 뜻이야. 뭐가 거짓말이란 거야?” 어질어질 해서 소리 지를 수도 없었다. 도대체 뭐가 거짓말이란 거냐, 송우진. “심연. 늪의 주인. 나와 유진이를 버리고서 가려고 했던, 니 주인.” 깨… 있었나? 우진은 비릿하게 웃었다. “꿈이라고… 꿈이야? 이대한은, 니 현실이고, 유진이랑 나는 꿈이야? 그럼, 꿈인데 뭐 어때. 나랑도 즐겨. 어차피 유진이랑은 섹스도 안하잖아. 비밀로 해줄 테니 한 번 즐기고 끝내자니까.” 유리에 베였는지 피가 흐르는 손으로 내 머리를 쓸어올리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잘… 해 줄 테니까. 황홀하게 해줄게. 유진이나, 이대한 따위는 생각도 안 나게…” “나는 유진 씨를 사랑해.” 그는 못 들은 척 했다. 내 눈가로 흐르는 피를 핥았다. “유진 씨를 사랑하고 있어. 지금은 유진 씨도 나의 현실이야. 또 다른 내 심장의 주인이야. 대한이만큼 중요해.” 그는 계속 모르는 척 했다. 내 목덜미로 내려가서 살짝 빨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그는 동요하고 있었다. “키스하고 싶었던 사람은 유진 씨 밖에 없었어. 몸을 겹치고 싶은 사람은, 하나가 되고 싶었던 사람은, 유진 씨가 처음이었어.” 그가 내 목을 깨물었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렸다. “닥쳐! 듣고 싶지 않아.” “대한이도, 그래, 내 세계의 중심. 그 조차도 내게 이런 기분이 들게 하진 않았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유진 씨 밖에 없어.” 퍽!! 퍽!! 퍽!! “닥치라고 했지!!! 니새끼가 누굴 사랑하건 관심 없어!!! 상관없다구!!! 니 몸만, 니 볼 품 없는 몸만 필요할 뿐이야!!!” 우진이는 흥분한 채로 내 얼굴을 집중적으로 팼다. 덕분에 그의 손도 내 얼굴도 온통 피투성이가 됐다. 맞는 동안에도 나는 손을 뻗어서 옆에 뿌려진 얼음과 유리조각들을 손에 모았다. 우진이가 잠시 숨을 돌린 틈에 얼굴을 향해 뿌렸다. 당황한 그의 목에 혈을 짚고 옆으로 넘겼다. 씹새끼. 너 죽었어!!! 우진이 눈이 홰까닥 넘어가서 입에 거품을 물 때 쯤에야 손을 풀고서, 비틀거리며 일어나 발로 배를 강하게 찍어버렸다. 여기쯤이지? 작년에 내가 카울로 찍은 데가? 이놈의 오피스텔은 올 때마다 피를 보는 구나, 이번이 두 번째지만. 씨발, 두 번 다시 안 온다. 바스룸으로 들어가 온통 피투성이인 얼굴을 보고 다시 열 받아서, 진짜 죽여 버릴까 했지만 참았다. 유진 씨 동생이잖아. 동생!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입 안을 헹궈 내니, 안이 찢어졌는지 핏물이 꽤 계속 나왔다. 그나마 이빨은 무사해서 다행이다. 코피는 줄줄 흐르고, 관자놀이에서도 끊임없이 피가 흘렀다. 대충 상처를 막고, 그 부위만 피해서 얼굴을 살살 씻은 뒤, 수건에 물을 축여서 우진이 새끼의 얼굴이랑 손도 닦아냈다. 나에 비하면 아주 깨끗하게 닦이는 그 면상을 보고, 몇 대 때려 볼까 하다가 냅두고 일어났다. 코피는 금방 멈췄지만, 찢어진 관자놀이에서 피가 계속 흘렀다. 대충 휴지로 막고 있지만, 잘 멈추질 않고 있었다. 이 시간에 약국이 열었을라나, 아직 12시는 안 넘었는데. 오피스텔 아래로 내려가다가 반년 전에 본 경비아저씨와 마주쳤다. 이차 저차해서 심하게 싸웠다고 근처 약국을 물어보니, 경비실에 있던 비상약을 주셨다. 인사를 하고 위로 올라가니까 우진이가 깨 있었다. 피와 유리, 얼음이 온통 범벅인 가운데, 우진이는 멍하니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머리 좀 식혔냐, 강간 미수범.” “………얼굴, 많이 상했네.” 순간 다시 열 받아서, 저걸 어떻게 죽일까 고민하다가 ‘유진 씨 동생이다! 동생!’ 주문을 외우고, 탁자 위에 약들을 꺼내 놨다. 유리 조각에 다친 내 양손을, 박힌 조각 없나 신경 써서 살펴본 뒤, 소독하고 붕대를 익숙하게 감아서 테입을 붙였다. 제일 크게 찢어져서 휴지로 잠깐 막아놨던 관자놀이를 보니, 다행히 피가 멈췄다. 지혈제가 없어서 걱정했는데… 그 위에 연고를 바르고 거즈를 댄 후, 테잎을 붙였다. 아직도 망연히 담배만 피우고 있는 우진이를 힐끔 봤다. 주위의 얼음이 녹아서 옷까지 젖었는데도,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이리 와.” 손을 까딱 거렸다. 미동도 않는다. 한 숨을 쉬고 대충 유리 조각 없는 쪽으로 가서, 녀석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고 일으켰다. 그 순간 경기를 일으키듯이 움찔 하더니, 내게 달려들어 숨 막히게 껴안았다. “녹수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정말이야, 너 밖에 모르겠어!!! 아무리 이쁘고 잘빠진 딴 새끼들 안고 뒹굴어도, 너밖에 생각이 안 나!! 너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어!!! 녹수야!! 녹수야!! 나, 불쌍하게 생각해, 응? 다시는 안 조를게. 적선한다고 생각하고, 한 번만, 한 번만 하자! 그냥 너랑 딱 한번만 한 몸이 돼 봤으면 좋겠어!! 딱 한 번만!! 녹수야… 부탁이야. 부탁이야.” 그리고는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옷을 잡아 뜯기 시작했다. 절대로 내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내 옷의 단추 구멍 만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덜덜 떠는 손으로, 피가 베인 그 손으로, 하나하나 단추를 풀렀다. 하나 밖에 없는 교복셔츠가 피로 얼룩져 갔다. 난 그 손을 잡았다. 화들짝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우진이, 이를 악물고 아까의 흉폭한 얼굴로 돌아갔다. “손부터 치료하자. 나 교복 이거 밖에 없어.” 그렇게 손을 떼 내고 소파에 앉힌 뒤, 우진이 손을 소독약으로 꼼꼼히 소독했다. 문득 목을 보니, 내가 아까 졸라서 붉게 멍들어 있었다. “목은 안 아파?” “응.” 나 전에 목 졸리고 난 뒤에는 목소리도 안 나오던데. 역시 난 마음이 약한 것 같다. 붕대까지 감아 주고 얼음과 피, 유리조각으로 엉망인 거실을 정리했다. 중간에 우진이 말리면서 다시 달려들려는 것을, “내 첫날밤을 이딴 곳에서 먹어 버리겠다고?” 라고 으름장을 놓고, 쳐 냈다. “처…처음…이야? 저, 그, 여자하고도 아직 안 해 본 거야?” 놀라서 더듬더듬 대고는 얼굴을 확 붉혔다. 좋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미안하지만, 난 앞과 뒤 모두 버진이야. 말했잖아, 유진 씨가 처음이라고.” 냉정하게 대꾸하자, ‘그랬지’ 하면서 풀 죽어 끄덕인다. “지금이라도 형의 연인에게 형과의 첫날밤을 양보할 생각은 없냐?” 그 말에 다시 도끼눈이 되서 쳐다본다.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청소를 했다. 청소가 끝나고, 교복을 따뜻한 물에 담가 핏물을 빼낸 뒤 세탁기에 넣었다. 이제 할 건 다 했다. 남은 것은 저 우진이 새끼와의 첫날 밤 뿐이다. 제기랄, 이럴 거였으면 진작에 유진 씨랑 자는 거였는데. 첫날밤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동생과 보내야 한다는 게 끔찍했다. 아직 안 늦었으니, 그냥 저 새끼 죽이고 튈까? “담배, 피우고 싶어?” “어.” 침대에 오피스텔에 있던 녀석의 셔츠 하나를 입고 앉아 고민 하던 차에, 우진이가 샤워를 끝내고 나왔다. 붕대에 물 닿으면 안 되는데… 그가 싱긋 웃으면서 담배 한 가치를 꺼내 들었다. 손을 내미는데, 무시하고는 얄딱구리한 자세로 서서, 담배를 지 손가락에 꽂고는 아래에서 위로 핥았다. “뭐 하냐?” “오랄.” 새빨간 혀가 다시 처음부터 짧은 담배를 천천히 조금씩 위로 쓸어 올려 가다가, 필터 부분에서 입으로 머금었다. 마치 사탕이라도 빨듯이 붉은 혀를 언뜻 언뜻 내비치며 필터를 빨면서, 서서히 내 앞으로 기어 왔다. 입에 담배를 문 채로, 내 두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로 들어가서, 붉어진 두 눈으로 나를 올려 봤다. 명백한 유혹이었다. 그의 얼굴은 짙은 색향을 머금고, 나의 바지 앞섶에 담배 가치를 옮겼다. 그리고 혀를 점점 옆으로 옮겨서, 앞섶을 헤치고 지퍼의 끝을 찾아서 이로 물었다. 조금씩 그의 입술에 눌려서 자극을 받아 가며, 페니스가 부풀러 올랐다. 그는 결코 서두르는 법 없이, 천천히 여러 번 얼굴을 떼면서 지퍼를 찾아서 내렸다. 담배 가치를 천천히 훑어 올렸듯이. 뭔가 뜨거운 열기가 아래로부터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반복 되는 그 단순한 자극이, 어느새 참을 수 없는 자극으로 변해, 나는 그가 어서 그것을 끝냈으면 했다. 마침내 브리프마저 혀로 걷어내며, 완전히 발기한 내 페니스가 공기 중으로 나왔다. 이미 애액에 젖어 번들거리는 그것을, 그는 아무런 주저 없이 혀로 핥았다. 살짝 뺨을 대기도 했다가, 고개를 옆으로 해서 밑을 핥기도 했다. 감질 맛나던 그 행위에 내가 애원할 뻔 했을 쯤이 되서, 그가 나의 페니스 끝에 혀를 박았다. “아…” 짜릿했다. 우진의 입 안은 뜨겁고 축축했으며, 끝내주게 부드러웠다. 춉춉 소리를 내면서 그가 입안으로 페니스를 빨아 대는 순간부터,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우진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고, 허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우진은 목이 막힐 것 같겠지만, 나는 상관없었다. 원한다면 박아주자! 어느새 뿌려진 나의 정액을 우진이는 한 톨도 남기지 않고 삼켰다. 그의 입가는 헤져있었다. 나는 거만한 황제처럼 뒤로 자세를 눕힌 채, 다음을 기다렸다. 우진은 서서히 자신의 옷을 벗기 시작했다. 셔츠의 단추 하나하나 풀러가는 손을, 나는 냉정하게 관찰했다. 그는 셔츠를 벗은 뒤에, 망설임 없이 바지와 브리프를 내렸다. 잘 짜여진 근육들이 날씬하게 자리 잡고 있는, 생각보다 하얀 속살들이 환한 조명아래 적나라하게 들어났다. 아름다운 몸이었다. 그의 중심에서 나를 향해 뻗어 있는 그의 페니스는 검은 숲에 싸인 채 붉게 빛나고 있었다. 약간 검은 빛을 띤 그것은 크고, 거칠어 보였다. 내 눈길을 받자, 이미 번들번들해 있던 그것은 애액을 쏟아냈다. “녹수야. 하아. 그렇게 보지 마. 참을 수가 없어진단 말이다.” “그래서…. 이제 끝이야?” “씨발, 나쁜 새끼.” 그가 내게 키스하며, 내 몸에 붙어 있는 단추란 단추는 다 떼어 냈다. 처음에는 차근차근 하나씩 애무하며 열려고 했지만, 속살이 하나 둘 드러나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는지, 잡아 뜯기 시작했다. 바지의 단추에 이르러서는 아예 입으로 물어 뜯어버렸다. 말도 잃어버린 채,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내면서 그는 그렇게 내 옷을 뜯어냈다. 마침내 드러난 나의 나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나를 숨 막히게 껴안았다. 내 피부는 작년에 유리조각으로 난자당한 뒤, 곳곳이 길게 파여서 흉한 흉터가 져 있었다. “왜, 걸레 같아?” 피식 웃으며 묻자, 그의 성난 페니스가 나의 것을 강하게 건드렸다. 서로 겹친 채로 스치는 느낌이 몸서리쳐지게 자극적이었다. 우진이는 그와 나의 페니스를 같이 붙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학, 씹… 아아… 하, 으… 녹수…” “…으… 하…음……아!!” 절정 끝에 서로에게 뿌린 정액을 맞았다. 우진이는 그것을 배에서 쓸어 모아, 자신의 뒤로 가져갔다. 두 무릎을 굽혀 세운 채로, 적나라하게 보이는 그의 ‘구멍’에, 정액과 함께 기다란 손가락을 처넣었다. 힘들게 애쓰는 그 모습이, 미안하지만 웃겼다. 그래서 앞에 앉아 큭큭 대고 말았는데도, 우진이는 아랑곳 하지 않고 열심히 손가락을 늘려 넣다 뺏다 하며 구멍을 넓혔다. 그리고는 나를 눕히고, 내 위로 올라탔다. 손가락 넣을 때도 꽤 힘들어 보였는데, 괜찮을까… 하는 나의 걱정을 증명하듯이, 몇 번 손으로 흔들어서 단단해진 내 것 위로 우진의 애널이 강림했을 때, 무언가 튿어지는 소리가 났다. “!!!!!!” 숨 막히게 조였다. 속된 말로 해서, 짤리는 줄 알았다. 우리는 둘 다 숨도 못 쉬고 잠시 멈췄다. 젠장. 나도 힘들었지만, 눈물까지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우진이가 안쓰러워서, 그의 시든 페니스에 손을 댔다. 순간 내 손이 마법의 손인 양, 그것은 닿자마자 터질 듯이 팽팽해지더니, 우진이 신음을 흘리며, 아래가 조금 편해졌다. 내 자의로 하는 그 첫 번째 애무에 놀란 듯, 그는 순식간에 열기로 가득 차서 페니스를 붙든 내손을 맞잡고서 허리를 조금씩 흔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내 뿌리를 머금은 그의 엉덩이도 움직이며 조여대서, 생전처음 겪어보는 쾌감이 밀려와 내 이성을 날려버렸다. 그렇게 정신이 나가버린 나는, 거칠게 그의 허리를 붙잡아 누른 채, 위로 박아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반응에 우진이 허둥대는 사이, 자세를 뒤집어서 그의 위를 타고 쑤셔 넣기 시작했다. “악… 악, 아…아퍼. 아악… 녹수야! 아악!” 우진이가 울면서 애걸했지만, 이미 내 이성은 끊긴지 오래 됐다. 들은 채도 안하고 페니스를 빼서, 불편한 자세를 집어치우고 우진이를 뒤집었다. 엉덩이를 위로 오게 하자, 우진이가 두려워서 도망가려 했지만, 단단히 붙잡았다. 온통 피투성이로 헐어버린 그의 구멍이 무척 아파보였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퍽퍽 소리가 나게 박기 시작했다. 우진이는 비명을 지르다 지쳐서, 이제 가냘픈 신음소리만 낼 뿐이었다. 그렇게 여기저기 열심히 돌려가며 박아대는데, 어느 순간 우진이의 몸이 움찔하고 격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헉!” 조금 이성이 돌아와서, 잠깐 멈추고 그를 살펴봤다. 우진이는 얼굴을 빨갛게 붉힌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는데, 그의 페니스가 발기돼서 애액을 흘리고 있었다. “좋아? 여기.” 하며, 아까 그 부분에 다시 자극을 주었다. “아학…” 등이 휘며, 쾌락의 의미가 담긴 신음성이 울렸다. “…거기, 더… 해줘. 더… 세게…” 목 뒤까지 붉어져서 희미하게 웅얼거리는 우진의 음성을 확실하게 입력시키고, 찾아낸 포인트를 강하게 박았다. 그 다음부터는, 우진이 역시 이성을 날린 채 엉덩이를 흔들었다. 첫 키스도 남자. 첫 섹스도 남자. 게다가 둘은 쌍둥이 형제. 이쯤 되면 상식이 말마따나, 난 진짜 미친 변태 새끼다. 아무리 우진이가 죽는다고 발광을 해도, 작년처럼 내버려 뒀어야 하는 거였다. 씨발. 복잡한 관계를 정리하고자 왔는데, 더 꼬여버렸다. 난 이제 유진 씨 얼굴, 더 이상 못 볼 것 같다. 그렇게까지 뻔뻔하진 못하단 말이다! 내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자책감, 회의감이 들었다. 자제력은 꽤 있다고 자신했는데… 그나마 나한테 있는, 거의 없는 장점 중 베스트라고 굳게 믿었었는데…. 나는 인간쓰레기가 되어버렸다. 유진 씨, 내 사랑 유진 씨. 난 이제 유진 씨 곁에 갈 수 없어요. 정말 사랑하는데……. 정말 행복했는데……. 미칠 듯이 머릿속을 맴도는 후회감을 접고서, 장을 보러 나갔다. 붕대도 새로 사고, 소염제랑 마데카솔, 오라메딘, 거즈랑 소독약까지 한가득 틀어쥐고, 죽거리를 찾았다. 그렇게 구멍을 헤져 놨는데, 죽 먹여야겠지. 아, 씨발. 나는 진짜 나쁜 새끼다. 아무리 우진이가 꼬셨다고 해도, 그 따위로 사람을 다루다니… 우진이가 기절했는데도 나는 헉헉대며 박았었다. 내가 지쳐서 쓰러지기 전까지, 계속해서 박았다. 생전 처음 겪은 육체적 오르가즘은 정신적인 것만큼 충족감을 주지는 못했어도, 상상치도 못했었던 쾌락의 영역이었다. 실로, 금단의 과일이라 봐도 좋은. 모든 이성과 신념, 자아를 잃고, 수치도 잊은 채, - 아니, 잊어도 좋았을 만큼, 몸이 주는 자극에 굴복했다. 정신이 들고 나서는 이미 나락으로 떨어져 갔지만, 그 순간의 쾌감은 오히려 터부를 건드림으로써 배가 되었다. 씨발, 애인의 남동생과 바람이라니! 나는 선악과를 낼름 먹은 것이다. 이로써 유진 씨란 천국의 대지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뭐라 변명해도 이건 자업자득이다. 또 한 번 자기혐오. 중얼거리다, 어제 외박했다는 사실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핸드폰을 놓고 와, 오피스텔로 돌아가서 집에 전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제 쓴 돈도 장난 아닌데. 이런 현실적인 문제조차 날 괴롭히는 구나. 어딘가로 도망가고 싶다, 진짜로. 그러고 보니 대한이 오늘 아침 굶었겠다. 유진 씨도 숙취로 속이 말이 아닐 텐데. 두 사람을 생각하니 다시 죄책감이 들었다. 왜 대한이한테까지 죄책감이 드느냐면, 뭐랄까, 내가 반듯하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 그 앞에 잘난 척 나서서 잔소리하는 것도 이제는 뭐라고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가뜩이나 변태라고 싫어하는데, 거기에 더해서 인간 말종 짓까지 해 버렸으니. 우울하다. 그래도…. “마무리는 잘 지어야겠지.” 오피스텔에 들어가자, 언제 깨어났는지 창백한 얼굴로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는 우진이와 마주쳤다. “몸 괜찮아? 푹 자두지 그러냐.” 좀 무뚝뚝한 어조로 말을 던진 뒤에, 시장 봐 온 것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봉지를 뒤적여서 약들이 들어 있는 봉투를 찾았다. “……간 줄… 알았어.” 우진이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목이 온통 쉬고 잠겨서, 쇠소리가 났다. 이런, 목은 생각 못했는데. 그의 짙은 갈색 눈이 일렁이더니,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간 줄 알았단 말이야!!! 이 나쁜 새끼야!!!” 그리고는 나를 끌어안고 울었다. 너무나 서럽게 울어서, 가슴이 쓰렸다. 알고 있었다. 그가, 어제 밤 도도한 척 했을 때부터, 애원했을 때부터, 유혹했을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다. 유진 씨가 나를 사랑하는 것 보다, 내가 유진 씨를 사랑하는 것 보다, 그가 유진 씨를 사랑하는 것 보다, 더 격렬하고, 더 깊고, 더 간절하게. 그래서 대한이를 보고, 그렇게 과민반응을 한 것이겠지. 내 주인이, 실제하고 있고, 옆에 있으니. 언제라도 유진 씨를 버리고, 자신을 버리고, 떠날 거라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어디까지 나빠져야 할까. 너를 사랑하지 않아, 우진아. 너와 몸을 섞은 이래로, 단 한 순간도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어. 이렇게 말해 주는 것이, 그를 위한 것. 아니, 나를 위한 것. 나를 품에 안고,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단단히 옥죄여 오는 그의 팔을 떼 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더 악착같이 붙잡았다. 한 숨을 쉬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일단 치료부터 하고 밥 먹자. 죽 끓여 줄게.” 전혀 색스럽지 않은 내용이었음에도, 뜨겁게 달아오르는 그의 몸이 느껴졌다. 우진의 불쑥 일어난 바지 앞섬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튕기고, “일어나, 아가씨.” 싱긋 웃었다. 지난 밤 내가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지가 여실한 그의 애널을 치료했다. 내 손이 닿을 때마다 움찔대는 구멍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혀로 핥아버렸다. 음. 나 변태 맞구나. “아앗! 뭐, 뭐하는 거야!! 미, 미쳤어. 변태새끼!!” 발버둥치는 우진의 허리를 꼭 잡고 고정시킨 뒤, 치료를 계속했다. “그만 좀 유혹해라. 이미 충분한 항문열상이야. 더하면 수술해야 될지도 몰라.” “누가 유혹을 했다는 거야!!!” “여기!” 움찔대는 애널을 가리키고 킥킥거리며 치료를 끝냈다. 간단히 크림스프를 끌이고, 우진이에게 먹였다. 먹으면서도 계속 내 눈치를 살피는 우진이가 안쓰러워서,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 7층 높이에서 보이는 사람들이나 차들의 모습이 그렇게 작지도, 크지도 않게 보였다. 손바닥에 올리면 들어가는 장난감 같다, 랄까. 바쁘게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람들은 오피스텔 앞에 자리한 예쁜 정원수 따위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무심히 지나쳐 갔다. 저렇게 정성스럽게 꾸미고, 봐달라고 하는데 말이다. 낮게 핀 꽃들은 다양해서, 주로 이름은 모르지만 도로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팔꽃 비스무리하게 생긴 것이라든가, 양배추처럼 생긴 꽃 같은 것이었다. 오히려 평범한 개나리나 진달래가 보이지 않아서, 좀 섭섭했다. 빛깔이 정말 고운데 말이다. 벚나무도 몇 그루 심어져있었지만, 시들하니 별로 꽃도 피지 않았다. 유진 씨, 괜찮을까…. 지포라이터와 담배를 꺼냈다. 불을 붙이려는데, 내 손에는 아직도 유진 씨와의 커플링이 껴져 있었다. 불붙이는 것도 잊고서 그것을 바라봤다. 빨개지는 얼굴, 눈물을 머금고, 서로에게 고백했지.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왠지 너무 먼 일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반지만 쳐다보다가, 그것이 유진 씨인 양, 유진 씨의 눈인 양, 손으로 덮어서 가려버렸다. 이걸 끼고 어제 그 짓을 했단 말이지. 씨발. 미간을 꾸기고서, 불을 붙였다. 다시 바지에 손을 넣다가, 핸드폰 생각이 났다. 집에…. 연락해야지. 어차피 대한이네서 잤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래도 나중에 귀찮으니까. 대충 가방을 뒤져서 핸드폰을 꺼내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우진이가 어느새 식사를 멈추고, 나를 뚫어지게 봤다. 화가 난 채 굳어버린 그 표정은, 어제 밤의 살기를 담은 것 같기도 하고, 오늘 아침의 눈물을 담은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눈이 마주치자 애써 도도한 척 표정을 추스르며 나를 보려했지만, 비틀린 미소 끝에 걸린 입가가 확연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유진이한테… 걸게?” 필사적으로 뭔가를 참으면서, 식탁아래의 주먹을 하얗게 말아 쥐고, 여전히 입가만 억지로 웃고 있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밥 먹는 중이니까, 닭살은 딴 데서 떨어. 니들 속삭이는 꼬라지, 역겨우니까.” 고개를 팍 숙이고는 식사에 집중하는 척 하며, 수저를 들고 입에 가져가 댔다. 최대한 천천히 평정을 가장했지만,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는 핸드폰을 든 채 현관문으로 향했다. 신발을 신고 문을 열려고 하는데, 그가 쫓아와서 죽 그릇을 있는 힘껏 던졌다. 챙! 소리와 함께 현관에 맞고 떨어진 그것은 온통 튀어서, 내 몸은 죽을 뒤집어 쓴 것 같았다. “나쁜 새끼!!! 나쁜 새끼!!! 이, 씨발, 잔인한 새끼!!! 꼭 그래야 돼?!! 오늘 하루만 나만 봐주면 안 되냐구!!! 유진이 생각 따위 하지 말란 말이야!!! 하지 마!!! 싫어!!! 싫다구!!! 진짜, 싫단… 말이야. 너 자꾸 그딴 식으로 굴 때마다, 너도, 유진이도, 다 죽여버리고 싶어져. 너랑 유진이, 아무렇지도 않은 거 아니야. 정말은, 진짜 싫었다구. 볼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았단 말야.” 히스테릭하게 외치다가 결국은 주저앉고 얼굴을 가린 채 울기 시작했다. 송우진. 널 대체 어쩌면 좋을까. 우진의 앞으로 가, 그의 머리를 가슴에 품었다. 머리를 꼭 끌어안고서, 유진 씨에게 했듯이 그의 검은 머리에 입술을 눌렀다.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뭐가 그렇게 늘 불안하냐. 내가 이대로 도망이라도 갈까봐 그래? 그냥 집에 전화 한 통 하려고 했던 거야.” “안돼, 하지 마! 싫어! 여기 나랑 있는 동안은, 누구한테도 전화하지 마! 내 생각만 해달란 말이야!! 난, 너 그렇게 나한테 무심하게 굴면, 진짜 기분 엿 같단 말이다.” 내 허리를 부서져라 감싸고 그가 떼를 썼다. 진짜, 애 같은 놈이다. 아, 고 3이면 아직 ‘애’의 범주에 들어가나? 그럼 나도 앤데. 에휴. 내가 미친놈이고, 다 내 죄다. 우진이는 기어이 약속을 받아내고, 내 핸드폰 밧데리까지 챙긴 후에야, 다시 자리에 앉아 새로 퍼 준 죽을 먹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아예 그 앞에 자리 잡고 앉아서, 우진이가 원하는 대로 실컷 얼굴을 봐줬다. 처음에는 뻔뻔하게 잘 먹다가, 점차 얼굴에 홍조를 띄더니, 탁 소리 내며 수저를 내렸다. “뭐야!” “니 생각만 하라며.” 그 말에 얼굴을 확 붉히더니, 뭐라뭐라 투덜거리며 과격하게 입에 수저를 집어넣었다. “그래서, 언제 ‘뒤돌아서서 안녕하고, 별거 아닌 놈이었어’, 하고 날 버릴 건데?” 툭하고 물어보니 쫙하고 째려본다. 헹이다. “한 번만 하고 안녕 하자며. 어제 했잖아. 이제 바이바이 할 차례다, 우진아.” 으드득 이를 갈며, 음산하게 바라본다. “그래서, 지금 나 이 꼴로 해놓고, 지는 룰루랄라 가서 유진이랑 뒹굴겠다고? 내가 한 판 땡겼냐? 니가 땡겼지?” “내 위로 와서 박힌 건, 너다.” 그가 얼굴을 붉히면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뒤뚱거리며 침실로 가서 쾅 소리 나게 문을 닫았다. 나는 천천히 그 뒤를 따르면서 손 안의 반지에 키스하고 뺐다. 안녕, 유진 씨. 내 예쁜 사랑. “나가! 간다며! 그럼 빨리 가버려!!” 눈시울이 시뻘겋게 되서 내게 던지는 베개를 잡아채고, 우진의 바싹 마른 입술에 키스했다. 당황해서 굳어버린 그에게 빙긋 웃으면서 떨어져 나왔다. 천천히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렀다. “뭐, 뭐야. 니 입으로 이제 더 안한다며! 나, 상처도 심하다고…” 움찔거리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렇게 아픈가? 어깨 너머로 셔츠를 넘기고 팔에 걸리게 한 채, 바지의 지퍼를 내리면서 우진의 옆에 가서 앉았다. 비스듬한 각도로 한 쪽 다리를 올려서 우진의 시야를 막고, 손을 걸친 후에 고개를 비스듬히 해서 손가락을 빨았다. 우진의 눈이 커졌다. “뭐…하는 거야…?” 그의 목소리는 벌써 잠겼다. 눈꼬리를 접고 혀로 입술을 축이며 눈웃음을 쳤다. 우진을 응시한 채 여전히 손가락을 빨면서, 다른 쪽 손으로 페니스를 꺼내서 훑었다. 가볍게 말아쥐고 쓸어올리다 내리고, 전날 밤 우진 속의 애널을 떠올리며, 허리를 천천히 흔들었다. 열기가 서서히 올라서, 어제 처음 배운 그 짜릿함에 몸이 실렸다. 점점 높아지는 고동소리에 맞춰, 나의 신음소리도 올라갔다. “…춥… 하…아… 응… 으, 음… 아, 아…. 으응…아아…윽, …하악… 앗…아…아아… 좋…아…” 츕츕하며 빨아올리는 손가락의 질척이는 음과, 다리사이로 언뜻 보이는 나의 손이 이끌어내는 마찰음, 그리고 신음소리가 어울러져서 마침내 스파크가 일었다. 우진이의 얼굴은 충격과 흥분으로 붉게 달아오른 채, 헉헉대고 있었다. “노…녹수야, 제발… 제발… 헉……” 움직이지도 못하며 안달하는 그에게 눈웃음치면서, 정액으로 젖은 두 손을 쪽쪽 빨아 먹고, 셔츠를 한쪽 팔 씩 빼면서 벗었다. 드러난 페니스를 침대 시트에 쓸어가며, 그에게로 기어갔다. 팽팽히 서서 하얀 이불 위로 그 존재를 주장하는 우진의 것에 다가가, 어제 그가 한 것처럼 이로 그의 바지 지퍼를 내렸다. 그는 도저히 못 견디겠는지, 손으로 지퍼를 내린 뒤 페니스를 꺼내서, 내 입에 처넣었다. 목구멍이 막히도록 넣고도, 채 다 들어오지 못한 남은 그의 것을 혀를 굴려가며, 이리저리 더듬었다. 입 안의 근육을 이용해서 빨자, 어젯밤 나는 저리가라 할 정도로, 내입에 박아 넣기 시작했다. “윽…으…학…학…아…악… 녹…수야!!!” 내 이름을 부르며 우진이 내 입에다 싼 그것을 머금었다가, 손에 뱉어냈다. 기진맥진한 우진을 보고 명령했다. “벗겨.” 그 말이 떨어지자, 짐승처럼 달려들어서 나를 쓰러뜨리고 바지를 찢어발기듯이 벗겨냈다. 나는 엎드린 채, 정액을 내 엉덩이로 가져가서, 우진이가 했던 것처럼 애널 사이로 손가락과 함께 밀어넣었다. 미끈덕거리는 덕에, 비교적 수월하게 손가락 하나를 집어넣고, 하나를 더 늘려서 집어넣는데, 안달이 나 있던 우진이가 내 입에 손가락을 처넣고 빨게 하더니, 내 손을 치우고 자신의 기다란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여기저기 콕콕 눌러보다가, 어느 한 지점을 자극하자, 나는 허리를 튕겨 올렸다. “여기야?” 흥분으로 더더욱 허스키해진 우진이 물었다. 나는 그에 응답하듯이, 아직 박혀있는 손가락을 향해 스스로 움직여, 신음소리와 함께 다시 허리를 튕겼다. “씨발, 장녹수!! 더 이상 도발하지 마!! 너, 복상사할 지도 몰라!!” “그 허리로?” 혀를 핥으면서 비웃자, 그대로 퍽! 하고 박아버렸다. 내가 어제 얼마나 죽을죄를 졌는지, 그제야 알았다. 진짜, 정말, 죽도록 아팠다!! 대한이한테 죽을 뻔 했을 때도, 이렇게 아프진 않았다. 뼈가 산 채로 들려지고, 살이 뻥하고 꿰뚫린 느낌이었다. 우진이는 그 상태로 잠시 멈춰서 숨을 고른 뒤, 내 페니스를 훑어서 나를 방심시켰다. “많이 아프지. 괜찮아?” 걱정스레 뒤에서 묻는 우진의 허리를 향해, 엉덩이를 들었다 놨다. “학!! 장…녹, 수! 도발, 하지 말랬지!! 크윽… 씨발, 죽여주게 조인다, 니 꺼. 그대로… 갈 것 같아.” 그리곤 아까 찾은 내 포인트를 한 번에 찔렀다. “아앗!!! 아…하아.” 눈앞이 새하얗게 될 만큼 짜릿한 쾌감에, 어느 정도 심리적 안정도 되찾은 나는, 엉덩이에 힘을 줘서 구멍을 조여 봤다. 그걸 느꼈는지, 갑자기 숨을 멈췄던 우진이 ‘씨발, 나도 몰라, 이제!’ 하고는 퍽퍽거리게 박아댔다. 그렇게 미친 듯이 박다가, 나를 뒤집고는 입안을 헤집는 키스를 했다. “녹수야! 녹수야! 녹수야! 크윽… 흑… 좋아서… 죽을 것 같아… 윽…!” “아앙… 우진아, 더 …… 더… 세게…. 아아, 더…세게 박아…학…흡…!” 짐승들의 교미처럼 우린 쾌락을 탐하고 또 탐했다. 우진이는 전날 밤의 데미지에도 불구하고, 끝내주는 절륜을 선보였다. 셀 수 없을 만큼의 절정을 보낸 뒤에야, 서로 지쳐 쓰러져서 잠들었다. 우진의 오피스텔에서 약 이틀 동안 섹스만 했던 우리는, 삼 일째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서로가 패잔병처럼 끙끙대며 널브러져서 킥킥댔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키스를 나누고, 섹스 한 판. 번갈아 가면서 대 줬지만, 내가 대 준 적이 더 많다. 섹스 요령이 생겼다랄까, 어떻게 하면 우진이나 내 몸에서 쉽게 쾌락을 끌어 낼 수 있는지, 나는 아주 빠른 속도로 터득했다. 얼굴과 손의 상처는 아직 덜 아물었지만, 즐기는데 지장은 없었다. 그렇게 서로의 몸을 탐하는 동안 까맣게 잊었던 현실을 깨달은 것은 4일째 저녁이 되어서였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서 섹스를 한 뒤에, 반 나체 상태로 창 밖을 바라봤다. 이제 조금 있으면 중간고사를 보겠네. 시험은 꼭 봐야지. “……무슨 생각해? 기분 안 좋아?” 뒤에서 허리를 손으로 감으면서, 목덜미에 입술을 댄 채 우진이가 물었다. “학교 가서 중간고사 볼 생각.” 연기를 후, 하고 불어줬다. 우진은 담배를 뺏더니 길쭉한 손을 뻗어서, 탁자위의 재떨이에다 비벼 껐다. 그리고 다시 내 목덜미를 자근자근 씹었다. “여기서, 나랑 평생 살자.” 점점 위로 올라와서 귀를 물며 속삭였다. 팔을 올려서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현실 도피는 여기까지야, 송우진. 우리 둘 다, 마침표를 찍으러 돌아가야 돼.” “4일은 너무 짧아. 난, 이 정도로 만족 할 수 없어.” 우진은 나를 가슴으로 강하게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런 우진의 팔을 부드럽게 풀고서, 뒤돌았다. 짙은 갈색의 눈을 들여다봤다. 내 심연과 내 사랑을 섞은 듯한. “유진 씨와 헤어질 거야.” 그의 눈이 정직하게 기뻐했다. 희망과 기대에 찼다. “하지만 너를 사랑하지는 않아.” 그의 눈에 절망이 깃들었다. “………상관없어. 계속, 이렇게 만날 수만 있다면.” 거짓말. 너는 또 원하게 되겠지. 나중에는 전부를 달라고 할 거야. 그의 검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제 만나지 않아. 처음에 약속했던 대로, 여기서 나가는 순간… 잊어. 어떻게 해도 내 세계의 중심은 대한이니까.” “이대한, 사랑해?” “아니. 사랑하지 않아.” 나 자신도 의외일 정도로, 쉽게 나온 결론이고 단정이었다. 하지만 그게 진실이었다. 나는 대한이를 사랑하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동경했던 것도 아니다. 동.정.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만난 그 오락실 화장실에서 그에게 얻어맞았을 때부터, 이미 그를 동정했다. 동경이라고 생각했지만, 동정이었다. 그의 눈 속이 비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언제나 무엇인가를 구하고, 허 해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가족이었고, 사랑이었고, 연민이었다. 싸구려 소설 같지만, 그런 거친 소년을 만난, 제법 잘 살고 있던 정상적인 소년이 그를 동정하고, 그러면서도 동경하는 척 했다. 가증스럽게도. 그리고 거친 소년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저 소년이, 자신을 건방지게도 동정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면서도 기만하고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외로웠기에 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동정이든, 동경이든, 옆에 있어 주는 걸로 됐으니까. 죽도록 싫어도, 외로움보다는 나았다. 한 술 더 떠서, 건방진 소년은 평생이라도 수발을 들어 줄 것처럼 그를 가지고 놀았다. 마치 좋아한다는 듯이, 반했다는 듯이. 소년은 그런 그가 무척이나 싫고, 징그러웠지만 참았다. 잠깐만 참으면, 그는 평생 자신을 외롭게 하지 않을 테니까. 그는 건방진 소년의 오만을 높이 샀고, 그런 면에서 조금 마음 한켠을 비웠다. 친구라는 이름과 근접한 곳으로. 이 건방진 소년이 어느 날 사랑을 했는데, 처음 주워 본 사랑이 너무 착하고 예뻐서, 깨어질까 두려워 매일 호호 불고 다녔다. 새로 생긴 그것이 너무 예쁘고 소중해서, 그는 매우 행복했다. 근데 그 사랑의 옆에는 수호자가 하나 있었다. 까탈스러운 수호자는 사랑 곁에 가지 못하게 매일 방해했지만, 사실 그것은 그가 그 건방진 소년을 사랑하게 되어서 였다. 건방진 소년이 그의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순간, 수호자는 갑자기 파괴자로 얼굴을 바꿨다. 자신의 사랑을 짓밟으려고 했다. 몇 번이나 거부해도, 그는 단념하지 않았다. 마침내 소년이 그가 내민 선악과를 먹고 타락하는 순간, 건방진 소년은 자신의 진짜 얼굴을 보고야 말았다. 너무나 흉측한 소년은 두려웠다. 이대로 어디론가 숨었으면 했다. 하지만, 그래선 안됐다. 거칠은 소년도, 예쁜 사랑도, 불쌍한 수호자도, 소년이 마침표를 찍어줘야 됐다. 하나도 남겨둬선 안됐다. 이 이상 자신을, 다른 이들을 기만할 수는 없었다. 소년은 용기를 내야한다. 세계를 끊어내야 한다. 툭. “녹…수씨? 난, 난,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지난 4일간 우진이랑 같이 오피스텔에 있었어요. 둘이 밤낮으로 섹스를 했습니다.” 냉정한 얼굴로, 지금이라도 올라가려는 손을 붙잡았다. 그의 아름다운 갈색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고, 끌어안고 키스하고 싶은 것을 억눌렀다. 내게 주어진 형벌. “우진이를 사랑한다거나 한 건 아니에요. 굳이 따지자면, 섹스 파트너였습니다.” 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유진 씨와 헤어지고 싶습니다.” 커플링을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뒤돌아서서 유진 씨에게 용서를 빌지 않으려 애쓰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유진 씨가 울면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비명처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다. 내… 예쁜 사랑.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아직도 사랑하고 있어요. 계속 곁에 있고 싶어요. 계속 당신에게 키스하고 싶습니다. 유진 씨. 사랑합니다. 사랑해요. 사랑… 해요. 유진 씨와 만난 커피숍을 나와서, 똑바로 걸으려고 애썼던 걸음이 흔들리며 나는 무너져 내렸다. 저 안에서 유진 씨가 울고 있다. 내 소중한 사람이. 앞이 흐릿해 졌다. 얼굴이 젖었다는 것을 알았다. 목에서 꾸그극 소리가 나면서, 뭔가가 울컥하고 나왔다. 나는 그렇게, 대로 한복판에서 실연의 통곡을 했다. 학교에 갔다. 5일 밖에 안 지났는데도, 학교는 달라보였다. 아니, 달라졌다. 5일전 학교는 내게 싱그러운 녹음이 어울어진 쉼터였지만, 지금부터는 피튀기는 전쟁터가 될 것이었다. 교문 앞에 서서, 맞은편 돌담을 쳐다봤다. 아무도 없지만, 내 눈에는 5일전의 풍경이 담겼다. 오렌지 빛 베스트와 그레이 색의 교복바지를 입고, 유진 씨와 우진이가 저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 옆에는 언제봐도 멋진 대한이와, 친구 병우, 웬수 상식이가 있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나중에 어울려서 같이 식사도 하고, 공원으로도 놀러갔다. 그것이 고작 5일 전이다. 고작 5일 전인 것이다. 교실에 들어가니, 대한이나 상식이, 병우도 없었다. 물끄러미 교실풍경을 바라보다가, 자리로 가서 앉았다. 책을 꺼내놓은 다음, 턱을 괴고 창 밖을 봤다. 교정에는 은행나무와 플라티너스가 파랗게 들어서 있었다. 개나리도 조금 보였다. 저렇게 꽃이 있으니, 남학교도 그리 살풍경해 뵈지는 않았다. 평화롭게 등교하는 학생들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나는 대부분 대한이들과 있었기에, 나 자체는 튀지 않아도 접근해 오는 애들이 별로 없었다. 같은 반이라 해도 이름도 모르고, 그나마 어울리는 연합회의 몇몇도 이름만 알았다. 앞에 선 녀석은 안경쟁이에 키도 제법 큰 녀석이었는데, 누군지는 나도 알았다. 우리반 반장이니까. 빤히 바라보자, 경직된 채 말을 고른다. 나는 싱긋 웃었다. “왜, 반장. 뭐 할 말 있니?” 최대한 부드럽고 상냥하게 물어봤다. 그는 당황해서 잠깐 머뭇거리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어, 저, 병, 병우가 학교 나오면 꼭 전화해 달라고 전해달래. 상, 상식이도 그랬고.” “그래? 응, 고마워. 근데, 걔네들 학교 안나와?” “으, 응. 토요일에 너 안 오고 나서, 월요일에 잠깐 왔다가, 그 다음부터 안 왔어.” “어디 놀러갔나? 알았어, 가르쳐줘서 고마워.” “이대한… 대한이는…. 저, 토요일부터 안나왔어.” “…아. 그래.” 눈썹을 찡그리니까, 반장이 서둘러서 가버렸다. 이런… 나, 이제 진짜 모범생으로 거듭날려고 하는데, 미리 친해두면 좋잖아. 5일만에 켜서 들어 본 핸드폰 안의 음성메세지는 꽉꽉 차 있었는데, 상식이가 50, 병우가 20, 엄마가 10, 유진 씨가 20…. 멍하니 음성을 듣다가 울어버렸다. 눈에서 눈물이 막을 새도 없이 줄줄 흘러나왔다. 유진 씨가 걱정해서 남긴 목소리, 어디냐고 묻는 목소리, 진심으로, 나를 찾는 목소리… 나의 유진 씨가 나를 찾는 동안 나는 우진이와 뒹굴고 있었다. 박고 빼고 신음하고. 나는 진짜 빌어먹을 새끼다. 재수없는 미친 변태새끼다. “노…녹수야.” 울면서 돌아보니, 반장이다. 반장은 티슈를 내밀며 닦으라고 해줬다. 그게 너무 고맙고, 또 서러워서, 나는 휴지를 붙든 채로 엉엉 울어버렸다. 반장은 곤란한 얼굴로 내 등을 두들겨 줬다. 나 체한 거 아닌데. 그래도, 고마웠다. 내가 바보였다. 내가 등신이었다. 대지가 바로 지척인데도, 왜 안보였을까. 반장은 내 옆으로 자리까지 옮겨가며, 나를 챙겨줬다. 게다가 반장은 매점에서 빵까지 사다줬다. 이렇게 공부 잘하고, 덕망 있는 애가 나한테 잘해주다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헤헤, 반장아. 고마워.” “녹수야, 넌 생각보다….” 뭔가 말하려다가 고개를 돌린다. “왜? 생각보다 뭐?” “아, 아니. 그냥, 어려보인다고. 나는 니가 굉장히 어른스러운 줄 알았거든. 언제나, 저 이대한하고 상식이, 병우를 챙기면서 다녔으니까.” “나 늙어 보인단 얘기 많이 들어. 방학 때 알바 구할 때는 그 덕도 많이 보고. 후훗.” “어? 녹수 너, 알바까지 해 봤어?” “응. 작년 여름방학 내내 했어. 바이크 살려고 했거든. 그거 무지 비싸서, 알바 세 탕 뛰었는데, 흐지부지 다 써버렸어.” 반장은 계속해서 놀라워했다. 우리같은 양아치들은 알바 안 할 줄 알았다나. 바보 반장. 그럼 돈이 어디서 나오겠냐. “대학생으로 위장취업해서, 커피숍이랑 호프집, 편의점에서 일 했지. 에헴.” “우와! 너 진짜 의외로 근면성실하구나. 난 학교도 잘 안오길래… 그, 좀 오해했었어.” “아냐, 반장아. 사실 놀러다녔어. 근면성실은 이제부터 해볼라고. 너, 공부 잘하지?” “아니, 그냥 보통이야.” “그래도 나보단 나을 거 아냐. 난 아예 기초가 꽝이거든.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볼 테니까, 좀 가르쳐 주라, 응?” 애교어린 내 말투에 어리둥절하다가, 반장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줬다. 아유, 착해라. 그렇게 반장이랑 나란히 앉아서 수업도 같이 들었다. 나는 뭔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그냥 선생님이 부르는 말은 무조건 받아썼다. 선생님들도 내가 다른 애들처럼 안자고 또랑또랑하다고 칭찬했다. 무식하게 필기를 해대는 나를 흐뭇한 얼굴로 보던 반장은, 자기 노트를 보여주고 이것저것 요령을 가르쳐 줬다. 그런 반장의 얼굴에서, 나는 또 다른 나를 봤다. 그렇구나. 대한이 심정을 조금 알겠다. 동정이건 뭐건 상관없는 것이다. 외롭고 힘들 때 옆에 누군가가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점심시간, 반장과 같이 점심을 먹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상식이었다. < 야!!! 이 씹새끼야!!! 너 지금 어디야!!! 아직 안 죽었으면, 내가 가서 죽인다!!! > “학교. 상식아, 학생이면 당연히 학교에 와야 하는 거 아니냐? 나처럼 성실하게 좀 살아봐라.” < 이 미친 변태새끼!!! 씹새끼!!! 꼼짝 말고 기다려!!! 너 튀면, 니네집 갈아 엎어버린다!!! > 고막이 떨어져라 소리를 지르고, 냅다 끊어 버린다. 걱정했나? 꽤 근처에 있었는지 30분도 안 지나서 교실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선생님께서 수업 중이신데…. 진짜 몰상식한 자식이다. 아, 쪽팔려, 이쪽 보지마라. 모르는 척 칠판을 바라보는데, 상식이는 교복도 아닌, 회색 양복을 입고서 구둣발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당신, 뭐야?!! 왜 수업 중에 함부로 들어 오는 거야?!!” 성질 급한 대머리 노총각 물리 선생님, 걔 우리반 애예요. 어떻게 저 새끼의 튀는 면상을 몰라볼까 하겠지만, 대출만 해대고 거의 수업을 삥땅치는 이 새끼 얼굴은, 우리 반 담임도 2학년 올라와서 2주가 지나서야 알았다. 물론 대출은 계속 되었기에 모른 척 했지만. 그래도 겨울에는 꽤 자주 볼 수 있다. 그렇다. 우리는 이런 학교에 다닌다. 학생 중 반이 넘게 양아치 놈들만 있는 것이다. 괜히 쓰레기 똥통 학교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선생님들도 모두 성격이 괄괄하고, 괴팍하고, 폭력적인데, 그대신 아주 무관심하다. 진짜 웬만한 일 아니면 체벌따위도 하지 않는다. 다들 귀가길이 무서우니까. 빨간줄이 그어질 사고나 공적인 기록상에 문제만 없으면, 삥땅을 치던 대출을 하던 노터치였다. 우리학교는 공부도 더럽게 못해서, 학군 아니라 전국구 내에서도 바닥을 기었다. 즉, 다시 말하자면 돌리고 돌리는 뺑뺑이 학교선정 시스템 중에서도, 진짜 문제아로 찍힌 놈들만 몰아서 넣은 학교라 볼 수 있다. 그러니 여기서마저 짤리게 되면, 진짜 받아 줄 곳이 없는 것이다. 어쨌든 흥분한 물리 선생님의 말은 개무시 때리고, 오른손에 빠따를 들고 쳐들어 온 상식이는 살기를 풍기면서 내게 걸어왔다. 그 빠따는 웬 거냐? 싸우다 왔나?……. 설마 그걸로 날 패진 않겠지? 상식이는 내 옆에 앉은 반장을 쫙 째려 봤다. 반장은 그 눈빛에 움칠 하고 주먹을 주었다. “뭐야, 이새끼. 씨발. 니가 왜 대한이 자리에 앉아 있어.” 상식이가 음산하게 중얼거리자 반장이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안돼는데… “이봐!! 당신 대체 누구야?!! 빨리 교실에서 나가!!!” 물리선생님이 그 쪼끄만 키로 힘껏 발돋움 해서, 상식이의 멱살을 잡았다. 그와 동시에, 상식이는 빠따를 후려쳐서 옆에 있던 유리창을 박살냈다. 선생님은 잡았던 것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뒤로 물러섰다. 나는 내 옆에서 펼쳐지는 그 꼬라지들을 팔짱을 낀 채 관망했다. 그런 나에게, 상식이가 완전히 맛이 간 눈으로 이를 갈면서 명령했다. “장녹수, 일어서!” 나는 한 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그런 상식이를 빤히 바라봤다. “안일어서?!! 이 미친 변태새끼!!! 나와!! 나가서 죽여줄 테니까!!!” 상식이는 내 앞의 책상을 발로 차서 넘어뜨리고는 빠따로 사물함이 있는 벽을 후려쳤다. 씨발, 짤리면 어쩔라구. 니머리로 검정고시 치면, 잘도 붙겠다. “왜 지랄이야,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냐?” 그 말에 이성이 끊어졌는지, 빠따를 내 머리통에 날렸다. 미친새끼, 내가 그걸 맞고 골로 가면 어쩔라구. 나 보고 싶어서 온 거 아냐? 나는 재빨리 피하면서 상식이의 정강이를 걷어찬 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팔꿈치로 옆구리를 찍었다. 그리고 의자를 들어서, 잠시 휘청한 상식이에게 후려치고 찍어버렸다. 쿠당소리와 함께 뻗은 상식이 위로 의자를 걸치고, 그 위에 올라타서 상식이를 내려봤다. 상식이는 고개를 잠깐 흔들더니, 나를 죽일듯이 째려봤다. 일단 휴전. “정신들어? 그러게 왜 빠따는 휘두르고 그러냐, 무섭게시리. 나 몸도 안 좋단 말이다. 이 얼굴 안보여?” 내 얼굴의, 아직 가시지 않은 멍이랑 피딱지 져있는 입가, 관자놀이를 가르키며 웃었다. “씹새끼. 어디서 맞고 돌아다닌 거야?” 퉁명스럽게 묻는 폼이, 많이 진정되어 보여서 의자를 치우고, 상식이를 일으킨 뒤에 옷을 털어줬다. 그리고 선생님께 집안의 빚 문제로 찾아 온 조폭이라고 변명을 치고, 양해를 얻어서 조퇴했다. 반장 얼굴한테도 밝게 인사를 하고 짐을 챙겨, 상식이 손을 붙든 채 교문을 나섰다. “대체 5일 동안 어디 처박혔던 거냐?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사라져 버리니, 연합 애들 풀었었잖아. 우리한테 앙심 있는 새끼들이 끌고 가서 죽여버린 줄 알고. 혹시나 해서, 클럽이랑 조직까지 뒤집고 다녔어.” 터덜터덜 걸으면서 담배를 물고는 꿍얼거렸다. “진짜 어디서 맞고 지내다 탈출한 거 아냐? 얼굴도 왕창 깨지고, 몸도 여기저기 멍든 것 같고.” 멍이 아니라, 쪼가리다. 키스마크. 밤의 황태자가 그것도 못 알아보냐? 나는 상식이 담배를 뺏어물고, 야시시하게 웃어보였다. “묻지마. 알면 다쳐.” 후우- 하고 벙쪄 있는 그 얼굴에 뿜어주고는, 다시 담배를 입에 물려줬다. 완전히 굳어서 안색이 창백해진 상식이는, 이어서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팔을 걷어 부치고 벅벅 긁으면서, 나를 두려움 가득 찬 눈으로 째려봤다. “씨…씨발!! 아부지, 저 변태새끼가 또 진화했어요!!! 아아악!!! 미치겠네!!!’ 지난 4일 동안의 하드섹스로 체력이 바닥난 데다가, 여러가지 정신적 데미지를 받은 나는 꽤 지쳐있었는데, 상식이의 그리운 욕소리가 들리자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병우는?” “지금 뒷처리하고 있지. 말했잖아. 너 찾느라고 여기저기 뒤집고 다녔다고. 전화라도 해줘라.” 상식이는 아직도 팔을 벅벅 긁어대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바람나서 도망친 마누라냐? 뭘 그렇게 열심히 찾고 다녀.” 웃으면서 말하자, 또 뭐라 뭐라 욕 할 줄 알았던 상식이는 아무 말 없이 얼굴을 굳혔을 뿐이었다. 헛, 참. 뭐냐. “어쨌든 걱정해 줘서 베리베리 땡큐다. 웬지 뭉클해용~ 한사장님!” 실실 웃으며 장난스럽게 비음 섞어서 말하는데도, 상식이는 여전히 대꾸도 없었다. 쳇. 뭔가 김이 빠져서,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병우야, 나 녹수.” < 녹수?!!! 녹수야?!!! 진짜, 녹수야?!!! 상식이는?!! 만났어? 상식이 만난거야?!! > “응, 걱정했지? 미안해. 사정이 있어서 연락도 못했어.” < 몸은 괜찮아? 아까 상식이한테 전화왔었는데, 너 학교에 있다고 해서 꾹 참고 전화 안 했어. > 보고 좀 배워봐라, 한상식! 어렸을 적에 제일 사고뭉치였던 병우가 이런데, 넌 대체 뭐냐? 기껏 오랜만에 봐서는 패려고 하질 않나. “걱정시켜서 정말 미안해. 나, 많이 보고 싶었어?” < 응, 굉장히. 유진 씨네 학교에 가서도 물어보고, 여러 군데 들러서 물었는데도 못 찾아서 걱정했어. 집에는 연락한거야? > “어제 들어가서 죽도록 맞았지. 헤헤. 진짜 미안.” < 지금 대한이네로 가는 거야? > “응, 이따 보자.” 뿌듯한 마음으로 병우와 통화를 마치자, 상식이가 옆에서 기묘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쳐다봤다. “왜?” “넌 왜 그렇게 전화만 하면 닭 잔치를 벌이냐? 아, 씨. 정말 간지러워서 죽어버리는 줄 알았네.” 그러면서 벅벅 긁는 상식이에게 은근히 물어봤다. “부러워?” “아아악!!! 미치겠네!!!” 학교에서 대한이 집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버스타고 10분, 슬슬 걸어도 30분이면 도착했다. 우리는 늘 걸어서 다녔다. 등교할 때나 땡땡이 칠 때나, 멀거나 특정 장소 아니라면 대개는 걸어서 이동을 했다. 멤버도 네 명이라서 버스보다는 택시를 더 자주탔다. 익숙한 가로수 길을 따라 걸으면서, 천천히 주위를 즐겼다. 이제는 꽃들이 절정에 다달은 듯, 나무마다 온갖 향기가 그득했다.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걷고 있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상식이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이, 아주 진지한 얼굴로 쳐다봤다. “왜?” “너… 왜 대한이 안 물어 봐?” 상식이를 응시했다. 진지한 얼굴을 한 상식이가 어느때보다도, 아름다웠다. 그래, 대지는 이렇게 옆에 있었어. 눈에 새겨 넣듯이, 상식이를 꼼꼼히 바라봤다. 탈색했지만 결이 좋은 갈색 머리, 쌍커플이 진하게 진 아몬드형 커다란 눈, 곧은 콧대, 두터우면서도 보기 좋은 입술.- 언제나 싸가지 없는 말만 골라서 하는. 어렸을 때랑 많이 변하지 않았구나. 훗. “그때, 왜 내게 그런 말을 한 거야?” “언제?” “3년 전 겨울, 크리스마스 이브 날 밤에 클럽 앞에서.” 상식이가 눈을 크게 뜬 채로 굳었다. 나는 대답을 기다렸다. “………… 병신 같아서.”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이, 그는 경직되고 멍하니 말했다. “……… 대한이는 너 싫어했는데도, 아주 징그러워했으면서도………. ………기다렸어. …………널… 기다렸어.” 내 눈을 피했다. “싫어 죽겠다고, 죽여 버리고 싶다고 하면서도, 만취한 상태에서 욕을 하면서도, 장담했지. 니가 자기를 기다릴 것이란 걸. 킬킬거리면서, 장담했지. 클럽 애들도 흥미로워했어. 그런 변태는 처음이라면서,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라면서 구경시켜 달라니까, 또 니 욕을 해댔어. 더럽고, 징그럽고…혐오스러워 죽겠다며… 처음에 쫓아다닐 때는 죽도록 패보기도 하고, 욕도 했었는데, 그래도 징하게 따라 붙었다고. 나중에는 귀찮아서 내버려 두게 됐다고, 짜증스럽게 말했지. 클럽애들 중 하나가 ‘오늘같이 추운 날인데도 따라다닌단 말이야?’ 라고 물었어. 그래서 내기를 걸었지. 과연 대한이표 미저리가 오늘 같은 날씨에도 밖에서 기다릴 것인가.” 기다렸었다. 대한이에게 줄 선물을 사고, 조금이라도 빨리 전할 수 있을까 하며. “……그렇게 추웠는데, 네놈은 눈에 젖은 싸구려 잠바에 손을 넣고 발을 동동거리면서도, 기쁘고, 기대감에 차서, 하나도 안 춥다는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지.” 상식이의 단정한 눈썹이 심하게 구겨졌다. “그 전까지, 나는 너를 친구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4년 넘게 얼굴을 매일 같이 봤지만, 너는 그냥 대한이를 쫓아다니는 좀 별난 변태새끼라고 생각했었어. 그 가을에 대한이 가출 때에는, 날뛰는 거 보고 진짜 대한이한테 미친 새끼구나, 라고 생각했었구. 처음으로 니가 우리한테 여행가자고 하는 거 동의한 것도, 그냥 변덕이었을 뿐이었어. 나나 병우, 대한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편리한 꼬붕이라고 생각했지. 나한테 건방지게 이것저것 간섭하는 것도, 그냥 편리하니까 냅둔 것뿐이었어. 솔직히 대한이랑 같이, 너 없을 때 욕도 하고 그랬어. 그 날의 대한이처럼, 대개 그런 내용으로. 가볍게 얘기하고 낄낄거렸지.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니까. 그랬었어. 그랬었는데……” 상식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클럽 애들 앞에서, 너를 까발기고, 비웃고, 경멸하는 대한이 모습을 보니까, 뭔가 울컥했어. 기분이 그지 같았지. 받을 건 다 받아먹으면서, 뒤에서 딴 소리하는 게 꼴사납고 재수 없었다. 그 전까지는 분명히 나도 같이 그랬는데 말이야. 왜 그렇게 혐오스러웠는지 모르겠어. 널 한 번도 본 적 없는 클럽 애들조차, 너에 대해 함부로 비웃고, 욕하는 것을 들으면서, ‘그렇게까지 형편없는 새끼는 아닌데’ 란 생각을 했었다. 아무리 싫고, 재수 없었어도, 4년이나 부대낀 녀석을, 전혀 모르는 부자 녀석들한테 노리개꺼리로 던져 주고, 거만한 표정으로 니가 자신을 데리러 오는 게 당연하다고 하는 대한이가, 진짜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찝찝한 기분도 털 겸, 거기서 나왔지.” 나를 향해 씁쓸하게 웃어보였다. “열 받더라. 둘 다 재수 없고, 병신 같았어. 그래서 말해 준 거야. 대한이한테 정나미 떨어지라고.” 조금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 깊은 뜻도 모르고 말야, 너는 등신같이 대한이가 보고 싶다고 했지. 나를 물어뜯기 까지 하고. 그런 얘기를 듣고도 대한이를 끝까지 챙기는 걸 보고는, ‘이 새끼가 진짜 등신이구나.’ 생각했어. 근데 의외로 다음 날부터 나타나지 않더라. 대한이야 그 이유를 몰랐지만, 나는 알았지. 훗. 솔직히 고소했다. 니가 자랑스럽기까지 했어.” 갑자기 다시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런데, 대한이가 흔들렸어.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그 변태새끼가 이제야 떨어져 나갔나보다’ 하고 후련한 척 했지만, 그는 분명히 충격을 받았어. 그것도 아주 치명적으로.” 모르는 얘기였다. 뜻밖의 얘기에 그를 쳐다봤다. 상식이는 여전히 진지했다. “그것은 하루가 지나면서부터, 확연히 드러났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것 같은데도, 무엇인가가 틀렸어. 시작은 길가에서 마주친 양아치들이었어. 고등학생 양아치들 3,4명이 우리한테 시비를 걸었지. 나와 병우가 나서서 대충 가볍게 처리하려는데, 우리를 제끼고 대한이가 먼저 달려들었어. 그리고는 멈추질 않는 거야. 주먹이 터질 정도로, 온통 피칠갑을 해서 녀석들을 패다가, 한 놈이 기어서 도망가려는 걸 보고 그대로 잡고 집중적으로 때리기 시작했어. 나는 도가 지나치다는 걸 알았다. 그대로 계속 팼다간, 진짜 죽이게 생겼던 거야. 그래서 병우랑 같이 말리는데, 이번에는 우리를 공격하더군. 빽차가 뜬 다음에야, 멈추고 도망쳤지. 뻗은 놈은 척 보기에도 내장파열이었어. 두 눈을 까집고 거품을 물고 기절해 있었지. 그 다음에는, 믿기 힘들겠지만 여학생이었어. 그것도 대한이가 좋다고 고백하려고 온. 대한이는 여자애가 보는 앞에서 비릿하게 비웃고는 편지며 선물을 짓밟고, 울고 있는 그녀를 패기 시작했어. 얼굴을 아주 뭉개놨었다. 그리고는 연합 애들 중 제일 질 안 좋은 새끼들한테 던져줬어. 가지고 놀라고. 강간당한 여학생은 그길로 차에 뛰어들어서 죽었어. 알겠냐? 죽었다고! 씨발. 그 새끼는 술집에서조차, 그 짓을 했어. 여자들을 가지고 놀다가 패고!! 업주들이 보낸 떡대들을 죽을 때까지 패고!!! 완전 씹새끼였다. 그래도 나나 병우는 말릴 수가 없었어. 무서웠거든, 그 새끼가!! 그게 고작 일주일 사이에 일어난 일이야!! 일주일이라고!!! 니가 없었던 단 일 주일 동안, 그 새끼는 사람을 죽였어!! 맞고 냅둔 새끼들 대다수도 진짜 중상이었다고!!!” 분노에 찬 음성으로 말을 끝내고, 상식이는 숨을 골랐다. “지옥 같았다. 안 보려고 했어도 안 볼 수가 없었지. 나는 대한이랑 같이 다니는 게 두려울 정도였어. 원인은…. 대한이가 미쳐버린 원인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장녹수, 니 새끼밖에 없었지. 그리고 니가 대한이 앞에서 사라진 건, 나 때문이었고. 난 그걸 대한이가 혹시라도 알게 될까봐 무서웠다. 미칠 듯이 죄책감이 들었지. 특히 죽어버린 여학생이 나 때문인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어.” 상식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울지는 않았다. “병우는 둔해 보이는 것과 다르게, 눈치가 빨랐다. 무슨 일이냐고 묻기에, 나는 병우에게 그 날 밤의 일을 털어 놓았어. 병우도 난감해했지. 너한테 가서 빌어볼까, 하고 생각도 했었다. 거짓말이었다고, 대한이는 그런 말 안했다고…. 그러니까, 제발 돌아오라고 하고 싶었어.” 그가 다시 나를 향해서 힘들게 웃었다. “그 때, 정동진 가기 전 날 니가 전화해줬을 때, 난 붙들고 울 뻔 했었어. 너무 반갑고 고마워서.” “반가워서 그렇게 욕을 했냐?” “당황해서 그랬지.” 피식 웃었다. 그래, 이제 내가 아는 한상식 같다. “병우가 대한이 데리고 가자고 했을 때, 나는 조마조마 했어. 둘이 마주치게 되면, 무슨 얘기를 하게 될지 몰랐으니까. 또 대한이 놈 폭주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선선히 대한이가 같이 갈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 의외일 정도로 선뜻 따라나섰지만. 기차역에서 너 담배 피는 걸 보는 순간- ‘아, 이 새끼도 힘들었구나.’ 하는 걸 알았지. 당연한건데 말야. 나나 대한이 생각하느라고, 니가 어떨지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어. 그제야 너한테 미안하더라. 너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나 병우를 대했지만… 니가 대한이한테 별로 관심두지 않는 게, 나까지 느껴질 정도여서, 병우나 나나 안절부절 했었어. 대한이는 지난 일주일 간 참는 법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대한이는 화내지 않더라. 기분이 안 좋은 게 느껴지는데도, 화내진 않았어. 미쳤던 광견이 주인 만난 것 마냥 이빨을 감췄지. 병우도 나도, 그 때 알았다. 대한이가 널 그렇게 욕하고 싫어하면서도, 사실은 너에게 기대고 있다는 것을. 새끼가 어미새에게 바라듯이, 너에게 무조건적인 포용을 바란다는 것을.” 상식이는 한 숨을 내쉬고, 담배를 새로 뜯었다. “‘애인이 생겼다’고 했을 때, 그래, 니가 우리 배터지게 먹여놓고서, 쑥스러운 얼굴로 나가서 그렇게 외치고, 뭔가 기대하는 얼굴로 우리들을 바라봤을 때 말이다. 진짜 명치끝을 강타당한 기분이었어. 헉, 소리가 날 정도로 충격이었지. 뭐, 그 때는 아직 남자애인인 줄은 몰랐지만…. 우린 네가 대한이를, 그- 니 지금 애인처럼,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줄 알았거든. 그래서 그렇게 대한이를 챙기는 거라고. 이건 우리가 오해했어도, 전적으로 네 잘못이야. 너, 진짜 대한이 짝사랑하는 여고생처럼 쫓아다녔잖냐. 아침부터 밤까지. 대한이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래서 일부러 더 여자들과 뒹구는 모습을 네게 보였었지. 네게, 자신은 남자한테 관심이 없다, 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었던 거야. 그러면서도 특정인을 사귀지도 않았어, 혹시라도 니가 토라져서 가버릴까 봐. 그게 대한이의 딜레마였지. 니가 떠나는 건 안 되는데, 곁에 둘 수는 없다는 것이. 아마 니가 여자였다면 진작에 상황 끝이었겠지만, 넌 누가 봐도 남자잖아. 것도 덩치 큰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뭐, 우리 중 제일 작긴 하지만. 넌 몰랐겠지만, 대한이도 나름대로 신경 많이 썼었다. 이쁘장한 남자를 안아보려고도 해봤고… 게이 문학인가 이딴 것도 뒤져보고, 외국 갔을 때 게이커플 들을 보고 적응도 해보려고 해봤고. 호모 포르노도 구해다가 봐 보고… 병우랑 나까지 동원해서 갖가지 해괴한 시도를 했지만, 안되더라. 이쁘장한 남자애는 침대에서 얻어맞고 나왔고, 게이문학은… 해석이 불가능하데. 외국에서 만난 게이 커플 중 하나가 너랑 대한이처럼 덩치도 비슷하고,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도 비슷해서, 조금 가능성을 가졌었는데, 한 놈이 대한이를 덮칠려고 했었어. 대한이 빡 돌아서, 그 새끼 죽도록 패버리고, 빨개 벗겨서 길거리에 매달아 놨었다. 이태원에 있다는 게이바에도 가봤는데 거기서도 어떤 외국놈이 찝적거려서, 셋이서 같이 팼어. 하여간 그랬었다. 마지막으로, 병우랑 내가 알게 된 일본 쪽 애들 통해서 호모 포르노 테잎도 구해 봤었는데, 우리 셋 다 그거 보고 토했다. 그리고는 기브업 했지. 그러니 대한이가 너, 애인있다는 말에 얼마나 충격을 먹었는지 알 만 했다. 우리들은 니 생각해서 난리 부르스를 췄는데, 진짜 지랄 생 쇼가 된 거였지. 순간 바보된 기분이더라. 나랑 병우조차 열이 받는데, 대한이가 빡도는 것은 당연했지. 대한이를 보니까, 열이 받을 때로 받아서 완전히 퓨즈가 나간 것 같았어. 무서웠다. 그 악몽 같던 일주일이 당장이라도 눈앞에 다시 펼쳐질 것 같았어. 널 족치기 시작한 대한이는 그때와 같았어. 때릴수록 폭주하는 것까지 똑같았지. 진짜 죽이려고 달려드는 게, 병우와 나는 완전히 겁먹었었다. 대한이가 칼까지 들었을 때야, 간신히 정신이 들어서 말릴 수 있었어. 우리 둘이 같이 죽도록 막았는데도, 기어이 가서 니 목을 조르더라.” 나는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았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간신히 담배를 찾아서 입에 물었을 때 쯤, 상식이가 말을 이었다. “……대한이한테는 너 죽었다고 했었다. 아니면 달려가서 다시 죽이려고 할 것 같았거든. 이상하지 않냐? 둘이 사귄 것도 아니고, 니가 애인 생겼다고 대한이를 버릴 것도 아닌데, 대한이는 배신당한 애인처럼 굴었어. 그래도, 너무 무서웠다. 그 새끼 눈이, 살아있으면 꼭 잡아 죽이겠다는 눈이었어. 그래서 너 죽었다고 할 수 밖에 없었지.” 후우. 숨을 내뱉었다. 상식이는 그런 나를 흘낏 보다가, 담배를 비벼 껐다. “클럽 애들한테 말해서 조직으로 들어가더라. 그리곤 두 달 동안 닥치는 대로 일했지. 패고, 부수고… 직접 죽이진 않았지만, 상대 중에 중상입고 죽은 새끼들도 있었어. 전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클럽 애들이 나서서 무마시키더라. 말릴 생각 따위는 들지도 않았어. 그저 병우랑 나는, 대한이 옆에서 눈치 보며, 니 부모님께 드릴 합의금 마련한다고 붙어 있었을 뿐이었다. 솔직히 그 때, 그 새끼가 너무 무서워서 도망가고 싶을 정도였다. 이제 사람 목숨을 개, 파리 보듯이 하는데, 진짜 도살꾼 옆에 앉은 소 심정이었다. 그래도, 혹시라도 너 살아 있다는 소리 귀에 들어갈까 봐, 최대한 옆에 붙어 연막 폈지.” 보도 블록을 다리로 쓱쓱 밀더니, 그 위에 앉았다. 그리고 옆에 앉으라 손 짓 한다. “니가 찾아 갈 줄은 몰랐어. 그것도 퇴원한 바로 다음 날. 상식적으로, 제정신 가진 놈이 자기 죽일라고 했던 새끼를 퇴원하자마자 찾아간다는 게 말이 되냐? 것도 복수할 것도 아니고, 걱정이 되서? 나중에 혼비백산해서 갔는데, 대한이 혼자 멍하니 앉아 있더라. 못 만났나 싶어서 안심하는데, 대한이 발치에 열쇠고리 떨어져 있었어. 작년 여름에 대한이가 너 줄라고 사왔던 거. 그거 보고 놀라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 설마 벌써 죽인 건 아니겠지 하고 생각하는데, 대한이가 열나 살벌하게 쳐다보더라. 한참을 그렇게 보다가 ‘쿡’ 웃고는, ‘나랑 너랑 병우, 몽땅 다 절교란다.’ 하고, 발 밑의 열쇠고리 주워서 나갔어. 진짜 순간 엄청 쫄았었다. 나중에 니 새끼 나타나서, 천연덕스럽게 대한이 머리며 얼굴 만지는 거 보고는 경기가 다 났지. 암만 봐도 너는 미친 놈이야.” 키득키득 대다가, 다시 나를 향해 진지하게 말했다. “바로 그 날 저녁에 불쑥 나타나서, 나랑 병우 내놓으라고 혼자 조직에 쳐들어와 불지르는 것 봤을 때, ‘아, 저래서 대한이가 그랬나.’ 그렇게 생각했다. 평소에는 그렇게 얄밉고, 재수 없게 굴면서도, 너는 꼭 결정적인 순간에 기대게 만드니까. 생각해보면 대한이 할머니 돌아가실 때도 그랬고, 대한이 가출했을 때도 그랬지. 그래도 의외였다. 대한이 일이었다면 니가 미친 짓 하는 거 여러 번 봤으니까 그러려니 생각했었겠지만, 나하고 병우한테까지 그럴 줄은 몰랐었거든. 니가…” 상식이는 말을 끊고, 조금 어색해하며 얼굴을 붉혔다. “니가, 우리도 ‘친구’로 생각하는 구나. 대한이만큼은 아니어도, 그 근처까지는 되는구나, 하고 감동 먹었었더랬어.” 쑥스러운 듯이, 얼굴을 돌렸다. “사실 우리 외국 나가는 거, 그냥 놀러가는 거 아니었어. 클럽 애들 들러리 한 것도 사실이지만, 경호원으로 간 거야. 또래에다 외모 괜찮으니 데리고 다니기도 좋고, 지키는 솜씨는 별로 없어도 싸우는 솜씨 하난 끝내 주니까.” 나는 놀랐다. 처음 아는 일이었다. “놀랐냐? 대한이 새끼도 아무생각 없이 사는 건 아니야. 외국 나가면 체류기간 동안 짬짬히, 꼭 뭐 한가지씩은 배워서 오니까. 국영수 같은 건 못해도, 그 자식, 어디 가서 굶어 죽진 않아. 음식도 잘하고, 기계도 잘 다뤄. 펜싱, 사격, 승마나 요트, 배도 몰 줄 알아. 원래 손재주도 있고, 잔머리도 잘 돌아가서, 뭐든 금세 익숙해지지.” 헤헤 거리며 뻐기다가, 갑자기 내 머리를 잡아 땡겨서 귀속말을 했다. “클럽 애들은 우릴 이용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론 대한이 손에 놀아나고 있어. ‘조직’도 작년 겨울 그때 기점으로, 대한이가 먹어 버렸고, 이미 클럽 애들 쪽 통해서 다방면에 발을 넓혀 놨어. 연합회 중에서도 괜찮은 새끼들로만 머리 골라놓고, 조직에 심어서 키우고 있어. 야,야, 눈쌀 찌푸리지 마라. 조폭 아니야. 니가 그렇게 싫어하는 대가리 똥만 든 새끼들 되려는 거 아니라고. 야망이야. 대한이는 클럽을 손에 넣으려고 하고 있어. 대한민국을 좌지우지 할, 장래 서러브래드들을 휘어잡고 싶어한다고. 지금이야 그 새끼들 똥구멍이나 빨고 있지만, 언젠가 그새끼들 머리 위로 올라 설 거야. 대한이는 반드시 그럴 놈이고, 나랑 병우는 그래서 따르는 거야. 그냥 친구라기보다는, 그래, 너처럼 우리도 대한이 추종자야.” 뭔가 엄청난 얘기를 했다는 듯이 말하곤, 사탕을 바라는 아이의 눈 빛으로 봤다. 소설쓰냐? 시큰둥한 내 반응에 쳇쳇 거리다가, 다시 기분나쁘게 쳐다보고 웃었다. 뭐야. “너, 내 선물 센스가 꽝이라고 했지. 훗. 대한이에 비하면… 키득.” 그리고는 계속 혼자 큭큭 거렸다. 그 열쇠고리 이쁘기만 하던데 뭘. 대한이한테 다시 던져버리긴 했지만. “역할이 역할이다 보니, 외국에서는 개인 시간 내기 거의 힘들었어. 거기다 대한이는 남는 시간 동안 뭔가 배우느라 바뻤지. 그러니 선물 같은거 고를 틈이 있겠냐. 게다가 경호 대상은 대부분 여자애들이었어. 들르는 데라곤 몽땅 다 여성코너였다. 나는 대충 그 안에서 해결 봤지. 작년 여름에도 상황은 비슷했는데, 대한이가 같이 다니기로 한 여자가 뭔가 특이한 선물 사고 싶다고, 보석 수공예점을 찾았어. 선물 고르는 여자들 기다리다가, 나는 그냥 나왔는데 대한이는 뭔가 한 참을 보더라고. 그러더니 포장까지 해서 사더라. 보니까 하늘색 큐빅 안에 녹색 에메랄드가 박혀있는, 그 열쇠고리였어. 생전 안하던 짓 하니까, 옆에 있던 여자도 놀라서 꼬치꼬치 캐묻다가, 막 달라고 졸랐지. 그거 수제품이라 하나 밖에 없는 거거든. 대한이, 죽어도 그거 안 내놓고, 다른거 사서 주더라. 근데 그 열쇠고리 이름도 있었는데, 그게 뭔지 아냐? 녹수야?” 별로 안 궁금했지만, 그냥 물어봐 줬다. “뭔데?” “Green-Wood (綠樹)” 난 솔직히 놀랐다. 대한이가, 설마 그런 식으로 신경 써서 사온 것인 줄은 몰랐다. 그냥 지나가다가, 싸구려 하나 사온 줄 알았는데…. “대한이 선물센스 끝내주지 않냐? 왕 유치뽕빨. 아씹. 왜 안 웃어? 웃기라고 한 건데. 뭐냐, 그 ‘나 지금 감동 중이다’ 표정은…. 이 얘기 해주면 울겠네. 이거, 해도 되나? 상관없겠지. 너 이제 애인도 있으니까.” 그 애인과 어제 헤어졌지만 궁금했기에 참았다. “대한이, 그거 지금도 꼭 몸에 갖고 다닌다. 가끔, 아주 기분 좋을 때나, 기분 나쁠 때, 술 마시고 삘 꽂히면, 그거 꺼내 놓고서 열심히 보더라. 물론 너 없을 때만 그랬어.” “……………” 지포라이터를 꺼냈다. 새 담배에 불을 붙이고, 그것을 바라봤다. 기막힌 우연인가…. 악연인가? 나는 선물하려다 못했고, 대한이는 선물하고도 돌려받았다. 나는 선물하려던 지포라이터를 갖고 다니고, 그는 선물했던 열쇠고리를 갖고 다닌다. 나는 상처받아서 주지 못했고, 대한이는 상처주고서 돌려받았다. 대칭으로 삐그덕대는 우리의 관계. 선물 하나에서조차. 연기가 희뿌옇게 번졌다. 녹색 나무 사이로 도달한 그것을 지켜보다가, 태양에 눈이 닿아 눈물이 날 뻔 했다. 상식이는 목이 탄 지, 여기저기 둘러보다 편의점에 들러서 맥주 두 캔을 사왔다. 내게 하나를 넘기고는 꿀꺽꿀꺽 입도 안 떼고 마신다. 캬-소리와 함께 캔을 우지끈 꾸기고는 뒤로 휙소리 나게 던졌다. 에이, 몰상식한 놈. 혀를 차고 바닥에 떨어진 그것을 주워다가 근처 휴지통에 버렸다. 아, 난 정말 착하지 않은가? 준법시민, 그 자체다. 나의 선행에 스스로 칭찬을 하는데, 상식이가 툭하고 얘기를 꺼냈다. “5일 동안, 너 그렇게 사라지고 나서, 대한이 미친놈 같았다.” 말하고 나서 열 받았는지, 나를 살벌하게 노려봤다. “중 2 때, 대한이 없어졌을 때의 너만큼, 그 새끼도 홱 돌았었어. 좀 체계적으로 돌았어서 그렇지. 전날 분명히 니 애인 놈이랑 같이 놀아주기까지 했는데, 다음날부터 소식이 뚝 끊겨서 집에서도 모르고, 애인 놈도 니 행방을 모르니, 머리가 빡 돌더라. 내가 그런데, 대한이 새끼는 완전히 퓨즈가 나갔지. 너 사라진 날 바로 나하고 병우한테 전화 때린 뒤에 집에다 확인해보고, 자기는 틀어박혀서 여기저기 뿌려 놓은 정보원들한테서 연락받고, 연합 소집 시켜서 요근래 적대 분위기인 학교리스트 뽑은 뒤, 조직 애들 족치고, 클럽 애들한테 까지 가서 긁었어. 오죽하면 걔들이 경찰청장한테 가서 전단지를 뿌렸겠냐. 조직 애들도 억울하고 열 받아서, 이 득득 갈며 그동안 밟았던 곳들 쑤시고 다녔지. 대한이가, 죽었으면 시체라도 찾으라고 발광을 하는데 어쩌겠어. 그랬는데 너 오늘 태연하게 학교에 있다는 말 듣고, 내가 제정신이었겠냐? 모르긴 몰라도 나중에 연합 애들이랑, 조직 애들도 한 번은 다녀갈 걸? 그 짧은 시간에 옛날에 쑤셨던 데는 다 다시 전쟁을 치르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가보면 아지트에다 니 사진 붙여놓고 사시미랑 손도끼로 다트놀이 하더라.” 나 엄청 유명해졌나 보다. 헤에. 근데, 상식아. 너 진짜 뻥 잘친다. 아예 소설가로 나서지 그러냐. 대한이가 무슨 비밀결사 암흑 조직의 보스쯤 되는 줄 아냐? 그냥 주먹 좀 휘두르는 돈 없는 양아치지. 어디서 영화는 많이 봐 가지고…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냥 생각만 하기로 했다. 괜히 말했다간 상식이한테 따발 욕을 얻어맞을 테니. ‘그려 그려’ 하면서 머리 쓰다듬어 주고, 맥주도 건넸다. 상식이는 눈이 가재미눈이 되서 날 째려봤다. “야!! 씨발!! 너 지금 안 믿는 거지?!! 아, 씹!! 누굴 뻥쟁이로 보나!!” “니놈이 ‘나 구해주러 와서 감동했어’ 부분까지는 몇 개 빼고 믿어주마. 그다음은 기각. 삼류 연애 소설 쓰냐, 너?” 상식이는 얼굴이 벌개져서, ‘에이, 씨발’, 하고는 다다다 경보로 걸어갔다. 쪽팔리지? “상식아.” “왜, 이 씨발 놈아!!!” “나는 너랑, 병우 모두 무척 좋아해. 대한이만큼.” 상식이는 걸음을 멈추고, 뒷목까지 새빨개져서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다가 아주 조그맣게 말했다. “… 나도…” 나는 피식 웃으면서 그의 뒷통수를 쓰다듬어 주고는 스쳐지나가며 속삭였다. “그것만은 믿어 줘.” 익숙한 녹색 대문을 밀고 들어섰다. 대한이가 마루에 걸터앉아,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담배를 피고 있었다. 녹색 낡은 대문과 회색 담장, 할머니의 감나무가 있는 손바닥만한 마당, 차가운 물 밖에 나오지 않고 겨울에는 가끔 얼기도 하는 수도 꼭지, 어렸을 적엔 그렇게 무서웠던 밖에 나와 있는 화장실, 구석 화단에 있는 깨져있는 장독대, 좁아 터진 부엌, 답답한 안 방보다도 안락한 마루. 우리집보다도 친근한 우리들의 아지트. 그 안에 새겨진 너무나도 아름다운 내 심연. “녹수야, 왜 이렇게 늦었어. 아까 전화 받고 나서 보고 싶어서 바로 뛰어왔는데, 나보다도 늦었네? 전화하려던 참이었어.” 후다닥 달려와서 내 손을 붙들고 흔들며 기뻐하는 병우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미안, 미안. 많이 기다렸어? 상식이가 계속 칭얼거리면서 꿍얼거려서, 그거 들어주느라 늦었어.” “그게 칭얼거린거냐?!! 그 심오하고 진지한 대화를 그딴 식으로 말하다니!!! 아, 씹!!!” 상식이야 욕하든 말든, 나는 병우와 함께 손 붙들고서 기뻐했다. 내 듬직한 친구, 병우야! 붉은기 도는 오렌지색 머리에 깊은 윤곽을 가진 눈가, 무표정할 때는 그렇게 험악해 보이는 인상이, 다정하고 반갑게 웃어보이던 입가의 미소로 솜사탕처럼 풀어진다. 조금 얼굴이 상해 있어서, 손을 들어서 쓰다듬어 줬다. “내가 많이 보고 싶었나 보네. 얼굴이 상했어.” “녹수 너야 말로 얼굴이 왜 그래? 어디서 맞은 거야?!” “아앗!! 유병우, 그거 묻지 마라!! 닭 되기 싫으면!!!” 상식이가 얼굴이 새파래져서 부르르 떨며 다급하게 외쳤다. 그 격렬한 반응에 병우도 나도 움찔해서 쳐다봤다. 내 섹쉬 모션이 그렇게 싫었냐? 쳇. 우진이는 그러면 바로 콜인데 말이야. “왜? 어디 갇혀 있다 나온 거면, 가서 엎어버려야지!” “아냐, 병우야. 사정이 있어서 연락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 많이 걱정시켜서 미안하다.” 계속 뭐라 하려는 병우를 말리고, 묵묵히 감나무만 응시하고 있는 대한이에게 걸어갔다. 대한이는 담배를 마당에 던지고 내게 고개를 돌렸다. 까맣게 빛나는 맑은 눈동자. 청색 빛이 도는 흰자위로 검은 동공 안의 내 자신을 바라보고 주먹을 쥐었다. 6년이다. 6년이었다. 그 눈동자 속에서 살아온 것이 6 년이다. 동정이든 동경이든 이미 6년의 세월동안, 나의 유년기를 그에게 바쳤다. 신을 숭배하는 순교자의 모습으로 껍데기를 쓴 채, 그를 받들면서 뿌듯함을 느꼈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교만한 거짓으로 자신을 보호했다. 그의 가족처럼, 친구처럼, 때로는 애인처럼 행동하면서 그를 기만했다. 그는 나를 혐오한다. 그건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게 그가 세상의 중심이듯이, 그에게도 내가 세상의 중심이란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저, 나는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강한 이 생물의 마음을 독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옆에 찰싹 붙어서, 그가 새로운 대지를 만날 기회를 박탈했다. 내가 홀로 차지하고 싶었다. 육체 따윈 필요 없었다. 정신적 유희만으로 나는 충분히 포만감을 느꼈으니까. 하지만, 유진 씨와 우진이와의 합일 후에, 사랑과 쾌락을 체험한 후에, 깨어진 거울 사이로 비추는 추악한 내 자신이 명령했다. 그를 이제는 사랑해 주라고. 그를 위해서 이제는 보내 주라고. 부디 그를 위해서 그렇게 하라고. 더 이상은 추악한 자신의 아집으로 그를 얽매지 말라고. 그렇게 명령했다. 그가 분노해도, 슬퍼해도, 아파… 해도…나를 디디고, 대지로 일어서게 하라고…. 그렇게, 이제야 말로 그를 사랑해 주라고… “대한아.” “……….” “절교다.” 세상이 정지했다. 마음속의 기둥을 뽑아냈다. 피 흘리며 비명 지르는 그것을, 나는 결코 망설임 없이 무자비하게 뽑아냈다. 그의 눈이 커졌다. 믿기지 않는 듯이.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이해 할 수 없다는 듯이. “……뭐…라고?” “더 이상 네 옆에 있고 싶지 않다. 이제 널 쫓아다니지 않을 거야. 너에게 말을 걸지도 않을 거고, 너를 보지도 않을 거야. 학교에서 만나도 아는 척하지 않을 거고, 집에도 안 찾아와. 니 꼬붕 짓도 이제 안 할 거야. 절교다. 이대한.” 차분히, 또박또박 말을 마쳤다. 대한이는 눈만을 크게 뜬 채, 내 눈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처음이구나, 니가 그렇게 열심히 나를 보는 것이. “장 녹 수!!!” 분노에 찬 일갈은, 대한이 아니라 상식이 쪽이었다. 나는 상식이를 향해 냉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부탁해, 한상식. 대한이를 부탁해. 나는 안돼. 더 이상 나는 안돼. 그러니까, 네가 병우와 같이 붙잡아 줘. 그를 보듬어 줘. 마음속으로 상식이에게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얼굴만은 냉정하게, 차가운 무표정을 유지했다. “너…. 아직도 오해하는 거야?!! 그때 그 말은…!!” “분명히 말해서,” 상식이의 말을 끊었다. “그 때 일과는 전혀 상관없어. 그냥 제대로 살고 싶어진 것뿐이야. ‘이대한’과 상관없이. 이제 병신춤을 그만 접고 싶다. 더 이상 인생 허비하고 싶지 않아. 나만 보고 싶어.” 초록색 대문을 향해 걸었다. 창백한 얼굴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병우와 상식이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너희 둘에게는 미안하다.” 그리고 대문 밖으로 나섰다. 대한이는 3년 전, 할머니의 장례식 때처럼 미동도 않고 앉아 있겠지. 내 뒷모습을 그의 아버지 등과 겹쳐 보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망가지지 마!!! 절대로!!! 넌 홀로 딛고 그 심연을 벗어나야 돼!!! 나 따위는 아랑곳없이 짓밟고 일어서야 돼!!! 절대 망가지지 마라, 이대한!!! 골목길을 들어서고, 대한이의 아버지가- 오늘 내가 했듯이, 그를 버리고 흐느꼈던, 바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우리 대한이, 잘 부탁한다.’ 입술을 깨물었다. 아저씨, 이게 대한이를 위한 겁니다. 그때, 아저씨가 그랬듯이. 내가, 이 장녹수가, 그의 세상의 중심이어선 안 된다. 나 역시 심연의 생물인 것이다. 그와 같이 빠져서 허우적거릴 뿐인. …………대지가 되어 줄 수는 없다. 나는 대한이 아버지가 그랬듯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흐느끼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저 숨이 멈출 정도로 앞을 향해 달렸을 뿐이다. 18 인생 살면서, 1/3 의 시간동안 한 새끼 꽁무니만 따라다녔다. 아침나절에 대령해서 수발들고, 점심때 달려가 수라상 차리고, 저녁때 쫓아 다니며 밤놀이 뒷처리에 집 앞까지 배웅하는, 똘마니 인생 6년도 오늘부로 끝이다. 절교다. 이 대 한. 그렇게 마침표를 찍었다. 평소보다도 밝은 얼굴로 씩씩하게 아침밥을 챙겨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녹수야, 대한이 도시락 안 싸?” 엄마가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나는 씨익 웃으면서, 엄마에게 달려가서 가슴에 폭 안겨 부비부비했다. 엄마는 황당해 하면서, 내 뒷통수를 내려쳤다. “징그럽게 달라붙지 마! 대가리는 다 커서!! 암만 그래도 카드는 못 주니까!!” 나는 풀 죽어서 힘없이 뒤돌아섰다. 엄마는 그런 내 뒤통수에 대고 쯧쯧 하더니, 한숨쉬면서 손에 돈을 쥐어줬다. 브이. (^.^)V 집의 대문을 열다가, 다시 들어가서 엄마 뺨에 뽀뽀하고 도망쳐 나왔다. 싱그러운 아침 봄 햇살을 맞으면서, 학교를 향했다. 평소와는 다른 방향으로, 서서히 걸어가면서 주위 경치를 감상했다. 아침이라서 그런지 진한 초록색의 나뭇잎 위로 이슬이 맺혀 있었다. 청량하고 상쾌함이 전해졌다. 물방울 안으로 녹색이파리가 반투명하게 비추었다. 멈추어 서서 그것을 한 참을 들여다봤다. 살짝 불어온 바람에 흘러서 떨어져 내릴 때까지. 여학생들이 지나가는 것을 구경하며, 세상에 여자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예쁜 여자, 미운 여자, 반듯한 여자, 시끄러운 여자… 많구나. 세상이 온통 시끌 벅적 하다. 매캐한 매연과 경적소리 속에서, 머리가 어질했다. 세상 속에서 내가 미아가 된 것 같았다. 조금 비틀 거리며 잠깐 길가 가로수에 기댔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어서 담배를 꺼내고 불을 붙이려다, 지포라이터를 보고는 집어 던져버렸다. 일어서서 길을 갔다가, 그것을 다시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처음과 달리, 지루할 정도로 길게 느껴지는 등교길 끝에, 학교 앞의 조그만 서점에 들려서 참고서나 사전을 샀다. 내 수준을 감안해서, 중학교용 교재로 골랐다. 쪽팔리니까 이건 꼼꼼히 싸서, 몰래 봐야겠다. 이따 집에 가는 길에 반장한테 물어서 학원도 끊고… 학원은 어떻게 다니는 거지? 설마 시험보고 들어가는 것은 아니겠지. 윽. 그럼 나 어쩌면 중학생 애들하고 같이 수업받거 아냐? 아 씨발, 그건 진짜 쪽팔려서 안 되는데. 한 번 반장한테 물어봐야겠다…. 따위를 열심히 생각했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발악 중이다. 완전 그로기 상태였다. 한 발만 더 쏘면, 대한이가 손 댈 것도 없이 그대로 골로 갈 것 같다. 유진 씨가 보고 싶다. 이틀 전에 헤어졌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만큼, 그의 얼굴이 희미하다. 슬퍼 죽겠는데도, 눈물샘이 말라버렸는지 가슴만 뻑뻑하고 죄여 올 뿐, 도무지 눈물이 나오질 않는다. 펑펑 울고 싶은데…. 말이다. 교문을 들어서는데 누군가가 앞을 가로막았다. 상식이었다. 상식이는 어제처럼 분노하거나, 열받아서 꼭지가 돌아버린 얼굴이 아니었다. 그저 목구멍에 커다란 가시 하나가 박힌 사람처럼, 그렇게 쳐다봤다. “얘기 좀 하자.” 상식이가 내게 말을 붙일 때, 욕 없이 들어 본 것이 얼마만인가. 기억도 나질 않는다. 시계를 흘낏 보고 고개를 까닥였다. 상식이를 따라서 학교 뒷 쪽 수돗가로 갔다. 상식이는 수돗가 옆에 서서 담벼락에 기댄 채,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학생 주제에 언제나 말보로다. 부르주아 놈. “학교 내에선 미성년자 금연, 모르냐? 신고할까 보다.” 웃으면서 가방을 던지고 그 위에 주저앉았다. 서 있는 것도 힘들다. 지금은. “웃으면서 농담이 나오냐? 미친 새끼.” 기다란 한 숨, 짧은 침묵 끝에 상식이가 입을 뗐다. “설명 좀 해 줘라. 내 머리로는 도저히 니 새끼 사고를 쫓아갈 수가 없으니. 그 유치한 내용의 절교선언은 뭐냐?” “어제 말한 그대로야. 설명하고 자시고도 없어. 그냥 말 그대로 대한이와 절교야. 나름대로 고심해서 준비한 말이었는데.” 상식이는 낮게 욕하고, 담배를 던진 뒤, 내 멱살을 잡아 올렸다. “이 씹새끼야!! 불은 누가 질러 놓고, 강 건너 불구경이야?!! 왜 또 지랄이냐구!!! 내가 어제 그렇게 변명을 했는데도!!! 아니, 왜 이제 와서!!!” “그딴 거, 이미 알고 있었어. 한상식.” 차가운 목소리에 상식이가 흠칫했다. “대한이가 내게 기댄다는 것 따위는,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 상식이의 손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럼… 왜?” 순간 머리 속을 스치는 생각에, 입 안이 써졌다. “넌, 내가 어쨌으면 좋겠는데?” 눈썹을 꿈틀거리며 의아하단 표정을 짓는다. “당연히, 대한이한테 가서….” “그리고?” 입을 다문다. 당황하는 표정. 듣고 싶어졌다. 니 대답. “그리고?” 상식이가 손을 풀고, 조금 난해한 시선으로 이리저리 생각한다. “돌아가서…… 사…과…를 하고….” 내 눈이 빙긋 접혔다. 하지만 조금도 즐거운 기분이 아니다. 그리고? 상식아. 내 친구 상식아. 그리고? “씹, 씨발. 왜… 왜 그러는 거야?!! 그냥, 예전처럼 지내면 되는 거잖아. …예전처럼……!” “내가, 뭘로 보여? 한상식.” “…뭐?” “내가, 니눈에 뭘로 보여? 너한테 장녹수가 뭘로 보이냐구.” 상식이 얼굴이 창백해졌다. “치…친구.” 심장이 차가워졌다. 한상식. “당연해? 내가, 대한이 옆에 가서 평생 딱갈이 노릇을 하는 게 당연해? 대한이 응석을 평생 받아줘야 하는 게 당연해? 내가, 니가 언제나 말하는, 진짜 대한이한테 미친 변태 새끼가 되서, 평생을 대한이 옆에서 수발들어야 당연하다고 하는 거냐, 지금? 말해봐, 장녹수 친구 한상식 씨. 응? 그게 당연한 거야?” 상식이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게 당연하다면, 말해봐. 내가 대한이 옆에 무슨 이름으로 있었는지. 그럼 내가 돌아가서 대한이한테 싹싹 빌고 사과할게. 난 뭐였냐? 한상식. 니 눈에, 대한이 눈에, 내가 뭘로 보였냐? 아침저녁으로 등신같이 실실대며, 사내새끼 뒷꽁무니나 쫓아다니는 내가, 뭘로 보였냐고.”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상식이는 땅바닥을 노려본 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친… 구…” 웃었다. 나는 고소를 터뜨렸다. 한참을 그렇게 웃었다. “친구라고? 내가? 내가? 틀렸어. 한상식. 나는 대한이의 개였어. 대한이의 딱갈이였어. 대한이 꼬붕이고, 미친 변태 새끼였지. 니 입으로도 말했었잖아?” “아니야!!! 그런 거 아니었어!!! 대한이 한테도, 병우한테도, 나한테도, 너 그런 거 아니었어!!!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 그딴 식으로…!!!” 상식이 눈가가 빨개졌다. 입술을 피가 안 통할 때까지 베어물고서, 상식이는 말을 삼켰다. 나는 조금 침착을 되찾았다. 머릿속의 열기를 식히느라, 상식이도 나도 잠깐 말을 끊었다. “대한이가 날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알고 있어. 내게 마음 터주고, 나를 믿고 기댄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상식이를 바라봤다. “하지만, 대한이가 날 혐오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 꺼림칙해 한다는 것도. 노력… 했었다고? 하지만 안됐지. 그런 거야. 그게 현실이라고. 어떻게 해도 안돼. 나도… 사람이야. 상처입고, 아파한다고. 대한이가 내 손이 닿을 때마다 미세하게 움찔거리는 것을 느낄 때면, 태연한 척 해도, 심장이 너덜너덜하게 난자당했어. 이미 수백 번, 수천 번을 그렇게 견뎠다고. 그 짓거리를 계속 하고 싶지 않아. 대한이와 네가 ‘저쪽’에 속해 있듯이, 나는 ‘이쪽’에 속해 있어. 그동안 내가 대한이에게 매달려 억지로 틀어쥐고 있었을 뿐이지. 지금 당장 대한이가 아파 보인다고, 내가 달려가서 호호 해준다고 해도, 결국은 제자리야. 섞일 수가 없어. 그래서 끊는 거야. 나를 위해서, 그리고 대한이를 위해서. 늦었지만 이제라도.” 단숨에 말을 맺었다. 상식이는 뭔가를 대꾸하려고 했지만, 말하지 못 했다. 깨닫고 있는 것이다. 이제야 안 것이다. 조금은 이해하는 눈치를 보이는 상식이를, 씁쓸하게 바라봤다. “대한이가 제대로 서길 바래. 나 같은 거한테, 기대지 말았으면 좋겠어. 친구로써도 가까워 질 수 없다면, 이런 변태가 붙어 다녀봤자 좋을 게 없어. 끝내는 것이 대한이에게 좋은 일이야. 나 역시, 이제는 나를 위해 살고 싶고.” “그…래.” 힘없이 상식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가슴 속에서 짐을 하나 덜은 것 같아서, 조금 편해졌다. 하지만 상식이는 주먹을 말아쥐고, 내게 다시 묻고야 말았다. “………대체… 5일 동안…… 뭘… 한 거야? ………그런 거 갑자기 생각할 만큼, 뭔가… 있었던 거야?” 나는 다시 심장이 돌처럼 굳었다. 그게 중요한 거냐? 지금? 결국…… 넌 대한이 사람이란 거야? 비릿하게 웃었다. 상식이를 향해서 내가 뿜을 수 있을 만큼의 독기를 뿜었다. 그 순간만은 정말 상식이가 증오스러웠다. “너와, 병우와, 대한이가 보고 토했다는 그 짓을 했어! 4일 동안 밤낮으로 개처럼 헉헉대며 뒹굴었지!! 사내새끼 좆을 엉덩이에 꽂고서 허릴 흔들었어!!! 더 해달라고!!! 엉덩이를 흔들며 유혹했다!!! 기절할 때까지!!!!” 상식이의 얼굴에서 핏기란 핏기가 모두 사라졌다. 그는 뒤로 주춤하더니, 수돗가로 뛰어가서 토하기 시작했다. 그런 상식이 뒤에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증오서린 말투로 얘기했다. “너, 앞으로 나 찾아오지 마. 병우도. 니들만큼, 이제 나도 니들이 싫고 역겨우니까. 부디 고귀하신 그 면상, 천하디 천한 이 호모새끼 앞에 다시는 디밀지 마.” 가방을 털어서 둘러메고, 자리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일별했다. “대한이가 폭주하거든, 그냥 내버려 둬. 어차피 그냥 두면, 언젠가는 식을 테니까. 아니면 고해바치던지. 그러면 당장 죽여주겠다고, 다시 내 목을 조를지도 모르지.” 지끈거리는 머리와 일렁이는 가슴이 미칠 듯이 답답하고 퍽퍽해졌지만, 다행히 눈물은 나지 않았다. 진짜 다행히도. 상식이가 다녀간 한 달 전 아침 이후로, 더 이상 어떤 접촉도 없었다. 유진 씨에게도, 우진이에게도, 연락은 없었다. 학교 분위기가 예전보다 몹시 험악해졌다. 연합에 속해 있는 몇몇이 찾아와서 시비를 걸기도 했지만, 몇 번 그냥 맞아줬더니 그 다음부터는 시들해졌다. 분위기가, 연속적으로 뭔가 크게 한탕들을 하는 듯, 하나같이 군기가 팍팍 들어가서 살기가 돌았지만,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나의 새로운 일상은 평온하게 이어졌다. 학교에 정시에 등교해서 아침자습도 하고, 성실하게 수업 듣고, 반장과도 친해져서 점심도 같이 먹는다. 숙제를 하고, 학원도 가고, 밤에는 희빈이와 함께 보충수업도 했다. 엄마는 처음에는 웬일인가 했다가, 근 한 달째 이어지는 이 현상에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다 보약까지 지어왔다. 학교, 집, 학원을 오가는 획일적이고 지루한 이 일상이, 나도 마음에 들었다. 점심시간에 자리에 앉아서, 근의 공식인가 뭔가를 외우느라 골이 빠개지는데, 순간 교실이 정적에 휩싸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고개를 드니, 한 달 만에 보는 병우가 얼굴에 온통 멍이 든 채, 입술에는 피딱지를 얹고서 내게 걸어왔다. 물론 교복을 입진 않았고, 다행히 빠따도 들지 않았다. “녹수야, 피해. 지금 당장.” 놀라서 멍하니 있는 내게 재빨리 말하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무슨 일이야? 너, 얼굴 왜 그래?” “시간 없어! 상식이가 최대한 시간 끌고 있지만, 나 없어진 거 알면 끝장이야. 빨리 가자.” 짧게 대꾸하고 내 팔을 붙들고서 달리기 시작했다. 교문 앞으로 가려다가, 방향을 바꿔서 학교 뒤쪽으로 가 담을 넘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내게 쥐어주고, 내 어깨를 단단히 붙들었다. “녹수야, 이거 들고 가서 현금 찾아 어디든 숨어있어. 비번은 안에 들어있으니까. 핸드폰 꺼놓고. 집에는 내가 말해 둘게. 지금 바로 유진 씨 데리고, 알았지? 꼭이다?” 등돌아서 서둘러 다시 담을 넘으려 했다. “뭐야? 병우야! 유진 씨는 왜?” “대한이가 드디어 꼭지 돌았어. 그동안 계속 폭주상태였는데도 참고 참았는데, 결국 못 참고 오늘 너랑 유진 씨 동시에 잡아 죽여 버리겠데. 나랑 상식이 먼저 이리로 보내고, 유진 씨 네 학교로 대한이가 직접 갔어. 너 잡아서 그리로 끌고 오래. 상식이 지금 연합 애들 데리고 연막치고 있다. 얼른 가. 정 안 되면, 유진 씨 버리고 너 혼자라도 살아. 알았지?” 숨도 안 쉬고 말하고는 재빨리 담을 넘어갔다. 남겨진 나는, 머리 속을 정리했다. 유진 씨라니? ……설마, 아직 몰랐던 걸까? !!!!!!!!!!!! 이런 씨발!!!! 하나 둘 주위로 양아치들이 보이길래, 얼른 몸을 숙이고 조끼를 벗어서 숨겼다. 타이를 빼고 단추를 몇 개를 풀었다. 그리고 최대한 여유롭게 걸으면서, 길가로 가서 택시를 잡았다. 택시 안에서 유진 씨 번호를 눌렀다. 헤어진 이후 처음이다. 아직 점심시간이니 받을 것이다. 아, 나라고 받지 않으려나? 초조하게 기나긴 신호음을 기다렸다. 숨넘어가게 오랜 시간 뒤에야, 마침내 유진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진 씨, 끊지 말아요!! 지금 학교죠? 당장 아무나 친구 데리고서, 교실 밖으로 나와 오픈되지 않은 곳으로 가요. 친구와 같이 사람들 많은데 섞여 있어요. 누가 불러도 절대 대답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꼼짝 말고 기다려요. 나도 지금 가고 있고, 우진이도 보낼 테니까. 알았어요?” < 가, 갑자기 무슨…. > “미안해요, 유진 씨. 지금 설명할 시간 없어요. 지금 당장 자리 피해요. 그리고 내 친구들 보면 바로 도망치세요. 알았죠? 제발, 부탁입니다.” < 알…알았어요. > 끊고, 우진이에게 전화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금방 통화가 됐다. < 녹수야!! 진짜, 녹수야?!! > “송우진. 지금 대한이가 연합 애들 끌고 그리로 가고 있다. 유진 씨 찾아서 같이 숨어 있어. 내가 지금 그리로 가니까.” < …… 뭐? > “니가 직접 붙으려고 하지 마. 다른 새끼들 풀어서 막고, 너는 유진 씨랑 같이 있어. 알았어?” < 무슨 일이야? > “설명할 시간 없으니까 지금 당장 움직여. 벌써 쫙 깔렸을 테니까 밖으론 나가지 마. 기회 생기면, 나 기다리지 말고 유진 씨 데리고 바로 도망쳐. 장소 정해지면 전화해라.” <… 알았어. > 유진 씨 학교 앞에서 내리려다가, 백주대낮에 무장하고 진짜로 쫙 깔려있는 연합놈들을 보고는, 안 보이는 곳까지 가서야 내려섰다. 학교 맞은편 모퉁이에 기대서 보니, 길바닥이 온통 양아치 새끼들 전쟁터가 됐다. 100 여명은 넘어 보이는 그 속에, 언젠가 봤던 우진이 쪽 일진들도 나와서 같이 엉켜있었다. 영화도 아니고 말이야.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기지가 않았을 그 장관에 혀를 차고, 유진 씨와 우진이가 무사히 피했기 만을 빌었다. 도서관에 있겠다는 전화 이후, 어떤 소식도 없었다. 머리를 식히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진작에 유진 씨 생각도 했어야 했는데, 내가 멍청했지. 씹. 지포라이터를 꺼내서 입에 물려있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근 한달간 금연, 잘 지켰는데 말이다. 후우. 흘낏 보니, 아주 위험한 무기류는 없었다. 손에 들린 라이터를 바라봤다. 내 무기는 이거 뿐이구나. 마디 안으로 깊숙이 말아 쥐었다. 대충 근처에서 제일 눈에 안 띄는 녀석을 뒤에서 붙잡아서, 목을 졸라 기절시킨 뒤에 웃옷을 바꿔 입었다. 떨어져 있는 각목을 잡았다. 내가 언덕 위의 왕자님도 아니고 말이야. 피식. 공주님들을 구하는 얼뜨기 촌기사 정도는 되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면서 교문을 향해 당당히 걸어갔다. 그 혼전 속에서, 다행히 내 얼굴을 알아보는 놈은 없었다. 그 대신 우진이 쪽 애들이 덤벼들었지만. ’ 미안, 지금은 저 쪽이 더 사람이 많으니까 용서해 줘.’ 하고 속으로 빌고는, 용서 없이 후려쳐 넘겼다. 최대한 싸우지 않고 끝나면 좋겠는데 말이야. 난 체력이 약하다고. 경찰은 부른지가 언젠데 왜 아직까지 오지 않는 거냐? 차라리 119에 신고할 것을… 투덜거리면서 나름대로 경쾌하게 도서관을 찾아 헤맸다. 처음 들어오는 유진 씨 학교. 이왕이면 사귈 때, 정식으로 왔으면 좋았을 것을…. 한 번 들어 와봤으면 했지만, 진짜 이딴 식으로는 아니었다. 도대체 여긴 선생도 없나? 왜 이렇게 조용한 거야? 선생들이 나서서, 어떻게든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선량한 학생들을 지켜야지! …했더니, 이유가 있었다. 기막히다. 이거 진짜 영화 아냐? 교무실 점거라니. 대한이가 진짜 미쳤음에 틀림없다. 지난 번, 상식이가 교실에 쳐들어 올 때부터 알아 봤어야 하는 건데. 쫓아다닐 땐 정말 몰랐다. 대한이가 이런 무대포에, 대담한 녀석인 줄은. 그래봤자 주먹 좀 쎈 양아치 고삐리일 뿐이지…… 하고 여유를 부려봤지만, 솔직히 놀랐다. 아예 조직적으로 외부에서 학교내 일진들을 막고, 본진은 들어와서 적은 인원으로 각 교실과 교무실을 빠른 시간 내에 장악해 버린 연합회는 마치 훈련 잘 된 군대 같았다. 10대 양아치들 모임 주제에 말이다. 일이 이렇게 커지면 바로 영창행일 텐데…… 경찰들이 늦는 것을 보면, 뭔가 연막까지 친 것 같다. 대한이 새끼, 오늘 아예 작정하고 벌린 것이다. 돌아도 체계적으로 돌아버렸다는 상식이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아직 유진 씨나 우진이가 무사한 지, 점점 확신이 가질 않았다. 화장실 쪽에 숨어서 폰을 걸었다. 지금 상황에선 최악의 방법이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상태를 확인해 둬야 했다. 또 한 번 기나긴 시다림 끝에 벨소리가 끊겼다. “유진 씨? 지금 어디에요? 괜찮습니까? 우진이 옆에 있어요?” < 오, 오지 마요. 가…!! 악-!!! > 숨이 멈출 뻔 했다. 유진 씨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번개를 맞은 듯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최악의 사태다. < …… 왜? 사랑하는 사이라면서 왜 그렇게 아무 말이 없어, 장녹수? > 낮고 시원하게 울리는 중저음의 미성. < 어떻게 할까 고민하느라고 아직은 많이 손 안댔어. 좀 더 늦어지면, 이쪽은 대환영이야. 옆에 있는 기다란 녀석은, 건방지게 굴길래 미리 좀 건드렸지만. 아! 옆에 상식이랑 병우도 와 있어. 널 보고 싶어 해.> “…어디야?” < 학교 서쪽에 체육창고가 있더군. 매트도 아주 깨끗하고… 좋은 학교라 역시 달라. > “지금, 간다.” 뛰어 가면서 계산을 때렸다. 경찰, 119 모두 안 오는 걸 봐선, 뭔가 손을 쓰긴 썼다.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씨발, 지금 가면 완전히 날 잡아 잡수 인데. 제기랄. 흘낏 체육창고 입구 쪽을 봤다. 많이도 모아놨네. 그것도 딱 1등급으로만. 게다가 무기도 살벌하다. 죽이겠다고 한 게 허튼 소리가 아니었어. 뒤쪽 길도 막혀 있고, 에잇, 진짜 씨발이다. 얼뜨기 촌기사 아니라 슈퍼맨이라도, 저건 못 뚫는다. 잔머리 쓰는 건 포기하고, 각목을 버린 채 일어섰다. 앞에서 반 죽고 들어갈 수야 없지. 체력낭비는 질색이니까.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여어.” “장녹수다. 대한이한테 알려.” 그냥 말해도 다 들리겠구만. 쳇. “안녕, 잘 있었어? 안에 상식이랑 병우도 있다며?” “…… 들어가시지.” 재미없는 것들. 쳇쳇 거리면서도 힘껏 허파에 바람을 집어넣었다. 어무이, 나 오늘 집에 못 들어가요. 문 안에 펼쳐진 검은 심연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마치 대한이의 눈동자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창고 안이 너무 어두워서, 눈에 익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 안에는 대부분이 아는 면상들이었다. 조직의 1등급짜리들이었다. 이렇게 사소한 일에 따라 나선 걸 보니, 전에 상식이가 말한 것 중에서 ‘사시미 다트’ 부분은 사실인가 보다. 대한이는 창고의 매트 쌓여진 부분에 앉아서, 하나 밖에 없는 창 아래에서 등지고 앉아 있었다. 역광으로 얼굴을 잘 볼 수가 없어서, 눈을 찌푸렸다. 그의 발치에, 작은 몸체의 갈색머리 소년이 무릎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로 있었고, 그 옆에는 척 보기에도 만신창이로 다져진 반사체가 누워 있었다. 그 옆에 상식이와 병우가 조직 애들에게 둘러싸여있는 채로, 서 있었다. 나를 빼돌린 것을 들킨 건가. 상식이나 병우 모두, 나와 눈이 마주치길 피했다. 함정…이었나? 참, 유별나게도 일 벌인다. 대한아. 그냥 집에 가는 날 데려다 조용히 죽여 버리면 되지, 뭔 놈의 쇼를 이렇게 크게 벌이냐? “안녕, 대한아. 오랜만이다. 얼굴은 잘 안보이지만, 좀 여윈 것 같네? 그러게 술 좀 작작 마시지.” 명랑하게 웃으면서 그의 곁으로 걸어갔다. “멈춰.” 짧은 명령에 멈춰 섰다. 꿇으라면 꿇어야지. “이런 일 하지 마. 나는 너 소년원 같은데 못 보낸다.” “왜?” “너를 그런데 보내느니, 내가 가는 게 낫지. 너 고생하는 걸 내가 어떻게 보냐?” “…듣기 싫지 않아. 어디 계속 해 봐. 니 애인 앞에서.” 시니컬한 목소리에, 앞에 앉아 있던 이의 어깨가 움찔 했다. “상식아, 너 대한이한테 말 안 해 준거야? 내가 그날, 그렇게 구구절절이 설명했는데 말이야?” 내가 싱글거리며 상식이를 바라보자, 대한이가 조금 자세를 앞으로 했다. 상식이는 난감한 얼굴로 대한이 쪽에다 고개를 한 번 저었다. “니가 말 안했으니까, 대한이가 아직 이렇게 화 내지. 안 그래?” “……직접 들어 보지. 내게 다시 말해 봐.” 나는 조금씩 그에게 걸어갔다. 미소 지으면서. “넌, 내 세상의 중심이야. 대한아. 알잖아? 내 세계는 너를 위해서만 움직여. 나의 심장은 너를 향해서 뛰고 있지. 세상이 널 버려도, 나만은 널 버리지 않아.” 그는 내가 다가갈수록 온 몸의 근육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에 멈춰 서서, 그의 얼굴을 바라 봤다. 그의 까만 눈동자가 보였다. “그걸 아니?” 부드럽게 속삭이며, 그에게 손을 뻗어서 뺨을 쓰다듬었다. 흠칫 했지만, 대한이는 피하거나 쳐내지 않았다. 그에게 한 층 다가가서 그의 다리 사이를 열었다. 엉덩이를 그의 다리에 걸치고, 팔을 어깨에 둘렀다. 명백히 유혹하는 그 동작에도, 그는 나를 밀쳐내지 않았다. “3년 전 할머니 장례식 날, 네 아버지가 널 버린 그 날…” 그는 무뚝뚝하게 날 흘겨봤다. 나는 그의 뒤통수를 내게 당겨서, 이마가 맞닿게 했다. 코끝이 닿았다. “내가 그를 쫓아간 것 기억하니?” 그의 두 눈이 또렷하게 보였다. 크게 떠진 두 눈. 그 눈을 즐겁게 바라보며, 나는 그의 귓가로 입을 옮겼다. 혀로 살짝 귀 뒤를 핥아 올렸다. 그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울고 있었어.” 그가 획 나를 돌아 봤다. 입이 마주칠 뻔 했다. 풋. 웃으면서, 대한이의 코끝을 튕겼다. 그의 눈썹이 위로 휘었다. 아차차. 안 되지. “그는 항상 약을 가지고 다녀야 할 만큼 아팠어, 대한아.” 대한이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나는 조금 재미없어졌다. 다음을 재촉하는 그의 눈빛에, 팔을 풀고서 어깨에 기댔다. 그리고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널 버린 게 아니야.” 그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저걸로 맞으면 무지 아프겠다. 그가 부들부들 떨면서 흥분하는 것을 느끼고, 김이 팍 새서 중얼거렸다. “나도, 널 버린 게 아니야.” 그는 내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운 뒤에, 내 얼굴에 강력한 펀치를 날렸다. 그대로 내가 뒤로 쓰러지자, 아예 내 위에 올라탔다. 무지하게 아프다. 떨어지는 주먹을 보면서 웅얼거렸다. “‘초등학교 때부터 스토커처럼 징하게 붙어오는 새끼가 있는데 말이야-’” 그가 멈칫했다. 나는 그의 웃옷을 잡아당겨서, 그의 얼굴이 서서히 내게로 내려오게 했다. 그 이끌림에 그는 팔로 몸을 지지하고, 나를 응시했다. 나는 생긋 웃었다. 다시 팔을 뻗어서, 그의 얼굴을 쓸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속삭였다. 그는 그 말을 듣기 위해, 내 입가로 가까이 와야 했다. “‘나는 그 새끼가 나를 쳐다 볼 때면’” 그의 입가를 마주 봤다.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훑었다. 매력적인 붉은 입술이 색정적으로 보인다. “‘먹은 게 솟구쳐 오르고-’” 그의 눈이 다시 커졌다. 나는 그런 그를 슬프게 바라보고, 그의 귓가를 지분거렸다. 핥고 싶다. “‘그 새끼 목소리로 나를 부를 때면’” 그의 귀 대신 목 줄기로 손가락을 옮겼다. 단단한 목. 하지만, 아름다운. “‘귀가 썩는 것 같고-’” 그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살짝 허리를 튕겨서, 그의 것을 자극했다. 손으로는 여전히 목 근처를 희롱하면서 조금씩 허리를 움직였다. 다리를 살짝 그의 긴 다리에 걸치며. 그는 서서히 일어서는 내 것이 느껴졌는지, 조금 몸을 떼었지만, 그 상태에서 나는 빨리 그의 것에다 문댔다. 이건 생각보다 커다란 쾌감을 준다. 그도 움찔하며 멈췄다. 나는 내 입술을 살짝 핥았다. “‘그 새끼 손이 나를 건드릴 때면’” 그의 페니스와 나의 것을 비비면서, 나는 천천히 허리에 율동을 탔다. 그는 뻣뻣하게 있었지만, 그의 것은 분명히 딱딱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조금씩 빨라지는 움직임에, 그의 숨소리가 점차 거칠어졌다. 내가 잠시 멈추자, 그가 움찔하며 스스로 허리를 움직였다. 하아… 대한이는 얼굴을 내 귓가에 묻었다. 나는 그의 목에다 입술을 대고, 베이비 키스를 반복했다. 그러다 혀를 살짝 대자, 그의 허리가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답답한지, 지퍼를 내렸다. 내 것도 같이. 그리고는 미친 듯이 다시 문질렀다. 아아… “‘온 몸에 소름이 돋아서-’ … 아…아… 응…” “윽…” 대한이는 첫 번째 사정을 했다. 그가 멈칫하는 사이, 나는 손으로 그것들을 쓸었다. 대한이의 것이,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손으로 살짝 쥐고 흔들다가, 대한이의 가슴을 밀었다.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그에게 미소 지으면서, 부드럽게 일으켜 세웠다. 매트에 앉히고 그의 다리사이로 들어가서, 페니스를 잡고 입술을 맞췄다. 대한이는 경련을 일으켰다. 완전히 뻣뻣하게 다시 서서 애액을 흘려 대는 거근을 입에 넣고, 앞뒤로 움직였다. 그렇게 몇 번 하니까, 대한이가 내 머리를 붙들고서 처박기 시작했다. 목구멍이 아팠지만, 최대한 입안의 근육을 이용해서 빨았다. “읍…음…음…” “아,… 씨발…읏. 헉…으…” 그렇게 대한이의 두 번째 사정을 입 안으로 받아내서 손에 뱉고는 바라봤다. 대한이는 뭔가 계속하기를 원했다. 나는 손가락을 바지에 쓰윽 문지르며,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추슬렀다. “계속해.” 흥분으로 허스키해진 목소리가 명령했다. 나는 옆에 앉아서 계속 중얼댔다. “‘죽이고 싶어서 죽겠는데’” 대한이가 거칠게 나를 매트위에다 눕혔다. 완전히 흥분한 눈으로, 내 옷을 잡아뜯기 시작했다. 바지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우악스러운 힘으로 앞단을 뜯어냈다. 아파라… 그리고는 멈칫하길래, 내가 일어나서 그를 눕혔다. 그의 검붉은 거근에 다시 입을 가져가서 빨았다. 확실하게 단단해진 그것이 느껴졌을 때, 입을 떼었다. 그는 나를 다시 그 곳에 처박으려 했지만, 내가 눈웃음을 치면서 막았다. 혀로 한 번 더 할짝이고, 다리를 세워서, 너덜너덜해진 바지로 허리를 감쌌다. 이런 건 보기 흉하니 말이다. 그리곤, 그가 안 보이게 살짝 엉덩이를 들고, 충분히 적신 손가락으로 구멍에 찔러 넣었다. 조금씩 조금씩 늘리며, 잘 알고 있는 나의 포인트를 찔렀다. “읏… 아…으응…하악… ‘그러려면… 그 새끼 몸에 손을 대야 돼서’ …으…음… ‘참고……있어.’” 그렇게 홀로 자위를 하고 있자, 대한이가 갑자기 나를 잡아끌더니, 뒤로 엎고는 생각할 틈도 없이 퍽! 하고 박았다. 충분히 넓히고, 적셔 놓긴 했지만, 그의 것이 워낙 큰데다가, 거칠기까지 해서, 아무래도 찢어진 것 같았다. 그는 정말 무식하게 박고 있었다. 아픈 와중에도 나는 허리를 움직여서, 그를 포인트로 인도하고, 그 때부터는 나도 즐겼다. “헉…헉…읏… 씨발, ……죽여… 큭…” “응…응… 아앗…아… 거기… 앗… 하아… 앗, 으읏. 앗, 대한아, 거기 더… 세게….” 엉덩이를 움찔거리면서, 그의 것을 요령있게 조였다. 그러자 대한이는 정말 정신이 나간 듯이 박아댔다. “크으읏…” “아아앗…아…아…하아…” 대한이의 세 번째 사정이 끝나고, 나는 조금 움찔거리며 앞으로 움직였다. 그것을 대한이가 허리를 낚아채서 고정시켰다.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계속 중얼거렸다. “‘한 번은 그 새끼가 우는 걸 봤는데,’” 대한이가 몸을 겹친 그대로 숙여서, 내 귓가의 뒤 쪽을 할짝였다. “‘그 모습이 얼마나 역겨웠는지,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어.’” 그가 내 목을 물어뜯듯이, 빨아 댔다. 그리고는 다시 딱딱해진 그의 것을 박은 채, 그대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번을 더해서, 다섯 번의 사정이 끝난 후에야 나는 마지막 대사를 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새끼가 징그러워서 미치겠어.’” 그렇게 약 한 시간 반 동안의 하드 섹스가 끝났을 무렵이 되서야, 나는 우리가 타학교의 체육관 창고에서 십여 명의 관중들 앞에서 라이브 섹스 쇼를 벌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도 유진 씨 코앞에서…. 나, 유진 씨랑 우진이 구하러 온 거였는데…. 그것도 까먹고 있었다니. 진짜 섹스에 환장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게다가 상식이랑 병우도 있다. 다행히, 창고 안은 무지하게 어두웠다. 아마 듣기는 다 들었겠지만, 몽땅 다 보진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뻘쭘하게 대한이를 몸에서 뽑아내고, 옷을 추스르며 유진 씨를 봤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무릎사이에 파묻고 있었다. 게다가 훌쩍거리고 있었다. 제기랄. 이건 완전히 공주 구하러 온 얼뜨기 촌기사가, 마왕이랑 눈 맞아서 뒹군 꼴이 아닌가. 이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원래는 ‘멋지게 꼬셨다가, 적당한 때 제압하고, 우진이랑 유진 씨를 구한다’였다. 얼굴을 구기고서 여기저기 튿어져 거지 옷이 다름없는 옷을 꿰어 입었다. 이대로 가면 틀림없이 변태 취급을 받겠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난 변태 맞으니까. 이미 버린 몸인데, 뭘 더 어쩌겠어. 옷을 대충 걸치고, 유진 씨에게 다가갔다. 괜찮은 건가? 그의 어깨에 손을 대려는데, 뒷머리채를 잡힌 채로 매트에 꽂혔다. 씹. 방심했다. 대한이는 나른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볼 일 다 보니까, 이제야 애인이 걱정돼?” “………그냥, 괜찮은지 보려고 한 것뿐이야.” “니 걱정이나 하지 그래. 이대로가 끝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꽤… 오래 있었는데, 이제 슬슬 위험하지 않냐?” “철수는 예전에 했어. 원래 20분 넘기지 않을 생각이었거든. 예정 외로 초과돼서, 이 주위에만 좀 남겼지. 여기, 별로 눈에 잘 안 띄니까 상관없어.” 용의주도한 자식. 철저히 계획적이잖아? “그래서 이제 어쩔 건데?” “원래는, 너 여기로 꼬여내서 니 손으로 니 애인 죽이게 한 뒤에, 죽일려고 했는데……” 그는 아쉽다는 듯이 말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놀랐다. 난 솔직히 남자한테는 절대 안 섰거든. 그러니 사내새끼 똥구멍 맛이란 게 이렇게 쫄깃한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지.” 평소보다도 몇 배는 말이 많은데, 내용은 저따위라니. “그래서, 내 친구들한테도 그 기회를 줄까하고 말이야. 물론, 너는 조금 쉬어야겠고… 시각적으로도, 니 애인이 훨씬 낫겠지?” 순간 머리속이 새하얘졌다. 상식이가 말했던 게…… 이런… 거였어? 유진 씨 등이 확연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대한이는 그것이 즐거운지, 아주 고소하단 표정을 지었다. “됐어. 테크닉은 내가 훨씬 나아. 외모야 뭐, 눈 질끈 감고 하면, 어차피 뭐랑 하는 지도 모르잖아? 내가 할게.” 대한이의 표정이 굳었다. “니가…. 저 새끼 대신, 돌림빵 당하겠다고?” “아까 먹어봐서 알지? 나, 죽여. 그러니까 니 친구들한테 날 선물해라. 내가 다 홍콩 가게 해주마.” 빡!!! 퍽!! 퍽! 퍽! 퍽! 오질라게 아프다. 또 내 코 뼈 나갔나 보다. 대한이와 내 뼈는 찰떡궁합이구나. 숨넘어가게 맞으면서도, 그냥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제발, 나한테만 풀어라. 대한아.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내 머리를 까대던 발길질이 뚝 끊겼다. “……너, 이 새끼랑 한 거 아니지.” “………쿨럭, 퉷. 씹. 뭐가?” “후장 댄 거, 이 새끼하고 해서 배운 거 아니지?” 하면서, 유진 씨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들어 올렸다. 여기 들어와 처음 본 유진 씨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코뼈가 내려앉아서 온통 피칠갑을 했고, 눈은 부운데다, 입가는 찢어졌다. 주먹뿐이 아니라 구둣발에 채인 게 분명한 보라색 피멍에…… 게다가, 뺨은 칼로 길게 그어놨다. 다마 나간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그 순간 느꼈다. 내 위에 있던 대한이 발을 뒤집고, 팔꿈치로 명치를 가격한 뒤에, 관자놀이를 걷어찼다. 그리고 옆구리를 발로 찍었지만, 곧이어 달려든 조직새끼들이 날 붙들고, 가격하기 시작했다. 빠따로 무릎을 정통으로 맞고 바닥에 꿇었다.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씨발!!!!! 개새끼!!! 씹새끼!!!! 사람을… 사람얼굴을!!!! 유진 씨를!!!!! “큭… 흐… 씹. 이 새끼 얼굴 이렇게 만들었다고, 지금 내게 이런 거야? 어? 장 녹 수!” “이대한!!! 유진 씨가, 대체 뭘 잘못했다고, 저렇게 한 거야?!! 어?!! 말해 봐!!! 이 나쁜 새끼!!!!” 쫙!!! 대한이는 내게 달려와서 뺨을 날렸다. “뭘 잘못했냐구?!! 저 새끼가 널 꼬드겨서, 내게서 빼갔는데, 뭘 잘못했냐구?!!! 씨발, 죽여버릴 꺼야!!! 진짜 죽여버릴 꺼야!!!” 옆에 조직새끼 하나가 들고 있던 사시미를 낚아채더니, 유진 씨에게로 갔다. 나쁜 새끼!! “하지 마, 대한아!!! 이대한!!! 유진 씨 이제 나랑 상관없어!!! 예전에 헤어졌단 말야!!!” “그거야말로, 상관없어.” 차갑게 대꾸하고 유진 씨에게로 향했다. “이대한!!! 이 씹새꺄!! 날 죽여!!! 차라리 당장 날 죽이란 말이다!!!” 온 힘을 다해서 외쳤다. 진짜 절박했다. 대한아, 그러지마. 이 나쁜 새끼야, 불쌍한 유진 씨한테 그러지 마! 대한이는 그 말에 잠깐 멈춰 서서 나를 봤지만, 입술을 깨물고는 다시 유진 씨에게로 향했다. 벽창호 같은 놈!!! 나는 급한 마음에 옆에 있던 조직 놈이 들고 있던 사시미를 꺼내서 내 배에 쑤셔넣었다. 그것은 정말 앗! 하는 순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녹수야!!!!” 상식이와 병우가 비명을 질렀다. 뱃가죽이 뜨거웠다. …제대로 찔렀나? 대한이는 얼굴이 하얘져서 굳어버렸다. 곧이어 창고 안에 짐승의 포효소리가 울렸다. 그대로 달려와서는 옆에서 내 배를 누르고 있는 상식이와 병우를 떼고, 대신 눌렀다. “이대한… 하…씹. 사고 좀… 치지 마라… 응?”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도, 대한이가 흘리는 눈물 때문에 눈도 감을 수 없었다. 사람 목숨이 질기긴 질기다. 5평 반짜리 텅 빈 병실에 누워서 눈을 뜬 순간,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이번에는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의외로 몸 상태는 10개월 전에 죽을 뻔 했을 때보다도 상쾌했다. 배가 좀 욱씬거리고 무릎이 쑤셔서 그렇지, 코도 그리 안 아프고, 그냥 몸이 좀 무거운 것뿐이었다. 대충 척 봐도 중환자실은 아니다. 개인실인 걸 보면, 또 대한이 잡혀가고 클럽 애들이 돈이라도 푼 것일까? 유진 씨는 어떻게 됐을까? 우진이는…. 죽진 않았겠지? 갖가지 걱정을 하면서 누룽지색 천장을 빤히 바라보다가, 침대 옆의 팔걸이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 방에 하나 나있는 창이, 밤이라는 것을 알려줬다. …내 몸, 이제는 진짜 조폭 저리가라 할 정도로, 여기 저기 찢어진 걸레가 됐구나. 등받이에 허리를 대고 몸을 일으켜서 둘러보니, 엄마도 아빠도 희빈이조차 없었다. 날 냅두고 잔치라도 간 것인지…. 에이씨. 중얼중얼 궁시렁거리며 사람을 기다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고동색 문이 소리도 없이 살짝 열렸다. 하지만 나타난 것은, 엄마도 아빠도 희빈이도 아니었다. “정신 들어?” “어떻게 된 거야…. 여긴 어디야?” 대한이는 그 긴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와서 내 옆의 의자를 빼고 앉았다. 조금 피곤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 얼굴엔, 내가 남긴 상처가 관자놀이 근처에 남아 멍자욱이 지어 있었다. 저거, 있는 힘껏 후려친 것이었는데, 겨우 저 정도 밖에 안 되나? …… 씹. 김빠지는 기분으로 대한이를 응시했다. “조직 애들 주로 다니는 단골 개인 병원이다. 일반병원은 여러모로 불편하니까. 클럽 애들 공동투자 작품이지. 니 애인이랑 그 동생도 여기에 있어. 어제 ‘일’ 치르고 여기서 해결 보려고 했었는데, 다른 용도로 쓰게 됐군.” 아쉽다는 듯이 냉소 지으며 말했다. 등골이 다 오싹하다. 뭔가 본격적이구나. 대한아, 뭐가 되려고 그러니… 이런 상황이니, 유진 씨랑 우진이 생사가 염려되기 시작했다. 더구나 우진이는 (아마도) 어제, 거의 초죽음 상태였다. “우진이는, 살아 있어?” 대한이의 잘 뻗은 눈썹이 위로 휘었다. 안광에 살기가 돌기 시작하며,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설마, 죽은 건가? 아찔한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대한이가 시니컬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왜, 본처 보다는 정부 쪽이 더 걱정인가 보지?” ……눈치 챘나. “우진이는 그때 벌써 죽을락 말락 했잖아. 유진 씨는 죽을 정도는 아니었고.” 유진 씨 얼굴이 떠오르자 다시금 울화가 치밀어서, 나도 모르게 차가운 음성으로 대꾸했다. “부정, 안 하네?” 대한이는 갑자기 일어서더니, 옆에 있던 꽃병을 잡고 벽에다 던졌다. 그리고 깨진 꽃병 위로 가서 몇 번이나 씩씩대며 짓밟더니, 숨을 고르고 나를 돌아봤다. 유전인가보다. 흥분한 뒤에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얼굴이 진정되는 것은. “……그 새끼랑, 언제부터 뒹굴었어?” 조금도 흥분하지 않았다는 듯이 그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올리며 물었다. 나는 한심스러운 기분이 들어서, 머리를 젓고는 뒤척이며 자리에 누우려고 했다. 그런 나를 거칠게 내리 누르며, 내 위로 대한이가 비스듬히 올라탔다. 이 새끼야, 나 배 뚫렸다고!! 아파서 찡그리는 나의 얼굴 밑으로 손을 넣어, 자신과 마주 보도록 시선을 고정시켰다. “언제부터야?” 나지막하게 묻는다. “몇 번이나 했어?”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돌리려는데, 획 잡아 고정시킨다. “니 애인이랑 셋이서 한거야? 그 쌍둥이 형제랑 동시에 정사를 나눈 거냐?” “이 대 한.” “말해봐. 궁금해서 그러니까. 그 새끼랑 얼마나 뒹굴었으면, 남자한테는 절대 안 서는 내 자식도 녹이는지.” 차갑고 냉정하게 묻고 있지만, 그의 눈 속에 광기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머리 속에서 위험신호가 반짝였다. “대답해 봐. 나 만나면서도, 그렇게 그 새끼한테 깔려서 신음한거냐? 어? 그래서 내가 안 깔아준다고, 나 버리고 간 거야? 그 새끼가 그러래?” 그의 입술이 날 괴롭힌다. 자꾸만, 날 슬프게 한다. 촉촉하고 예쁜 그 입술이 나 자신의 타부를 건드린다. “대한아.” “왜, 말을 못 해? 너 말 잘하잖아. 언제나 실실거리면서, 날 갖고 놀았잖아. 말해봐, 그 새끼가 널 꼬여낸 거야?” “대한아.” “씹. 너, 더러워!! 난 니 새끼가 싫어!! 니가 밉다고!! 역겨워서 죽여버리고 싶어!!!” 그가 나의 목에 손을 감았다. 점점 조이기 시작하는 그의 손에 온기를 느끼며 눈을 감는 순간에, 눈 위로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대한아.” 손을 들어서 그의 눈물을 닦았다. 그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가 우는 것을 본 게 이번이 세 번째구나. 그 중 두 번이 나 때문이란 게 기쁘다. 그의 눈물이 매달려 있는 그의 입술을 바라봤다. 나를 비난한 입술. 나를 경멸한 입술. 예쁘고 붉게 빛나는 입술. 문득 어제 그렇게 둘이서 해댔는데도, 정작 키스는 안했다는 것이 기억났다. ………키스하고 싶다. 정말, 난 어쩔 수 없는 변태새끼구나. 지금 이 상황에서도 그런 게 눈에 들어오냐? 나는 장난스럽게 웃고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직 내 목에 손을 두른 채 눈물을 흘리고 있던 대한이는, 이 황당한 나의 반응에 당황했다. “뭐야?!!” “키스하고 싶어.” 살짝 눈을 뜨고서 대한이를 향해, 다시 한번 키득거렸다. “장난치지 마!” 대한이는 사납게 살기를 담아서 외쳤지만, 이미 아까의 기세가 많이 꺾여 있었다. “키스해줘.” 나는 뻔뻔스럽게 눈을 감고, 츕- 소리를 내고 미소 지었다. “누가 사내새끼랑, 너 같은 변태 새끼랑!!!” “싫어?” 내가 토라진 표정으로 그를 봤다. “………하나도 안 땡겨, 씹.” 대한이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숨결이 거칠어지며 내 입술로 다가왔다. 맞부딪히는 촉촉한 입술에 입만 대고 가만히 있으니까, 대한이는 초조한 듯이 내 입술을 빨면서 입을 열 것을 종용했다. 살짝 벌리자, 서둘러 들어오는 그의 것을 맞이하고, 처음 맛보는 달콤함에 이리저리 혀를 섞으며 점차 몸 안의 흥분을 이끌었다. 열렬히 물고 빨고 하는 통에 배가 몹시 땡겼지만, 무시하고 입술과 혀의 애무를 즐겼다. 얇은 환자복 위로, 그의 페니스가 단단히 일어선 게 느껴졌다. 물론 나도 섰다. 하지만, 이럼 안 되지. 난 환자니까. 고개를 약간 비키는 것으로 그만하자는 의사를 비췄지만, 대한이는 오히려 목으로 옮겨가서 이를 박기 시작했다. “앗, 으… 대한아. 나 아직 배 안 붙었어!” 다급하게 말하고 나서야, 흠칫하며 대한이가 멈췄다. 거친 숨소리를 진정시키며,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니가 시작했어.” 그려그려 하면서, 아직 흥분으로 팽팽한 그의 것을 느끼며, 손을 내밀어 그의 지퍼를 내렸다. 오랄도 안되니, 손으로 해야지. 대한이는 뒤로 물러서려다가, 내 뜻을 알았는지 다시 편하게 몸을 이완시켰다. 그리고 내 귓가에 입술을 묻고는 핥고 빨았다. 나도 괴로울 정도로 일어섰지만, 허리라도 흔들다간 끝장이다. 최대한 침착하게, 이를 악물고 혀까지 깨물어가며 참고는, 대한이의 신음소리를 들으면서 그의 사정을 받아냈다. “하아… 하아… 하…악… 씹.” 대한이는 자신만 사정한 것을 알고 열 받은 듯 했지만, 난 다시 내 자신이 ‘환자’라는 것을 강조했다. 침대 옆 탁자 위의 티슈로 손을 뻗어서, 손에 묻은 정액을 닦아내고 대한이 것도 수습한 뒤에 지퍼를 올려줬다. 손으로 받아내서 시트가 그다지 더럽혀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갈아야겠지. 나, 환잔데… 방을 뒤져서 새 시트를 찾아내고 갈자, 대한이는 그 길다란 몸을 좁은 1인용 침대 위에 나와 나란히 눕혀 놓고, 나른하게 하품했다. 진짜 좁았지만 대한이에게 팔배개를 해주며 바싹 끌어안았다. 내 팔에 묵직하게 올려져 있는 그의 머리를 쓸어올리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대한이는 내 목가를 지분거리다가, 쇄골에 입술을 대고 가볍게 베이비 키스했다. 잠시 간의 평안한 공기가 감돌다가, 그의 가라앉은 우울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그렇게… 노력했어도…… 안 됐었는데…. 진작에……, 그랬으면……” 내 목덜미를 세게 깨물었다. 아프다. “대한아.” 조금 몸을 떼어내고,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내 깊고 검은 심연의 눈이 맑고 고요하게 나를 비추었다. 너를, 놓아주는 게 옳아. 그렇지? 하지만…… “사 랑 해.” 그의 눈이 커졌다. “사랑해, 대한아.” 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 어느 때보다도 눈이 부시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오랜 폭풍 속에 갖혀있다 해방되고, 비 개인 녹색 대지 위에 발을 디뎠듯이. 그토록이나 개운하고 맑은 표정이다. 나는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미소지었다. “사랑한다. 이 대 한.” 대한이는 그림 같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래.” 실로 맥 빠지는 간단한 대답이지만, 그 눈빛과 미소만으로 충분했다. 나는 이것이 ‘이대한’ 식 사랑고백이란 것을 아니까. “……몸은 좀 괜찮냐?” “녹수야, 미안해!!” 대한이가 열나 해맑게 달려가서 상식이랑 병우를 데리고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 폭주하던 놈이라곤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손바닥 뒤집듯이 바뀐 그의 분위기에, 상식이와 병우는 떨떠름해 하며 들어왔다. “한 상 식. 너 나한테 말걸지 말랬지, 이 씹새꺄!!! 아, 병우는 괜찮아. 병우는 적어도 날 보고 토하진 않았으니까. 대신 넌 나중에 기회봐서 배신 한 번 때리마.” 상식이는 얼굴이 노래지고, 병우는 울상이 됐다. 나쁜 새끼들. 내가 그렇게 쉽게 잊을 것 같냐? 이 장녹수가? 미안해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병우를 향해 손짓하며, 침대 옆을 톡톡 쳤다. 병우는 감격에 찬 표정으로 쪼르르 달려오더니, 그 커다란 덩치로 내 품에 안겼다. 곰이랑 포옹하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친근한 병우가 반가워서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줬다. 병우는 꼬리라도 있으면 칠 기세였다. “유병우, 장녹수. 그 손 풀어.” 대한이가 서늘한 목소리를 음산하게 내리깔며 명령했다. 그 분위기가, 다시 헤까닥한 분위기라서 우리는 후다닥 떨어졌다. 이… 이대한. 지금 설마, 너, 설마, 지금 병우한테 설마, 거시기, 그 여자들이 잘한다는, 그 거시기 한 것을 한 건…… 아니겠지? 나는 황당으로 벙찐 기분이었다. 난 생전 처음 겪는 생경한 기분으로 낯이 뜨뜻해졌다. 아, 진짜 쪽팔리다. “대한아, 왜 그래… 녹수랑 반가워서 그런 건데…” 주춤거리며 나와 떨어져 앉은 병우는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보면 모르냐? 저 미친 변태새끼가 대한이까지 물들인 거지, 씨발!” 나쁜 새끼 한상식, 재수황제 한상식은 반성의 기미도 안 보인 채 되려 삐져서, 여전히 싸가지 바가지인 말을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래. 어디 한 번 계속 그렇게만 해 봐. “한상식. 이리로 와봐라. 일루 오면, 그간의 니 새끼 만행을 모두 용서하고 같이 놀아주마.” “지랄하네. 됐어, 새꺄. 누가 변태 새끼랑 놀아는 준대냐?” 나는 ‘그래?’ 하고 눈썹을 치켜올리고, 병우에게 눈짓했다. 병우는 전에도 말했지만, 생긴 것 같지 않게 눈치가 빠르다. 재빨리 가서, 상식이를 뒤에서 잡고, 사뿐히 들어서 내 앞에 대령했다. 나는 흐뭇한 마음으로 병우를 칭찬하고, 악독한 상식이를 째려봤다. 상식이는 발악을 하다가, 지 성질에 못 이기고 지쳐서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봤다. 크크크. “너, 그때 토했지! 나 상처 받았어. 그러니 잠자코 내 정의의 응징을 받아라.” “씨발, 올라오니까 토했지! 난들 토하고 싶었는줄 알아?! 씹새…. 읍?!!!!” 나불대는 상식이 입술을 붙들고, 딥!! 키스를 했다. 내가 원래 키스 테크닉도 죽이지. 닭살 올라 죽겠지? 꼬숩다, 새꺄! 입술을 할짝이면서 히죽거리고 떨어져 나오자, 한참 동안 모두가 굳은 채로 움직일 줄을 몰랐다. 대한이조차. 크하하하하핫!!! 몽땅 다 쌤통이다!! 그후, 광분한 대한이가 상식이를 열나 패고, 나를 좀 패고, 말리던 병우까지 패다가 씩씩 대면서 나갔고, 맞아서 널부러진 병우와 나는 죽을 맛이면서도 키득대고 웃었다. 상식이야 계속 씨발씨발을 연발했지만. -끼익. 문을 열었다. 다행히, 우진이는 겉가죽을 심하게 건드려서 그렇지, 속은 그다지 상하지 않았다. 애당초 대한이 목표는 유진 씨였으니까. 물론 그 전에 대한이가 사정을 다 알았다면, 내가 가기 전에 우진이는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온 몸이 탱탱하게 부어서, 예전의 말쑥한 모습이 엉망이 되어버린 우진이의 너무 아파보이는 모습에, 가슴이 쓰렸다. 자고 있는 우진이 옆에 가서 앉아, 땀에 젖은 검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래…. 1년 전의 그 오피스텔에서도 이랬었지. 나처럼 배에 칼자국 내고, 오피스텔에 쳐박혀서 폭주하는 우진이를 유진 씨 부탁으로 찾아가서, 설득한답시고 패고, 괴롭히고……… 고백 받고…… 다시 만났을 때도 내가 상처 줬었지. …… 나를 만나면 언제나 이녀석은 피를 보는 것 같다. 역시, 악연이야. 나보다 나이도 많으면서 말야. 언제나 떼쓰고, 질질짜고, 괴로워하고. 날…… 사랑 하고. 나에게 자신을 줄 만큼. 쌍둥이 형이라도 날 양보할 수 없을 만큼. 격렬하게, 깊게, 애절하게…. 바보, 송우진. 경고했잖냐. 꿈으로 치라고. 바보같으니. 어딜 가도 왕자님이 될 수 있는 놈이…… 진작에 끊었어야 했는데…… “녹수…야?” “응.” 가냘프게 들리는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 물을 따라서 머금고 그의 입술을 축였다. 차가운 물을 따라 들어가던 혀가, 그 안에서 동족을 만나 얽혔다. 익숙한 그가 반가웠지만 살짝 피해서 다시 밖으로 빼냈다. “대한이랑…… 했지?” “응.” 툭.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아파하지 마, 우진아. 제발. “………… 사랑해?” “응.” 그가 고개를 돌렸다. 심하게 흐느끼는 그의 어깨에 입 맞추고 뒤돌아서서 나왔다. 대한이가 문 앞에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 언제나의 디스.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 입에 물려있는 담배를 빼앗고는 비벼서 꺼버렸다. “병원 내 미성년자 금연. 모르냐? 신고할까보다.”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가 나를 조금, 아프게 쳐다봤다. 미안해, 대한아. 지금은….마침표를 찍어야 해. 그가 나의 손에 뭔가를 쥐어 주고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너무… 늦지 마. 기다릴 거니까.” 손 안에 든 그것은, 내가 유진 씨와 우진이에게 줬던 커플링 한 쌍과, 회중시계 두 개 였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 봤다. 행복했었다. 정말 행복했었다. 따스한 갈색 대지. 내 예쁜 사람. 내 예쁜 사랑. 유진 씨가 있고, 우진이가 있고, 내가 있는 풍경. 뜨거웠던 여름만큼 타올랐던 우리들. 내나이 17세의 동화. 마이 퍼스트 러브 스토리. ‘사랑합니다, 유진 씨.’ ‘나도… 나도… 사랑해요! 사랑해요! 정말, 사랑해요!! 녹수 씨! 사랑해요!!’ ‘나도, 널 사랑해.’ 회중 시계의 뚜껑을 열고, 그 안에서- 내가 살 때는 없었던, 새로 새겨진 문구를 바라봤다. ‘녹수 씨 & 유진’ ‘N & W’ 반달형 모양에, 서로 꼭 맞는 짝이라는 듯이 주장하는 홈에 맞추어, 둘을 합해 주었다. 아름다운 하모니의 멜로디가 끝없이 흘러나온다. 텅 빈 병원 복도에서 그 멜로디만을 끝없이 들었다. 머리 속에 꽉 채우고 다시 그것이 비워질 때까지. 유진 씨는 유령처럼 방 창가에 기대, 희미한 달빛에 비추어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것 같이. 문소리로 누군가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유진 씨. 어두운데 안 무서워요?” 갈라진 내 목소리가 건조하게 방 안을 갈랐다. “불 켜지마!!!” 유진 씨는 비명처럼 외쳤다. 창틀을 꼭 쥔 채로. “불…. 켜지 마.” 유진 씨에게 다가갔다. 그의 뒤에 서자, 창문위의 유리로 내 그림자가 졌다. 유진 씨는 그것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나쁜 놈!!!” 유진 씨는 발작적으로 외쳤다. “나쁜 새끼!!!”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짝!!! 유진 씨는 온 힘을 다해서 내 뺨을 갈긴 뒤에 크게 휘청였다. 그런 그의 허리를 낚아채서 부축하고, 끌어안았다. 또 한번의 지독한 랑데뷰. 유진 씨에게 처음 고백하던 날, 극장앞에서 놀라 휘청이던 그를 이렇게 감쌌었다. 동작 하나에 조차도 묻어나는 그리움. 내가… 당신을…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그는 미친듯이 나를 밀치며 외쳤다. “나쁜놈!!! 교활한 놈!!! 사기꾼!!! 나쁜새끼!!! 배신자!!!!” 그의 비명이 가슴을 후벼판다. 괴로워서 죽을 수 있다는게 믿겨진다. 나는 너무 괴로워서 죽어버릴 것 같다. 그를 더 꼭 끌어 안았다. “용서 안해!!! 절대 용서 못해!!! 너도!! 우진이도!! 그 놈도!! 저주할거야!!! 저주할거야!!!” 헉헉 거리면서도 그는 악을 질렀고, 나를 밀어내고자 내 배의 상처를 치고, 꼬집고, 할퀴었다. 하지만, 나는 너무 괴로워서 도저히 그를 놓을 수가 없었다. 그를 놓치면 죽을 것 같았다. 이미, 그를 놓았음에도. “나를, 날 가지고 놀았어!! 너랑 우진이 둘이서, 나를 바보로 만들었어!! 날 기만했어!! 속이고! 기만하고! 배신하고!!! 아아아!!!!” 그가 잦아들었다. 부들부들 떨면서 흐느꼈다. 그의 눈물이 내 심장을 다시 적신다. 아아…내 사랑. 내가 놓아버린. “… 도망치고…. 날…… 버렸어.” 그날, 그에게 통고하고 도망쳤다. 용기가… 나질 않아서…. 그렇게, 그에게 배신이란 이름의 고통을 안겨주고, 나는 떠나버렸다. 그날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이렇게 받아줬어야 했다. 그의 분노를, 그의 슬픔을, 그의 고통을…. 그날 받았어야 했다. 그는 행복해 했었는데…… 우진이와 둘이서, 따뜻하고 밝게 행복해 했었는데…… 한참을 흐느끼던 그의 팔이 내 목을 감싸 안았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온통 거즈로 싸여서, 채 다 보이지도 않았다. 그의 다정하고 평온했던 갈색눈이 너무나도 아프게 일렁이며 나를 담았다. “울지 말아요, 유진 씨. 상처가 덧나겠어요. 유진 씨 이렇게 아름다운데, 그러면 안 되잖아요. 울지… 말아요.” 그의 얼굴을 닦아주려고 조금 몸을 떼려는데, 갑자기 그가 나를 격렬하게 끌어안으며 입맞추기 시작했다. 무작정 입을 문대면서 입술을 찾아 헤매면서, 떨리는 손으로 내 옷을 잡아 뜯기 시작했다. “유진 씨, 그만!” 그 손목을 붙잡으며 말리자, 사납게 내쳐버린다. “나… 나도 할 수 있어!!! 이 쯤은, 이 까짓 것! 나도 할 수 있단 말이야!!” “유진 씨. 제발, 울지 말아요. 울지 말아 주세요. 부탁이니까… 나, 너무 아프니까. 제발. 나 같은 놈 때문에 울지 마요.” 그가 발작적으로 내 얼굴을 후려쳤다. “닥…닥쳐!! 이제 그런 말 안 통해!!! 듣기싫어!! 날 위하는 척 하지마!!! 나쁜놈!! 내가, 바본지 알아?!!” 그리고는 나를 밀쳐서 넘어뜨렸다. 그리고 내 위에 올라타서 바지를 벗기려고 했다. “너, 이…이런 거 좋아하잖아! 나 몰래 우진이랑 이런거 했잖아!! 그리고 어제도!!! .어…어제도… !!! 그렇게…!” 그는 말을 끊고서 입술을 깨물었다. 창가로 비추는 불 빛에 희미하게도, 그가 창백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내…. 앞에서… 그렇게…… 어떻게… 내 앞에서…… 흑……” 벌려진 내 환자복 상의를 두 손에 꼭 붙든 채로, 그는 울었다. 울고 있었다. 그가… 우는 것이 좋았었는데… 나 때문에, 언제나 기뻐서 우는 그가 좋았었는데…. 그가 나 때문에 절망해서 우는 것은 나를 나락끝으로 밀어 버리고 있다. 저 울음을 멈출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죽을 수 있다. 뭔가 말하고 싶었다. 그를 위해서, 용서의 말을, 위로의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목 안이 꽉 막힌 것만 같이, 말을 하고 싶은데도,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왜 날 안지 않았어?” 흐느낌의 끝에 다시 나를 노려보며 물었다. “내 동생이랑 섹스를 할 정도였으면서, 왜 나랑 하지 않았어?!!’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말을 하고 싶었다. 말을 하고 싶었다. “대답해!! 내가 뭐였는데? 왜 하필 우진이랑 잔 건데? 어제처럼 밑에 깔리고 싶어서? 그럼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 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단 말이야!! 나도 남자라구!!!” 그가, 잠시 숨을 멈췄다. 참고 참아서, 모든 것을 한 번에 터뜨리는 화산처럼…. “나도, 너랑 하고 싶었단 말이야!!! 너랑 그짓 하고 싶을 만큼!!! 어제 니가 그랬던 것처럼, 너한테 깔리고 싶을 만큼!!! 널, 사랑했단 말이다!!! 장녹수!!!” “당신을…” 유진 씨의 그 말 한마디에, 자물쇠가 풀리듯이 나의 말이 터졌다. 그리고, 지난 일개월간 참아왔던 눈물도.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유진 씨는 감전이라도 당한 것처럼 부르르 떨었다. 내 얼굴 위로 흘렀던 그의 눈물 조차 말랐다. “그래서, 내 자신을 용서 할 수 없었어요. 당신을…. 그런 식으로…” 그의 따스한 빛을 머금었던 갈색 머리카락을 넘겼다. “그런 식으로…. 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짐승같은 육욕의 대상으로, 그렇게….” 그의 다정한 천연의 갈색 눈동자를…… “당신이 처음이었습니다. 나의 첫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더럽히고 싶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눈에 새겼다. “그래서 우진이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잤고. 그래서 당신과 헤어졌습니다. 그래서 우진과 더 만날 수 없습니다.” “바…보.” 나는 그에게 미소지었다. “나는 바보에요.” “교활해.” “나는 교활합니다.” “사기꾼.” “나는 사기꾼입니다.” “나쁜 놈.” “나는 나쁜 놈입니다.” 그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어제의 그 친구는?” “지금 내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나에게 입 맞췄다. 다정하고 따스한 입맞춤. 그리고 아름다운 미소. 너무나 아픈 축복의 미소. “녹수 씨, 그동안 행복했어요. 정말로, 아주 많이. 송유진은 장녹수 씨를 사랑했습니다. 유진 씨가 행복하길 빕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장녹수는 당신을 만나서 처음으로,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정말, 당신을 아주 많이 사랑했습니다. 유진 씨.” 그에게 인사하고 뒤돌아 문을 닫았다. 한 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걸음을 옮겼다. 나의 아름다운 사람. 나의 대지. 유진 씨. 사실은…. 사실은…… 사실은…. 헤어지고 싶지 않았어요! 절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도망치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게 망쳐버리고 싶지 않았어요! 용서를 빌고 싶었습니다! 제발 버리지 말아달라고 빌고 싶었어요! 끝내고 싶지 않았어요! 절대 끝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찰칵. 후우. ………… 정말… 끝인가요? 이것이 끝이라니… 믿기지가 않네요. 당신의 향기, 목소리, 모습. 그 모든 것이 이렇게도 선명한데, 이것이 끝이라는 것을…… 나는 정말 믿을 수가 없어요. 정말…… 이것으로 끝인가요? 유진 씨, 사실은…… 사실은… 사실은… 지금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아주 많이. 사실은… 대한이보다도 더. 오는 길에 시장을 봐서 오늘 저녁은 아주 푸짐하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병우는 많이 먹으니까, 양을 많이 쟁겨 고기를 샀다. 흠, 뼈가 잘 붙을라면 사골을 먹으면 되는데, 멍을 빼는 덴 뭐가 좋을까. 그러다가 계란 한 판을 골랐다. 세일 중인게 저녁때라 한 판 밖에 안남았어서, 경쟁자 아줌마와 열나 싸우고 챙겨온 것이다. 훗. 전리품이라 볼 수 있다. 대한이는 과일 좋아하니까, 딸기를 먹여볼까 하고 사려니 너무 비싸서 툴툴 대다가, 그래도 죄진 것도 있으니 하며 큰 맘 먹고 샀다. 아, 한 달 동안이나 안갔으니, 틀림없이 밑반찬 없을 것이다. 귀찮으니까 오늘은 그냥 가벼운 겉저리를 사고, 내일 집에서 김치 날라야 겠다. 헤헤. 이러고 걷고 있자니, 마치 집에서 삐약대는 애새끼 세마리를 키우는 애미가 된 기분이다. 사나이 나이 18세, 풍운의 뜻을 떨칠 나이에, 아줌마틱한 고민 뿐이라니 이게 웬말인가 말이냐. 에휴. 익숙한 가로수를 걸어갔다. 만개한 꽃들이 아름답다. 벚꽃도 한창일 것이다. 나중에… 조금 시간이 더 지나고, 마음이 좀 더 편해지면, 대한이들 데리고 어딘가 여행을 가야 겠다. 벚꽃이 만개한 곳으로. 담배를 입에 물려고 주머니를 뒤지다가, 커플링과 시계가 한쌍 씩 나왔다. 방심 상태에서 조금 치명적이다. 남자에게 제일 민감한 멜랑꼴리한 첫사랑의 흔적이라니. 미련스럽게 그걸 계속 지켜보다가,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얼른 그걸 던질려고 했다. 그러다가 움찔하고 멈춘 것이……… 절대, 빚진 카드 값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 만은 아니다!! 단지………이것들 꽤 비싼데. 흐…음. 결코 내가 낭만적이지 않다거나 한 게 아니다. 다만, 난 돈이 없는 가난한 고등학생이고, 방학은 아직 좀 많이 남았는데 빚은 많고…. 그러니까, 좀… 어차피 물건일 뿐이고, 또 추억의 도움을 받아도 좋지 않을까 하는 합리적인 생각을…. 쿨럭. 흠. 살때는 비쌌는데, 팔 때는 얼마나 나올까. 싱글벙글 하며 그것들을 주머니에 집어넣는 것이, 결코 내가 단순하기 때문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익숙한 초록색 대문을 열고서 들어갔다. 마루 위에서 뒹굴고 있던 병우가 달려와서 마중을 했다. 상식이는 수돗가에 쭈구리고 앉아서, 뭘 열심히 붙잡고 있으면서, 스타일 구겨진다고 투덜댔다. 무슨일인가 보니, 파란색 호수가 수도꼭지에 물려있는데 그게 너무 잘빠져서, 할 수 없이 상식이가 붙들고 있는 중이었다. 꽤 비싸보이는 양복이 온통 물에 튀겨서, 굉장히 꼴사납기에 손가락질을 하며 비웃어줬다. 흥분한 상식이가 달려오려다가, 호수가 쏙 빠져서 물벼락을 맞았다. 울상이 된 게 불쌍해서, 양복 크리닝 해주겠다고 약속하고 들여보내서 옷 갈아 입게 했다. 대한이는 마당 구석에서, 입에 담배를 물고 호수를 가져다가 감나무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물 빛이 반사 되서 생생하게 살아나는 그의 모습이 너무 활기차고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쪼르르 달려가 먹고 싶은 것 없냐고 물었다. 대한이가 무뚝뚝한 얼굴로 담배를 뱉고는, 내 허리를 잡아 당겨서 입맞춤 했다. 나는 그의 목에 손을 감고, 그의 아름다운 눈 속에 비친 나를 바라보며, 진한 키스를 나눴다. 감나무 푸른 잎에는 물방울들이 맺혀, 그 안으로 보석처럼 예쁜 녹색이 빛나고 있었다. - 절교 (絶交) 完 - --------------------------------------------------------------------- 안녕하세요, 그린그림이라고 합니다. 여기까지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m(_ _)m 처음 올려 보는데 잘 올라갈 지 걱정이 됩니다. ‘절교(絶交)’ 는 그냥 편히 읽으시고, 머리속에서 지워 주세요. 위에 난무하는 욕들이나 기타 상용여구에 대한 것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봐주셨음 합니다. 절교는 한마디로 말해서, 장녹수라는 극악 무도한 변태가 순진한 쌍둥이 형제를 가지고 놀다가 차버렸다는 끔찍한 내용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만…. 조금 정신상태가 맛이 간, 조금 평범을 벗어난 녀석의 첫사랑 이야기 입니다. 애초에는 ‘열병같은 사랑 대 오래된 진국 같은 사랑’의 대결 구도를 써보고 싶었습니다만… 캐릭터들이 몽땅 그지 같은 나머지, 이상 얄딱구리한 글이 나와버렸습니다. (ㅠ_ㅠ) 외전도 준비중인데요, 중편 정도의 ‘가출(家出)’, 아주 짧은 단편으로 3인칭 시점으로 쓰여질 ‘전학생’ , 장녹수-이대한의 닭살을 견디고 사는 철저한 헤테로 ‘한상식 진상서’ 가 있습니다. 이대한이나 유진-우진 형제 시점의 외전은 안 쓸려고 합니다. 안그럼 장녹수, 진짜 나쁜놈이었다는게 밝혀질지도 모르거든요. (^^;;) 사실 본편에선 짤린 커플이 하나 더 있습니다. 녹수 동생 희빈이와 병우 죠. 외전이라기엔 분위기가 너무 틀린, 완전 건전해피 스토리라 따로 쓸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이글은 완전 픽션이니, 말이 안된다거나, 뭔가를 묻지는 말아 주십시오. 욕멜도, 스팸멜도… 부디, 참아주세요. (ㅠ.ㅠ) 그럼, 건강하세요. ♤ 전학생(轉學生) ♤ 그린그림 ------------------------------------------------------ 눈앞 가리고 과거를 그리는 것은 미련 맞은 짓이다. 이미 떠난 버스에 대고 안녕하는 건 더더욱 꼴불견. 흥얼거리는 올드 팝송 따위는 그냥 입에 배인 습관일 뿐. 손안에 쥔 시계는 그저 예쁜 추억일 뿐. 그러니까 울지 말고, 아프지도 말고… 행복해라, crazy. ------------------------------------------------------ 이상하 나라에 뚝 떨어진 엘리스 생각이 난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이 진정 대한민국 서울 맞단 말인가. 하늘도 땅도 다 미쳐 돌아가는 이 동네에서…… 나는 과연 제 정신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허지만 19세, 여름. 초여름의 일요일 오후, ‘허지만’은 기분이 바닥이었다. 이미 1년을 꿇었는데, 이번엔 학교에서 짤리기까지 했으니. 지금 그가 땀 한 바가지를 흘리며 찾아가는 곳은, 이런 사정으로 전학하게 된 학교와 가장 가까운 하숙집이다. “씨발, 졸라 머네.” ……‘허지만’은 인천 바닥에서 알아주는 폭력학생─일명 양아치, 이명 깡패다. 이번에 퇴학당한 것도, 타학교 일진들과 구역을 놓고 크게 한판 붙다가 상대 쪽 한 명이 크게 다치는 바람에 그가 짱으로서 책임을 지겠다고 나선 것이 이유였다. 내심 선처를 기대했건만, 학교 측에선 냉큼 기회를 잡고 그를 댕강 잘라버렸다. 기껏 지켜줬던 동네 민방위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국토방위군이 된 기분. 몹시 억울했지만, 황새의 뜻을 뱁새 따위가 어찌 아랴. 사나이 넓은 마음으로 용서했다. “나쁜 새끼들! 씨버럴 놈들! 두고 봐. 밤길이 평탄치 않을 것이다!! 으드득.” …어쨌든 고등학교는 마쳐야겠기에 전학 갈 학교를 찾아봤지만, 이미 인천 바닥에선 그를 받아 줄 곳이 없었다. 결국 잉리저리 수소문 한 끝에야 겨우, 서울 강북 어딘가에 박혀 있다는 문제아들의 집합소 ‘청운고교’에 발 디디게 된 것이다. 청운고교. 그를 개 패듯이 패서 쫓아낸 그의 부친 말을 빌자면, 그곳은 ‘갈 데까지 간 녀석들의 집합소’라고 했다. 인천바닥도 떠들썩하게 했던 ‘연합’인가 하는 싱거운 이름의 강북학군 통합 본부에, 비공식 배틀스쿨이란 소문. 교사들 수준도 개판 5분전이라 웬만한 일 아니면 교내에서 담배를 피든 삥을 뜯든 내버려둔다는, 세살박이 어린애도 코웃음칠 소문들이었다. ‘그건 파라다이스잖아! 격전 속에서 꽃피는 사나이들간의 뜨거운 우정과 열정의 전장(戰場)!! 럭키!!’ 그래, 말만 들어도 그를 위해 존재하는 학교 같다. “좋았어. 서울 상경 기념으로, 청운부터 접수한다!” 벗-뜨! 접수건 제패건, 지금 당장의 지만은 굉장히 난감했다 비하자면, 고차원적 방향 탐지 기능의 동서남북이 얽혀버린 채 자기장 한 가운데에 서서 나침반을 들고 있는 기분이랄까. …한 마디로 말해, 길을 잃었다. 벌써 몇 시간째 같은 곳에서 빙빙 돌고 있는 것인지. 불친절한 하숙집 주인 아줌마는 지만이 3시간 전 걸었던 3번째 전화를 짜증 만땅으로 받아 끊고 코드까지 뽑아버림으로써, 앞으로 그곳에서 먹고살아야 할 그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했다. 할 수 없이 집에서 가져온 어설픈 약도를 이리저리 디밀며 물어도 봤지만, 근방 인간들이 몽땅 뻥쟁이인지 도대체 가도가도 이놈의 하숙집은 나타나질 않았다. 이러니까 서울에서 눈 감으면 코 베어간단 말이 나왔을 것이다, 나쁜 놈들. 지만은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사나이 나이 19세─수많은 격전의 장을 치러온 그가, 고작 이따위 길 하나 못 찾아 서울 놈팽이들의 조롱을 받아야 하다니! 게다가 초여름이라지만 제법 더운 날씨에, 모처럼 단정히 차려입은 흰 셔츠가 온통 땀으로 뒤덮이며, 그의 불쾌지수는 무한 상승곡선을 이뤘다. 덧붙여, 어머니의 강력한 권유로 걸친 베이지 색 여름 정장 바지는 가뜩이나 짜증스러운 그의 마음에 기름 붓고 불붙이고 선풍기까지 돌렸다. ‘씨발, 아무나 잡아 족치자.’ 얼토당토않은 결심을 하고 나서야, 그는 나이키 가방과 여행용 트렁크를 털썩 내려놓고 그 위에 앉아 희생양을 기다렸다. 이왕에 할 것─상경기념 첫 개시라 치고, 본격적으로 긴 다리 쫙 뻗어 모양새 잡은 뒤, 올백으로 넘겨 올린 머리를 다시 한 번 정성스럽게 고쳐 쓸었다. 그리고 어깨에 힘을 팍팍 준 채, 고개는 30˚각도, 포인트 눈빛을 살렸다. 허 눈빛. 캬- 원빈이 울고 가는구나. 평소대로 영업용 자세를 마무리한 지만은, 음산하게 미소지으며 희생양을 기다렸다. 그러나… 5분. 10분. 30분. 동네에 사람이라곤 씨가 말랐는지, 거리는 적막하기만 했다. 똥개 한 마리조차 그의 앞을 지나가지 않았다. 지만은 몹시 당황했다. 배도 고팠고, 피곤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일정 시간동안 뽀다구 나는 자세를 유지하느라, 체력을 다 써버린 그의 팔다리는 굳어버린 채 쥐가 날 지경이었다. 싸우나 탕 같은 무더위가 계속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씨발!! 안 오면, 내가 간다!!” 마침내 인내의 한계에 도달,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퍽! “우악!!” “!!!!!!!” 씩씩대며 벌떡 일어나 골목을 거칠게 돌아가려는 순간, 그는 그만 누군가와 강력하게 정면 충돌했다. 그것도 안면을. 게다가 입술을. 로스트 마이 퍼스트 키스. 화르륵! 19년 동안 지만이 고이 지켰던 입술의 순결이었다. 고작 이런 허접한 동네 낡은 담벼락 앞에서 잃어버린 순결이었다. “나, 나의…! 나의…! 나의…!!!” 충격으로 어버버거리던 그는 기어코 할 말을 잃었다. 기념비적인 첫 키스 상대는 바로, 자신과 비슷한 덩치의 ‘남․자였던 것이다! “끄아아아악!!! 죽여 버리겠어!!!” 자기랑 똑같은 거 달린 놈과 입박치기 했다는 현실에 비관, 그는 무고한 시민을 향해 핵펀치를 난사했다. 천만 다행히도, 놀란 시만이 반사적으로 피하면서 휘두른 무언가가 그의 관자놀이에 정통으로 명중했다. 그리곤, 까무룩- 털썩. “정신 들어요?” 신선한 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식혀줘서 기분이 좋았다. 어쩐지 어질어질해서, 지만은 눈을 뜨고도 한참동안 시야의 초점을 맞출 수 없었다. “괜찮습니까?” 다시 한 번 걱정스러운 음색을 담은 목소리가 울렸다. “젠장.” “아, 정신이 납니까?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눈앞의 남자는 분명 아까 그놈이었다. 19년 동안이나 그가 지켜왔던 싸나이 순결을 짓밟아버린! 다시금 혈압이 오르는 지만이었다. 그것을 눈치챈 듯, 남자는 재빨리 비켜서며 손사래를 쳤다. “아까는 정말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저도 너무 놀라서…” 그리고 난처한 듯 얼굴을 조금 붉혔다. 흘낏 보니 꽤나 딱딱해 보이는 하드 커버의 책이 그 옆에 놓여 있었다. 흉기는 저것인가 보다. 일반 수학의 정석. “어떻게 죽을래.” “네?” “어떻게 죽여줄까 하고 물었다.” “정말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쪽도……” “닥쳐!!!” 지만은 거칠게 그의 멱살을 잡아 내렸다. 그런데 그만 힘이 과했는지, 남자가 확 하고 무너져 내리면서 그의 품에 안겨버렸다. “우왓!! 뭐, 뭐야!!” “아~ 아~, 죄송~.” 놀리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남자의 얼굴은 천연덕스러웠다. 싱긋 미소까지 짓는 모습에, 순간 지만의 팔에는 오도독 소름이 돋았다. “벼… 변태같은 새끼!! 절루 안 꺼져?!!” “하핫. 죄송죄송~.” 남자는 여전히 능청맞게 싱글거리면서 일어나 몸을 툭툭 털고, 지만에게 손을 내밀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듯이 연결되는 그 동작에, 지만의 손이 무심코 그 손을 붙들었다. 남자의 조금 처진 눈꼬리가 가늘게 접혔다. 그는 지만을 잡아 일으켜 옷을 가볍게 털어 준 뒤, 옷단장 마무리까지 해 주고는 방긋 웃었다. 장난기 어린 그 웃음을 보고서야, 하는 대로 내버려둔 채 멍하니 있던 지만이 뒤늦게야 ‘핫!’하고 발끈했다. 울그락 불그락. 그런 지만은 아랑곳없이, 남자는 정석 책을 주워 옆구리에 끼고 바닥의 트렁크를 응시한 채 물었다. “혹시 하숙집 찾고 있어요?” 지만은 움찔 했다. 말아 쥐었던 주먹을 풀고, 머쓱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아까보다도 환하게 미소지으며 트렁크를 주워 들었다. 옆에 놓여 있던 나이키 가방은 어깨에 둘러맸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를 향해 상냥하게 말했다. 차 두 대가 지나가면 꽉 찰 좁은 골목길을 이리저리 복잡스럽게 돌아가니, 약도 어딘가에 적혀 있던 할인마트가 눈에 들어왔다. 그때서야 남자가 제대로 안내한다는 확신을 한 지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무사히 하숙집에 도착한다면, 아까 일에 대한 응징을 조금 가볍게 해줘도 되겠다. “어라? 잠깐, 이봐! 내가 어느 하숙집 찾는지 알아?” “이 근처에 하숙집은 한 군데 밖에 없어요. 몰랐습니까?” 지만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씨발, 그럴 수도 있지. 감형 취소다. 쿡쿡 대며 앞장서던 남자는 동네 슈퍼 두 개만한 할인마트 앞에 멈춰 섰다. “저… 시간 괜찮으시면, 잠깐 들러 장을 봐도 괜찮을까요?” “맘대로 하쇼.” 지만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정중한 말씨도 배알이 꼴렸다. 남자가 마트로 들어가자 처음엔 밖에서 기다리려던 그는, 내리쬐는 햇살에 못 이겨 결국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별달리 살 것도 없었기에, 그저 입구 근처에 멀뚱하니 서서 남자를 노려봤다. 그는 대학생처러 보였다. 키는 자신과 비슷한 183 정도로, 호리호리한 체형에 특별히 근육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말라보이지도 않는, 그저 그런 평범한 몸뚱이. 검은 커트머리에 조금 눈꼬리가 처진 속 쌍꺼풀의 눈과 조금 비스듬한 것 같은 코는, 보기 좋고 건실한 인상을 주었다. 옷은 캐주얼하게, 스타일 잘 빠진 헐렁한 청바지와 흰색 티를 위에 체크무늬 칠부 반팔 남방을 걸쳤다. ‘어려 보이려고 발악을 하는구만.’ 남 말 할 처지가 아닌 허지만의 평이었다. 트렁크는 입구 옆에 세워두고, 옆구리에는 여전히 정석 책을 낀 채로 이것저것 고르는 모습이 아주 능숙해 보였다. 과외라도 갔다 오는 길에 장을 보는 것인가 보다. ‘사내자식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여자 틈에 섞여 시장을 보다니.’ 지만의 집안은 가부장적인 분위기로, 그는 어렸을 적부터 ‘고추 달린 노은 부엌에 들어오는 것 아니다’란 가르침을 받고 살았다. 더불어, ‘여자는 땅, 남자는 하늘’,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 따위의 촌스런 가훈을 부친으로부터 귀가 닳도록 들어 온 것이다. 어머니 애교 한 방이면 홀라당 넘어가는 부친이라 그다지 설득력은 없었지만. 아무튼 여타의 살이 되고 뼈가 되는 소리들은 귓등으로도 안 들으면서 요런 것만은 머리 속에 쏙쏙 집어넣는 인간, 허지만이었다. 복잡스러운 물건들을 요령 좋게 쌓아올리며 계산대에 내려둔 남자는, 각각 다른 종류의 담배 두 갑을 주문하고 돈을 치렀다. 그러다 입구 옆의 지만을 흘낏 보더니 물었다. “음료수 드실래요? 제가 사겠습니다.” 마침 목이 말랐기에 고개를 끄덕이자, 계산대 옆의 냉장고에서 캔 두개를 꺼내 마저 계산했다. 지만은 흠칫 놀랐다. 캔을 넘겨주는 남자의 팔에는 아주 희미하지만 여러 상흔이 보였다. 유리 같이 날카로운 것으로 베인 듯한.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상처에 익숙하지 앟은 사람들이 보면 그다지 눈에 띄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코찔찔이 시절부터 싸움터를 굴러온 자신이 보기에, 저건 분명히 베인 상처였다. 그것도 어쩐지 악질적인 고의성이 엿보이는. 지만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러고 보니, 어딘지 좀 특이했다. 생긴 생긴 것도 멀끔하고, 보아하니 꽤나 범생이였을 것 같은데도, 그는 무척이나 친절해 보였다. 대개 그러면 싸가지가 바가지인데 말이다.(─어디까지나 그의 기준) 게다가 시중 드는데 익숙한 저 동작들. 거기에, 솔직히 척 봐도 양아치인 자신에게 당황하지 않고, 비위를 맞추며 자연스럽게 대하는 점! ‘왕따였구나!’ 입구에 서서 한 보따리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자신을 기다리는 남자를 향해 지만은 혀를 찼다.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안 가세요? 뭐, 다른 거 사드릴까요?” ‘붕신, 겁먹었구나. 졸라 겁쟁이네. 새끼.’ 지만은 그가 조금 불쌍해졌다. 얼마나 당하고 살았으면, 처음 보는 양아치에게도 전자동 풀 서비스일까. ‘인생이 불쌍하니 때리진 말자. 까짓 입술 박치기야, 기집애랑 하나 것도 아닌데 뭐 어떠냐.’ 지만은 손안의 음료수를 화끈하게 들이키고, 마무리로 캔을 빠직- 구겼다. 터프한 남성미. “갑시다.” 서비스로 콩나물 봉다리 하나도 들어줬다. 그들이 복잡한 골목길을 다시 구비구비 돌아서 하숙집 앞에 도착한 것은, 할인점에서 출발하고부터 약 5분 뒤였다. 허름한 해장국 집은, 낡아빠진 복층 건물 1층에 구멍가게 만한 크기로 자리잡고 있었다. 간판도 꾸질하니 달랑 ‘해장국집’ 이 한마디가 파란색 낡은 판대기 위에 검은색으로 갈겨써져 있을 뿐이었다. 가게 입구 옆으로는 조그만 회갈색 쪽문이 하나 있었는데, 가게 위의 건물 내부로 통하는 길인 것 같았다. 그러나, 비록 외양은 협소해도 위치나 가격 면에서, 또 음식점을 겸업한다는 점에서 볼 때, 하숙집으로서는 정말 최상의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영감탱!! 날 이런데다 처박다니!!! 수전노 같으니라구!!!” 인천 땅부자 허지용씨 댁 늦둥이 허지만 군은, 부친을 향해 분노성 포효를 날렸다. “그럼, 안녕히 들어가세요.” 곁에서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울렸다. 그때서야 남자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 그는, 순간 쪼금 쪽팔렸다. “어… 수고했수다.” “아니요, 이웃끼리 서로 도와야 잘 살죠. 앞으로 자주 볼텐데.” “엥?” “옆집의 장녹수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해장국 집 맞은 편으로 보이는 낡은 초록색 대문을 가리키며, 남자─장녹수는 미소지었다. “어라, 학상. 이제야 도착한건감? 아니, 전화한 지가 언즉인디?” 지만이 해장국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 걸죽한 음성의 배 뽈록이 아줌마가 나타났다. 모든 일의 원흉!! “이 아줌마야! 당신이 길만 똑바로 알려줬어도 이럴 일은 없었잖아! 전화까지 끊어 놓고는!!” …이리 소리치고 싶은 것을 최대한 꾸욱 눌러 담으며, 지만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도 제법 빨리 왔구먼? 최단 기록이여. …거참, 이상하구먼…” 뽀글뽀글 파마머리를 긁적이며 말한 중얼거림. 그것이 지만의 귀에 쏘옥 들어갔다. “아니, 헤맬지도 모르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랬단 말입니까?!!” “사내자슥이 사소한 것 갖고 시부렁거림 못 쓰제~. 근디 참말로, 워찌 이리 퍼뜩 왔나 모르겄네.” 커억!! 비꼬듯이 웃고 앞장서는 아줌마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니, 꽃무늬 월남치마에 출렁이는 엉덩이가 온통 심술통으로만 보였다. 1인실은 매우 협소했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가 놓여있고, 사이에 사람 하나 누우면 끝날만한 통로. 방구석에는 조그만 행거 하나가 초라하게 서 있었다. “짐 풀고 내려오든지, 밥 한 술은 줄 터니. 시간 안 지키믄 다음부턴 국물도 없을 줄 알어. …최장 기록은 48시간인데 말여. 이상-타…” 갸우뚱하고 내려가는 아줌마의 뒤통수를 밀어버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은 지만은, 2층 구석에 위치한 자신의 황량한 방에서 분노와 서러움의 일갈을 외쳤다. “영감탱!! 선생들!! 반드시 복수하겠어!! 우어어어어!!!” 딸칵. 콰르르르-. ‘씨발.’ 지만은 거의 초죽음 상태였다. 저녁때 그 심술 아줌마가 차려 준 괴상한 향과 모양의 수상한 국을 그나마 맛은 괜찮아서 꾸역꾸역 다 먹을 무렵, 그 안에서는… 윽. ‘다리였어! 그건 분명히 곤충의 다리였어! 아니면 더듬이야!! 이 집 해장국을 먹는 사람들은 본체를 먹는 게 틀림없어!!’ 너무 놀란 나머지 지만은 말도 못하고 손짓으로 아줌마를 불러 보여 줬더니 그녀가 씨익 웃으며 했던 말은 더 가관이었다. “원래 학상 나이 때는 많이 묵어야 좋은 것이구만. 사양말고 많~이 묵어라.” 낮부터 시달린데다가 저녁까지 그딴 걸 먹으니, 지만의 속이 난리도 아니었다. ‘객지가면 고생밭이라더니, 씨발! 청운이고 뭐고, 내가 그 학교 먹기 전에 저 마구할망구한테 잡아먹히고 말거야. 이러니까 하숙집이 근처에 하나인데도 방이 남아돌지!!’ 기실, 이 하숙집의 하숙생은 온리 그밖에 없었다. 아무튼 기진맥진해서 방으로 돌아오는데, 복도 쪽 창으로 앞집 마당이 보였다. 낮의 입 박치기 사건이 떠올라서 또 한번 홀로 버닝! 진짜 첫 발부터 엉망진창 난리 브루스다. 정작 내일 화려한 신고식을 해 올리기도 전에 기운이 쪽쪽 빠져 버렸으니. 이걸 노리고 여기 처박은 거면, 영감 정말 짱이유. ‘하지만 사나이 강딴이 있지. 이 허지만이 고작 이따위 시련에 굴할 줄 알아!’ “그 집엔 악마가 살어.” “히익!!!!!” “키키키. 뭘 그리 놀라남? 고추 떨어지겄네.” 한참 어두운 창 밖을 바라보며 홀로 분노를 불태우는데, 그의 뒤에서 울리는 쇳소리. 지만은 정말 놀라버렸다. 깜깜한 가운데 달빛을 받아 푸르고 창백하게 덩그러니 떠있는 아줌마의 웃는 얼굴은, 납량특선 공포특급 그 자체였다. 게다가 저 웃음소리!! 후다닥 물러선 지만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그 모습에, 소름이 쫙 돋으며 등골이 오싹했다. “잊지 말어. 그 집엔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 좋아. 암, 고럼. 그놈은 악마니께.” 웃음기마저 거둔 채, 그녀는 지만을 잡아먹을 것처럼 바라보다 건너편 집으로 눈을 돌렸다. 그 눈이 너무나도 살벌해서, 쌈꾼인 지만조차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마녀는 잠시 더 창 밖을 노려보다가, 뒤돌아 뒤뚱뒤뚱 걸어가기 시작했다. “화장지 아껴 써라. 한 번에 4칸 이상은 쓰지 말어.” 음산한 경고를 남기며. 지만은 또 헤매고 있었다. 어제의 할인점을 기점으로, 또다시 방향이 얽히기 시작한 것이다. 개미소굴처럼 다닥다닥 붙은 데다,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꼬여있는 동네구조는 실로 미로라 불릴만 했다. 참다못해 또다시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물어봐도, 상황은 어제와 같았다. 동네가 워낙 복잡하다보니 설명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쉽지 않았던 것이다. 할 수 없이 지만은, 사방을 휘휘 돌아보며 청운 고교의 교복을 찾았다. 출근 시간의 많은 사람들 틈에서 이상하게도 고교생은 잘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초조한 지만이 마침내 어제와 같은 짜증을 낼 무렵… 있었다. 꾸리꾸리한 청색 셔츠와 흰색 베스트, 거기에 곤색 바지. 틀림없는 청운 고교의 교복이다. 지만도 지금 입고 있긴 하지만, 처음 이 교복을 보고 얼마나 치를 떨었던가! 착용자의 스마트함을 최소 반 이상 깎아 내리는 이 교복은 패셔너블한 지만의 감성에 좌절감을 안겨줬다. 그래서 그는 교복바지 폭부터 줄였다. 아침에 처음 입어본 이 쫄쫄이 교복은, 새 옷이라 그런지 좀더 낑겼지만 다리를 꿰는데는 무난했다. 거기에 나름대로 애지중지하는 뾰족 가죽구두를 정성 들어 닦아 신고 하숙집 통들어 하나밖에 없는 대형거울 앞에 서니, 자신이 보기에는 그나마 많이 나아졌다. 자신이 보기에는. ‘웃! 빛난다! 역시 원판 불변의 법칙!’ 스스로 흡족해하며 므흣하게 미소짓고 있을 때, “하이고, 눈꼴 시려라~. 꼴이 그게 뭐여? 미친 거 아녀? 살다살다 별 꼬라지를 다 봤지만서도, 학상 같은 꼴은 처음 보는구먼. 양아치 중에서도 쌩 양아치여. 시방, 참말로 고러고 나갈 건감? 부끄럽지도 않은겨? 하유~, 머리 꼬라지 좀 보소. 쯧쯧.” “뽀그리 파마에 때꾹물 묻은 월남치마 아줌마한텐,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 …라고 그는 외치고 싶었지만, 이번엔 예의 곤충을 전체적으로 우려 낸 먹거리라도 먹게 될까봐, 참았다. ‘씨발! 두고봐! 이런 곳에 날 처박다니!! 영감탱, 선생들!! 기필고 복수한다!!’ 다시 굳은 다짐을 끝으로 불쾌한 기억을 접으며, 앞에 가던 청운고교 학생을 위엄스레 불렀다. “어이! 교복! 너, 이리 좀 와봐라.” “저요?” 대답하며 슥 돌아보는 이는 어디서 많이 본 면상이었다. “어라?” “아!” 어제 본 왕따, 옆집 사는 장녹수였다. “……고등…학생이었나?” “네. 2학년입니다.” “……혹시, 몇 년 꿇었다거나?” “아니오.’열 여덟’ 맞는데요.” ‘거짓부렁!!!’ 싱글거리며 답하는 장녹수는 교복만 입었지, 어디로 봐도 고등학생은 아니었다. 그 보통 있지 않은가, 고교생 특유의 ‘싱싱하고 청초한 오오라’라는 것이! 그를 포함해 그의 주변에도 험상궂게 생긴 덩치들이야 많았지만, 그래도 척 보면 겉늙은 고딩이구나 싶은 정도였다. 그런데 장녹수는 키만 좀 크다 뿐이지 별 특별한 점은 없는데도 성인처럼 보였다. 덧붙여 교복 입은 모습은, 마치 안 어울리는 옷 억지로 걸친 대학생 같았다. 한참동안 녹수의 외양에 대해 요리조리 고찰하던 지만은 그가 삭은(?) 것이 어제 봤던 그 상처의 원인─즉 왕따에 기인한다고 결론 지으며 그를 불쌍하게 쳐다봤다. ‘대체 얼마나 고생이 심했으면, 쯧쯧.’ 길 찾기로 벌써 두 번이나 도움을 받는데 마침 같은 학교라니, 저 정도 트러블이야 자신이 가볍게 해결해 줄 수도 있다. 후훗, 역시 나이스 가이. 지만은 녹수의 어깨를 콱 거머쥐었다. “걱정마라! 이제부터는 이 허지만 형님이 널 지켜주마!” “…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냐. 하지만 이제 이 형님이 청운에 온 이상, 너도 고생 끝이다.” “저… 뭔가, 오해를…?” “아니! 말 안 해도 다 안다! 불안해서 주위 어디에도 하소연 못하는 그 고통, 내 다 안다. 걱정 마라. 이 형님, 능력 있다!” …거듭 말하지만, 그는 인천바닥에서 알아주는 꼴통이었다. 대망의 청운 고교 앞. 학교는 생각보다도 큰 규모였다. 건물은 두 동으로 나누어져 가운데엔 꽤 넓은 운동장이 있었다. 정문은 학교 전체 크기에 비해 무척 작고 담도 높아서, 일견하기에는 교도소 같은 느낌을 주었다. 언뜻 엄격해 보이는 외관이었지만 지만이 길을 헤맨 시간을 생각하며 꽤 늦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아무 제재 없이 태평스레 교문을 드나들고 있었다. 그 흔한 선도부라던가 학생주임의 복장단속 광경 따위는 눈에 띄지 않았다. 설마 소문이 사실이란 말인가. 지만의 가슴이 뛰었다. “여기, 지각이라던가 복장 같은 거 잡는 사람 없냐?” “그냥 다른 학교보다 등교시간이 한 시간 늦는 것뿐이에요. 시간 지나면 교문 걸어 잠급니다.” 그럼 그렇지. “그․대․신.” 장녹수는 빙긋거리며 학교 뒤쪽을 가리켰다. “디딤돌까지 구비된 낮은 담장이 비공식 루트로서 정문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 학교는 순찰 같은 것 안 돌거든요. 신입생 환영회 때 다 알려주는 곳이기도 하구요. 아참, 대신 출석 체크는 칼같이 하니까 자의조퇴 시에는 과목단위 잘 계사해서 하세요.” 갑자기 불쑥 지만에게 바짝 다가서서 킁킁댔다. “모… 목욕했는데…” 당황한 지만이 얼빠진 대답을 하자, 그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담배 피우시나 해서요. 실내 흡연은 금지거든요. 냄새 배고 지저분해 진다고 관리가 어렵다나. 그래서 담배는 쓰레기 소각장 옆이나 옥상에서만 가능해요.” ‘거짓말! 그런 뻥이 어딨어!’라고 지만이 외치려는 순간, 뒤이은 말에 먹혔다. “거짓말이 아니라, 학교 관리 아저씨가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진 거래요. 남학교에 어쩐지 거친 학생들이 많아서 꽁초는 산처럼 쏟아지는데, 그게 여기저기 사방팔방으로 퍼지니까 아저씨 혼자 청소하시기 여간 힘드신 게 아니었나봐요. 참다못해 학교측에 고육지책으로 건의하고, 안되면 그만두겠다고 못박으셨답니다. 우리 학교는 어째 일하는 분들 구하기가 쉽지 않으니, 할 수 없이 들어 준 거구요. 그래도 공식적으로는 못하고, 학생회 통해 홍보문 돌렸어요.” ─오오! 독심술이라도 한 듯 좔좔 읊는 그 말에, 지만은 손을 탁 치며 이해했다. …여전히 안 믿기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럴 수도…? 학교 자체가 문제아들 집합소라는 특수환경이니까. …어라? “그런데, 그런걸 지키냐? 귀찮게끔.” 녹수는 훗- 하고 웃으며 두 번째 손가락을 들었다. “물론, 벌칙이 있습니다. 꽤, 아니, 아주 효과적인… 이 학교 유일무이한 벌칙.” 그리고는 운동장을 가리켰다. “<완전군장 뺑뺑이>“ “완전군장 뺑뺑이?” “네, 완전군장 뺑뺑이. 통칭 연병장으로 불리는 우리 학교 운동장에서 행해지는, 아주 치사하고도 모욕적인 체벌입니다.” 지만은 호기심이 생겼다. 도대체 어떤 벌이면 이곳의 야수들을 잠재울 수 있는 걸까. 그는 하키스틱에 맞아 엉덩이가 터진 적도 있지만, 그딴 건 별로 두렵지 않았다. 아마 이 곳에 있는 대다수의 놈들도 그럴 터. “흐음. 그게 뭔데?” 그가 관심을 보이자, 자신만만한 자세로 장녹수가 답했다. “책 꽉꽉 채워 책가방 매고, 양손에는 주전자, 앞에는 공익광고 문구가 달린 플래카드, 허리에는 깡통 꼬리를 단 채 운동장 10바퀴. 참고로 광고문구는, ‘낮에는 불조심 밤에는 쉬․아․조․심♡’.” 뭐……, 뭐야 그게!!! “뭐냐, 그게!! 유치하게!! 고작 그거야?!!” “어라, 우습게 보지 마세요. 그래뵈도 본보기로 적발한 10여명이 당한 것을 본 이후로는, 그 누구도 어긴 적이 없다는 전설의 형벌이니까. 간혹 신입생이 겁없이 도전했다 걸린 걸 제외한다면 말이죠.” ……엄청 쪽팔릴 것 같긴 하다. “아참, 특히 조심하셔야 할 곳은 매점과 화장실입니다. 거기게 제일 빈도수가 높은 위험지대거든요.” “흐음.” 지만의 시큰둥한 반응에도, 장녹수의 정보를 위장한 수다는 끊이질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청운고교 교무실 앞으로 당도했다. “그럼 지만 형, 도움 필요하시면 저 찾으세요. 2학년 1반입니다.” “어, 어. 그래.” 종종걸음으로 명랑하게 사라지는 녹수의 뒷모습을 보며, 지만은 흐트러진 머릿속을 정리했다. 귀가 다 쟁쟁하네. 사내자식이 수다라니. 피식. …형이라. 생긴 것 답지 않게 애교스럽다. 형이라… ‘형이라니! 하핫!! 지만 형, 지만 형이라고?! 하하하핫!!’ 외아들에 늦둥이인 허지만은, 형이란 단어에 약했다. “야, 저 녀석 못 보던 놈인데.” “장녹수란 걷고 있었어.” “헉! 그럼…!” 문득 잡소리가 귀를 가렵혔다. 지만은 안광을 번뜩이며 뒤돌아, 잡소리의 주범을 찾아 노려봤다. 눈이 마주친 덩치 두 명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고 서둘러 사라졌다. 자신의 짐작이 맞는 것 같다. ‘도대체 그 녀석은 왜 왕따를 당하는 것일까. 짧은 시간 겪었지만, 시끄러운 것 빼면 성격도 밝은 것 같은데.’ 지만은 혀를 차고, 의기양양하게 교무실의 문을 열어 제쳤다. “우헥!!!” 들어선 문 바로 앞에는 퀭한 눈의 비쩍 마른 교사 한 명이 지키고 앉아 있었다. 어쩐지 어두침침한 오라를 발산하며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던 그 교사는 허겁한 표정의 지만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허지만?” “네? 네.” “따라와라.” 일언반구도 없이, 그대로 지만을 데리고 어디론가 향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담임인 듯한 그는 2층의 한 교실 앞에 서더니 더더욱 음침한 오라를 뿜었다. 멈춰 선 곳은 2학년 1반, 장녹수의 반이었다. 지만은 어쩐지 낯뜨겁기도 하면서, 또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한 가지…” 교실 문을 열기 직전, 창백한 안색의 담임이 입을 열었다. “이대한, 유병우, 한상식, 그리고… 아니다. 특히 이대한을 조심해라.” “…네? 누구요?” 갑작스런 말에 당황하며 반문하자, 담임은 다시 웅얼웅얼 세 명의 이름을 알려주고 문을 열었다. 늦은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반의 대다수는 잠들어 있었다. 전체 인원은 대충봐도 50명은 넘지 않았고, 빈자리도 많았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장녹수로, 방금 헤어져서인지 팔팔하게 앉아서 뭔가 열심히 노트에 적고 있었다. 어쩌면 범생이라 따를 당한 것인지도… 끼이익- 열린 희미한 문소리에 고개를 든 그는 지만을 발견하더니 반갑게 웃었다. 그리고 서둘러 옆자리에서 자고 있던 짝을 깨웠다. 눈을 부비대고 일어나 안경을 걸친 옆자리 학생은 지만과 담임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일어섰다. “차렷-!!” 기상나팔 소리처럼 우렁차게 구호가 터졌다. 그러자 반 여기저기 쓰러져 자고 있던 시커먼 덩치들이 좀비처럼 꾸물꾸물 일어나기 시작했다. 반장임에 틀림없는 그 학생은, 대부분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잡을 때까지 2~3분 여를 기다렸다가 다시 구호를 외쳤다. “경례!!” “안녕하십니까!” 마치 잘 훈련된 군대 함성소리 같았다. 박력과 기합이 팍팍 들어가서 단음절로 딱 완결되는 완전무결한 인사였다. 그들은 잠이 완전히 깼는지, 뉴페이스인 지만을 향해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런데 그 분위기란 것이, ‘새 친구야 어서 와’ 따위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새로운 적수의 등장에 하나같이 긴장하며 전투력을 측정하는, 바로 싸우기 직전의 탐색전 같다랄까. 과연 비공식 배틀스쿨이란 말도 허튼 소리만은 아니었나 보다. 처음 낯선 환경에 내심 쫄았던 지만은, 익숙한 공기를 접하자 다시 투기(鬪技)가 들끓었다. “전학생이다. 허지만, 19세. 1년 꿇었고 인천에서 왔다. 이상. 오늘도 사고 치지들 말아라.” 실로 간단한 조례를 남기며 담임은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교탁 옆에 세워둔 지만은 그냥 내버려둔 채. 홀로 남은 그는 참으로 민망했다. 어쨌든, “허지만이다. 오늘 부로 청운은 내가 접수한다! 붙고 싶은 놈 있으면 다 나와!!” 밤새 준비한 소개 멘트는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거하게 외치고 히죽 웃는 지만을 향해, 살의에 찬 시선이 집중됐다. 숨막힐 정도의 침묵과 함께 증폭되는 투기들.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어 마침내 절정에 달아, 허지만 대 청운고교 2학년 1반의 대치는 일촉즉발!! “와아! 지만 형! 이리와 앉으세요. 우와 반가워라. 에헤헤.” ─휘청. 경악을 담아 일제히 장녹수를 바라봤다. 교실을 가로지른 이 눈치 없는 한 마디에, 실내는 종전과 다른 의미의 침묵이 흘렀다. “…노…녹수야… 너, 저 형 알아?” “응. 어제 내가 길도 가르켜 드렸거든. 해장국집 하숙생이셔.” 놀란 반장의 질문에 천연덕스럽게 받아치는 장녹수를 바라보며, 지만은 그가 ‘따’가 된 이유를 어쩐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럽게 눈치 없는 자식. 아씨, 스타일 구겼네. 지만이 인상을 팍팍 쓰며 노려보는데, 장녹수는 빈자리를 찾아 손까지 흔들며 자신을 불렀다. 교실 가운데의 맨 뒤, 덩치가 사난한 녀석의 뒷자리였다. 지만이 애용하는 곳은 주로 창가 쪽이었지만, 대꾸할 기분도 나지 않아 그냥 이끄는 대로 앉았다. “하하, 정말 신기하네요. 우연히 길에서 만났는데, 이웃에다 같은 반까지 되다니. 형이란 저랑 참 특이하 인연이에요, 그죠?” 실상을 말하자면, 그 근방에 있는 고등학교라고는 청운밖에 없었고, 지만이 헤맨 곳은 녹수의 통학로인 데다가, 결정적으로 2학년 1반은 청운 전체에서도 내노라하는 문제아들을 보아놓은 곳이라, 지만은 애초부터 여기로 내정되어 있었다. …어쨌거나 본인들에게는 정말 신기한 우연이었다. 장녹수는 정말 기분이 좋은지 그 옆으로 자리까지 옮겨와 헤실헤실 대며 지만에게 이것저것 말을 걸었다. 아까 일로 토라진 그가 무반응에 무시여도 끈질긴 물음을 반복해서, 마지못해 대답하면 저 혼자 신나게 웃었다. 이걸로 그는 좀전의 호감도 포인트를 다 깎아 먹어버렸다. 지만은 한숨을 내시었다. 피곤이 몰려오니 허기가 졌다. 엊저녁부터 굶은 데다가 아침까지 걸렀는데, 그동안은 긴장해서 그랬는지 느끼지도 못했었다. 하지만 일단 주린 배를 의식하자, 몹시 시장했다. “배고프다.” 무심코 중얼거렸는데, 의외로 즉각 눈앞에 삼단 찬합이 뚝 떨어졌다. “드세요.” 장녹수는 싱글거리면서 젓가락까지 지만의 손에 쥐어주고, 찬합을 착착 열기 시작했다. 지만은 지금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싶었다. 눈앞에 노인 찬합 안, 그 곳에는 색색가지 화려한 반찬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샛노란 계란말이와 초록 시금치, 갈색 감자조림과 불고기, 흰색 두부와 도토리묵, 붉은 새우볶음과 깍두기 김치. 보온통에서 퍼 담은 맑은 콩나물국까지. 지만의 짧은 생애 통틀어, 제일 푸짐하고 호화로운 도시락이었다. 게다가 맛은 더 환상적으로, 달짝지근하게 달라붙는 불고기는 적당히 구워져서 질기지도 무르지도 않게 익혀졌고, 양파와 파를 적당히 섞어 말아 부친 계란말이는 그가 먹어본 것 중 최고! 입안으로 살살 녹는 감자 조림과 담백한 두부, 탱탱한 도토리 묵을 맛본 뒤, 까득까득 씹을수록 맛이 좋은 새우볶음과 잘 익이 맛깔스러운 네모 깍두기를 곁들여 식욕을 더욱 돋구었다. 텁텁한 입안에 부운 콩나물국의 국물은, 진짜 끝- 내주게 시원했다. 마지막 마무리는 아기자기하게 깎은 사과의 페펙트한 입가심. ‘아~, 행복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띄며 식후 포만감을 즐겼다. 그러다 퍼뜩, 이거 혹시 생일 도시락 같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 야. 이거 내가 다 먹어서 어쩌냐.” “괜찮아요. 그거 이제 필요 없게 된 거였거든요. 별로 식욕도 없고.” “그럼 다행이지만… 험. 거, 어머니 음식솜씨 하나 끝내주신다.” “입에 맞아요? 다행이네. 그거 제가 만든 겁니다.” 지만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지… 진짜냐?! 우… 우리 어머니가 싼 것보다도 맛있었는데!!” “에헤헤, 쑥스럽게. 맛있었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지만은 진정, 진심으로 놀랐다. 사내자식이 부엌에 들어가 요리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놀랐지만, 그런 주제에 이렇게 맛있는 도시락까지 만들다니! 진정한 컬쳐쇼크! …하지만 미각은 편견을 이겼다. 이미 맛 본 장녹수의 도시락은, 그 어떤 편견도 깨부술 수 있을 만큼 맛있었으니까. 지만은,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된다’에서 ‘장녹수는 제외’로 자신의 좌우명을 일부 수정했다. 지만의 <녹수 평가 재조정> 중에, 시각은 9시 10분. 드디어 청운고교 1교시 알림종이 울렸다. 도시락에 홀려 있다가, 그제야 자신의 선전포고가 녹수 때문에 흐지부지 됐다는 것을 떠올린 그는, 또 한번 찝찌름하게 옆자리를 쏘아봤다. 교실은 평소 분위기로 돌아와, 지만과 녹수 쪽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제 할 일들만을 했다. ‘이게 아닌데…, 쩝.’ 입맛을 다시고, 수업 끝난 뒤에 다시 한 번 분위기를 잡기로 결심했다. “이대한.” 출석체크가 시작되고, 귀에 익은 이름이 호명됐다. 분명 아까 담임이 조심하라고 한 그 놈이다. 지만은 대답이 들린 쪽을 바라봤다. 어느새 왔는지, 아까는 분명 비어있던 창가 쪽 끝자리가 채워져 있었다. 과연 척 보기에도 살기등등한 것이, 한 가닥은 넘어 두세 가닥은 할 것 같은 분위기의 놈이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서는 녀석의 앞을 지만이 재빨리 가로막았다. “뭐냐, 넌?” “전학생이다. 오늘 부로 청운은 이 허지만 님께서 접수한다!” “…전학생?” 이대한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지만은 펀치를 날렸다. 생각보다 빠르고 강력한 선제공격에 당한 이대한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 안색을 굳혔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의 접전이 시작됐다. 주변의 책상들도 우르르 치워지며 관중들도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진짜 입만 살은 녀석이라 생각했던 허지만의 그 의외의 선전에, 모두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꼴통이네 뭐네 했지만, 그는 인천 일대에서 내노라하는 쌈꾼인 것이다. 공으로 머릿자리를 해 먹은 건 아니었다. 특히 펀치력과 속도는 천하일품으로, 지금까지 일대일로 붙어 그가 져본 일은 거의 없었다. 화려한 공방 속에 갖가지 기술들을 선보이며 숨쉴 틈도 없이 몰아치다가 반격기까지 펼치는 지만은, 자신이 그저 어중이 떠중이 떠다니는 허풍선이가 아님을, ‘청운’에 증명했다. 수업 예비종이 울리고 접전이 잠시 멈췄다. 두 사람의 몰골은 모두 엉망으로, 얼굴과 몸은 온통 피와 땀 투성이였다. “후… 꽤 하는군.” 얼굴의 피를 훔쳐내며 이대한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너 역시… 만만치는 않다.” 지만은 숨을 최대한으로 작게 몰아쉬면서 비릿하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자세를 잡는데, 문득 이대한이 고개를 돌렸다. 따라간 시선의 끝에는 장녹수가 있었다. 의아한 지만이 돌아볼 때쯤에는 장녹수도 이대한도 다른 곳을 보았지만… 곧이어 본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어이, 나가자. 나가서 결판 짓자.” 지만이 제안했다. “이따가, 다 끝나고.” “뭐?!!” 지만은 당황했다. 그러나 그런 그와는 아랑곳없이, 이대한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 털썩 앉아버렸다. 또다시 그만 홀로 뎅그라니 서 있는 상황. ‘대부분 이러면 자리 옮겨서 다시 붙는 거 아닌가? 서울은 안 그러나? 아니면 이것도 여기만 틀린 건가?’ 황당했지만 어차피 하나부터 열까지 이상한 곳이었다. 자신도 전학 첫날이니 어떻게 보면 곤란하기도 했다. 매시간 바뀌는 담당과목 교사들에게 얼굴 도장을 찍어야 했으니 말이다. 맥 빠지는 기분으로 혀를 한번 차고는 자리에 앉자, 녹수가 찬물에 적신 수건을 내밀었다.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괜찮냐는 질문에, “어, 당연하지. 뭐, 저 녀석도 꽤 쎈 편이지만, 이 형님의 적수는 아니다. 하하하하!” 호탕하게 웃어주고 폼을 잡기는 했어도, 지만의 속은 내심 아니었다. 생각보다도 훨씬 강한 녀석이었다. 파워나 속도는 자신이 우위였지만, 기술이나 숙련도에서 차이가 났다. 게다가 저 엄청난 체력과 맷집이라니. 자신도 밥만 먹으면 싸움터에서 굴렀지만, 저 정도는 아니다. 아무래도 소문이 과장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대로 길게 시간을 끌수록 불리한 것은 자신일 터. 심각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는데, 손끝으로 뭔가 와 닿았다. 후시딘. “입가도 터졌어요. 바르세요.” 수업중이라 살짝 속삭이고, 다시 고개를 앞으로 하는 장녹수였다. 후시딘은 새 것이 아니었다. 반은 줄어있는 그것은, 평소 지니고 다니는 상비품이었음에 틀림없다. 지만은 어쩐지 조금, 머쓱해졌다. “…고맙다.” 평소 절대 안 쓰는 단어 중 하나를 슬며시 말하고 나니, 여간 쑥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지만의 거무스름한 얼굴이 붉어졌다. “듣기 좋네요.” 녹수는 상쾌한 미소로 답했다. 점심시간, 지만은 녹수와 함께 매점 탐방에 나섰다. 아침의 도시락이 하나 더 등장해 점심 역시 그걸로 해결할 수 있었지만, 아무리 지만이라도 염치가 없어 후식은 자신이 내기로 한 것이다. 지만으로서는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막 교실을 나서려는 순간, 누군가 장녹수를 불렀다. 이대한이었다. 그는 눈이 마주치자, 뭔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녹수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험악한 분위기에 장녹수의 눈가가 찌푸려지더니, 한숨을 내쉬고는 그쪽으로 향했다. 지만이 녹수의 팔을 잡았다. “갈 필요 없다. 가지마.” “네? 저기, 형. 그게…” “아, 글쎄. 갈 필요 없다니까. 이 형님이 다 책임져 주마.” 지만은 붙잡은 팔을 당겨서 그를 자연스럽게 감싸안으며 어깨에 팔을 두른 채 교실 밖으로 이끌었다. 녹수는 이대한 쪽을 흘낏흘낏 보면서도, 걸음은 그를 따라 옮겼다. 동네 구멍가게보다도 작은 매점은 몹시 비좁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한산했다. 분명 점심시간인데도 매점이 한산하다니… 청운은 정말 평범한 일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만은 여유 있는 빈자리 중 아무거나 잡아 앉고, 그가 준 돈을 들고 빵이나 음료수 따위를 사러간 녹수의 뒷모습을 보았다. ‘좀 수다스럽고 눈치 없는 것 빼면, 그다지 다른 놈들과 다를 것도 없어 보이는데. 거기다 자꾸 보니 별로 어른스러운 것 같지도 않고. 뭐, 다른 사람한테 참견을 잘 하기는 하지만… 성격도 특별히 나쁜 것 같지 않고… 반장과도 친해 보이는데. 그럼 왕따는 아닌 건가. 아, 이대한이 찝적거렸지. 그럼, 왕따라기보다는… 그냥 ‘봉’인가? 그런데 그 상처들은 뭐지. 보통 그렇게까지는 안 하는데…, 음?’ “뭐냐, 그 이상한 표정은?” “지…지만 형, 그거…” “……?” 뭔가 잔뜩 주전부리거리를 사온 녹수가 엄청 놀라면서 지만의 팔을 가리켰다. 뭐가 어떻다는 건가. 담배 피는 거 처음 보냐? ─담배!!!!! 화들짝 놀란 지만이 입에 문 담배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짓이겼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매점 안으 모든 시선이 흥미와 경악을 담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이런, 젠장. 저 녀석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뭐, 뭐라고 했지? 무슨 벌이라고 했더라?’ 긴장감 어린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매점 쪽문이 벌컥 열렸다. “어느 놈이여!!! 감히, 어느 눔이 싹퉁머리 읍시 매점 안에서 담배질이여?!! 누구여! 너여?!!” 지만의 얼굴이 핼쑥해 졌다. 오, 마이 갓뜨!! “저 아줌마가 왜 여기 있는 거야!!” 황당함과 억울함에 복받쳐서 지만이 외쳤다. 매점 주인 아주머니는 바로, 어젯밤부터 지만의 일상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하고 있는 하숙집의 그녀였다. “몰랐어요? 같이 사니까 당연히 아는 줄 알았는데…” 녹수는 의아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지만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어떻게 이 땅에 이런 비리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파릇파릇한 청춘이 자라나는 신성한 교정에, 지금 당장 자격증 박탈하고 징역살게 해도 시원찮을 해장국집의 운영자가, 무려 ‘학교 매점 주인’이라니!! 이건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이건 사기야!! 비리라구!!!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어~어~, 학상이여? 우짠~지, 이상타 혔지. 근래 드문 일인데 말여.” 지만의 앞에 떡하니 서서, 무다리 만한 팔뚝으로 팔짱 낀 채 그를 내려다보는 심술 마녀의 얼굴은 사악한 미소로 그득했다. “교칙 들었제? 어여 가서 준비하고, 퍼뜩 다녀 와~.” “처… 첫날인데, 몰랐습니다.” “…시방…, 못하것다 이거여?!! 학상, 몸이 부실한가 보제?!!!” “하하하, 시켜만 주십시오!” 누런 이를 번뜩이며 지만을 쏘아보는 그녀의 박력에, 지만은 바로 꼬리 내렸다. 저쪽은 뭐라 해도, 현재 그의 생활권을 쥔 사람인 것이다. …벌레탕은 사양이었다. 그런 지만이 안쓰러웠는지, 옆에 주저앉은 장녹수는 눈에 눈물까지 괴며 입가를 틀어막고 부들부들 떨었다. 초요름의 무더운 월요일 정오, 청운고교의 드넓은 연병장 한가운데. 지만은 피딱지 멍투성이 얼굴로 등뒤에 한가득 책을 담은 초등학생 용 책가방을 매고, 양손에는 입구까지 물 찬 주전자를 들고, 허리에는 노끈으로 연결된 깡통들을 매달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익광고 문구가 쓰여있는 플래카드를… 목에 걸었다. <완전군장 뺑뺑이>. 이 체벌을 위해 학교에서 공들여 제작했다고 하는 이 2절지 크기의 얇은 나무판에는, 흰 캔버스 종이에 어디서든 잘 보일 수 있을 만큼 커다랗고 선명하게, [낮에는 불조심, 밤에는 쉬아 조심♡ 여러분, 소금 플리즈~]라고 쓰여 있었다. 참고로, 특정 단어에는 강조의 의미였는지 빨간색을 사용했고, 어두운 날이나 비 오는 날에도 쓸 수 있도록 야광안료와 방수처리까지 되어 있었다. 장인의 배려가 돋보이는 작품. “지…지만 형, 괜찮…아요. …멋…져요. 풋!” 새어나오는 웃음소리를 필사적으로 누르며, 녹수가 지만을 위로했다.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그는 눈치 없는 장녹수가 더 얄미웠다. 정말 죽도록 쪽팔리고, 쪽팔리고, 또 쪽팔렸다. 수치스럽다의 수준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쪽 팔리다’였다. 지만은 너무 쪽 팔려서 육체의 고통 따위는 인지하지도 못했다. 숨도 안 쉬고, 눈도 감은 채, 죽어라 넓디넓은 운동장 열 바퀴를 돌았다. 때마침 점심시간이라, 밖에 나와있던 청운고교 학생들은 물론이고 모처럼의 볼거리에 열광하는 교실파와 교무실파들은, 덕분에 모두 한마음 한눈이 되어 지만을 지켜 볼 수 있었다. 벌칙이 끝나고 복도를 지나 교실에 도달할 때까지, 쏟아지는 갈채소리와 환호성에 지만의 얼굴은 벌겋다 못해 퍼래졌다. 결정타로, 교실 안을 들어서자마자 이대한이 다가와 날린,”그래, 내가 졌다. 니가 짱이다, 하하핫!”에서는 하늘이 노래졌다. 허지만 19 평생 최악의 날이었다. 수업도 자체 휴식하고, 그는 옥상으로 기어 올라갔다. 새파란 하늘은 구름이 화창했다. 내리쬐는 햇볕은 타들어 가는 그의 마음에 또한번 염장을 질렀다. “에잇, 씨발!! 될 대로 되라!!” 웃통을 훌러덩 벗어제끼며, 뜨겁게 달궈진 옥상 시멘트 바닥에 대(大)자로 드러누웠다. “젠장! 날씨 한 번 화창하네!!” 눈을 감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갑갑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고자… 눈앞에 보이는 하늘은 뻥 뚫렸건만, 그 앞의 현실은 막막 그 자체였다. ‘어째서 나는 되는 일은 하나도 없는 것일까. 이번에는 정말, 정말로 잘 해보려고 했는데… 진짜로, 뭔가 좀 보이고 싶었는데.’ 어머니는 우셨다. 언제나 말썽 부렸지만 혼내기만 할 뿐, 또 잔소리만 늘어놨었을 뿐이었는데, 울었다. 울어버렸다. 항상 큰소리치며 패기만 하던 아버지도, 몇 번이나 죄송하다마 굽실거렸다. 퇴학이 명백하다는 것을 알고 교무실로 찾아간 부모님은 그의 옆에 꿇어앉은 채 전학만이라도 하게 해 달라며, 빌고, 또 빌었다. 평생 큰소리만 치시던 그 아버지가… 항상 잔소리만 하시던 그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살았지만, 비겁하거나 부끄러울 짓은 하지 않았다. 자신이 믿는 정도(正道)의 기준에서 흐트러진 짓은 하지 않았단 말이다. 그냥 힘 겨루기 싸움박질을 즐긴 것뿐이었다. 때리는 것이 좋았고, 이기는 것이 좋았다. 그냥 그뿐이었는데… 어느새 자신은 소위 ‘문제아’가 되어 있었고, ‘깡패’‘양아치’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중퇴자’. ……낙오자. 자신도 잘못 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왔는걸… 모른단 말이다. 지금 와서 다르게 사는 방법 따위, 다르게 섞이는 법 따위…’ 그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도 방향치였다. 이글거리는 6월의 태양은, 사양없이 지만을 야금야금 깎아먹었다. ‘만사가 다 귀찮아. 이대로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져서 신문에 대서특필되고, 병원이나 그런데 기증되는 것도 좋겠지. 쳇! …거기서도 이런 중퇴자 깡패새끼 몸은 필요 없다고 할라나.’ 자기가 말하고도 신경질이 났는지, 데굴데굴 굴렀다. 앞으로 뒤집기 뒤로 뒤집기를 반복하다, 결국 온몸이 따끔거리도록 벌겋게 익고 나서야 더 이상은 못 견디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다 현기증에 다리를 휘청- “괜찮아요?” 재빨리 그의 허리를 낚아채는 손이 있었다. 장녹수… 지만을 부축한 채 마주친 어두운 갈색 눈이, 걱정스럽게 그를 응시했다. 말 없이, 고요하게…. 갑자기 지만의 맨살에 닿아있는 그 손길이 따갑게 느껴졌다. 화끈거리는 기운이 몸 속으로 구석구석 퍼져나갔다. 더위 먹었나 보다. 지만은 조금 거칠게 그를 밀치고 신경질적으로 옷을 주워 걸쳤다. 돌아선 그의 목 뒤는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물 사왔어요. 어디 있든, 목… 마르실 것 같아서.” 잠시 뜸을 들이다가, 녹수는 투명한 병을 내밀었다. 탁-!! 지만이 내밀어진 물통을 쳐서 떨어뜨렸다. “너 뭐야?” 짜증이 났다. “니가 뭔데 자꾸만 날 따라다녀, 어?!!” 그가 귀찮았다. “씨발, 맞고 싶지 않으면 꺼져!! 등신 쪼다 새끼!!” 자신의 치부를 들킨 것만 같아서, 비참했다. 그가 그를 만난 다음부터,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처음부터 끝까지.’그러니까 저 놈 탓이다! 모두 저 새끼 탓이야!!’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운 머리가 어지럽게 엉켜서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녹수를 향해, 그는 온갖 악에 받힌 욕설들을 퍼붓기 시자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니 화풀이가 분명한 부당한 야유들. 그것을 장녹수는 미동도 않은 채 묵묵히 받아주었다. 마치, 어떤 돌에도 파문을 일으키지 않는 잔잔한 수면처럼… 지만은 그것 역시 거슬렸다. “꺼지라니까!! 씨팔, 안 꺼져?!! 재수 없고 눈치 없는 쪼다새끼!!! 아니면 뭐야, 나한테도 한번 죽도록 당해 볼래?!! 니 걸레같은 몸뚱아리 상처들을 거미줄처럼 늘려줄까?!!!” 흠칫. 장녹수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순간 제 정신이 든 지만도, 아차 싶었다. 찬물을 뒤집어 쓴 것만 같은 기분에, 지만은 그 시선을 피해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휙 뒤돌아서 옥상을 벗어났다. 상관없다. 어차피 자신과는 별 상관없는 녀석 아닌가. 잘 알지도 못하고, 어제오늘 우연히 어울린 것 뿐. ‘…그래도 내 입으로, 잘 지내자고 그랬는데…’ 뭐 어떤가. 무슨 상관이냔 말이다. 생판 모르는 놈인데. ‘상처… 입은 것 같았는데…’ …정말 더위를 먹었는지, 지만은 다시 뒤돌아 옥상으로 향했다. 매캐한 담배연기가 코에 스몄다. 순간 의외라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살짝 열린 문 사이로 장녹수의 다리가 보였다. 지만이 어떻게 해야할까 망설이는 사이, 어디선가 희미한 멜로디가 들렸다. 그것은 카드나 보석상자를 열면 나오는 그런 음이었는데, 들어본 적은 없는 곡이었다. 호기심과 의아함에 문을 소리나지 않게 열었다. 장녹수는 옥상 끄트머리 그늘에 앉아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에는 담배를 힘없이 물려 놓고, 손에는 햇빛에 반사되어 빛이 나는 물건을 쥐고 있었다. 멜로디는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듯 했다. 녹수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지난 이틀 간 지만이 만난 사람과 과연 동일 인물인가 싶을 정도로… 지독하게 표정 하나 없었다. 영혼의 조각이라고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듯한 데드 마스크.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생명의 향기가 나지 않는 그 모습에, 지만은 순간 그가 죽은 것은 아닌가 싶었다. 만약 담배를 털기 위한 손의 움지임이 없었다면, 바로 확인해 보려고 했을 것이다. 쉽사리 말을 붙일 수 잇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지만은 조용히 물러나 먼저 교실로 돌아갔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자신의 탓만은 아닐 것이다. 원인이 된 것은 틀림없지만, 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이전에……, 아마도 그 상처나…… …뭔가 커다란 구멍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아주 어둡고, 음습한. 점심시간의 연병장 사건으로 지만을 알아보고 달라붙어 까부는 녀석들이 늘어서 있었지만,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지만의 머릿속은 온통 장녹수로 가득 차 있었다. 가슴이 미친 듯이 답답했다. 그리고 어쩐지, 초조했다. 뒷문이 열리고 장녹수가 옆자리에 앉았다. 지만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가슴 머리의 동맥이 몸 밖으로 뛰쳐나올 것처럼 세차게 방망이질하며, 목안의 침이 꼴깍 넘어갔다. “정말 미안하다!!!” 외친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불쑥, 지만의 입에서 커다란 사과 말이 튀어나왔다. 당황한 나머지, 그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는 그만… 딸꾹질을 시작했다. 장녹수와 2학년 1반 전원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집중됐다. 지만은 또한번 죽고싶을 만큼 쪽팔렸다. 그런 그를 향해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던 녹수의 입에서, 풋- 하는 웃음소리가 터졌다. 그리고는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시원하게 울리는 그의 웃음소리에, 지만은 쪽팔렸지만 ‘그래도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방과 후, 녹수와 지만은 여기저기 함께 놀러 다녔다. 처음에는 나란히 서서 묵묵하니 걷기만 했던 귀가길은, 마침 눈에 띈 편의점에 들르면서부터 청소년용 유흥길로 변모했다. 가게 앞에 놓여있던 인형 뽑기 기계. 어설프고 싼 티 나는 인형들로 가득 찬 그 네모난 박스는, 호기심으로 넣은 지만의 500원을 낼름 삼켰다. 음료수를 사서 나오던 녹수는, 박스 앞에 잔뜩 흥분해서 상자 채로 흔들고 있는 지만과 마주했다.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자신만만하게 굵은 동전을 넣은 뒤 붉은 레버를 잡은 장녹수는, 슥삭슥삭 움지이다가 기어코는 상자를 흔들었다. 얌전한 줄로만 알았던 그의 갑작스러운 흥분은 옆에 있던 지만을 다시 한 번 자극했고, 그 길로 둘은 상자를 함께 흔들면서 친밀도를 업(up) 시켰다. 물론, 당황한 가게 주인이 뛰쳐나와 항의하자 잽싸게 도망쳤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어서 마주친 오락실 앞,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안으로 돌진했다. 기세 좋게 돌진한 것에 비해, 막상 안으로 들어서자 분위기에 적응 못한 그들은 이리저리 눈에 익숙한 옛날 오락기 앞에서만 기웃거리다가, 요란한 음악을 울리는 요상 야릇한 기계 앞에 나란히 서서 팔짱을 끼고 감상했다. 현란한 발 동작으로 좌중을 압도하는 이름 모를 누군가의 친절한 시범이 끝난 뒤, 호기심이 발동한 녹수와 지만도 눈치를 살피며 동전을 넣었다. 누가 그랬던가, 마음은 청춘─몸은 고목나무여라. 참으로 안쓰러운 두 사람의 뻣뻣함에 보는 이들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기계에서 내려서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밖으로 돌진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다시 한참을 묵묵히 걷던 둘은, 이번에는 화려한 입구의 노래방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갈까요?” “음.” 만화 주제곡부터 뽕짝까지, 덩치와는 영 매치 안 되는 노래들로 고성방가 소음공해를 일으키다가, 인상과 애교로 서비스 30분까지 받아내서 듣는 이의 괴로움을 연장시켰다. “아, 이거!” 서비스 1분을 남기고 녹수가 고른 곡의 전주가 시작되자, 지만이 외쳤다. 어디선가 들은 멜로디. 어디서 들었더라. 지만의 머리가 아무리 나빠도, 이건 기억해야 했다. …바로 몇 시간 전, 옥상에서 들었던 그 곡이었으니 말이다. 출처를 떠올린 지만의 얼굴이 굳어졌다. “알아요? 옛날 노랜데.” “하하하, 내가 원래 오래된 노래를 좋아하거든…” 그래서 뽕짝만 불렀나보다. 지만은 되도 않는 변명을 하고는 괜시리 음료수만 홀짝였다. ‘Yesterday once more’ 올드 팝송을 락처럼 부르는 녹수으 목소리 안에, 한낮의 음울함 따위는 자취도 없었다. …알 수 없는 그리움은 묻어 있을지도 모르지만. 노래방을 나서니 어둑해졌다. 내친김에 패스트푸드점까지 들러서, 길이 183 이상의 두 남자는 고개를 수그리고 햄버거를 뜯었다. 지만에게 턱도 없는 양이었지만, 하숙집의 무시무시한 저녁 먹고 체하고픈 마음은 없었기에, 얼마 안 남은 용돈을 탈탈 털었다. ‘젠장. 좀 실하게 줄 것이지, 노랭이.’ 투덜거리면서 얇아진 지갑을 교복 주머니에 쑤시며, 가게문을 열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쓰읍. 대낮의 연방장 사건이 떠올라 위가 아팠지만, 식후땡. ─없으면 허전하다. 차칵차칵. 라이터도 맛이 갔는지, 불도 안 붙었다. 치익- 은백색 지포라이터의 주홍 불빛이 담배 끄트머리를 그을렸다. “여-. 좋은 거 쓰네. 부자구나, 너?” 어쩐지 배알이 꼴려서 지만이 시비조로 말을 건넸다. 약간의 직업정신(?) 발동. 녹수는 그저 빙긋이 미소지으며 라이터를 갈무리했다. 지만도 더 이상은 관심 두지 않았다. 무사히 하숙집까지 도착한 그들이 서로 헤어질 즈음에는 완전히 친해져서, 지만은 이제 녹수가 친동생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럼 들어가라.” “네, 형도 안녕히 주무세요.” 방실방실 웃고는 맞은편의 녹색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웃음도 헤프지. 그래도 보기 나쁘지 않다. 흘낏 허름한 그 집의 문틈으로 스며드는 녹수를 일별하고, 지만은 자신의 지옥으로 향했다. 괴기스러울 정도로 끼기긱- 거리는 샤시 문에, 그의 간이 콩알만해 졌다. 저녁시간 거른 것이 조금 걸렸다. 귀가 시간이 약간 늦은 것 같기도 했다. 평생 해 본 적 없는 고민을 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했지만, 낮의 일도 있고 보니 아무래도 껄적지근 했다. 가게와 통하는 계단을 살피면서 살금살금 기어 무사히 복도를 통과한 지만은 그제야 한숨 놓을 수 있었다. 쿠당! “으헥~!!!!” 살며시 일어서는 지만의 등을 무자비하게 짓밟으며, 심술마녀가 등장했다. 올려다본 그녀의 표정은… 살벌했다. “시방 뭐하는 겨?” “하하… 아직, 안 주무셨어요? 컥!” 말 끝나기가 무섭게 코끼리 다리에 무게를 싣는 뽀글 파마머리, 돼지코, 심술마녀… “내가 경고했제? 밥상머리 거르면, 꼭 전화질하라구 말여!! 손가락이 분질러졌남? 아님 분질러 줄까?!!” “잘못했습니다. 다음부터는 꼭 지키겠습니다.” 재빠르게 빌었다. 이건 꼭 그의 성격 탓만은 아니니, 탓하진 말자. 말없이 치워진 다리에 후다닥 일어선 지만이 어색하게 웃었따. 주인 아줌마는 단춧구멍 만한 눈으로 그를 한번 쪽지게 째려보고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야말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지만이 그녀의 등을 향해 분노에 찬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확!! 짤라 부릴라! 그 손가락지는 뭐여, 앙?!!” 깨갱. 돌아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얼굴의 핏기가 사라진 지만을 향해 번뜩이는 안광을 쏟으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밤잠 조심하는 게 좋을 겨. 언놈이 고추 훔쳐갈 지 모르니께. 알간?” 왜 저 아줌마는 고추에 집착하는 걸까. 긴장한 채 식은땀을 흘리는 지만의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그녀는 천천히 디로 물러섰다. “그리고-,“ 희미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는, 분명히 경고혔다. 옆집 아랑 놀지 말라구…” 기묘한 울림을 가진 그 속삭임을 끝으로, 마녀는 사라졌다. 묵직한 돌이라도 얹어놓은 것처럼 머리가 무거웠다. 앵앵거리는 소리에 간신히 눈을 뜨니, 책상 위에 얹어 놓은 핸드폰이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가위라도 눌린 건가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닌 것 같은 것이, 목구멍이 따끔거리면서 숨이 차고 열이 올랐으니까. 어제 먹은 더위가 이제야 올라오나 보다. 거기에 이대한과 붙어 얻은 상처의 열이 가해지며, 고통스러울 정도로 온몸이 욱신거려 왔다. 지만은 힘겹게 손을 뻗던 그대로, 다시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어쩐지 구수한 향내가 코를 자극했다. 이마가 시려오면서 몸도 산뜻한 것이, 아까 정신을 잃을 때보다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땀내 나는 속옷까지 누가 대신 갈아입혔나 보다. 지만은 잔뜩 부운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봤다. “깼어요? 안 그래도 지금 깨우려고 했는데. 죽 끓여 왔어요.” 녹수가 다가와, 그의 머리 위에서 수건으로 감싼 얼음주머니를 치웠다. “…어떻게… 왔어?” 거슬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녹수는 지만이 몸을 일으키는 것을 돕고, 찬물을 건넸다. “학교도 안 나오고 전화도 안 받길래, 혹시나 하고 와본 거예요. 형, 어제 많이 힘들었잖아요. 하숙집에는 아무도 없을 테고.” 고개를 끄덕이는 지만의 눈이 슬쩍 옷을 향했다. “땀에 푹 절어있어서, 제가 그냥 옷가방 뒤져 갈아 입혔어요. 죄송해요.” 멋쩍게 웃으며 대답하고,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죽그릇의 쟁반을 내밀었다. 지만의 마음 속에, 갑자기 무언가 뭉클한 것이 울컥 치밀었다. 오랜만에 먹는 따뜻한 밥, 따뜻한 관심, 따뜻한 배려. …사람의 온기. 그래서 받아든 수저를 들고 묵묵히 입으로 향하다가, “고맙다.” 또 툭하니 인사말을 던졌다. 대답은… 다시 환하고 멋진 미소로 돌아왔다. 지만이 식사를 하는 동안, 녹수는 책상 옆 방구석에 붙은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조용히 창 밖을 응시하는 그 모습에, 옥상에서아 같은 괴리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어쩐지 텅 비 것만 같은 느낌은 그대로였다. 옆에 있지만, 그렇지 않은 느낌. 그걸 무어라 설명할까. 쓸쓸함, 고독? ……그리움? 문득, 귓가를 맴돌던 멜로디가 떠올랐다. 수저질도 멈춘 채, 그는 멍하니 생각에 잠겨 녹수를 바라봤다. 정말 알수록 볼수록 이상한 녀석이다. 남자인 주제에 친절하고 요리도 잘하는데다가, 왕따인가 싶었더니 그건 아닌 것 같고, 그러면서도 이대한이란 청운 짱의 ‘봉’. 게다가 몸에 난 상처들은 예사 것이 아니었다. 신빙성은 없지만, 심술마녀도 뭔가 경고했고. “싱거워요? 소금 칠까요?” “아냐, 됐어.” …눈치는 참 없다. 모처럼 진지했던 단상을 왕창 깨부수는 녹수의 한 마디에 맥이 탁 풀리며, 지만은 맛좋은 쌀죽을 퍼먹었다. 녹수가 돌아가고도 한참을 자리에서 뒤척거리던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해는 중천을 넘어서 아예 해질 무렵이었다. 열이 내리고 나니 몸도 가뿐해져, 좁은 방안에만 있자니 온몸이 근질거렸다. 그렇다고 나가자니, 아는 곳도 아는 놈도 없었다. 장녹수 외에는… 지만은 대충 옷을 걸친 뒤 담배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집 앞은 고요했다. 좁은 골목을 두고 하숙집과 마주한 초록색 대문은, 낡은 시멘트로 성기게 이은 담장 사이에 다소곳이 박혀있었다. 대문 오른쪽에 달린 도윽란 버튼 벨 주변을 맴돌더 손가락은 이미 몇 번이나 목표를 벗어났다. 손가락 주인의 옆구리에 둥글게 말아 낀 잡지 안에는, 방금 사온 맥주 두 캔과 안주거리가 숨겨져 있었다. 오렌지색 박스티에 곤색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한참을 그 앞에서 서성대며 지만은 망설였다. 새로 사귄 동생(?)은 그 주위의 흔해빠진 양아치가 아니었다. 혹시 안에 녹수 부모님이라도 계신다면… 윽-. 어른들 중에서 그를 보고 첫눈에 마음 들어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라기보다는, 전무했다.) ‘핸드폰이라도 가지고 나올걸.’ 쩝쩝거리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피식. 뭐하는 짓이냐, 이게. 지만은 뒤돌아 섰다. “헉!!!!!” 깜짝이야. 지만의 뒤로, 거대한 인영 둘이 버티고 있었다. “봐, 봐. 이제야 돌아본다.” “저 새끼 저거, 바보 아냐?” 지만의 놀란 새가슴이 팔딱거리고 있는데, 언제 온 것인지 그 뒤에서 말없이 서 있던 두 남자는 지만을 두고 지들끼리 쑥덕거렸다.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이들은, 굉장히 인상깊은 외양이었다. 진짜 ‘억’ 소리 날 정도로 커다란 오른쪽 빨간 머리의 거인과 역시 커다란 왼쪽은, 꼭 TV에 나오는 탤런트처럼 엄청나게 잘 생긴 놈들이었다. 휘둥그래 쳐다보는데, 탤런트 쪽이 그를 째려봤다. “야, 너 누구냐?” 다짜고짜 나오는 반말 짓거리에 기분은 나빴지만, 지만은 대답했다. 녹수네 친형일지도 모르지 않은가. “이 집에 사는 녀석 아는 형인데요.” 탤런트의 눈썹이 위로 휘어졌다. “이 집 사는 새끼는 나도 알아. 넌 누구냐고.” 이런, 싸가지!! “그러는 넌 누구냐?!!” “씨발, 병우야. 이 새끼가 지금 나한테 말 깐다?” “씹새꺄, 니가 먼저 깠잖아!!” “어, 상식아. 니가 먼저 깠어.” “이런 씹!! 너 누구 편이야?!” “정의의 편.” 갑자기 덤 앤 더머가 된 두 남자는 지들끼리 툭탁거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지만은 어디선가 들은 적 있는 이름에 귀가 솔깃했다. 겉보기는 삭았지만 전적(녹수)도 있으니, 혹시나 해서 물었다. “야, 니네 혹시… 청운 다니냐?” “이 동네에 거기 안 다니는 고삐리도 있냐?” 터가 안 좋은가 보다. 하나같이 겉늙었으니. 쯧, 그나저나… “이대한, 보기보다 독하군. 이제는 집까지 쫓아와서 닦달 하냐?” “엥?!! 무슨 헛소리야?” 지만은 짐을 내려두고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가서, 앞으로는 녹수 건들지 말라고 전해라. 이제부터 장녹수는 이 허지만이 지켜준다!” “뭐?!!!!” “엣?!!!!” 괴성을 지르며 두 놈은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미… 미친 거 아냐? 지가, 갑자기, 뭘, 왜 지키겠다는 건데?” “노… 녹수를 지키겠다니, 그… 그게 무슨…” 황당을 넘어서 경악하고 있는 그들은 몹시 동요했다. 후훗, 겁 먹었군. “그야 마음에 들었으니까.” 당당하게 선언했다. “진짜, 변태 아냐?!! 니가 왜 그 새끼를 마음에 들어해?!! 어?!!” 동요는 잠시였는지, 갑자기 울컥해서 격분을 토하는 탤런트… 아니, 한상식이었다. 마치, ‘그게 왜 니꺼야?’하는 억울함 섞인 어투였다. “나 말리지 마라, 유병우.” “안 말려, 밟아!” 거인도 음산하게 동의했다. 장녹수를 건 공방이 시작됐다. 한상식 VS 허지만. 처음엔 비슷한 양상의 격돌이 이루어졌다. 체격적으로 비슷한데다, 오히려 힘은 지만 쪽이 유리했으니까. 하지만 곧, 한상식의 입버릇과 엄청나게 차이나는 깔끔한 기술과 예리한 공격이 지만을 수세로 몰기 시작했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대한에게도 뒤지지 않던 공격 속도가 그에게는 딸린다는 것이었다. 지만의 체감상으로는 이대한과 한상식 둘 중에서, 한상식이 더 우위로 느껴질 정도였다. ‘과연 입만 산 녀석은 아니군.’ 지만은 날카로운 중단 킥 이후의 빈틈을 노려, 펀치를 먹였다. 그가 가장 자신있어하는 오른쪽 어퍼컷을 완벽한 타이밍으로! 그는 확신했다. 이 한 방으로 끝!! 그러나, 큰 자세 이후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재빠른 블로킹이 타격을 봉쇄하더니, 블로킹한 팔로 지만의 팔뚝을 붙잡아 뒤로 꺾고 무릎으로 등을 깠다. …결정타였다. “퉷. 무식하게 힘만 디따 세네. 유병우, 네 타입인데 돌려주랴?” 방금 막은 오른쪽 어퍼컷의 스친 상흔 외에는 여전히 깨끗한 면상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한상식이 이죽거렸다. “됐어. 그냥 그런데 뭐.” 이어지는 비아냥과 조소, 대놓고 자존심을 완전 깔아뭉개는 그 만담에도 반박할 수 없을 만큼, 지만은 완벽하게 졌다. 아직까지 숨도 제대로 못 쉬며 몸을 비틀던 지만이 헐떡거리며 그들을 노려봤다. 컨디션 100%가 아닌 탓도 있었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런 타입과 싸워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지금까지 겪은 놈들과는 실력의 차원이 틀리다!! 젠장!! 젠장!!!’ 정통. 진짜배기, 싸움터에서 다뎌진 지만의 주먹이 조잡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한상식의 무위(武威)는 정갈했다. 우열은 명확하고, 상황은 자신의 패배로 끝이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이대로… 이것마저 무너질 수는 없었다. 주먹과 싸움은, 그에게 마지막 하나 남은 ‘자존심’이었으니까. 지만은 돌진했다. 서울 상경 3일만에 기절만 3번째. 삼 세 번도 거지같다. 얼굴이 팽팽하게 땡기는 것이, 안 봐도 비디오다. 부어터진 눈을 들어 보니, 하숙집 천장. 그나마 길가에 버려진 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현실은 냉정했다. 오기나 기합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 태반인 것이다. 돌진하던 지만… 상식은 가볍게 자리를 피하면서 그의 다리를 걸어 넘어트린 뒤 팔꿈치로 명치를 찎었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탄 채, 끝없는 난타를 시작했다.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깼음 어여 인나제, 뭐 대수라고 그리 퍼질러 있남?” 걸쭉한 음성의 주인 아줌마는 침대가에 서서, 그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어떻게 되긴 뭐가 워떻게 된 겨, 요렇게 된 것이제. 그라게 내 그랬잖여, 옆 집 아랑 놀지 말라구. 그 노마들이 어떤 놈들인디.” …하필이면 이 아줌마가 구해 줬나 보다. 지만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떼었다. “…힘드셨겠어요. …감사…합니다.” “뭘, 고마울 것도 없구먼. 힘은 옆집 그 학상이 다 썼으니께.” “녹수가요?!!! 윽!” “하이고 마. 갑자기 움직이니까 그라제.” “다… 다치진 않았어요? 그 녀석, 저처럼……” 모종의 보복이 있을지도 몰랐다. 일단 지만이 녹수 이름을 걸고 싸운 이상, 그와 관계없다고 보기는 힘들었으니까. 그때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해서 그렇다 쳐도, 정말 바보 같았다. 녹수 이름을 대다니… 근심스러운 지만의 얼굴을 이상하단 듯 쳐다보던 아줌마는 혀를 끌끌 찼다. “업고 왔다고 했잖여? 털끝 하나도 멀쩡했구먼.”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말을 이었다. “내, 재삼 말하지만서도, 그 아한테는 관심 끊는 것이 학상한테도 좋을 것이구먼.” 뭔가, 아는 듯한 분위기를 팍팍 풍기며 말을 던졌다. 아니 처음부터 그랬지만 계속 무시했는데, 생각해보니 옆집 사는 사람이라 제일 잘 알 법도 했다. “혹시… 예전에 녹수한테 무슨 일 있었는지 아십니까? 몸에… 심한 상처가 있는데…” 번뜩. 그녀는 지만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책상 앞 의자에 자리 잡았다. “봤는감? 하긴, 희미해지긴 했어도 어디 그게 보통 상처야 말이제.” 아무래도 말해주고 싶었나보다. “무슨… 상처인데요?” “그 학상, 작년에 살해당할 뻔했구먼! 그 노마들한테!!” 이어서 나온 말들은, 지만의 상상을 초월하는 내용이었다. 1년 전, 하숙집 주인 아줌마가 복도 청소를 할 때였다. 뭔가가 심하게 깨지고 부서지는 엄청난 소리가 밖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무슨 일인가 하고 내다본 창 밖의 풍경, 그것은 옆집 마당에서 벌어지고 있던 살해현장이었다. 평소에 싹싹하니 그녀에게 인사도 잘 하던 옆집 학생─장녹수가, 항상 같이 다니던 세 놈들에게 둘러싸인 채 온갖 위험스러운 물건들로 난자당하고 있었다. 깨진 유리나 장독대 같은 것이 이리저리 널려 있는 마당을 그 중 한 놈에게 머리채를 쥐어 잡힌 채 끌려 다니기도 했다. 너무 놀란 주인 아줌마는 허겁지겁 경찰에 신고하고, 그 집으로 달려갔다. 열려진 대문 안은 어느새 조용해져 있었다. 살며시 문을 열어보니, 그 놈─아주머니 표현을 빌자면─그 악마는 손에 시퍼런 부엌칼을 쥐고 있었다. 갑자기 내분이 일어났다. 그 악마 같은 놈들이, 서로 자기가 녹수를 죽이겠다며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한참동안의 거센 드잡이질 끝에, 결국 다른 두 놈까지 해치운 두목격 악마가 이미 핏덩이였던 녹수에게로 다가가 목을 졸랐다. 정말 그대로 뒀다가는 사람 하나 잡은 기세였다. 그때 보다못한 아줌마가 용감하게 나서서 땅에 떨어져 있던 장독대 뚜껑을 들어, 악마의 뒤통수를 힘껏 내리쳤다. 즉, 장녹수 절대절명의 순간에 그를 구한 사람은 119도 경찰도 아닌, 바로 하숙집의 주인 아줌마─그녀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녀가 무엇보다 놀랐던 것은, 그 일이 있고 나서 두 달쯤 뒤, 그 악마 놈이 버젓이 이 거리에 다시 나타났던 것이었다. 옆에는 부하들과… 장녹수까지 대동한 채! ─이것이 학교는 물론이고, 이 동네에서 가장 유명하고 끔찍했던 사건의 전말이었다. 여러 군데 미심쩍은 부분들이 많은 진술이었지만, 어쨌든 적어도 그때의 악마가 ‘이대한’이고 부하가 ‘한상식’, ‘유병우’ 임에는 분명했다. ‘살해당할 뻔 했다고……’ 그 웃는 얼굴 어디에도, 그런 기색은 없었다. ‘그런데도 같이 다닌다고…?’ 도대체… 어떤 심정일까.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상대와 하루종일 붙어있는 기분이란…… 자신을 바닥까지 떨어뜨린 상대와 하루종일 붙어있는 기분이란…… 끔찍하게 비참하고, 참담하고…… 또…… 떠오르는 웃는 얼굴이, 보기 좋은 미소가 가시처럼 마음에 박혔다. “훗, 내가 지금 남 걱정할 때냐…” 머리를 털어 버리며 지만이 중얼거렸다. 당장 내일부터 같은 학교 같은 반에서, 저 한상식․유병우, 이대한과 얼굴 맞대고 살아야 하는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보니, 이제 진짜 녹수랑 똑같은 입장 아닌가. “그 새끼들 앞에서 나란히 쫄아있으면 진짜 무슨 쪼다 브라더스 같겠다. 하하하핫!” ……자조(自嘲). 퇴학성 전학으로 도망치고 구걸해서 간신히 이곳까지 굴러 왔는데, 자신이 내세우는 유일한 주먹조차 깨져버렸다. 가진 재산 다 털어 박고 빈털터리 된 도박사라고나 할까. 주먹 가지고 먹고 살 생각은 아니었지만, 지금 당장 손에 쥐고 있는 패가 파토난 판국이니 앞길이 막막했다. 다시 도로 원점. 뭐 하나 나아지질 못한다. ‘지지리도 못난 자식!!’ 그의 아버지가 항시 달고 살던 그 말이, 아프게 되새김질 됐다. 다음날 지만이 기운을 차리고 학교로 향한 것은 점심시간 무렵이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더 이상 자의도 아닌 타의로 하게 되는 결석을 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출석부에 도장 찍은 것이 전학 온 첫 날 뿐이라니. 안 다닐 거라면 모를까, 문제가 될 지도 몰랐다. 게다가 자신만만하게 내뱉어놓은 말도 있었다. 선전포고 때리고 바로 꼬리를 말다니, 아무리 지금 그가 왕창 깨지고 자신의 주먹세계에 회의감을 품고 있다지만, 그간 쌓아온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지만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대한과는 더 붙어보지 않아도 그의 패배가 확실했다. 그 밑에 있다는 한상식조차 감당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유병우는 그 덩치만으로도 짐작이 갔다. 같은 파워 중심 타입이라면 더더욱 상대가 안되겠지. 그래도… “이대로 그냥 무너지지는 않겠어!” 스스로 기합을 넣고, 교실 문을 힘차게 열었다. 앗싸, 근성!! 이틀만에 다시 보는 교실 안의 전경은… 고요 그 자체였다. 원래도 그다지 시끌시끌하지는 않았지만 지금과는 근본적으로 틀렸다. 묘한 긴장감이 맴돌면서 교실 안의 덩치들이 모두 숨죽이고 경직되어 있었다. 지만의 의아한 눈 속으로, 이틀 전과 다른 요소 하나가 포착되었다. 남자가 있었다. 창가 쪽 끝자리.’이대한‘이 앉아있던 그 곳에, 남자가 하나 있었다. 마치 신이 공들여 빚은 듯한 미모의 남자가, 길게 뺀 책상 위로 긴 다리를 올려놓은 채 두 눈을 감고 앉아있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런데도 교실 안의 모든 공기는 그를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 진공상태를 이루었다. 폐부를 짓누르는 압박가이 실재했다. 절대적이고 압도적인 존재감이 그 곳에, 있었다. 지만은 숨이 막혔다. 감겼던 눈이 뜨이며 새까만 눈동자가 지만을 향했다. 매끄러운 동작으로 다리를 접고 자리에서 일어난 뒤, 지만 쪽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허지만?” 낮게 울리는 중저음. …꿀꺽. ‘절대, 그냥 지지는 않겠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다!” 쉭-. 즈컥!!! 보이지도 않을 만큼의 빠른 킥이 배에 꽂혔다. 지만은 그대로 복도까지 날아가 처박혔다. 재빨리 일어서려고 했지만 제대로 들어간 그 한 방으로 이미 완전 그로기 상태, 막고 자시고도 없었다. 간신히 몸을 추슬렀을 때는 바싹 다가선 긴 다리의 인정사정 없는 발길질이 시작됐다. 원래부터 엉망이었던 지만의 얼굴이나 몸 따위는, 그로부터 일말의 동정도 얻지 못했다. 결코 사정 봐주는 법 없이 내려찍는 무자비한 철퇴의 고통! 고통! 고통! 지만은 몸을 최대한 웅크린 채 조금이라도… 빨리, 끝나기만을 바랬다. “이 대 한!!!” 쥐죽은듯 했던 복도의 침묵을 깨는 목소리에, 일방적으로 계속되든 구타음이 멈췄다. 서둘러 달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지만은 머리를 감싸던 손의 힘을 더했다. 이런 몰골 따위, 절대 보이고 싶지 않다… “…선전포고한 건, 이게 먼저야.” 그를 발로 툭 건드리며 대답했다. 지만의 몸은 그 작은 움직임에도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일어나요, 형.” 숨을 몰아쉬며 다가온 목소리가 그의 머리 위에서 울렸다. 차가운 손이 그의 헤진 손을 붙들었다. 지만은 잠시 부르르 떨다가, 굳은 손의 힘을 풀었다. 곧이어 그의 열린 시야로 들어온 것은… 잔뜩 부어 오른 멍투성이의 얼굴. ‘거짓말쟁이 아줌마. 털끝하나 안 다쳤다며…’ 지만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헤플 정도로 웃음 많던 얼굴이 알록달록 팬더곰 같아졌다. 농담이었는데, 진짜로 쪼다 브라더스가 되버렸다. 걱정 가득한 암갈색 눈동자가 가슴을 친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냐, 바보.’ 힘겨운 손을 들어 얼굴을 매만졌다. 명치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울컥함에, 지만이 녹수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빡!!! 잠시간 멈췄던 철퇴가 그의 팔을 강타했다. 검은색 구둣발이 그의 손을 짓이겼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크어어어억!!!!!!” 신음 한 번 내지 않던 지만의 입에서 고토의 비명이 터졌다. “이대한!!!!” “닥쳐!!” 거친 일갈. 그는 녹수를 서늘하게 노려보았다. “전에도 경고했지, 장녹수. 사람 갖고 놀지 말라고. 이번에는, 그냥 두고 보지만은 않겠어.” “……!!!” 녹수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그리고 안색을 굳힌 채 이대한과 마주섰다.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야. 발, 치워.” “뭐야 그 눈은… 왜, 또 때리기라도 하게?” 이대한의 입가가 비틀어지면서 다리 아래 구두 굽도 돌아갔다. 다시 터지는 비명음. 그 때, 녹수가 두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부드럽게 감쌌다. 한 걸음, 곁으로 다가서며 바짝 얼굴을 맞댔다. “이대한, 사랑한다.” 허지만도, 이대한도, 숨을 멈췄다. 녹수는 빙긋 미소지었다. “그러니까 용서해라.” 퍽!!!!! ….급소를 걷어찼다. “형, 뛰어요!” 우악스럽게 지만을 일으키더니, 거의 업다시피 하며 데리고 튀었다. “드세요.” “……” 깐 음료수 캔을 입에 붓고, 지만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켜주네 어쩌네 큰소리 탕탕 쳐놓고 왕창 깨지는 장면을 보여준 건 둘째치고, 그 장본인에게 대신 구해지기까지 하다니…… ‘진짜 접시물에 코박고 콱 뒤지고 싶다.’ 한심, 한심, 왕한심! 이제 허지만이 아니라, 허한심이다. 비참과 참담한 심정을 한숨에 담아 팍팍 내쉬며, 학교 근처 아파트 외곽의 담벼락에 기댔다. 녹수와 지만이 아까 그 길로 튀어 밖까지 나와 숨은 곳이다. ─찰칵. 양반다리 자세로 옆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물던 녹수와 눈이 마주쳤다. “…면목 없다.” “무슨… 아니에요, 형.” 피식 웃으며 담배연기를 뿜는 얼굴의 푸르딩딩한 멍이 무척이나 아파 보였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지만의 얼굴도 만만치는 않았지만. “그나저나, 이제 진짜 어떻게 하냐. 너까지 말려들어서… 젠장, 진짜 면목 없고, 미안하다!” 녹수는 입을 약간 벌리고 잠시동안 그를 지긋하게 바라봤다. 그러다 갑자기 큭큭대기 시작했다. “형. 형은, 진짜… 하하하하하핫!” “뭐…뭐야, 왜 웃어!! 씨발, 무안하게…! 기껏!”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하하하핫! 죄, 죄송해요.” 죄송하다며 손을 내저으면서도, 그의 웃음소리는 끊기지 않았다. 결국 얼굴이 벌게진 지만에게 머리를 한 대 맞고야 멈췄다. “…그게 어째서 형 탓이에요. 대한이 자식이 나쁜 놈이지. 상식이도 그렇고. 되려, 제가 죄송합니다.” “어, 어, 뭐가… 어차피 그 녀석들하고 붙을 거였는데… 이대한 말마따나 선전포고한 것도 내가 먼저였고…… 근데…, 그럼… 그 놈은 누구냐? 나, 전학온 첫 날에 같이 붙었던…” “김현수라고, 연합의… 아! 혹시 그 녀석이 대한인 줄 아셨어요?” 황당하단 듯이 쳐다보는 녹수의 시선에 그도 할말을 잃었다. 몰랐다곤 하지만, 실물 차이가 저렇게 엄청나니 착각한 게 민망할 정도였다. 어쩐지, 한상식이 열라 더 세더라니. “…뭐, 주제를 몰랐던 게지.” “그렇지 않아요. 녀석이 괴물이라서 그렇지, 형도 충분히 멋져요.” 그다지 위로 같지도 않은 위로를 하고는 지만의 손을 붙들고 살폈다. “괘… 괜찮아.” “상태가 심한데… 병원이라도 가 봐야 되는 거 아니에요?” “괜찮다니까, 자 봐라! 윽, 쓰~읍.” “흠. 주먹 쥘 수 있는 걸 보니, 뼈나 신경은 괜찮은 것도 같고… 그래도 모르니까, 지금 같이 병원 가요.” “괜찮다니가… 어, 야!” 지만이야 뭐라든, 녹수는 자리를 탈탈 털고 일어나서 그를 일으켰다. 구겨진 옷가지를 정리해 주고 머리를 한번 넘겨준 뒤, 어깨를 감싸고는 막무가내로 인근 병원으로 직행, 결국 손을 치료받게 했다. 생각보다 행동력이 넘치는 녀석이다. 그는 꼬치꼬치 캐묻는 병원의사 말을 유유히 웃으면서 요리조리 둘러댔다. 아까 이대한을 방심시킬 때도 그랬지만, 정말 말이 많은 만큼 말빨도 좋은 놈이었다. 무사히 치료를 끝낸 후에는 지만을 데리고 다니며 먹거리를 사 먹였다. 온몸이 간질간질할 만큼의 풀 서비스로 지만을 챙겨주면서, 해질 무렵이 되서야 해장국집으로 향했다. 도착한 집 앞엔 벌써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야, 앞에 아무도 없다. 가자!” “형, 진짜 괜찮다니까요. 지금쯤이면 많이 풀렸을 거예요.” “쉿! 조용히 해!” 지만은 슬쩍 다시 하숙집 앞 골목을 살피고는, 녹수 손을 붙들고 다다다다 뛰었다. 해장국 집까지만! 거기에는 그다지 믿음직스럽진 않지만, 나름대로 강력한 아군(?)이 있다. “아줌마!! 할 말이 있…는…데.” 새카맸다. 새카만 덩치들이 옹기종기 모여 좁은 식당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나같이 이틀 전에 봤던 짜가 이대한들이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진짜 이대한이, 마치 잘못 들어간 퍼즐 조각처럼 박혀 앉아 담배를 피고 있었다. “어쩌냐. 주인 아줌마는 볼일 있으시다며 나가셨지.” “애냐? 아줌마 뒷꽁무니에 붙게. 쿠쿠쿡.” 사방에서 왁자지껄 비웃는 소리가 쏟아졌다. 지만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다만, 이대한만은 지만이 들어선 순간부터 그를 무시한 채 그의 뒤쪽만을 묵묵히 응시했다. 여전히 삭막한 분위기. 꿀꺽. 지만이 그 앞을 가렸다. 이대한의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식은땀이 절로 났다. 가게 안의 소음도 잦아들었다. “저녁은, 먹었어?” 태평스러운 어조로 질문을 던지면서 녹수가 앞으로 나섰다. 지만이 흠칫하며 막자, 괜찮다는 듯 손을 젓고는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이제 가게 안은 완전 침묵했다. 살기. 온통 살기들을 내뿜었다. 뿌드득 이를 가는 녀석이나, 안광을 돋우는 녀석, 주먹을 가다듬는 녀석도 있었다. 장녹수의 일보는, 그들의 평정을 한 방에 날렸다. “학교에서도 보기 힘든 얼굴들이 웬일들로 모여 앉았냐? 오늘 대한이가 한방 쏜 거야?” 이죽대는 말투에, 살벌한 분위기가 더욱 싸늘해졌다. 지만은 아연실색했다. “좀 좋은데서 쏘지 그랬어. 우린 더 좋은데서 먹고 왔는… 읍!” 지만이 입을 틀어막았다. “하하…하. 얘가 지금 좀 더위를 먹어서…” 어색하게 변명을 둘러대는데, 이대한이 움직였다. “그 손, 치워.” “……에?” “씨발, 치워!” 이를 부득부득 갈며 지만 쪽으로 성큼 다가온다. 지만은, 진짜 쫄았다.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차가운 손이 지만의 손을 내리며 앞으로 나섰다. “아직도 화난 거야? 아잉~, 그럼 안되지. 아까는 너도 심했잖아. 이 형 손, 못 쓰게 될 뻔 했다구. 알아?” 지만의 붕대감긴 손까지 들어 보이며, 아양인지 비아냥인지 알 수 없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장녹수. 얘야, 너 왜 이러니. 지만이 황망해서 바라봤다. 이대한의 인내도 거기까지였는지, 주먹 쥔 손이 올라갔다. “이번에는 나도 진짜 화났어, 이대한. 알아?” 녹수가 음산하게 못박았다. 내리깐 목소리는 일변해서, 방금 전까지 헤실대던 그 녀석이 맞나 싶었다. “지금 내가 바람이라도 났냐? 왜 지랄이야, 씨발.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좆질한 게 어떤 새낀데 되려 큰소리냐구, 어?!” “…상관, 없잖아.” “그럼 너도 상관없어.” 짝!!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려친 따귀에, 녹수의 얼굴이 돌아갔다. 이대한은 그의 얼굴을 친 손을 다른 손으로 꽉 쥐었다. “너는… 나, 상관 안 하지만… 나는, 상관 있어.” 녹수는 입가의 피를 훔치고, 피식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지금 니가 하는 말, 얼마나 웃긴지 아냐?” 이대한이 이를 악물었다. 녹수는 아랑곳없이 그를 비웃었다. “저기 앉아있는 새끼들 아무나 붙들고 물어봐라. 이 장녹수가 이대한을 상관 안 한다?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해? 어? 이대한, 곧 죽어도 잘난 씹새꺄!!” “상관 안 했잖아!!!” 가게를 울리는 사납고 박력 있는 목소리. 이대한의 일그러진 얼굴에, 악다문 송곳니가 유난히 눈에 시렸다. “너, 내가…! 내가 어디서 누구랑 뒹굴던지 상관도 안 했잖아! 그 때 이후로도! 그 날 이후로도! 내가 보란듯이 계집애들 끼고 지분대거나 말거나, 넌 관심도 없었잖아!!” 이 사이로 뱉는… 원망과 질책 가득한 고통스러운 내심. “그건 내가 터치할 부분이 아니지. 니 사생활이잖아.” 냉정한 대답이 떨어졌다. 대한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나…? …나에게… 돌아온 것, 아니야?” 극심한 동요와 떨림이, 그의 눈과 목소리 사이에 깃들었다. “그건 그거지. 하지만, 알잖아. 너 호모 아니야.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여기 있는 새끼들 다 아는 얘기지. 나는 너에게 어떠한 것도 구속할 생각 없어. 그러고 싶지도 않고.” 창백해진 안색으로 이대한은 입술을 깨물었다. “너, 아직, <그 것> 가지고 있는 거 알고 있어.” 흠칫. “아직도, <그 새끼> 사랑하는 거 알고 있어.” 녹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부정도, 긍정도 없는… 깨문 입술 아래의 턱이 가늘게 떨렸다. “나보다, 사랑하는 것도, 알고 있어.” “……” “니가, 그 새끼랑 <어떤 식으로> 사랑했는지도… 알고 있어.” “……그래서?” 퍽!!! 퍽!!! 빠악!!! “나쁜 새끼!!! 나쁜 자식!!! 거짓말쟁이!!! 사기꾼 새끼!!! 구속할 생각이 없어?!! 그러고 싶지도 않아?!! 날 위해서라고?!! 언제나 말만은 번드르하지!! 그 새끼랑은 그렇게 놀아난 주제에!!! 아직도 그 새끼만 생각하는 주제에!!!” 그는 녹수를 바닥에 처박은 뒤, 패기 시작했다. 광폭, 그 자체. 지만이 모르는 세계, 모르는 이야기였다. 밑도 끝도 없이 무슨 이야기인지, 암호문으로 가득했던 대화 끝에 벌어진 이 상황이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머릿속으로는 삐뽀삐뽀 1년 전 벌어졌다는 장녹수─이대한 간의 살인 미수사건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말려야겠는데, 도무지 엄두가 안 난다. 이미 주위 포진해 있던 덩치들이 바리케이드를 싼 것은 물론이고, 이대한의 폭주는 멀리서 보기에도 섬짓했다. “대한아!! 그만해!!!” “씨발!! 그만해라 새꺄!! 또 죽일래!!!” 해장국집 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한상식과 유병우가 난입했다. 이미 얼굴에 멍 한가득씩 달고 나타난 그들은, 바리케이드 친 덩치들을 퍽퍽 날려버리면서(말 그대로 날려버렸다) 이대한 쪽으로 다가가 팔을 하나씩 붙들었다. 이대한의 무시무시한 신위는 그때부터 발휘됐다. 비교적 가벼운 체구인 한상식은 그렇다 치고, 거인 유병우마저 한 번에 밀어붙이는 괴력! 그는 양쪽으로 잡힌 팔을 뒤집으며 빠져나간 뒤, 앉은 자세 그대로 로우 킥을 돌려 찼다. 정강이에 정확히 들어간 킥으로 자세가 무너진 틈을 타 번쩍 일어나며, 둘의 복부와 명치끝에 연달아 팔꿈치 찍기와 강펀치를 먹였다. 그 뒤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까버리곤, 덩치들을 시켜 눌러버리게 했다. 일순간에 상황종료. “커헉… 이 씹, 놔!!! 씨발!! 피하지 말고 덤벼라!! 이대한, 이 겁쟁이 씹새끼!!! 좆도 아닌 새꺄!!! 덤벼!!!” “하악, 큭. 대한아, 안 돼!! 녹수한테 그러지 마!!! 녹수한테 그러지마…!!! 이번엔 진짜 안 돌아올지도 모른단 말야!!!” 의외의 구원자들은 허무하게 사로잡히고도 맹렬히 반항했다. 온갖 욕설을 다 동원하며 이대한을 자극하는 한상식이나, 있는 말 없는 말 다 동원하며 애걸복걸하는 유병우나, 목적은 누가 봐도 단 하나였다. 지만은 놀랐다. 설마 저 둘…, ‘친구’였던 것인가?! 녹수의…… 주먹이 움칠거렸다. 저 싸가지 밥맛인 한상식이나 유병우가 둘이 합쳤어도 못 당해냈다. 그래도… 사나이는 의리!! “헤이~, 이봐! 날 잊으면 안 되지!! 장녹수 꼬드긴 게 바로 나다, 나!!” 뜻도 모르면서 지만이 한 이 도발은 의외로 효과가 즉방이었다. 이대한의 움직임이 뚝 멈추며, 서서히 그 쪽으로 돌아본 것이다. ‘얼라리!! 이거, 설마… 역시, 무덤 판 건가?!’ 때늦은 후회감이 조금 들었지만, 어쩌랴. 이미 물은 엎질러진 것을. “저 새끼, 밟아서 데려와.” 완전 맛이 간 눈으로, 이대한이 명령했다. 우르르 몰려드는 덩치들을 맞이하며, 지만의 등뒤로는 식은땀이 다 났다. 좋다, 이거야. 꿈꾸던 것 아닌가. 말 그대로, 이곳이 ‘전장(戰場)’이다. 싸우다 뒤지면, 그것도 좋겠지. 어차피 쓸모도 없는 몸이니까. “에브리바리 Stop─, 거기까지!” 잠시 끊어졌던 정신이 돌아왔는지, 그 와중에도 명랑한 장녹수의 목소리가 울렸다. “녹수야, 괜찮아?!!” “아직 살아있냐?!!” “그래, 아직 살아있다. 니들 얼굴은 괜찮냐?” “씹새끼, 끝나고 두고보자!!” 아무래도, 저 잔뜩 멍진 얼굴 이야기인 것 같다. …이런 때에도 농담이 나오다니. 장녹수, 의외로 거물이군. 여전히 이대한 아래 깔린 채 나불나불 대면서도, 장녹수의 눈은 오직 이대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한 역시, 녹수만을 바라봤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봐 줬구나.” 피범벅인 얼굴로 싱긋 웃었다. 손을 들어서 얼굴을 훔치다가 바지에 슥슥 문질렀다. “일으켜 주라. 사랑하는 대한아.” “…입까지 뭉개줄까? 닥쳐.” 녹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키스해 주던가.” “닥치랬지!” “그럼 사랑해 주던가… 이 유치똥빤스 어린애 자식아!!” 퍽!!!! 바닥에 손을 짚으며 힘을 받아, 멋지게 성공한 헤딩샷!! 고스란히 턱이 맞은 이대한이 주춤한 틈을 타 그대로 밀어 넘어뜨리며, 장녹수가 그 위로 올라탔다. 일발 자세 역전. “대한아, 나 못 믿냐?” 팔 아래의 얼굴을 똑바로 직시했다. “나… 못 믿어? 내가 불안하게 한 거야?” 검은 동공과 암갈색 눈을 마주하며, 그가 감미롭게 속삭였다. “…속상하지. 왜 아니겠냐. 너 클럽 가서 딴 여자들이랑 뒹굴고 들어올 때마다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데… 이건 진~짜 옛날부터 그랬다. 널 사랑한다고 하기 전부터 그랬다고. 그러니까 믿어라, 응?” 이대한은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녹수는 한숨 섞인 미소로 말을 이었다. “너 여자 좋아하는 거 다 아는데, 내가 어떻게 그러지 말라고 하냐. 사내자식이 어떻게 그래, 쪽팔리게. 그래서 안 그런 척 한 것뿐이야.” 흑청색 머리칼을 쓰다듬으려다, 자신의 피묻은 손을 보며 그냥 내렸다. 저 검은 눈동자는 여전히 말이 없다. “나는…, 그래 나는… 너랑 내 마음이야 어떻든, 실제로는 지금까지와 별 다를 거 없다고 생각했어. 조금 다르다면, 이젠 더 이상 네가 날 혐오하지는 않겠지 하는 정도…” 파문…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그런 식으로 비교할 줄은 몰랐다. 그렇게 생각 할 줄은 몰랐어. 그런 거, 네가 신경 쓸 줄은 정말 몰랐다. 미안…” “아직 사랑하지, 그 녀석…” 침묵을 깬 건조한 목소리. 담담한 어조였지만, 눈동자는 여전히 크게 흔들렸다. 장녹수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그는 그에게서 조금씩 몸을 떼어갔다. 흠칫하는 이대한의 몸이, 느껴졌다. “그래. 사랑해.” 죽음과도 같은 데드마스크. 입에서 떨어지는 것이 사랑의 말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고통과 죄책감으로 가득 일그러진 초상. “지금은, 아직은 그래. 그게 싫어도, 대한아. 나도 어쩔 수 없어. 처음으로…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이란 말이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멈출 만큼… 떠났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죽고 싶을 만큼…” “됐어.”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사람이었는걸. 어떻게, 그렇게 빨리 지울 수 있을까. 아직… 이렇게나 생생한데. 잡힐 듯이 그려지는데…” “그만해.” 맺혀있는 줄도 몰랐던 차가운 눈물 방울이, 뺨을 가로질렀다. “그래, 사랑해! 아직도 사랑해! 지금도 달려가서 무릎 꿇고 키스하고 사랑한다고 외치고 싶을 만큼! 다시 돌아와 달라고 하고 싶을 만큼!” “그만하랬지!!! 닥쳐!!! 닥치라고!!!!” 대한은 일어나 녹수의 팔을 부러뜨릴 기세로 붙들었다. 다시 끓어오르는 살심(殺心)을 참아 내려는 듯, 거친 한숨을 몰아 쉬었다. “…너도, 그만큼 사랑해. 대한아.” 크게 뜨인 눈. 피와 눈물 섞인 얼굴이 그를 향해 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존재감 없는 목소리로. “그만큼, 사랑한다.” “…거짓…말.” 대한이 고개를 저었다. 검디검은 눈동자가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못 믿겠냐고? 불안하게 했냐고?” 비틀린 입가에 조소를 띄었다. “니가…, 지난 두 달 동안 단 하루라도 그 새끼 시계 보지 않은 적 없다는 것이나, 고이 저장해 둔 그 새끼 음성 메시지 몰래 듣는다는 것… 지나가는 그 새끼 학교 교복 볼 때마다 눈을 못 떼는 것이나, 그 새끼 머리끝이라도 닮았으면 가까이 가고 싶어 안달을 못하는 거, 하다못해 잘 피지도 않던 담배가 하루 한 갑 이상을 늘은 것 따위… 내가… 정말, 모를 줄 알았나?” “……!!” “사랑해? 아직도 죽도록 사랑하는 그 새끼만큼, 날 사랑하신다고?” 느릿하게 말을 있던 검은머리의 사내는 숨을 삼켰다. 조소를 띄우려 했지만, 이미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입가가 떨리고 있었다. “이 뻔뻔한 사기꾼 새끼!! 거짓말쟁이 자식!!! 틈만 나면, 딴 생각하면서!!! 그 새끼만 생각했으면서!!! 날!! 나를, 사랑한다고?!!!” 굶주린, 상처 입은 야수의 포효소리… “달려가서 사랑한다고 하고 싶다고?!! 무릎 꿇고 키스하고 사랑한다 외치고 싶어?!! 씨발, 그럼 가!! 가버려!! 나도 니 새끼 따위 필요 없어!!! 필요 없다고!!! 미친 호모 변태 새끼 따위!!! 이제 필요 없다고!!!” 거칠게 녹수를 팽개치며 그가 일어섰다. “…너, 앞으로 내 눈에 띄지 마. 이번엔, 진짜 죽여버릴 테니까.” 살벌한 경고를 남기고, 대한은 덩치들과 함께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꼴 좋다, 새꺄. 뻥 차인 거 보니까 속이 다 시원하다.” “입 좀 다물어라, 씨발아. 치료할 수가 없잖아.” “도대체 집들은 원제 갈 껴? 시간 좀 보제 그러남?” “어차피 방도 남아돌잖아요. 가게도 치워줬는데, 하룻밤 재워 주시죠.” “지 멋디로 난장판 맹글어 치워놓구선 시방 유세떠는 겨? 학상, 여기 전세 냈남?” “하하하, 아주머니. 정말 죄송합니다. 녹수 몸도 그렇고, 시간도 늦어서 그러니까, 하룻밤만 신세지면 안될까요?” “…거기랑은 말 섞고 싶지 않구먼. 덩치는 산만한 게, 구들장이 다 무너지겄네.” 투덜투덜 대며 나갔던 심술마녀는, 곧이어 이불 뭉탱이를 들고 지만의 방으로 돌아왔다. “딴 방 넘보지 말고, 여기서 다 해결 보아. 글고, 변기에 휴지 박으면 알제? …죽음이여.” 머리를 득득 긁으며 궁시렁 대고 나갔다. 이대한이 휩쓸고 지나간 해장국집에는 패잔병들로만 가득 찼다. 그나마 이 정도라 다행이었다. 제일 중상일 것 같던 장녹수도, 나름대로 봐준 것인지 어디 하나 부러진 곳은 없었다. 나머지들도 여기저기 쑤시고 아파서 그렇지, 병원행은 아니었다. 그녀가 사라진 후 한동안, 하나같이 평균은 훌쩍 넘는 덩치들로 가득찬 지만의 일인실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누가, 설명 좀 해줬으면 하는데…” 제일 먼저, 의자 위에 자리잡고 있던 지만이 입을 뗐다. “상관없는 새끼는 알 필요 없는 역사다. 신경 꺼.” 한상식이 침대 위에 앉아서, 역시나 싸가지 만땅의 대답을 했다. “…니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건, 혹시 내 주먹 탓 아니냐?” “까는 소리하고 있네. 어디서 솜방망이 휘둘러 놓고는. 내 옆에 있는 이 새끼가, 니 새끼 팼다고 대신 두들겼다. 왜, 떫냐?” “주둥아리 좀 닥쳐라, 한 사장. 너는 왜 맨날 그 모양이냐?” “씹새가 맨날 지만 착한 척 해. ─헹! 그럼 뭐하나~ 대한이한테는 뻥 채였는데~ 꼬숩다!!” “…한 마디만 더 해봐. 채인 기념으로, 아예 덮쳐 주마.” “둘 다 그만─. 저, 허지만 형님이라고 하셨지요?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저희들이 좀 오해해서, 실례를 했습니다.” “어, 어… 됐어. 뭐. 그럴 수도 있지.” 제일 큰 덩치면서도 제일 좁은 침대가 사이에 쪼그리고 앉은 유병우가 진지하게 사과했다. 그의 얼굴에도 약간의 멍자욱은 있었다. 지만은 뜻밖의 사과에 의아해하며, 녹수 쪽을 흘끔흘끔 쳐다봤다. 어제 그렇게 흉험하던 녀석들의 태도가 180˚까지는 아니어도, 상당한 수준으로 일변했다. 아까 이대한 때도 느꼈지만, 장녹수란 녀석 진짜 의외로 거물인 것 아냐? 녹수는 좀 전의 협박에 입을 싹 다문 한상식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치료하고, 바지를 걷어올리게 한 뒤, 뜨거운 물에 덥힌 수건으로 찜질을 해줬다. 한상식은 방금까지의 거친 말투와는 사뭇 다르게 순한 양처럼 온몸을 맡기고 있었다. “병우, 이리 와. 넌 아래로 꺼지고.” “좀 더 해주지.” “병우 먼저 하고.” “칫.” 놀랠 ‘노’자다. 한상식은 떼까지 썼다. 유병우와 자리를 체인지하고 시부렁거리던 한상식과 눈이 마주쳤다. “씨발, 뭘 야려?” “…아니다.” 한상식 맞구나. 지만은 머쓱하니 고개를 돌렸다. 참, 곁에서 보기에 끈끈하다 못해 끈적한 우정들이었다. 지만이 하릴없이 빈둥거리고 있는데, 유병우의 치료도 끝났는지 녹수가 그를 바라봤다. “형도 이리 와요. 붕대 좀 갈게.” “어, 됐어. 난 내가 하면 돼.” “냅둬. 뭘 갈아주냐. 저 새낀 손 없데?” “넌 닥치라고 했지. 제발 좀 닥쳐라, 응? 형, 이리 와요.” 가재미 눈이 돼서 욕 연타 준비를 하는 한상식을, 유병우가 내려와서 달래며 지만에게 눈짓했다. …시, 싫은데. 가야 되는 건가. 엄청나게 껄끄러운 기분으로 침대 위에 앉아서, 녹수의 치료를 받았다. 소독하고 약 바른 후 붕대까지 감는 동작에 군더더기라곤 하나도 없이 착착 이뤄졌다. 지만의 손을 치료하면서, 녹수가 말을 건넸다. “휘말리게 해서 죄송해요. 그리고… 앞으로 조금, 힘 드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음… 무슨 일인지는 좀 알고나 힘들고 싶은데.” 지만이 한상식 쪽을 힐끗 보며 답했다. 그는 ‘나 토라졌음’ 표시로 의자 위에 삐딱하게 앉아, 볼이 퉁퉁 부운 채 녹수를 째려보고 있었다. “우선, 저 호모입니다.” 데엥─!! 지만의 머리 저편에서 보신각 종소리가 울렸다. ‘호…모? 호모? 효모? 빵 넣을 때 쓰는 거? 아니, 이게 아니지. 뭐더라… 어디서 많이 듣던 단어인데. 호모? 호모… 호모?!!! 그, 그… 달린 놈들 둘이서 짝짝궁한다는 전설의 그거?!! 똥구녕에 대고 응응하면서 에이즈 균을 뿌리고 다닌다는 지랄 같은 그 족속을 말하는 것인가?!!! 크아아아아악!!!!!!’ 몸을 뒤로 빼내며 녹수의 손을 탁 쳤다. 반사적인 행동이었기에, 지만 자신도 치고 나서 당황했다. “씹새끼가!!!” 흥분한 상식이 달려들어 지만의 멱살을 잡아 바닥에 처박았다. 그리고는 배며, 등이며 격하게 후두려 패기 시작했다. “니가 뭔데 저 새끼 손을 쳐?!!! 어?!!! 씹새꺄!!! 씨발새끼가, 지는 얼마나 깨끗해서!!!” “상식아! 그만해, 진정하라고!!” 병우가 완전히 흥분한 상식이를 붙들고 끌어냈다. 끌려가면서도 발길질을 멈추지 않던 상식이가 씩씩대고 있는데, 녹수가 다가가 상식이의 머리를 넘겨주며 말했다. “너보단 낫다. 넌 토했잖아.” 순간 말문이 막힌 한상식은, 벌개진 얼굴로 외쳤다. “이 미친 변태새끼!!! 나가 뒈져라!! 사서 제 무덤 파는 새끼!!!” “병우야, 데리고 잠깐만 나가 있어라.” “어, 얘기 끝나면 전화해. …무슨 일 있어도 전화하고.” 퇴장 당한 상식과 병우가 사라지고, 방은 고요해졌다. “죄송해요. 어디 많이 안 다치셨어요?” 지만을 일으키려다 움츠러드는 모양을 보고는 어색하게 손을 거뒀다. 지만은, 민망했다. 일부러가 아니었다. 본능적인 거부감에 일어난 반사작용이었을 뿐이었다. 주로 욕설의 재료로나 쓰던 주인공을 대하자니 나온, 일종의 반사작용이었을 뿐이란 말이다. 그는 도대체 어떤 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머릿속이 완전 백짓장처럼 하얘졌다.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물론, 남자였구요.” 한참을 말없이 서 있던 장녹수가 의자를 빼고 앉은 뒤, 등받이에 양손을 올려두고 턱을 괴었다. 조용한 독백이 시작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해 본 사람이었습니다. 나를 아껴주고, 내가 아껴줄 수 있었던, 세상의 단 하나였던 내 보물.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었습니다.” 지만을 향해 쑥스럽게 웃었다. “참 많이 행복했는데… 참 많이 사랑했거든요. 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천국인 것처럼, 그렇게 느끼게 해 주는 사람이었어요. 그랬는데…” 놓쳐버렸어요. 바보같이. …나직한 읊조림. “그 사람 그렇게 놓아버리고 나니까, 사는 게… 재미없어졌어요. 살아있는데 만날 수 없다는 게, 저 곳에서 숨쉬고 있는데 볼 수 없다는 게… 죽은 것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심장이… 돌처럼 굳어갔습니다.” 다크 블루의 데드 마스크가 다시 한번 그의 얼굴을 덮었다. 피 묻은 옷과 가득한 멍자국이 그로테스크하게 어우러져, 이전보다도 더 스산한 느낌을 주었다. “그럼, 이대한은…?” 지만이 망설이다 물었다. “대한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제가 쫓아다녔어요. 멋진 녀석이잖아요. 보는 순간 반해버렸죠. 아, 그런… 의미는 아니고. 뭐랄까. 영웅이랄까… 제 인생의 중심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는 바지를 뒤적이더니 라이터만을 꺼내 불을 켰다. 찰칵 소리가 명쾌하게 울렸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서, 마음에 틈이 생겼습니다. 그때까지 굳건히 믿어온 세계가 통째로 흔들렸어요. 그러다… 대한이를 위해서도, 서로 떨어지는 게 좋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제가 곁에 있어 봤자, 그에게 좋을 건 정말 하나도 없었거든요.” 훗, 웃으며 라이터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떨어져 나가려는 저를, 대한이는 이해하지 못했어요. 용서할 수도… 없었겠지요. 그 녀석 마음 붙일 곳, 그다지 없었으니까.” 가늘게 떨리는 눈가가 뭔가를 떠올렸다. 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저, 그것뿐인데… 그저 그 익숙한 것을 놓치기 싫은 것뿐이었는데도… 그는, 그걸 ‘장녹수를 사랑한다’로 믿어버린 겁니다, 바보같이.” “!!!!” “…6년이나 모신 주인님의 저 좋다는 사인에, 싱글이 된 미친 호모새끼도 혹 했지요. 얼마나 좋아요.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 자신을 좋아한다는데. 얼씨구나 하고 다시 들러붙어 버렸어요.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고… 아직 첫사랑에 대한 미련도 제대로 비우지 못한 주제에 말입니다. 그러다…, 뭐, 이 꼴 난 거죠.” 지만을 향해 살풋이 웃고는 라이터 뚜껑을 닫았다. “오히려 잘된 건지도 몰라요. 오늘 헤어지는 게, 이게 제대로 된 것인지도…” “너, 나쁜 놈이구나?”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하지만, 나쁜 놈이다. 이 녀석, 진짜 나쁜 놈이다. 녹수는 입을 다물고 그를 쳐다봤다. 굳어져 가는 안색에서 그의 마음이 느껴졌지만, 지만은 참을 수 없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도 못했고, 지금 들은 이야기도 이해는 잘 안됐지만, 아까 일어난 일만은 그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느꼈다. 호모인지, 사랑인지 하는 것은 잘 모른다. 다만, 한 가지. 제 3자인 지만의 한 눈에 보기에도, 이대한이 장녹수를 생각하는 마음은 그저 보통의 감정이 아니었다. 발끝이 저밀 정도로 강렬하고 절박했다. …괴로움과 원망들 사이에 섞여있는 마음이, 지만에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도 장본인이란 새끼는 고작…! “그게 착각이라고? 니 눈엔 그게 착각하는 걸로 보이냐? 세상에 어느 멀쩡한 사내자식이, 사내새끼 관심 한번 끌어보겠다고 여자랑 뒹구냐?! 그 새끼 옆에 못 보던 놈팽이 하나 붙어있다고 촉각을 곤두세우냐고!! 보는 내가 창피할 정도로, ‘나만 봐라’하고 외쳤는데…!! ‘나만 안 볼 거면 싫다, 나 좀 잡아다오’ 외치고 갔는데…!! 정작 니 새끼는 거기에 대고 ‘나 아직 옛날 애인 사랑하는데, 너도 그만큼은 사랑해 줄 거다. 싫음 관두자’며, 기다렸다는 듯이 바아바이냐?!! 이기적인 새끼!!! 이거 진짜 나쁜 놈이잖아!!!” 지만은 분개했다. 자기가 생각해도 좀 오버였지만, 그래도 저 먹통 같은 둔치에는 자신이 다 억울할 정도였다. “야, 너 나가! 니 떨거지들 데리고 나가라!! 가서 싹싹 빌던지, 맞아 뒤지던지, 니가 가서 해결 짓고 와!! 씨발, 결자해지 몰라? 결자해지!! 니가 씨 뿌렸으니까, 니가 매듭짓고 오란 말이다!!!” 재빨리 일어서서, 회초리라도 맞은 듯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장녹수를 일으켜 밖으로 내보냈다. 문 밖에는 두 놈이 대기하고 있다가 재빨리 다가섰다. 지만은 쌍심지를 돋웠다. 이제 이딴 녀석들 두렵지 않다. 이, 어린 것들!!! “꺼져!! 새끼들아!!! 뻑큐닷!!” 힘차게 외치고, 문을 쾅 닫은 뒤 걸어 잠궜다. …사실 좀 쫄았다. 갑자기 문 밖에서 녹수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졌다. 시원하게 울리는, 좋은 목소리. “듣기 좋네.” 지만은 중얼거렸다. 녹수들을 쫓아 보내고 30여 분 뒤, 옆집에서는 아직까지도 뭔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안 그래도 조마조마하던 지만은 복도의 창문을 얼른 훔쳐봤다. 마당에는 한상식과 유병우로 추정되는 거인 둘이 서서 왔다리 갔다리 하고 있었다. 지만의 마음이 불편해졌다. 괜한 짓을 했나. 문득 다시 1년 전 옆집에서 벌어졌다는 살인미수사건이 떠올랐다. 지만은 후다닥 뛰쳐나갔다. 그가 도착했을 때는 한상식과 유병우도 발을 구르면서 돌진할지 말지를 의논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방안의 소리가 뚝 끊겼다. 밖에 멍하니 서 있던 셋은, 가슴이 조마조마 했다. “어쩌지? 벌써 죽인 거 아냐?!” “설마… 불러 볼까?” “잘도 대답하겠다, 씨발. 야! 허지만인지, 하지만인지, 너! 장녹수 새끼 뒤졌으면 다음은 너다!!” “불길한 소리는 집어쳐!” “대한이 새끼는 한다면 하는 새끼란 말이다!! 씹!!” “셋, 하면 들어가자.” 돌진! 장녹수 구출대는 초라한 안방 문을 박차고 부숴 버렸다. “하…아. 윽! 으음… 앗, 아아…! 아… 그만…!” “가만… 있어. 훅… 후윽…! 학!!” …좁은 방, 노란 바닥재 위에 쓰러진 온갖 잡동사니 위에서, 입고 있던 교복 상의를 활짝 편 채 가슴을 빨고 있는 검은머리의 율동에 맞춰 허리를 아래위로 흔드는 장녹수와 그를 밑에 깔고 다리 한짝을 어깨에 걸친 채 열심히 쑤셔박고 있는 이대한의 적나라한 광경에, 멍청이 특공대는 일동 할말을 잃었다. 부서진 문을 붙여놓을 수도 없고, 눈을 돌려도 서라운드의 굵은 신음소리는 열린 귀로 쏙쏙 들어왔다. “어우, 씨발!!! 또야!!! 또!! 또 보고 말았어!!!” 신음소리라도 지워보고자 상식이의 씨발씨발 하는 소리에 귀기울여도 봤지만, 지만의 컬쳐 쇼크는 이 동네에 온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허지만, 그가 전학 온 지 벌써 한 달. 청운은 여름방학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새파란 여름 하늘 아래, 오늘도 옥상은 이 장소를 애용하는 몇몇에게 점령당했다. 급수 탱크 그늘 밑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보기에도 화려한 도시락을 까먹고 있는 이들은, 청운의 문제아 최고로 꼽히는 이대한․한상식․유병우․장녹수, 플러스 허지만이었다. 전학 초부터 어영부영 휩쓸려서 같이 어울리다 보니, 지만도 어느새 이들과 한 묶음이 된 것이다. 녹수를 제외하면 모두 이 근방의 실권을 꽉 쥔 주먹들이니, 지만이 이곳에 오기 전 꿈꿨던 풍운의 뜻을 펼치기에도 더 없이 이상적인 환경이었다. 그러나, 뜻밖의 암초가 있었다. “형, 오늘 반찬은 별로에요? 표정이 영, 시큰둥이네.” 바로 이 인간. 호모 장녹수. 저 곳에 앉아있는 죽도록 잘생긴 사나이 이대한의 애인 때문이었다. 지만의 청운 생활은 장녹수를 만난 이후 베베 꼬이다 못해 아주 엉켜버렸다.’연합‘이라는 화려한 전쟁터를 눈앞에 두고도, 발걸음은 언제나 저 인간 옆에 묶여서 이런 심심풀이 땅콩놀이만 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다 인천 제일의 핵주먹 허지만이 이런 애보기 전담반이 된 건지… 한심한심 왕한심. “대한아, 맛없어?” “아니.” “맛있는데?” “괜찮구만.” 물어본 건 한 명이었는데, 줄줄이 사탕으로 붙는 인간들은 물론 장녹수 곁다리인 유병우, 한상식이다. 이들은 장녹수 신봉자 겸 이대한 추종자로, 평소 학교에도 잘 안나오면서 어딘가 바쁘게 싸돌아다니는 정체 모호한 녀석들이기도 했다. 가끔 보면 덜떨어진 면들도 많이 보였는데, 자신도 한번 붙어봐서 알지만, 겉보기와는 아주 틀린 녀석들이었다. “됐어. 그냥 여름이라 입맛이 없어서 그래.” 그냥 뒀다간 또 여름 별식을 만드네 어쩌네 하다, 이대한에게 눈총 맞고 죽게 생겼기에 지만이 나서서 수습을 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저 괴물들의 전폭적인 애정전선 중심에 서 있는 장녹수는, 지만을 꽤나 마음에 들어했다. “역시 타향살이를 하느라 그럴 거예요. 이번 여름에 집에 가시죠?” “음, 뭐……” “저도 놀러가도 되요?” “뭣?!” 지만은 당황했다. 슥 보니, 역시. 이대한의 눈꼬리가 삭 올라가 있다. “어차피 대한이랑 이 녀석들은 방학동안 국내에 없거든요. 알바는 8월에나 하려고 하는데, 그 전에 시간 빌 때 저랑 놀아 줄 사람이 없어요. 헤헷.” “왜 너는 같이 안 가고?” 잘못 물었나 보다. 갑자기 시무룩해진 녹수가 입을 다물었다. 이 녀석은 절대 고교생으로 안 보이는 덩치며 인상은 물론이고, 다른 녀석들한테는 온갖 어른스러운 척까지 다하면서, 꼭 이렇게 지만에게만 애 티를 냈다. 귀엽지도 않다, 이눔아! “저희도… 다른 팀에 끼어 가는 거거든요. 비용도 전부 그쪽에서 내는 거라서요…” 머뭇거리며 병우가 대신 답했다. “괜히 삐진 척이야, 새끼가. 여태까지 한 번도 암말 안 했으면서.” “흥이다. 누가 삐졌냐. 난 지만이 형이랑 같이 인천 갈 거라니까!” ‘누구 맘대로! 그렇지 않냐, 이대한?’ 차마 말로는 못하고, 지만이 동의의 뜻을 구하며 이대한을 쳐다봤다. 무심한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살 떨렸다. “사고 치지 않게, 잘 감시해.” 믿는 도끼가 발등 채로 갈아버렸다. 전권을 위임하다니!! 지만은 빼도 박도 못하게 되 버렸다. “나, 나 내일 방학식 끝나자마자 당장 갈 건데?! 녹수야, 그럼 나중에 오던가. 대한이들 마중도 가야지. 안 그래?” 뻥쳤다. “그래요? 그럼 대한이도 같이 가면 되겠다. 어차피 인천공항이잖아.” 컥! 되려 독박썼다. “돼… 됐어. 그 전에, 둘만의 시간을 갖는다거나 하는 건 어때? 오랫동안 못 볼 텐데…” “이젠 익숙해져서 괜찮아요. 아, 혹시 형… 곤란한 거예요?” ‘그래, 곤란해. 무지 곤란해.’ …라고 지만은 본심을 말하고 싶었지만, 녹수 등뒤로 없는 꼬랑지가 생기며 축 쳐지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 그게 꽤 처량해 보이는 것이, 이 녀석은 별로 불쌍하지도 않으면서 불쌍해 보이는 기묘한 재주를 가졌다. 어쩌면 첫인상 탓일지도. 지만의 인식에, 장녹수=왕따로 각인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사실, 실제도 크게 다른 것은 아니지만. 장녹수와 이대한의 관계는 학교에서도(─하다못해 동네에서도) 유명했다. 호모라는 것만으로도 입에 오르내리며 따 당할 판에, 저 화려한 이대한의 꼬봉 겸 거시기(?)라니. 게다가 곁다리로 붙어있는 한상식, 유병우와 친하다는 것도 거리낌의 대상이 되는 듯 했다. …같은 이유로 지만 역시 따 비슷한 입장이 되었다. 동병상련─ 그래서 더 친근하게 구는 것일지도. “괘… 괜찮아. 하하하하.” “정말요?! 진짜 가도 돼요?!” 지만은 허탈하게 웃었지만, 녹수는 정말 좋은지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그럼, 나도.” “어, 그럼 저두요.” 한상식, 유병우가 따라붙겠다고 나섰다. ‘네버!!!!! 네버, 네버, 네버, 절대 안 돼!! 니들이 초딩이냐, 맨날 붙어다니게?!! 안 돼!! 절대 안 돼!! 결사반대야!! 내 홈그라운드에까지 저 녀석들을 들여놓을 수는 없어!!!’ “둘은 안 돼. 수속 끝내고 인수인계 해둬.” 그럴 살린 것은 이대한의 근사한 목소리였다. 두 녀석이야 불평을 내뱉었지만. 지만은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대한을 봤다. 그래, 백보 양보해서, 녹수까지는 괜찮다. 이제 이대한만 빠져주면… “대한이, 너는?” “가.” 크윽. 역시. 바늘 가는데 실이 안 갈리 없지. “나중에. 여기 일 마무리 짓고 들를게.” ‘만세!!!!’ 지만은 속으로 외쳤다. 녹수는 섭섭했는지, 대한의 앞으로 가더니 갑자기 그의 얼굴을 옆으로 쭉 잡아당겼다. 지만은 기겁을 했다. 한 달이나 매일같이 얼굴 도장을 찍었지만, 아직도 그에게 이대한은 경외의 대상이었다. ‘연합’이라는 통 큰 교복 군단을 만들어낸 창시자.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곳의 실체는, 생각보다도 더 어마어마했다. 강북학군 통합-. 말로는 쉬운 것 같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한 그것을, 그는 입학하자마자 단 반 년 만에 해냈던 것이다. 도저히 같은 나이 대의, 그것도 연하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꿈에서라도 저 딴 짓을 했다간 손목부터 분질러 나갈 것 같았다. 경악하는 지만이야 어쨌건,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지 쿡 웃기까지 했다. 그것은 지만이 여기 와서 처음 보는 이대한의 미소, 가히 살인적으로 멋진 미소였다. 그가 녹수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앗, 위험모드! 지만이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상식이와 병우는 도시락에 집중했다. 저 위험모드에 대해서 말하자면…, 때와 장소가 어떻든, 관중이 있든 없든, 일단 땡기면 무조건 한판 붙는 저 호모커플의 무대포 애정행각 자체 경보다. 이미 몇 번의 라이브 섹스 쇼까지 생생하게 목격하고 얻은 타이밍의 지혜랄까. 덕분에, 이제 CD Player는 그의 일상에서 뗄래야 뗄 수 없는 필수품이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운이 안 좋았다. 밧데리가 나가버린 것이다. 흑-. “아… 으응… 아, 안 돼, 이런 곳에서… 아, 하지 말라니까. 앗, 애들도 있는데!! 대한아, 제발. 아앗, 하지 마, 야!! 야!! 하지 말라니까… 아! 하아, 윽, 으응… 아…앗, 앗!!” 자지러지는 듯한 신음이 생생하게 울려퍼졌다. 쪽팔린 줄 알아라, 제발. 도대체 어떤 낯 두께면 남 앞에서 응응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처음 그가 그 장면을 목격하고 얼마나 쇼크를 받았던지! 성에 대해서 나름대로 엄청난 환상을 가지고 있던 순진남 허지만에게, 두 남자의 적나라한 응응씬은 충격을 넘어선 고문이자 절망이었다. 지만이 마음속으로 백만 스물 하나까지 셋을 때, 드디어 끝났는지 춉춉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가, 지만은 허걱했다. 그건, 이대한의 바지 앞섬에 붙어 앉은 녹수가 머리를 처박고 무언가를 열심히 빨고 있는 소리였던 것이다! 장녹수는 눈을 살며시 감고, 그 뭔가를 혀로 쓰다듬다가 입안에 집어넣은 채, 볼이 홀쭉해 지도록 빨아올리며 천천히 머리를 앞뒤로 움직였다. 아래에 남은 부분은 손으로 잡아 살짝 쥐고 흔들거나, 다시 혀로 핥았다. 그럴 때는 그의 뺨에 이대한의 그것이 문대졌는데, 놈은 그 상태로 방향을 틀며 이리저리 뺨까지 이용한 애무를 했다. 덕분에 완전히 타오른 이대한이 그를 시멘트 바닥에 거칠게 눕혔다. “안 된다니까… 밖에서는 이러지 말자, 응?” 이미 할 것 다해놓고 빼는 장녹수였다. “괜찮아. 우리밖에 없어.” 우린 사람도 아니냐! 지만이 속으로만 외쳤다. “그냥 내가 입으로만 할게. 대한아… 앗!” 입을 입술로 틀어막고, 청운의 최강자는 경이로운 속도로 녹수의 바지와 속옷을 벗겼다. 바로 인서트! 아무리 봐도 좁아 보이는 그 곳에, 무식한 크기로 커진 흉기는 거침없이 들어갔다. 그래도 이전에 충분히 적신 탓인지, 다행히 유혈사태는 없었다. 유연한 허리로 힘껏 몰아붙이며, 펌프질을 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포식자의 만족스러운 탄성이 터졌다. 그는 찬찬히 숨을 고르며 녹수의 목에 이를 박고,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녹수의 실금같은 상처자국들을 쓰다듬었다. 마치 경고와도 같은 후희. 오만하고 이기적인 야수가 종속자에게 각성시키는, ‘너는 내 것이다’라는 잔인한 주장… 지만은 혀를 찼다. 이대한의 녹수에 대한 마음은, 때때로 사랑보다는 애증에 가까워 보였다. 그가 만지고 있는 저 상처들… 그것은 바로 이대한, 그가 직접 녹수의 몸에 새긴 것이었다.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그를 ‘죽이고 싶을만큼’ 미워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그는, 가끔 이런 식으로 장녹수에 대해 잔혹한 극성을 보이곤 했다. 녹수는 그에게 목을 내맡기고 누운 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은 청색 빛 검은 머리칼을 달래듯 천천히 쓸어 올렸다. 텅 빈 하늘을 몽롱하게 바라보는 그를 보며, 문득 지만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불안해하는 이대한의 마음… 1년 전의 7월. 대한의 부재 동안, 녹수가 심장의 주인을 바꿨었다. “준비 다 됐어요?” 활기 찬 목소리로 방문을 활짝 열며, 녹수가 지만의 하숙방으로 들어왔다. “엣, 이게 뭐예요! 짐도 얼마 없으면서 잔뜩 늘어놓기만 하고.” “갈 거면 어여 가 부리는 게 한갓지고 좋겠구먼, 쯧.” 녹수는 하숙집 주인아줌마와 문가에 나란히 서서 지만을 채근했다. ‘젠장, 내가 우리 집 가는데, 왜 재촉을 받아야 되냐고!!!’ 지만은 툴툴거리면서 트렁크 안에 옷을 퍽퍽 구겨 넣었다. “형, 그러면 다 들어가지도 않고 옷만 망가져요. 에잇, 비켜요. 내가 하게.” “학상이 손도 더 빠르긴 하제, 야물 딱 지고.” “헤헤, 아줌마도 참~. 맞다. 언제 한 번 해장국 끓이는 법 가르쳐 주세요. 이 집 해장국이 제일 맛있더라구요.” ‘입에 침이나 바르고 구라를 쳐라.’ 의외로 쿵짝이 잘 맞는 이 둘은, 이후 지만이 짐을 다 꾸릴 때까지 서로간의 칭찬으로 침을 튀겼다. 젱말, 쒯이다. 흰색 폴로 티에 청바지를 걸치고 검은색 이스트 백을 맨 녹수는, 어젯밤 이대한의 집에서 자고 바로 온 듯 했다. 이대한의 집… 녹수 집이라 생각했던 하숙집 옆 초록색 대문 집은, 사실 이대한의 집이다. 벌써 몇 년을 옆에서 함께 살아온 하숙집 아줌마까지 오해할 정도로 녹수가 더 뻔질나게 드나드는 데다, 본인도 제 2의 자기 집이라 칭할 정도이긴 하지만. 처음에 지만은 녹수를 무척이나 오해했었다. 녹수와 대한이 그 앞에서 거하게 싸웠던 일을 보고, 이대한만의 일방적인 러브러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반대였다. 오히려, 장녹수 쪽이 더 일방적인 러브러브라고나 할까. 그는 지만이 본 커플 중, 가장 극성맞고 제일 지극정성인 놈이었다. 녹수는 아침이면 새벽같이 일어나 국까지 구비된 도시락을 바리바리 싸들고 이대한의 집으로 왔다. 봐서 전날 술 마셨으면 해장국을, 아니면 풀세트로 차린 아침밥상을 대령했다. 집안 구석구석 챙기고 문단속까지 한 뒤에 이대한을 데리고 등교하거나, 지만이 전학 온 첫 날처럼 전날 무리했다거나 하면 그냥 쉬게 두었다. 대신 그런 날은 온 종일 핸드폰을 들고 앉아, 그의 끼니 걱정과 잔소리를 연발했다. 간혹 이대한의 외모에 혹해 대쉬하는 여자들이 나타나면, 저번 일의 원인인 관계로, 아주 적극적으로 막았다. 퇴치방법은 주로 이대한 뒷담화였는데, 있는 말-없는 말 다 섞어가며 자기 애인을 화끈하게 흉본 그는, 돌아가는 여자들을 볼 때면 굉장히 속시원한 표정으로 좋아하곤 했다. 한번은 이대한이 술 먹고 어딘가에서 혼자 뻗은 적이 있었다. 녹수는 달려가 뒤처리까지 다해주고 그를 집으로 업고 와서, 구석구석 몸까지 닦아준 뒤에 고이 재웠다. 그때 옆에 있던 지만은, 여자 향내와 화장품 자국이 가득한 이대한의 옷을 짓밟으며 녹수 대신 분통을 터트렸다. 그 길로 그 집에서 녹수를 끌고 나와 하숙집에서 재운 뒤, 다음날도 평소처럼 그 집에 가려는 것을 강경하게 막고, 학교로 데려갔다. 그 몰래 걸려던 핸드폰도 빼앗아 전원을 꺼버렸다. 확실히 지만의 쓸데없는 오지랖이라 볼 수도 있었지만, 전에 둘이 싸웠을 때 그런 인간한테 가라고, 가야한다고 등 떠민 게 자신이었으니, 그는 상관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었다. “이 미친 새꺄!! 왜 핸드폰은 꺼놓고 지랄이야!! 우리 또 뒤집어질 뻔했잖아!!!” “녹수야, 학교에 있었어?” 땀투성이의 한상식과 유병우가 문을 뻥 차고 들어왔다. 교실은 술렁거렸다. 다행히 수업 중은 아니었다. “씨발, 다 나가!! 여기 남아 있는 새끼, 오늘 갈아버린다!!” 한상식의 기세가 보통 흉흉한 것이 아니었다. 생각보다도 격한 그들의 반응에 의아했지만, 지만은 얼른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핸드폰 내가 뺏어서 껐다. 학교로도 내가 데려왔어.” “뭐야?! 니가 뭔데 저 새끼 핸드폰을 꺼?!” “걱정했잖습니까! 대한이도 지금 엄청 찾고 있다구요!” 적반하장! 유병우까지 따지고 들었다. “그 녀석 하는 짓이 하도 꼴같잖아서 그랬다, 씨발! 니들도 어제 같이 있었다며!! 그러고도 니들이 녹수 친구냐?!!” 지만은 정말 화가 났다. 녹수가 겉보기에 담담한 척 해도, 어디 그 속까지 그렇겠는가! 정말 해도해도 너무하지 않는가! 그렇게 매일을 온갖 정성 다 들여가며 뒷바라지 했으면, 그만큼 보답은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성의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적어도, 계집 끼고 열라 뒹굴다 온 흔적 따위는 보이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니냔 말이다!! “기집애들이 그 새끼한테 달려든 게 어디 하루이틀이냐? 녹수 새끼는 가만있는데, 왜 니가 지랄이야!!” 뚫린 게 입이라고, 지만의 추궁에 잠시 움츠렸던 상식이 나불거렸다. 하지만 역시 찔렸는지, 기세는 팍 줄어들었다. 병우도 난처한 듯 입을 다물었다. 지만은 눈썹을 치켜뜨고 입가를 위로 올렸다. “하! 그럼, 녹수가 다른 놈 생각한다고 뭐라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저는 몸뚱이 함부로 굴리면서 말야, 생각만 하는 녹수더러 나쁜 놈이라는 건 말이 안 되지. 그 때는 자포자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다. 구속하고 싶으면, 구속되던가! 구속되기 싫으면, 헤어지던가!” 정말 그때 말리는 게 아니었다. 말리지 말 것을 그랬다. “씨발, 내가 왜 그 때 녹수한테 가라고 한 거지!! 저딴 새낀 줄도 모르고!! 그대로 끝내버리는 게, 더 나았는데!!!” 과격한 지만의 선언에, 상식과 병우는 총이라도 맞은 것처럼 얼굴의 핏기가 싸악 가셨다. 그들은 불안한 눈으로 녹수를 바라봤다. “야…, 장녹수. 너… 왜 암말도 안 해. …설마, 설마,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한상식은 목소리까지 떨었다. “어? 난, 지만 형 멋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대한이 뻥 차고, 지만이 형한테 시집갈까 하고.” 전혀 농담 같지 않은 농을 던지며, 장녹수는 실실 웃었다. “전 정말 상관없어요, 지만 형. 상식이 말대로, 하루이틀 된 일도 아닌데. 뭘, 새삼스레.” 지만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럴 리 있냐. 정말 그 말처럼 아무렇지도 않다면, 어젯밤 하숙집 베란다의 담뱃재가 그렇게 수북할 리 없겠지. 지만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야, 너 진짜 헤어져라.” 퍼억!!!! 퍽!!! 퍽!!! “닥쳐, 씹새꺄!! 니가 뭔데 자꾸 가만히 있는 새끼를 부추겨?!! 쥐뿔도 모르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우리에 대해 뭘 안다고!!!!” 상식이 지만을 미친듯이 후려갈겼다. 그는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그래도 역시 손속은 매서웠다. 타격률이 떨어질만도 하건만, 지만의 손쓸 겨를도 없이 속사포처럼 두들겨 팼다. 샌드백을 때리는 듯한 격타음은 잠시 이어지다, 갑자기 멈췄다. 녹수가 상식을 감싸안고 있었다. 한 손은 머리를, 한 손은 어깨를, 깊숙이 감싸고 꽈악 껴안았다. “한 사장, 왜 지랄이야. 나 안 가. 안 간다고.” 한상식은, 울고 있었다. “쉬… 안 가. 있을 거야. 옆에 있을 거야. 계속… 있을게. 계속… 계속 옆에 있을게. 계속…” 되풀이해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다정하고… 다정하게. 지만은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저들의 ‘관계’라는 것은… 섣불리 측정할 수도 단정할 수도 없는 견고한 성벽─그 안에 자리잡은 전혀 다른 세상의 것이었다. 이대한이란 커다란 톱니바퀴의 중심에 장녹수가 박혀있고, 그것을 구심점으로 한상식, 유병우가 작은 톱니바퀴가 된 채 맞물려 돌아가는 세상. 유병우가 다가와 지만을 일으켰다. 처음을 제외하곤 언제나 지만에게 깍듯하고 친절했던 그가, 살며시 지만의 목가를 쓰다듬었다. 마치 옷매무새를 다듬듯이 자연스럽게… 그의 숨통을 틀어쥐었다.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어떤 가책도 없었다. 그저 커다란 손으로 그의 목젖을 지그시 눌렀다. 끔찍한, 압박감이 몸을 묶었다. 조그만 움직임에도 손의 힘은 강해졌다. 아직 울고 있는 한상식이나 달래고 있는 녹수나,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손은 곧 치워졌고, 모두 해봤자 고작 1~2분 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지만이 살면서 가장 길게 느낀 시간이었다. “형, 안가요?” “응? 아…, 다 됐어.” 지만은 트렁크 문을 닫았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는 내내, 녹수는 상기된 표정으로 이리저리 둘러봤다. “지하철, 처음 타냐? 왜 이렇게 촌닭처럼 고개를 흔들어.” “인천은 공항밖에 안 가봤단 말이에요. 회도 먹어야지.” “서울 촌닭.” “…정동진에도 가봤어요.” 지만은 헛웃음을 치고 녹수의 머리를 흩트렸다. 답지 않게 가끔 이리 귀엽게 군다. 녹수는 투덜대며 머리를 쓸고, 다시 차창 밖을 열심히 쳐다봤다. 이대한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녹수를 노려봤다. 한상식이 진정될 무렵 나타난 그는, 녹수를 향해 큰 보폭으로 걸어가 세차게 뺨을 쳤다. 멱살을 틀어잡아 올리고, 잡아먹을 것처럼 이를 갈았다. “자물쇠라도 채워줄까? 말했지! 꼬리표 지우고 한 번만 더 사라지면, 이번에는 니 다리를 분질러 주겠다고!” 녹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올라간 입가에 피가 터졌다. “내가 가긴 어딜 간다고 그러냐들? 걱정 마라. 너랑 안 굴러도 옆에는 붙어있어 줄 테니.” 검은 아미가 꿈틀했다. “무슨 뜻이야?” “예전으로 돌아가잔 뜻이다. 너랑 나랑 굴러먹기 이전으로.” 달콤하게 웃었다. “너는 전혀 손해 볼 것 없어. 아니, 오히려 이익이지. 호모라는 불명예스런 딱지도 떨어질 테고, 나는 나대로 옆에서 계속 돌봐 줄 거고. 클럽이나 조직 애들 대하기도 수월해질 거야. 지금 이대로는 서로 힘들지 않아?” 손을 들어서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다정하게… “그렇게 하자, 대한아. 그냥 예전으로 돌아가자.” 석상처럼 굳어진 검은머리의 사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갈등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그는, 증오…를 갈무리하고 있었다. 공기마저 찢어발길 듯한 흉악한 기운이 전신을 맴돌았다. 눈빛으로 살인을 할 수 있다면, 지금 장녹수는 머리카락 한올까지도 갈기갈기 찢겨졌을 것이다. 지만은 손발이 다 떨렸다. “나, 사랑해?” 무겁고 음산한 단음절의 물음. 녹수는 입을 다물었다. “대답해.” 단정했던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계속 옆에 있을 거야.” “대답해!” “…그건, 이제 중요하지 않아.” 빠악!!! 잡았던 그대로 교실 바닥에 처박았다. 그 위에 올라탄 남자는 녹수의 목에 두 손을 감았다. “안 돼!!! 대한아, 안 돼!!!” 놀란 유병우가 있는 힘껏 그 손을 붙들고 잡아뗐다. 지만도 달려들었다. 때리고 차고 목을 조여도 이대한은 그 손을 절대 풀지 않았다. “또! 또 뺏기느니 그냥 죽여버리겠어!! 아예 그냥 죽여버리겠다고!!! 나쁜 새끼!!! 좆같은 새끼!!! 갖고 놀아!!! 날 갖고 놀아!!!” 퍼억!!! 한상식이 의자를 들어 이대한의 머리를 있는 힘껏 후려쳤다. “새끼가… 또 죽일라고 그러네. 철 좀 들어라, 이대한.” 머리가 깨졌는지 피를 흘리는 이대한이 고개를 들었다. 괴물이다. 저걸 맞고도 멀쩡하다니. 그래도 그 틈을 타 유병우가 쓰러진 녹수를 끌어내는 데는 성공했다. 한상식, 유병우가 등장했을 때부터 아수라장이 되어 텅 빈 교실 안에는, 오직 거칠게 토해내는 숨소리들만으로 가득 찼다. “괘… 괜찮냐, 녹수야?” 지만이 서둘러 녹수를 일으켰다. 앞에는 유병우와 한상식이 긴장한 채 바리케이트를 쳤다. 이대한이 피를 훔치고 일어서고 있었다. “쿨럭… 컥… 하…악. 하악. 하아… 하아… 큭. 크크크크….”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녹수가 비틀비틀 일어섰다. 부축하는 지만의 손을 사양하고 이대한 쪽으로 향했다. 병우가 어깨를 붙들었다. 녹수는 그의 얼굴을 한번 쓰다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대한은 자신 앞에 마주선 그를 잔뜩 독오른 표정으로 노려봤다. ─짝!!! 녹수가 그의 뺨을 후려쳤다. 모두, 숨을 삼켰다. 서서히 고개를 드는 이대한의 얼굴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너는, 나 사랑하냐?” 무표정, 무감정의 어조로 녹수가 물었다. “너도, 나 사랑하냐?” 이대한의 커다란 몸이 부들 떨었다. 녹수는 답을 기다렸다. 대한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알잖아.” “몰라. 들은 적 없어.” 이대한의 얼굴이 붉어졌다. 주먹을 꾹 쥐고, 턱을 경직시켰다. “말장난하지 마.” “들어야겠어.” 단호한 선고. 숨막히고 갑갑한 침묵이 흘렀다.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사방은 고요했다. 심장이 튀어나올까 싶던 끈질기고 긴 침묵의 끝, 밤보다 짙고 검은 눈동자가 녹수를 직시했다. “사랑해.” 시원하게 울리는 중저음이… “사랑한다, 장녹수.” 진심을 담아, 사랑을 전했다. 녹수는 살며서 손을 뻗어, 대한의 이마에 흐르는 피를 닦고 그대로 그의 머리를 당겨 입을 맞췄다. 깃털처럼 가볍게 얹은 입술, 작은 한숨을 몰아쉬고, 다시 강하게 부딪힌다. 닫혔던 입술이 벌어지며 붉은 혀가 엉켰다. 끼워 맞춘 듯 몸을 밀착시킨 그들은, 깊은 키스와… 깊은 마음을 나누었다. …그러니까…… 그 뺨에 흐르는 눈물은 기쁨의 뜻이 것이다. 혹은… 이제야말로 놓아버릴 첫사랑에 대한 안녕일 것이다. “엣, 벌써 내려요? 아직 많이 남았는데…” “…어딜 가려고 했는데?” “바다요! 바다 보고 싶었거든요. 바다 안 가요?” “그 비린내나는 꾸정물을 뭐 보러가냐. 볼 것도 없어.” “그래도… 보고… 싶었는데.” 아쉬운 듯 되새김질했다. 내리는 순간에도 닫히는 문을 흘끔거렸다. 미련 많은 녀석이다. “데려다 줄게, 나중에.” 뗄 줄 모르던 눈을 돌려, 환하게 웃었다. “아니, 이게 누구셔~. 우리집 망나니잖아! 그래도 때 됐다고 기어 내려오다니, 한달 새에 사람됐네!” “지만이 왔니? 아유, 꼴이 그게 뭐야. 너 제대로 씻고는 산 거야?” 지만은 오랜만에 듣는 영감의 갈굼과 어머니의 잔소리마저 반가웠다. 외계로 출장갔다 귀환한 우주 비행사의 기분이랄까. 드디어 평소의 일상이다, 일상! 그리웠다, 일상아! “안녕하세요. 지만 형 후배, 장녹수라고 합니다.” 아차, 이 녀석이 있었지. 딸려온 비일상. “어머, 어머, 어머!! 여보, 지만이 후배래요!” “허, 흠! 거─, 방정은! 녀석, 미리 말이나 하고 데려오지 그랬냐. 잘 왔네.” 당황이란 두 글자가 허지용씨 부부를 덮쳤다. 그렇지. 저것이 바로 지만의 지난 한 달간 일상이었다. “하하, 정말 죄송합니다. 지만 형이 아직 말씀 안 드렸었나 보네요. 음, 저… 정말 실례지만, 며칠 신세 좀 져도 될까요?” “엥? 그… 됐네. 아니, 잘 지내라고. 아, 여보 뭐해. 방 내주라고…” 지만의 선후배 통틀어 이 집을 드나든 인간 중 제일 말끔하고 예의바른 장녹수의 등장으로, 부친 허지용씨는 말까지 꼬여가며 허둥지둥 댔고, 모친 장미영씨는 넋을 잃었다. 장녹수는 특유의 뻔뻔한 미소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아참. 이거, 드리려고 가져온 건데요, 약소하지만 받아주십시오.” “아니, 뭘 이런 걸 다… 엇, 이, 이건 뭔가?” 가방을 내려놓다가 생각났는지, 낡은 이스트백을 뒤져 붉은 상자 하나를 꺼내 허지용씨에게 건넸다. 뭔가 하고 들여다보던 허지용씨의 입이 귀까지 찢어졌다. 그것은, 척 보기에도 엄청 비싸 보이는 양주 상자였다. 얼른 열어보니 ‘VIP XO Cognac Frapin’란 상품 라벨이 붙은 넓적한 병 하나가 들어 있었다. “아, 아니… 이거, 학생이 이렇게 비싼걸…” “사실은 누가 사다 준 건데, 저희 집은 이런 거 잘 안 마시거든요. 며칠 신세진다고 하니까 어머니께서 잘 부탁하신다고 챙겨주신 거예요.” 물론 뻥이다. 틀림없이 이대한이 준 거다. 그의 그 허름한 집에는 의외로 이런 고가의 물건들이 굴러다니곤 했다. 지만에게는 유산 받은 돈이 많은 거라고 둘러댔지만, 지나가는 개도 안 믿을 소리였다. “저, 그리고 이건 그냥 제가 사온 겁니다. 아는 분이 가게를 하셔서 싸게 주시거든요.” 브라운 베이지의 여자용 손지갑을 내밀었다. G 로고가 문양으로 박혀있는 구찌 손지갑이었다. 안 그래도 부러운 듯 쳐다보고 있던 장미영씨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지만, 그 손은 이미 지갑을 쥐고 있었다. …저건 대체 어디서 났을까. 지만의 수수께끼를 뒤로하고, 허지용씨 부부는 매우 유쾌한 기분으로 장녹수를 환영했다. “얘, 얘, 지만아. 녹수 학생 말인데, 정말 후배니? 생긴 것도 그렇지만, 어쩜 저렇게 의젓하고 예의 바르니. 딸 있으면 사위 삼고 싶다!” “걔 임자 있어.” ‘뭐어? 정말이야? 아이, 아까워─.(대체 왜)’를 외치는 어머님을 뒤로하며, 지만은 부엌에서 받은 쟁반을 들고 이층 방으로 올라갔다. 지만의 옆방에 짐을 풀던 녹수는 정리를 끝냈는지 침대에 앉아서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었다. 지만은 모친이 인심 팍팍 쓴 흔적이 역력한 쟁반을 내려놨다. 평소에는 안 쓰던 손님용 접시에 오렌지도 정성 들여 깎고, 급조한 샌드위치에는 은박지까지 싸여 있었다. 하나 집으며 우적우적 씹고, 녹수에게도 하나 집어주며 침대 위에 나란히 앉았다. “오랜마네 내려왔는데, 친구들 만나러 안 가요? 그러고 보니, 서울에서도 연락하는 모습 못 본 것 같은데.” 잊고 있었다. 고얀 놈들. 아, 복수도 해야되는데. 지만은 녹수를 흘낏 봤다. “갈래? 나 전에 다니던 고등학교, 바닷가 가는 길에 있는데.” “네!” 한 달 만에 보는 신포동 거리는 어쩐지 생소했다. 고작 30여 일 지났을 뿐인데, 3년은 지난 것 같은 기분이라니. 저 곳에서 오토바이 쇼바 올리고 빠라빠라빠라 빰하던 기억이 흐릿하니 잘 떠오르지 않았다. 지만은 머리를 긁적이며 전에 패거리들과 곧잘 모이곤 하던 공원 뒤쪽으로 갔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담배연기 틈으로, 땡볕을 피해 앉은 덩치 뭉탱이가 보였다. “여─!” 손을 들어 한 지만의 인사에, 근육 뭉치 4명은 “헉!” “엣!” “으윽!” “컥!” 등의 다양한 감탄사를 연발하며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뜨렸다. “지, 지만 형님! 안녕하셨습니까!” “왜 벌써 내려오셨어요?!” 딱콩! “뭐야! 지금 니들, 내가 온 게 불만이야?!!” “아닙니다! 뵙기만을 학수고대 했습니다!!” “엄청 뵙고 싶었습니다!!” “형님, 더 멋있어 지셨습니다!!” “엄청 멋있어 지셨습니다!!” “풋!!” 10개의 눈이 한 지점으로 몰렸다. “푸하하하하하하핫!!” 허리를 꺾고 웃고 있는 장녹수였다. 지만은 뻘쭘했다. 덩치들은 더 쪽팔렸다. “뭐야, 당신?!! 왜 웃어?!!” 성질 급한 한 놈이 먼저 나섰다. “아, 아… 죄송합니다. 그냥 참 다정다감한 재회 인사라서요. 역시 지만 형과 친한 분들이라 그런지, 다들 재미있으십니다.” “쩝. 얘들아, 인사해랴. 서울에서 온 장녹수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장녹수입니다. 지만 형한테 신세 많이 지고 있어요.” “형이요? 어, 지만 형보다 아래십니까?” “…니들이랑 동갑이다.” 녹수는 술렁술렁 대는 덩치들을 보며 즐거워했다. 지만의 타박 섞인 재회식을 치르고, 그들은 신포동 거리를 몰려다녔다. 이것저것 구경하고 돌아다니다 저녁을 먹고, 2차로 호프집을 들어갔다. 모두 사복 차림의 덩치들인 데다가 지만과 녹수가 앞장서서 들어가니, 잡을 사람도 없었다. 자리를 잡아 앉고, 왁자지껄 소란을 피우며 수다꽃을 피우고 있을 때였다. 지만의 뒷벽으로, 맥주 잔이 날아와 박살났다. “이게 누구야~, 꼴통 허지만 아냐? 아아─. 학교 짜리고 시골로 갔다더니, 방학 때 되니까 떨거지 보러왔나 보지?” 삽시간에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얍실하게 생긴 녀석 하나가 패거리 10여 명을 끌고 껄렁껄렁 다가왔다. 재수없다. 허지만이 청운으로 가게 된 넘버 원 공로자, 조득주여싸. “그러는 넌 누구냐? 미친놈은 약도 없다지만, 그나마 지어주는 약 처먹으면 좀 낫지 않겠냐? 병원이나 가라.” “어디서 말빨만 늘어왔군. 전 같으면 주먹부터 뻗을 새끼가, 난 척 하기는.” “가자.” 나불대는 주둥아리를 뭉개버리고픈 마음이야 굴뚝이지만, 녹수도 있었다. 더러워서 피한다를 외우며, 무시하고 발길을 돌렸다. “캬캬캬캬! 저거 봐라, 저거. 저 새끼 꽁지말고 튄다! 허지만, 그나마 있는 거라곤 성깔밖에 없던 니 성질도 다 죽었구나. 하하하하핫!!” 주위에 있던 패거리도 같이 비웃었다. “형님, 그냥 붙어요!! 수가 딸려 그럽니까?!! 우리가 언제 그런 거 따졌어요! 저딴 새끼들 저 혼자도 다 뭉갤 수 있습니다!!” “그래요, 형님!! 저흰 괜찮으니까 붙어요!!” 지만 쪽의 덩치들도 흥분해서 이를 갈앗다. 지만도 욱하는 마음에 ‘그래, 뭉개버리자!’하고 외치려는 순간, 녹수가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뒤에서 멍하니 저 얍실한 패거리를 바라보는 녹수를 보고 있자니, 도저히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머릿수 차이가 배로 나니까 이쪽이 훨씬 불리하다. …다칠지도… 모른다. “가자!” 입술을 힘껏 깨물고, 주먹의 힘을 풀었다. 항의하려는 덩치들을 엄한 눈으로 노려보면서 입을 다물게 하고, 녹수의 어깨에 손을 돌려 문 쪽으로 끌었다. “뭐─야, 진짜 쪼다가 됐네? 이러면 재미없지, 허지만. 안 그래?!” 계속해서 도발을 해오는 조득주를 무시하며 발걸음을 옮기자 심사가 두틀렸는지, 녹수를 걸고 넘어졌다. “뭐냐, 그 희멀건한 새끼는? 시골에서 낚은 니 애인이냐? 이제 보니, 쪼다에다 호모까지 돼서 돌아왔구만!!” 또 한번의 조소가 호프집을 채웠다. 지만의 걸음이 멈췄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으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래도 참자. 자기가 생각해도, 자신의 인내심이 한 달만에 태산만큼 높아졌다. 그러나 그런 지만은 아랑곳없이, 조득주는 계속 녹수를 건드렸다. “어디, 어디, 면상이나 보자. 애게~! 허지만 눈 엄청 낮구만! 이게 뭐냐, 이게?” 하면서 녹수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휙─ 퍽!!! 지만의 주먹이 반사적으로 튀어 나갔다. 인내의 끝이다, 끝! 시원하게 후려치고 발로 깠다. 조득주는 첫 방은 맞았지만, 두 번째는 재빨리 뒤로 빠졌다. “캬캇. 이렇게 나와야지~. 얘들아, 쳐… 욱?!!” 조득주가 머리채를 잡혀 탁자 모서리에 처박혔다. ─장녹수였다. “안녕. 지만 형 얼굴 봐서 참았는데, 도저히 못 참겠다. 오늘 처음 보는 씨발놈아, 정말 미안한데, 너 오늘 좀 죽어줘야겠다.” 그대로 옆 탁자에 놓였던 500밀리리터 피처 잔을 들고 조득주의 머리에 힘껏 내리쳤다. 단단한 맥주잔이 박살날 정도로. 그는 한방에 나가떨어진 놈을 끌어내 앞으로 차서 눕히고, 의자를 뽑아 등을 찍었다. 동그라미 의자 좁은 다리 사이로 놈의 목을 끼우고, 다시 땅에 붙은 얼굴을 세차게 걷어차더니, 의자에 기대 실실 웃으며 전면을 응시했다. “이리 와 봐. 귀여운 니들 대장 목부터, 내가 다 따 줄게.” ─일동 경악! 지만은 더더욱 경악!! 녹수는 쓰러져있는 득주의 주머니를 유유히 뒤져서 잭나이프 하나를 찾아냈다. 날을 펴고 한바퀴 돌리더니, 그 상태로 낚아채서 아래로 휙 던졌다. 단단한 시멘트 바닥을 뚫고, 칼날은 조득주 바로 코앞에 꽂혔다. “왜 다들 말이 없냐? 이러면 심심하지. 어이, 안 그래?” 득주의 엉덩이를 툭툭 차며, 녹수가 물었다. “미… 미친 놈. 너, 너 누구야. 뭐… 하는 새끼야.” 나름대로 강단 있게 말하려고 했지만, 이미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허지만 씨 애인이다, 어쩔래? 이걸로 니 후장이라도 따주랴?” 깊게 박힌 나이프를 쓱쓱 움직여서 빼고는 물었다. “기회 한번이니, 잘 골라라. 고냐 스톱이냐? 참고로, 판 돌아가면 니 목부터 딴다. 나 미친놈 맞거든.” “스…스톱.” “접수했다. 아, 뒷북치면 알지? 이번엔 진짜 갈아버린다. 사실 지금, 지만 형 봐서 많이 참은 거거든.” 평소와 다름없는 어조로 한편의 사이코 폭력 드라마를 찍은 장녹수는 물러가는 조득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의자가 치워지자마자 후다닥 비틀거리며 패거리한테로 간 녀석은, 나가면서도 계속 그를 흘끔거렸다. ─스걱. 나이프를 던졌다. 역시나 벽에 박힌 나이프는, 마지막으로 뭔가 말하려던 조득주 얼굴 바로 옆에 꽂혔다. “잊은 거 챙겨가라고.” 싱긋 웃으며 손까지 흔들었다. 조득주 패거리가 물러가고 얼마 안 돼서 사이렌 소리가 울렸기에, 녹수의 지만들은 얼른 튀어 아지트로 쓰던 폐교 운동장으로 갔다. 옛날 여자 고등학교였다는 이 건물은 아주 복잡스러워서, 옛 별관이었던 건물과 담장이 운동장을 완전히 가려주고 있었다. 옆에 있는 뉴코아 백화점에서 사온 안주거리와 술을 챙겨 들고, 일행은 술판을 벌렸다. 초반에는 지만의 후배들이 녹수를 향해 신기하다는 듯 이것저것 질문공세를 폈지만, 지만이 주의를 한 번 주자 입들을 다물었다. 화제를 전환해서, 덩치답지 않은 이런저런 재롱들로 다시 분위기가 화기애애해 졌다. 술이 웬만큼 들어가자, 모두 얼굴들이 달아올랐다. 구석에서 담배를 물고 묵묵히 앉아있던 지만이, 덩치 한 명과 마주앉아 안주 받아먹기 놀이를 하고 있는 녹수를 바라봤다. 놀랐다. 지만은 정말 놀랐다. 이대한들과 여러 복잡한 일이 있었던 와중에도 낌새는 있었지만, 그런 쪽의 느낌은 전혀 없었기에, 녹수는 그저 그들의 보호만을 받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대한과의 관계에서도… 말하자면 녹수가 여자 역이었기에, 은연중 자신도 ‘녹수 = 보호해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녀석이, 갑자기 멀쩡한 사내자식… 아니, 그보다 더 강한 깡패자식으로 거듭나다니… 지만은 녹수를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도통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기분이 꽤 좋았는지 술을 연거푸 푸던 녹수의 얼굴이 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되었다. 안 그래도 웃음이 헤픈 녀석이, 술 들어가니까 정말 가관이다. 지만은 혀를 차고, 녹수에게로 갔다. “야, 그만 가자.” “에헤헤. 형, 지만 형. 이거 제가 다 마셨습니다. 제가 다 마셨어요!” 궤짝 채 뒹굴고 있는 빈 맥주병들 앞에서, 녹수가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래, 좋겠다. 그러니까 일어나.” “아이고, 형님! 벌써 가실라구요~. 에잉, 우리랑 더 놀다 가요.” “이것들이 단체로 혀가 꼬여선, 씨발!! 닥치고 빨리 안 접어?!!!” 불벼락이 떨어지자, 헤롱헤롱하던 덩치들이 후다닥 일어나서 자리를 정돈했다. 녹수는 그 틈바구니에서도 꿋꿋하게 자리에 앉아 좌우를 둘러보며, 계속 웃고 있었다. “야, 일어나. 일어나라니까!” “세상은 빙글빙글. 님도 가고 뽕도 가고… 에헤라디야~.” “뭐라는 거야.” “우리 예쁜 유진 씨가 어디로 갔을까, 우리 불쌍한 우진이는 어디로 갔을까…” “……이상한 노래 만들지 말고, 얼른 일어나.” “형, 지만 형. 어디로 갔을까요, 다들? 왜 다 떠났을까요? 왜~~ 떠났을까요? 내가 이렇게…… 이렇게… 보고 싶어… 하는데…” 웃음이 멈추고, 힘없는 웅얼거림. 망연히 앉아 있던 그는 또 웃었다. “맞다! 내가 보냈어요! 내가! 내가! 내가! 내가, 보냈어요!! 맞다, 그랬지. 우리 예쁜 유진 씨 울리고. 불쌍한 우진이도 울리고. 대한이도 울리고. 상식이도 울리고. 내가 그랬지, 참…” 가슴을 탕탕 치며 시작한 한탄은, 다시 웅얼거림으로 끝을 맺었다. 지만은 한숨을 쉬며 녹수를 일으켰다. “형, 지만 형. 나, 나쁜 놈이랬죠? 그랬죠? 맞아요, 나쁜 놈이에요. 그렇게 예쁜 사람들을 울렸으니, 나는 정말 나쁜 놈이에요. 근데, 근데…! 그런데, 있잖아요! 나도… 죽을 만큼 힘들었거든요? 죽고싶을 만큼 힘들었거든요?” 자꾸만 풀리는 다리에, 축축 처지는 몸이 무거웠다. 지만은 녹수를 뒤로해서 업었다. ‘그래서, 나도……울었…거든요.’ 속삭이는 소리가 귓가 옆의 뜨거운 입술 속에서 들린 듯도 싶었지만, 확실하진 않다. “어, 어? 형이 날 업었네? 와! 지만 형은 장사십니다! 천하장사! 으랏차차!” “정신 사나우니까, 가만 있어!!” 지만이 짜증내자, 곧 쥐죽은듯이 조용해졌다. “하하핫, 형님. 형수님이 많이 취하셨네요. 그래도 보기 좋~습니다!” 이게 뭔, 자다 봉창 두드리는 개소리야! “씨발, 지금 뭐라 씨부렁거렸냐, 앙?!!” “아이, 참. 뭘 그리 빼십니까. 저희는 편견 없어요! 전혀! 네버!” “맞아요, 그런 거 전~혀 없어요. 저 형수님, 진짜 멋있기도 하고… 형님 봉 잡으셨네요.” 지만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어디서 저런, 이대한 들으면 갈가리 찢어놓고 인수분해까지 할 소리를!!! “씨발!! 내가 어딜 봐서 호모라는 거냐?!! 어?!!” “어어, 진짜 왜 그러세요! 아까 다 파악했다니까요. 형수님이 그러셨잖아요. 지만 형님 애인이라고.” 커억─!!! 이래서 애들 앞에선 농담도 못한다. “이 자식이 헛소리한 거야! 농담한 거라고!! 내가 뭐가 모자라서 임자 있는 사내새끼한테 껄떡거리냐?!!” “엉?! 지, 진짜 아니에요?! 아, 아니. 우린 다, 꼭 그런 줄 알았는데… 아까 하도 지만 형님이 형수… 아니, 이 형님을 챙기셔서…” “그럼, 인천까지 내가 데리고 왔는데 안 챙기고 그냥 내비두랴?!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황당한 생각을!!” “죄… 죄송합니다. 그래도 저희는 진짜 그런 줄 알았거든요?” “확 엎어버리기 전에 다들 아가리 다물어라, 응?!” 짜증짜증 왕짜증을 부리며 패거리와 헤어진 허지만은, 장녹수를 들쳐업고 택시를 잡았다. 잠들었는지 잠잠한 녹수가 자꾸만 밑으로 처져서 아주 죽을 맛이었다. 간신히 택시를 잡고 뒷자리에 녹수를 꾸겨 넣을 수 있었다. “얄미운 놈.” 이마를 한번 튕기고 다리까지 다 집어넣은 뒤, 자신은 앞에 탔다. 인천명물 폭주택시의 거친 운전에, 자꾸만 덜컹거리는 뒷자석이 들썩여싸. 몇 번을 덜커덩덜커덩거리다, 결국 녹수가 쓱 의자 아래로 떨어졌다. 지만은 차를 세우고 뒷자리로 옮겨 탔다. 녹수를 다시 한쪽 구석으로 앉힌 뒤에,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물론 속으로는 씨발을 연발하며, ‘어우!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생고생을!!’하고 외쳤다. 집 앞 골목에 내려서 다시 낑낑대며 업고, 높디높은 계단 길을 걸어 올라갔다. 지만은 올라가는 내내, 등뒤에 엎은 녹수를 저 아래로 던져버리면 어떨까를 두고 열심히 고민했다. 결국, 계단 끝까지 올라와서는 진이 다 빠져버렸다. 잠시 휴식. 지만은 바지를 뒤적여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여름 밤 공기가 후끈했다. 땀 범벅인 검은색 반팔 티 속에 손을 넣어 훌렁훌렁 부쳤다. 얼핏보니, 계단 옆 주황색 가로등에 비춘 녹수의 얼굴도 온통 땀투성이였다. 술까지 먹어 그런지, 호흡도 거칠었다. “젠장.” 늦은 밤에 어차피 집도 코앞이다. 녹수의 웃통을 벗겨서 땀을 식혔다. 지만의 손이 멈췄다. 가끔 이대한과 뒹굴 때 살짝씩 엿보였던 그의 몸에는, 1년 전 상처들이 마른 논바닥의 금처럼 여기저기 흔적을 남겨두고 있었다. ……상상한 것보다도, 훨씬… 많앗다. “씨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 길로 다시 옷을 입혀 들쳐업고, 집으로 달음박질 쳤다. 어두운 방, 지만이 오랜만에 자기 방에서 맞는 잠자리였다. 녹수는 옆방에 재워뒀다. 잔뜩 땀에 젖은 셔츠와 바지를 편한 옷으로 갈아 입히고 침대에 눕힌 뒤, 자기 방에서 끌어온 선풍기의 타이머를 세팅했다. 에어컨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허지용씨 덕에, 이 넓은 집의 여름 실정은 무척이나 각박해서, 각방에 선풍기 한 대씩이 여름철 장비의 전부였다. 지금 방금 지만은, 열대야 밤의 서늘한 안식을 녹수에게 양보한 거나 마찬가지인 것이었다. 효과는 즉방.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하루종일 돌아다니느라 죽도록 피곤한 몸과는 관계없이, 후덥지근한 공기는 지만의 잠을 저 멀리로 날려버렸다. 앵앵거리는 모기소리도 신경을 거슬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가벼운 체조를 하다가, 문득 모종의 생각이 떠올랐다. 간만의 기회다. 하숙집에서는 그놈의 공포특급 아줌마 때문에 신경 쓰여서 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는 슬쩍 침대 위에 앉아 트렁크를 내렸다. 오랜만의 손 운동을 하려니까, 조금 떨린다. 문은 확실히 잠궜고, 옆에는 휴지도 있으니, 준비는 퍼펙트. 흐흐흣.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막상 손을 풀려고 보니, 재료가 떨어진 것이다. 빨간 비디오 본 지가 언제더라… 1등급 포르노야 인터넷을 하면 어디서든 볼 수 있지만, 그동안 정신 사나워서 미쳐 챙기질 못했다. …죽어도 이 21세기에 자라나는 청춘이 컴맹이라곤 밝힐 수 없다. 할 수 없이, 하는 도중에 그냥 서서히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잡기부터 했다. 슬슬 쓸어 올리면서, 쥐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빨간 비디오를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풍부한 가슴과 엉덩이, 구멍… 아, 다시. 가슴- 엉덩이, 구멍, 씨발. 다시! 허리, 엉덩이, 구멍…! 젠장!!’ 아주 심각한 트러블이었다. 그가 가장 근래에 본 응응 씬은, 저 방에 누워있는 남정네와 그의 애인이 펼쳤던 생 라이브. 게다가 어디 그게 그냥 응응인가, 호모끼리의 거시기한 응응 아니냔 말이다! 보기 힘든 만큼 임팩트도 강한 그것은, 지만의 뇌리에 가서 팍 박혀버렸다. 그는 정말 난감했다. 이미 손으로 건드려놔서 잔뜩 성이 난 그의 것은 ‘넥스트!’를 외치고 있었다. ‘미안하다, 리틀 지만. 형님이 지금 재료가 딸린다.’ 포기를 선언했지만 진짜 간만이어서 그런지, 열기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결국 뒤치덕거리던 지만의 손이 다시 한 번 트렁크 속으로 들어갔다. ‘애니든 제니든, 아야꼬든 사쿠라든, 아무나 튀어 나와라!!’ 자신의 페니스를 흔들며, 그는 필사적으로 옛 비디오를 떠올렸다. 거듭된 그의 끈질긴 노력 덕에, 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안심한 지만이 그대로 피칭을 올리며 끝을 보려고 했던 순간… 뺨에 물건을 올려놓은 채 밑을 핥는 새빨간 혀, 옆으로 비틀며 튀어 오르는 허리, 위아래로 정신 없이 흔드는 엉덩이, 거친 신음을 내며 ‘거기!’를 외치는 목소리, 흩뿌리는 하얀 정액과 만족의 탄성음… 실금 같은 상처 자국. 손안 가득 뿜어진 흰색 액체를 바라보며, 지만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형, 괜찮아요“ “어?! 왜, 왜?!” “왜라니요. 아까 아침 식사 때, 배탈났다고 먼저 올라왔잖아요.” ‘아… 아침식사… …지옥이었지.’ 기분 낸답시고 모친이 아침부터 밥상에 올린 갈비는, 아들을 위기에 빠뜨렸다. 어젯밤 자신의 머릿속에서 치른 모종의 일 때문에, 차마 친한 후배녀석의 눈과 마주치지 못하던 허지용씨 댁 외아들은, 시선을 반상머리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러니 뭉툭하고 마디 굵은 손들 사이에 있는, 날씬하고 길쭉한 손에 그의 눈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손이 다시 갈비를 집어 주인의 입가로 가져가는 것을 함께 따라 보았던 것도, 나쁘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얀 이빨과 붉은 혀가 살짝 보이며 손가락을 쪽쪽 빨아먹는 장면을 본 것은, 위 과정의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다만, 문제는… ‘왜 거기에, 그의 목줄기가 쭈뼛해지면서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는가’이다. 식탁 아래에서 왕성해진 분신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는 식은땀을 흘렸다. 결국 진수성찬을 뒤로 물린 채, 배탈났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후다닥 위층 자기 방으로 도망왔었다. “그럼… 오늘도 바다는 못 가겠네요.” “애냐? 진짜 볼 것도 없다니까.” “쳇, 남이사! 그럼 가는 법이라도 가르쳐 줘요. 혼자라도 가게!” “씨발, 이게 이제 머리끝까지 기어오르네! 죽을라고!! 콱!!” “아야!! 씨, 두고봐요!!” “엇, 앗, 씹!! 야, 야…!!! 크악, 푸하하하하하핫!!” 지만은 녹수에게 헤드락을 걸어, 주먹으로 머리를 콩콩 찍었다. 녹수는 반격으로 지만의 옆구리를 간질였다. 정곡을 찌른 약점이었다. 결국 배가 땡기도록 웃은 지만이, 열이 올라서 녹수를 공격했다. 기술이야 딸리지만 힘은 장사다. 엎치락 뒤치락하며 뒹굴다가 결국 녹수의 옆구리를 공략하는데 성공했다. “앗, 아앗, 앗, 혀, 형, 그만…!!! 아하하하핫, 학, 하악, 지, 지만 형, 이제, 그만…?!” 자지러지듯 웃는 녹수를 갑자기 내팽개치고, 지만이 어디론가 후다닥 달려갔다. ‘씨발! 씨발!! 이게 진짜 미쳤나!!!’ 리틀 지만이 다시 잔뜩 성을 낸 채, 앞으로 나란히를 하고 있었다. 그는 화장실 문을 닫고, 재빨리 칠부 트레이닝 팬츠를 내렸다. 그리고 냅다 찬 물을 들이부었다. “형, 형! 괜찮아요?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밖에서 따라나온 녹수가 화장실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 “배, 배탈 났어.” “진짜 심한가 보네… 괜찮아요? 약 사올까요?” “됐으니까 꺼져라. 씨발, 쪽팔려서 안 나오잖아!” “네, 네. 알겠습니다.” 잠잠해진 문밖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소란 틈에서도 리틀 지만은 여전히 쌩쌩했다. 지만은 입술을 깨물고, 다시 속으로 ‘제니, 애니’를 외쳤다. 그러나… 방금 그의 페니스에 닿았던 허리, 엉덩이의 감촉, 벌려진 사이로 들어간 그의 허리를 감쌌던 다리의 존재감, 헐떡거리며 그를 부르던 목소리, 마치 절정의 순간처럼 뒤로 꺾이던 긴 목… 이 차례대로 생생하게 떠오르며 애니, 제니를 몰아냈다. 더구나 머릿속은 어젯밤보다 한층 진보해서, 이제 그를 깔고 있는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 되어 있었다. 차가운 손이 자신의 지퍼를 열었다. 이미 부풀어 오를 대로 부풀어 오른 성기를 밖으로 꺼내고, 빨간 혀로 핥으며 빨기 시작했다. 앞뒤로 움직이는 진갈색 머리가, 그의 흥분을 부추겼다. 절정의 순간, 다리 사이에 박힌 갈색머리를 뒤로 빼게 하며 그의 얼굴에 하얀 정액을 뿌렸다. 그는 흐르는 액을 핥고, 입을 벌렸다. 그의 입술을 거칠게 덮고, 빨았다. 이어 혀끼리의 설전이 벌어지고, 서로의 옷을 풀어헤쳤다. 목에까지 올라오는 실금 같은 상처에 키스하면서, 유두를 지분거렸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자신의 것을 요구하는 그는, 마치 요부처럼 바지를 벗어제낀 채 다리를 활짝 벌리고 허리를 흔들었다. 원하고 구했던 구멍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부드럽게 집어넣으려 하자, ‘거칠게, 해도 괜찮아요. …형.’하고 눈웃음을 친다. 엉덩이를 붙들고, 열이 오른 대로 힘껏 박았다. 퍽! 퍽! 퍽! 퍽! ‘아앗, 앗, 학, 으응… 아앗, 좋아… 아앗, 아앗, 하악, 응. 응, 윽, 지만… 형. 그… 그…만. 하…앗!’ 짙은 혐오감 속에, 지옥 같은 쾌감이 전신을 훑었다. “너, 가라.” “네?” “몸도 아프고, 아니라도 귀찮아. 그냥 서울로 올라가라, 역까지는 데려다 줄 테니.” 화장실에서 나온 즉시 지만은 침대에 드러누워,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저 녀석 얼굴을 봐 버리면, 또 마음이 약해질 지도 모르니까. “……그래요… 그럼. …저, 가볼게요.” 녹수의 대답이 들렸다. 실망 어린 그의 목소리에 어떤 표정일지 얼굴이 그대로 그려졌지만, 지만은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으로 향했다. “됐어요, 형. 아픈데 그냥 누워 있어요. 오는 길 기억해서, 혼자 찾아 갈 수 있으니까.” 옷을 잡은 손이 움찔거렸다. “그럼 그렇게 해.”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차갑고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보지 않아도, 숨소리만으로도, 지금 녹수의 얼굴이 근심과 의구심으로 일그러졌을 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잠시 뭔가 말을 꺼내려다 삼키고, 그는 옆방으로 가서 짐을 챙겼다. “부모님께 인사 못 드리고 가서 죄송하다고 전해 주세요.” “어. 가라.” “서울에서 다시 봬요, 형. 몸조리 잘 하시고…” “그래.”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검은색 이스트백과 작은 여행가방을 들고, 녹수는 자신과 왔던 모습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그의 암갈색 머리가 계단 언덕 저편으로 사라지고 한참이 지나서도, 지만의 발과 눈은 못 박힌 듯 움직이질 못했다. 시간이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한여름 밤의 무더위에 잠깐 정신이 나간 것뿐이다. 그냥 호모 섹스라는 걸 처음 봐서 땡겼던 것뿐이다. 새로운 분야에 대한 성적 호기심이, 저 녀석을 잠깐 끼웠던 것뿐이다. 아는 호모라는 것이 저 녀석 밖에 없으니까. 거기에, 타지에서 외로울 때 매일매일 오래 붙어있다 보니 얼굴도 머리에 박혔고, 많이 정들기도 했으니까. 게다가 불쌍한 녀석이지 않은가. 동정심이 마음이 가는 것이 당연하다. 아니, 동정할 필요도 없는 녀석이다. 기차게 잘난 애인까지 있지 않은가, 놈은… 씨발. …서울 가면 다시 친해질 수 있다. 다시 잘해 줄 수 있다. 그때 바다도 데려가 주고, 인천 바닥 구석구석 바이크에 태워서 구경시켜 주면 된다. 영종도도 데려가자. 지만은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다짐과 변명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녹수를 서울로 보내고 한 시간 후, 지만은 갑갑함을 못 견디고 집을 나섰다. 전에 쓰던 바이크를 압수 당해 끌고 나가진 못하지만, 바이크가 세상에 그것 하나 뿐은 아니다. “아, 나다. 지만이. 니 애마 좀 끌고 와라. 오랜만에 몸 좀 풀자.” 어제 본 덩치 중 한 명에게 폰을 때리고, 집 앞 계단을 내려가서 기다렸다. 생각보다 늦게 도착해서 지만이 짜증을 내려던 차에 덩치가 먼저 말을 꺼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형님! 어제 그 형수님… 아니지, 녹수 좀 데려다 줬거든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트렸다. “뭐, 누구? 누굴 데려다 줘?” “녹수요. 어제 폰 번호 나눴거든요. 아까 한 시간 전쯤인가 전화해서 바다 보러 가려면 어디로 가야되냐고 하길래, 월미도까지 데려다 줬지요.” 지만은, ‘잘했죠?’하고 히히덕거리는 덩치를 찌뿌둥하게 바라봤다. ‘왜… 이렇게 친한 척이야! 언제 봤다고 녹수, 녹수냐! 젠장. 자식이, 기어코 갔네. 내가 데려가기로 했는데… 나랑 가기로 했으면서. 같이 가기로 한 거였잖아. 정말 바다라면, 아무라도 좋았던 거냐? 씨발, 기분 좆같네! 둘이, 바짝 붙어서 갔겠지? …꽉, 안았을까… 그 손으로…’ “씨발!!!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갑자기 지른 소리에 덩치 후배는 깜짝 놀랐다. “왜, 왜 그러세요. 녹수랑 거기서 만나기로 하신 것 아니에요?” “너, 언제 봤다고 녹수야!! 녹수가 니 친구야?!!” “네?!! 그, 그치만… 도… 동갑이라고, 노… 녹수도 말 놓으라고…” “놓치마, 새꺄!! 이게 어디서 맞먹을라고!!!” 근래 잠잠하다 했더니, 귀향 이틀만에 그 지랄 같은 성깔이 도졌다. 옆에 누구 씨가 없어서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지만은 기가 팍 죽은 덩치한테서 헬멧을 넘겨받고 바이크에 올라탔다. 열라 좁네!! 씨발!! 뒷좌석과의 거리를 확인하며 성질을 냈다. 월미도에서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은 어차피 한 줄이다. 지만은 바이크를 몰고 입구에 대충 주차시킨 뒤에 발로 한 대 찼다. …오는데 걸리는 시간도 꽤 길었다. 그는 씩씩거리면서 일렬 전방을 쫙 노려봤다. 그다지 사람이 없는 데다, 키도 큰놈이라 찾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암갈색 머리의 꺽다리가 티켓 파는 곳 근처에 서서, 서해 바다 똥물을 똥폼 잡고 보고 있었다. 지만은 뒤로 가서 그의 등을 힘껏 발로 깠다. “집에 가라니까, 기어코 딴 새끼랑 여길 와?! 내 말이 우습냐, 엉?!!” “우앗?!! 뭐, …어라, 지만 형. 어떻게 알고 왔어요? 배는 이제 다 나았어요?” 앞으로 고꾸라지며 한 손은 난간에 걸치고, 놀라 커진 눈이 그를 올려다봤다. ─두근.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일어나!” 지만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하, 정말 놀랐어요. 빠지는 줄 알았다구요. 다리도 풀려버렸네.” 녹수가 다리를 앞으로 모으며 말했다. 지만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녹수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일으켰다. 어째 안기는 포즈. 녹수의 목가에 입술이 살짝 닿았다. “…형?” “이왕 온 거, 뭐 먹을래? 아니면 뭐 탈까?” 지만은 필사적으로 얼굴색을 유지하며, 말을 돌렸다. 젠장, 왜 그랬을까. “음… 저 아래에는 못 내려가요?” “어. 똥물이잖어.” “형은, 참. 좋기만 하구만. 탁 트여서 시원하고, 바다 바람도 좋고.” 싱글거리면서 녹수가 난간에 팔을 기댔다. 그리고 다시 바다를 바라봤다. 한여름의 월미도는 바닷가답지 않게 한산했다. 하긴, 방학이라지만 평일이고, 아니래도 누가 일부러 이리로 오겠는가. 땡볕의 정오, 아무리 바닷가라지만 그늘 장막도 없는데, 누가 좋다고… 문득, 바다 햇빛이 강하게 반사돼 눈이 부셨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암갈색 머리를 흩뜨렸다. 평소와 조금 다른 느낌. …그다지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좋은 것 같다… 지만은 녹수의 옆게 자리잡고 서서 나란히 바다를 감상했다. 생각보다 인천 서해 바다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아니, 푸르다. 동해 바다 푸른 물, 제주 바다 초록 물도 안 부럽다. 지금 이 순간만은, 인천 앞 바다가 세계에서 제일로 아름다웠다. 한참을 서 있자니, 역시 더웠다. 소금기 머금은 바닷바람의 상쾌함도 이제 끝발 떨어졌다. 가만히 있으려니 땀이 줄줄 흘렀다. 그래도 좋다잖냐. 슬쩍 녹수의 옆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의 턱 끝으로 땀이 내려 고였다. 흰색 라운드 티도 젖어 속살을 옅게 비췄다. 적갈색 봉우리 있는 부분이 아주 살짝 눈에 띄었다. 날씬한 허리선도 드러났다. 헛, 위험. 다시 얼굴, 입술. 그래 입술을 보자. 살짝 벌어져서 숨쉬는 입술, 언젠가 닿은 적도 있는… “저기 놀이동산도 있네. 응? 형 왜 그래요? 또 배 아파요?” “…조금. 괜찮아.” 녹수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뒤로하고 지만이 먼저 앞장섰다.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키스, 하고 싶었다. 지만과 녹수는 한동안 말없이 바다를 보면서 걸어다니며 거리 화가의 그림을 구경하거나, 횟집을 기웃거리거나 했다. 특별히 뭔가 하지 않아도 편안한 공기. 지만의 마음도 평정을 되찾았다. “탈까?” “괜찮을까요? 엄청나게 삐그덕거리는데?” “그게 묘미지. 언제라도 부서질 것 같잖아? 스릴완빵이다.” “흐흐흣. 좋습니다. 타요~.” 자신만만하게 월미도 명물 삐그덕 바이킹 110°에 도전한 키 183 상당의 두 남자는, 잠시 후 안색이 허옇게 질려 비틀비틀 육지에 착륙했다. “지… 지상이에요.” “어, 살았구나.” “드… 들렸어요.” “어, 엉덩이가 의자에서 떨어지길래 이게 웬일인가 싶었다.” “나사가 헐거워진 것 같았는데…” “어, 삐그덕을 넘어서 한 쪾은 아예 없더라.” 둘은 공포 어린 시선으로 바이킹 아래 펴진 안전망을 확인했다. 안전망은 개뿔! 스타킹보다도 얇고, 고래잡이용 그물보다도 헐거웠다. 저기 떨어졌다간, 땅바닥과 딥 키스, 굿바이 마이 라이프다! “내 평생 타 본 놀이기구 중 가장 자해도구에 가까웠다.” “푸하하하핫. 형 얼굴 하얘져서, 비명 지르는 거 봤어요.” “그러는 댁도 만만치 않았네.” 바이킹 후유증으로 주위 놀이기구들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근처 커피숍에 들려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에어컨 찬 기운을 쐬니 많이 나아졌다. “그러고 보니, 너 짐은 다 어쨌어?” “동암역인가… 거기 보관함에 넣어놨어요.” “아까는… 미안했다. 덥고 아프니까 짜증나서 그랬어.” “어, ……난, 형이… 혹시…” 말을 끊었다. 지만이 가슴이 덜컹해서 바라봤다. “그냥. 어제 밤에 안 좋은 모습 보여서… 그래서, 그거 떠올린 건가 싶었거든요. 아침에, 어렴풋이 밖에 기억 안 나지만… 호…모 취급도 받게 하고.” 피식. 지만은 녹수의 이마를 튕겼다. “안 그래도, 한 마디 하려고 했다. 야, 너 어디 가서 술 마시지 말아라. 거, 술 버릇 한번 고약하데. 속은 괜찮냐?” “술… 꽤 센 편인데. 대한이보다도 더 잘 마시거든요. 어제는 도대체 얼마나 마신건지 기억도 안 나요.” 얼굴을 붉혔다. 하긴 궤짝으로 퍼 마셨으니…… “노래 불렀는데, 그건 기억 나냐? 굉장히 웃겼다.” “기억 안 나는데…… 그랬어요? 헤헤. 나 음치인데.” “그건 지난번에 확인했지.” 녹수는 머리를 테이블에 박고 드러누웠다. 잠시간의 침묵. “……혹시.” 지만이 마시던 음료수를 내려놓으며 응시했다. “……이름…, 부르지 않았어요?” 녹수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오른팔에 얼굴을 묻고, 왼손의 손가락으로 물잔 주위를 뱅글뱅글 돌렸다. “몰라. 기억 안 나.” ‘…우리 예쁜 유진 씨가 어디로 갔을까, 우리 불쌍한 우진이는 어디로 갔을까…’ 그래. …왜 갔을까. …왜, 그를 남겨두고 갔을까. …왜, 그는 이대한을 택한 것일까. 물잔 주위를 돌리던 손이 멈췄다. “한 번만, 힘든 소리… 할 게요.” 물기 어린 목소리에, 약간의 떨림의 있었다. “형, 한 번만, 들어 주세요.” “……말해.” “유진 씨.” 지만의 가슴에 무거운 뭔가가 얹어졌다. “유진 씨…… 유진 씨…… 유진 씨… 유진 씨… 유진 씨… 유진 씨……” 끝없이 외워대는 단 하나의 이름. 그에게 있어서 가장 힘든 소리는… 저 이름이구나. 제일 부르고 싶은 이름. 제일 보고 싶은 이름. 제일…… 사그라지는 흐느낌 사이로, 고백은 끝났다. 지만은 손을 뻗어 맞은편에 앉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이제 알 것도 같았다. 자신이 녹수에게 끌리는 이유를. 무참히 밟혀 보았던, 참담하고 비참했던 기억을 가진 자들의 공통적인 교감. 황폐해진 마음의 구석, 그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 뿌리게 되는, 간섭과 관계. 관심과 인정을 받고 싶어서 행하는 몸부림과 기다림. …그 안에 찾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도, 미련하게 뒤돌아 설 줄 모르는… 미련 많은 바보들. 그들은 서로에게 닮은 꼴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역에 들려 짐을 찾아 다시 집으로 향했다. 지만은 등 뒤에 꼭 붙은 녹수의 체온에, 무더운 여름 날씨마저도 상쾌하게 느껴졌다. 가는 길이… 길었으면 좋겠다. “아유, 지만아. 왜 이제 와-. 핸드폰도 꺼 놓고! 녹수 학생은?” “같이 월미도 갔다 왔어. 바다 보고 싶다고 해서, …!” 현관에 못 보던 구두가 놓여 있었다. 여름용 고급 신사화. “다녀왔습니다. 어, 왜 모두 현관에 서 계세요?” “꽤 늦은 시간까지 놀러 다니는군. 재밌어?” 중저음이 기분 좋은 울림으로 울렸다. 널찍한 현관 너머의 거실로부터, 멋쟁이 양복 신사가 한 명 나타났다. “대한아! 어떻게 온 거야? 아직 일 남지 않았어?” “급한 것만 마무리 짓고, 뒷일은 맡기고 왔다.”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 녹수의 옆에서, 지만은 짐을 들고 거실로 들어섰다. 이대한의 의아한 시선이 느껴졌다. “어머, 그 짐은 뭐니? 짐까지 들고 갔다 온 거야?” “저 녀석이 집에 가고 싶다고 징징댔거든. 집은 어떻게 찾았냐?” 지만이 시큰둥하니 대답하자, 이대한의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핸드폰도 안 받길래, 집 번호로 전화해서 여쭤봤습니다.” 놀랠 ‘노’다! 이대한이 존댓말을!! 경악한 지만의 입이 떡 하니 벌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한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녹수를 주시했다. “지만 형 어머님께는 인사 드렸어? 설마 또 실례합니다, 한 마디 하고 입 딱 다문 건 아니지?” “호호호. 어쩜, 녹수 학생 족집게네. 이 분, 아니 이 학생이, 정말 우리 지만이보다 연하 맞니? 녹수도 그렇지만, 어쩜 이렇게 다들 의젓하고 번듯하니.” “앗, 진짜 그랬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생긴 거랑 달리, 이 녀석 사회화가 좀 덜 됐거든요. 헤헤헤.” “……” “아니야, 뭘. 이렇게 보기만 해도 멋진데. 어머, 어머. 내 정신 좀 봐. 기다려, 저녁들 차려줄게.” ‘어머!’를 연발하며 엄청 오버한 그녀는, 돌아서면서도 지난 3시간 동안 보고 또 봤던, 이대한의 얼굴을 또 한번 흐뭇하게 훔쳐봤다. “뭐 타고 왔냐?” “전철.” 이대한은 지만의 어머니가 사라지자마자 바로 반토막으로 돌아갔다. 그나저나 꼭 비즈니스 만찬에라도 참석하는 것 같은 꼬라지로 전철이라니. 엄청나게 낯두껍구나, 이대한. 지만의 그런 내심을 증명이라도 하듯, 대한은 곁에 선 녹수를 끌어당겨 키스하는 무모함까지 저질렀다. “나, 많이 보고 싶었구나?” 살짝 입술을 떼고 눈웃음치며, 녹수는 대한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지끈. “올라가자. 너희는 정말 시도 때도 없냐.” 가벼운 핀잔을 던지며 지만이 앞장섰다. 늘 보던 장면임에도 마음이 불편했다. 어련하시겠어. 왜 모를까. 옛사랑이 어쩌고 해도, 현재 그의 사랑이 누군지는 극명했다. 다만… 아직… 아직, 등에 온기가 남아 있는데… 그러는 것, 보기 싫다. 쓸어 올리는 손을, 잡아 내리고 싶다. 옆에 선 것이 자신이었으면 싶다. 지만의 방으로 들어서자, 대한은 타이와 드레스 셔츠의 단추 몇 개를 풀며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침대 위에 자리잡고 앉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한번 흘낏. 녹수는 쪼르르 달려가서 옆에 앉았다. “그런데 웬일로 전철 탔어? 보통 공항까지 갈 때도 택시 탔잖아.” “어제 하도 자랑하길래, 어떤가 싶어서.” “…녹수가 자랑했냐?” “음.” “촌닭들.” 지만은 째릿하는 대한의 시선을 삭 피해서 방의 선풍기를 돌렸다. 저녁인데도 방은 후끈했다. “…짐은, 무슨 일이지?” “아까 낮에 신경질이 좀 나서 쫓아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서울로 안 가고 월미도로 가서 박혀있더군.” “뭘, 잘못했는데?” “잘못한 거 없어. 그냥 내가 귀찮아서 그랬다.” “아니야, 대한아. 형이 아까 배탈났는데, 내가 자꾸 귀찮게 보챘거든. 그래서 그랬어. 에이~, 우리 잘생긴 이대한씨 얼굴이 왜 이리 찌그러질까.” 지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치솟는 대한의 눈썹에, 녹수가 재빨리 변명했다.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서 자신을 보게 하고 뺨을 어루만졌다. 대한은 묵묵히 녹수를 쳐다보다, 눈을 감았다. 키스하라는 신호. 녹수는 싱긋 웃으며, 뺨을 감쌌던 손을 그대로 뒤로 넘겨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대한의 팔의 녹수의 허리를 두르며 자신 쪽으로 바싹 당겼다. 점점 짙어지는 입맞춤, 점점 가까워지는 허리의 사이. “여기 우리 집이야. 내 방, 내 침대라고. 그만들 하시지?” 기분이 더러웠다. “아, 형 죄송해요. 매번…” “알면 닥쳐. 씨발! 호모새끼들 뒹구는 거 보기도, 이제는 역겹다 못해 지겹다!” 말이 거칠게 나간다. 이대한의 살기 따위 두렵지 않다. 흠칫하는 녀석의 얼굴 따위, 꼴도 보기 싫다. 마음이 이상하다. 방금 전까지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친근했던 녀석이… 왜 자꾸, 왜 이렇게 자꾸, 미워지는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 울화가 치미는 것인지 모르겠다. …몰랐던 것도 아닌데. 지만은 인상을 팍 쓰며 방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저녁시간 내내 흐르는 살벌한 공기에, 허지용씨와 장미영씨는 어쩔 줄 몰랐다. 어제 한 달만에 본 아들은 엄청나게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항상 촐랑거리는 양아치 어린애로만 보였는데, 깜짝 놀랄 만큼 의젓한 청년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같이 온 후배가 반듯하니, 그 영향이라도 받은 것일까. 전화위복이라고, 둘은 아들의 급격한 성장에 뿌듯해 하며 그를 청운에 보낸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은, 후회가 막심했다. 뭐가 문제인지 잔뜩 화가 난 아들은, 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박력이 넘쳤다. 식사 내내 입을 꾹 다물고, 밥만 꾸역꾸역 먹다, 가끔 그 앞에 앉은 입 딱 벌어지게 잘 생긴 청년을 사납게 노려봤다. 그 기색이 마치 제련된 칼날이라도 된 듯해서, 부모 눈으로 보기에도, 이건 뭐 꼭 진짜 조폭 같았다. 예전에는 기껏 날라리 영아치 정도였는데… 깡패 학교라더니, 정말 학교 탓인지도 모른다. 첫눈부터 호감이 갔던 녹수 학생은, 그런 지만의 눈치를 살피면서 기가 죽어 있었다. 옆에 앉은 잘생긴 청년은 지만보다도 더 음산하게 안색을 굳힌 채 싸늘하게 식사를 계속했다. “정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처음 인사말 외에는 묻는 말에 ‘예, 아니오’의 짧은 대답 정도가 다였던 잘생긴 총각의 입에서, 예의바른 인사가 떨어졌다. 목소리도 굵직하니 멋진 것이 진짜 영화배우보다도 더 멋있었다. 지만의 모친이 그를 처음에 보고 촬영 나온 영화배우로 착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허지용씨조차, 마주친 순간 어리둥절해하며 주위를 돌아봤었으니. “어머, 입에 맞았다니 다행이네. 더 들지 그래요?” 살풍경한 저녁 식탁이었지만, 잘생긴 총각의 멋진 공치사를 들으니 금새 마음이 들떴다. 40대 후반의 부인은, 무려 20년이나 차이가 나는 아들의 후배에게 경어를 쓸 정도로 그에게 혹했다. 아이돌 가수를 만난 소녀 팬의 심정이랄까. 그래서 그의 다음 말이 나왔을 때는 아연실색했다. “아니오. 저녁 막차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이만 일어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너도 다 먹었으면, 그만 인사드리고 일어나.” 아무 표정도 없이 그가 녹수에게 말했다. 식탁은 순식간에 혼란에 휩싸였다. “아, 아니. 왜 이렇게 갑자기… 며칠 묵다 간다고 하지 않았나?” 지만의 부친도 갑작스러운 말에 놀라서 물었다. “조금 사정이 생겼습니다. 실례 많았습니다.” 딱딱하게 끊어 말하고, 녹수를 바라봤다. 녹수는 눈가를 찌푸리고 있다가 곧 이어 힘없이 수저를 내려놓고, ‘잘 먹었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인사를 했다. 탁!! 수저를 내려놓으며 지만이 뿌드득 이를 갈았다. “뭐야! 왜 니 멋대로 지랄이야! 갈 거면 너 혼자나 가!!” 대한은 그를 서늘하게 흘겨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일어서.” “이․대․한!!!” “…형. 저도 그만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억지 써서 와 놓고…” 지만이 일어선 녹수를 세차게 째려봤다.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쥐었다. 어깨가 경직됐다. “저기…, 녹수 학생, 조금만 더 있다가 가. 지만이도 말리는데…” “그래, 자고 가게나. 시간도 늦었는데…”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안절부절 못하며 부부가 쌍으로 말렸다. “씨발, 그래 가!! 꺼져 버려, 새꺄!!! 등신 같은 새끼, 씨발 좆같은 병신 새끼!!” 지만이 발작적으로 외치며 식탁을 엎었다. 의자를 걷어차고, 식기를 부쉈다. 전보다도 더 개차반이다. 허지용씨는 할 말을 잃었고, 장미영씨는 얼굴이 노래졌다. 녹수도 넋 놓고 바라보는데, 이대한의 손이 쉭- 하고 뻗어 지만의 멱살을 낚아챘다. “눈독 들이지 마, 저건 내 꺼니까. 넌 따순 밥 잘 처먹고 잘 컸잖아? 나는 저 새끼밖에 먹을 게 없었어. 그러니 뺏기지도 않을 거고, 뺏기느니 부셔버린다. 이쪽 넘보지 말고 니 세계에서나 잘 살아. 난, 같은 실수 두 번은 안 한다.” 낮고 빠른 으르렁거림. 그러나 분명하게 읊조렸다. 지만은 넋이 빠진 듯이 거친 숨만을 고르며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대한! 형, 죄송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부모님께도 정말 죄송합니다. 빨리 그 손 안 놔, 이 바보자식!” 녹수가 나서서 대한의 팔을 떼어냈다. 미간을 좁힌 이대한이 잠시 후 멱살을 잡았던 손을 풀었다. 그 순간, 지만이 녹수의 허리를 낚아챘다. “!!!!” “헉!!!” “꺄악-!!!” 벌려진 입 사이로 거칠게 혀를 집어넣었다. 떨어지려는 머리를 단단히 붙들고 당황하는 녹수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키스했다. 쓰러진 탁자로 밀어붙여, 허리를 비볐다. 무섭게 치솟은 지만의 성기가 녹수의 것을 찔렀다. 이대한의 녹수의 가슴과 허리 사이로 팔을 넣어 끌어내면서 지만을 차낼 때까지… 아버지 허지용씨가 골프채를 들고 와서 후려칠 때까지… 그는 꿈에서처럼 녹수 위에서 허리를 흔들고, 박았다.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두들겨 맞고 뻗으면서도, 그의 눈은 광기를 띄고 녹수만을 바라봤다. 이대한의 팔 안에 갇힌 녹수는,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대한은 그를 꼭 끌어안은 채,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마에 입술을 마주 대고 있었다. 지만을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미친놈의 자식!!! 미친놈의 자식!!! 한심한 놈!!!! 미친 놈!!!!” 부친의 분노를 넘어선 격분이나, 모친의 경악을 넘어선 혼절이나, 까무룩히 희미해지는 정신 속에서도… 지만은 오직 슬픈 암갈색 눈동자만이 마음에 걸렸다. 그것만이, 후회됐다. 지만이 눈을 떴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방 침대에, 미라가 되어 누워있었다. 딸깍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어머니였다. 반나절만에 10년은 더 늙어 보이는 어머니의 파리한 안색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녹수는?” 상처받은 어머니의 마음을 빤히 보면서도, 지만의 입은 그의 안부를 물었다. …또, 울려버렸다. 어머니는 가져왔던 물과 죽이 들어있던 쟁반을 책상에 내려두고, 흐느끼며 문을 나섰다. 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지만의 머릿속은 고장 난 시계처럼 녹수의 슬픈 눈만을 반복해 그의 심장에 비췄으니까. 식음을 전폐했다. 아버지한테 맞고 뻗은 그 날부터, 지만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알고 싶다. 단지 그 뿐이다. 아니, 사실은 보고 싶다. 그리고… 보고 싶다. 억지로 꽂은 링겔도 뽑아버리는 지만에게 질린 부모는, 결국 단식농성 7일 만에 녹수를 호출했다. 다행히 이대한과 한상식, 유병우는 이미 해외로 떴기에, 녹수가 지만의 집으로 오는데 걸릴 것은 전혀 없었다. 일주일 만에 얼굴이 많이 상한 지만의 부모에게 인사하고, 녹수는 2층으로 올라갔다. “형, 얼굴 많이 상했네요.” “…여, 왔냐.”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가에 의자를 끌어놓고 앉았다. 잠시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던 그들은, 이어 조그만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꼴이 그게 뭐예요. 씻기는 한 겁니까?” “원래 나는 안 씻어도 자동 정화되는 몸이다.” “웩~ 형 절로 가요. 쉰내 나.” “뭐~야? 이게 또 기어오르네. 죽고 잡냐?” 어느새 바짝 붙어 앉아 서로를 타박하는, 간만의 인사였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또 일상적인 이야기를 꺼내고, 웃고, 떠들었다. 밖에서 조마조마해하며 기다리던 허지용 씨 부부가 허탈할 정도로, 그들은 덤덤했다. 문가를 맴돌던 부친과 모친이 어느 정도 안심하고 사라진 얼마 뒤… “미안하다.” 툭, 지만이 사과말을 던졌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어쩌면 그 때와 같은 녹수의 대답을 기다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냥 말없이, 파문 없이 받아주는 잔잔한 호수와 같은… 혹은 호탕한 웃음소리를… 그러나 이번에는, 다정했던 암갈색 눈이 흐려지며 커다란 물결이 일렁였다. 눈썹을 찌푸리고, 콧잔등을 찡그리고, 얼굴이 빨개지면서…… 툭, 눈물을 흘렸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쉽게 멈추질 않았다. 울음소리를 죽여 가며, 끅끅거리며, 지만의 심장을 조였다. “왜 우냐… 대한이가 죽기라도 했데?” “형은!! 말이라도!! 젠장!! 씨발!!!” “그래, 그래~. 알아들었어.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잖냐.” “알긴 뭘 알아요, 씨발!! 묵은 상처에 염장 질러놓고!!” “…이대한 죽었냐?” “죽기라도 바래요? 좆털 하나까지 씽씽해서, 가기 전날까지 박아대고 갔으니 걱정 마쇼!! 씹!!” “말이 참…, 거시기 하다. 장녹수.” “그러게 누가 성질 건드리랍디까?” “너도 성깔 있구나.” “…형보다 더 하진 않습니다.” 말을 끊고, 녹수는 바지를 뒤적여 라이터와 은색 시계를 꺼냈다. 입에 담배를 물리고 불을 붙인 뒤, 지만에게 시계를 던졌다. …전에 옥상에서 봤던 그것이다. 첫사랑이 남기고 간 추억의… “아직까지 갖고 있었냐? 그때 이것 때문에 죽을 뻔하지 않았나?” “버리려니까 아까워서. 그거 비싼 거거든요. …그러니까 가져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뱉었다. 지만은 가까이서는 처음 보는 그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달칵 소리가 나면서 두 쪽으로 갈라진다. 아니, 원래부터 두 쪽이다. 다시 합치니까 전에 들었던 멜로디가 흘렀다.’Yesterday once more‘… 이제는 지만도 잘 아는 곡, 이제는 지만도 좋아하는 노래. 한 달 동안, 녹수와 지만이 방과후면 슬쩍 들리곤 했던 노래방의 단골 엔딩송. 이제는 자신의 18번 곡이 되기도 하는, 녹수의 18번 곡. 지나간 어제의 기억들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처음 만나고, 소동 부리고, 싸우기도 하고, 놀기도 하고… 피식. 함께 했다. 그 기억의 페이지에는, 모두 녹수가 함께 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뭐냐. 이건 왜 주는 건데…” “이제 필요 없으니까.” “……왜?” “대한이가 있으니까.” ─욱씬. 심장이 조였다. 잔인하다, 너. 담배 연기가 후욱- 지만에게로 불었다. 벌린 입안으로 빨간 혀가 엿보였다. “…도발하냐? 내 아랫도리는 아직 건재하다.” “언제부터 호모였다고.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습니까? 진짜 호모 도발하지 마요. 전적도 있으니까.” 지만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대한이를, 깔았냐?” “헛소리! 그 녀석은 뿌리 끝까지 노말입니다. 내가 구멍 대니까 해주는 것뿐이지.” “…전의 애인이군.” “땡! 그 동생.” 지만의 놀란 눈을 즐거운 듯 바라보며 녹수가 다시 연기를 뱉었다. 그 올라간 입가와 눈은 웃는 형상이었지만, 안에 숨은 것은 뿌리 깊은 자조와 자괴감이었다. “내가, 오매불망 사랑해 마지않던 그 사람을 놓게 된 원인이…” 지만의 눈을 응시했다. “그 녀석이랑 잤기 때문입니다. 것도 무지 진…하게.” 담배를 치우고, 스윽 손을 뻗어 지만의 이불을 들쳤다. 냉정한 얼굴로 그의 하반신을 훑었다. “뭐… 하는 거야!” 지만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까 그가 들어온 순간부터 이미 발기한 그의 성기는, 트레이닝팬츠를 밀어 올려 산의 형상을 이루었다. 빨간 혀가 날름 입술을 핥았다. “나랑 자고 싶어요?” 감미로운 목소리로 그에게 다가왔다. “형이라면… 좋을지도.” 싱긋 눈을 접으며 입고 있던 반팔 남방의 단추를 끌렀다. 하나, 둘, 천천히 끌러 내리며, 침대 베개에 등을 기댄 지만의 위에 걸터앉았다. 얇은 면바지와 트레이닝팬츠는 지만의 페니스에 닿은 엉덩이의 말랑거리는 감촉을 그대로 전했다. 그는 골짜기 사이에 지만의 페니스를 자리 잡게 하고, 옷 입은 그대로 내리 눌렀다. 허리를 위아래로 서서히 움직이며 옷의 단추를 모두 끌고, 입에 손가락 두 개를 집어넣어 빨기 시작했다. 남은 한 손으로는 자신의 유두를 지분거리면서, 지만을 흘겨봤다. 꿈일까. 꿈을 꾸는 것일까. 지만은 실감이 나질 않았다. 몸은 이미 흥분할 대로 흥분해서 애액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한여름 더위 속의 몽환처럼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녹수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어떤 생각으로… 창부처럼 변모하여 자신을 구하는지, 그 밑바닥에 깔린 뜻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려웠다. 이미 손은 그의 허리를 붙들고, 몸 역시 그의 리듬을 따라서 흔들기 시작했지만… 그의 유두를 핥고 빨고 있지만… 실금 같은 그의 상처들을 샅샅이 훑고 있지만… 그의 마음을 알 수가 없어서, 지만은 두려웠다. 뿌리 끝부터 올라오는 쾌감 속에 섞인 희미한 거슬림. 마치 손톱사이에 낀 가시처럼, 뭔가가 껄끄러웠다. “학, 학, 이…대한은…? 윽, 헉… 괜찮은 거야?” 침대가 삐걱거릴 정도로 격하게 허리를 붙들고 위로 박았다. 트레이닝팬츠가 흠뻑 젖을 정도로, 몇 발이고 쐈다. 옷을 벗지는 않았어도, 쾌락은 충분했다. 갑갑한 팬츠를 벗어버리고 바로 들어가고 싶었다. 다만… 아직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어 망설이는 중이었다. 녹수의 눈이 가늘게 접히며 대답했다. “무슨 소리? 대한이가 무슨 상관입니까.” 지만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냥 색다른 운동이나 마찬가지예요, 지만 형. 상쾌하게 땀 흘리고, 마는.” 그는 쿡쿡거리며 경직된 지만의 몸에서 내려섰다. “형이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해 드릴게요. 이런 거, 바라는 거죠?” 지만의 심장이 돌처럼 굳어졌다. 머리가 차가워졌다. 순식간에 식어버린 마음과 열기. 그러나, 아직 하반신은 건재했다. 차가운 손이 그의 팬츠 속으로 들어와 끌어내리고, 물건을 세웠다. 그토록이나 바라던, 빨간색 혀가 자신의 페니스를 물었다. 찌릿한… 쾌감. 갖고 싶다. 갖고 싶다. 꿈에서도 갖고 싶었다. 작은 구멍 안에 빈틈없이 집어넣어 한 몸이 되고 싶었다. 지만은 갈색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 뺐다. “…그만 둬.” 꺾여 올라간 녹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지금까지의 가식적이었던 웃음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데드마스크. 저 표정은 정말 싫다. “왜요? 싫어요?” “너, 하기 싫잖아.” “상관없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싫어.” 데드마스크가 깨지며, 씁쓸하게 웃는다. “…형은, 정말 강하네요. …나는… 넘어갔는데……” 녹수는 지만의 옷을 추슬러주고 일어섰다. “정말 괜찮았는데. 몸 따위… 또… 잃어버리느니, 또 놓아버리느니…… 차라리… 내가 눈을 가리고, 귀를 닫는 게, 더 나았는데……”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슬펐다. 고개를 숙이고 뒤로 돌아섰다. 그를 남겨둔 채 사라지려 한다. 이대로가 끝…… “너를 울리는 짓은 안 한다! 나는!” 지만의 외침, 돌아선 어깨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네가 괴로워 할 짓도 안 해!” ‘그거 아냐? 너 울면… 내가 더 아프다. 심장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숨을 못 쉬어. 갑갑해서 돌아버리지.’ “너를 떠나게 될 짓도 안 할 거다!!” ‘나… 고직 일주일 동안, 못 보면 죽을 만큼 너 보고 싶었다. 첫사랑에 대한 너의 말, 너의 마음. 이제는 다 안다. 정말이지, 죽고 싶을 만큼 보고 싶더라.’ 지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미동도 없는 목수의 곁으로 다가가 섰다. 그리고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눈물 가득한 그의 얼굴을, 쓸어 주었다. “네 곁에 있어주마. 언제까지고. 네… 위성이 되어줄게. 장녹수라는 녹색별을 돌며 지켜봐 주는.” 암갈색 머리를 가슴으로 끌어안고, 맹세했다. “이제, 사랑은 하지 않으마.” 그게 사랑이다. ……바보에겐 비밀이지만. 품에 안은 것은, 다시 찾은 그의 닮은 꼴. 영혼의 쌍둥이. 그의 반쪽이었다. 마음은 첫사랑, 몸은 이대한에게 가 있다지만, 뭐… 어떤가. 세상에 태어나 죽도록 하나만 사랑하고 가는 것도 좋지 않은가. 혹은 죽도록 그리워만 하다가 가는 것도 좋지 않은가. 어차피 그가 떨어진 곳은 이상한 나라. 하늘도 땅도 다 미쳐 돌아가는 듯한 이 곳에서… 그만 홀로 제 정신일 필요는 없겠지. 문득, 녹수가 가슴에서 얼굴을 떼어내며 외쳤다. “오늘 일, 무덤까지 비밀입니다!!” 지만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고는 머리를 흐트러트려 주었다. “너 하는 거 봐서.” 은색 시계를 떨어뜨렸다. 반동강이 나는 것에 놀란 지만이 허겁지겁 들어 올렸다. 아, 이거 원래 두 개지. “뭐혀? 접시 나르라니께! 퍼뜩 몬 움직이남?!” “예~ 예. 갑니다, 가요.” “녹수 동상 좀 보고 배우는 게 워뗘? 만날 붙어 다니믄서도 워찌 이리 다른지 몰러.” 툴툴대며 주방으로 향하는 마녀를 쳇쳇거리며 째려보던 지만은, 시계를 털고 바지에 슥 문질렀다. 살펴보니 흠집나진 않았다. 가게 안은 지지고 볶는 고소하니 맛난 냄새로 가득했다. 속속, 탕수육이니 양장피니 하는 해장국과 별 관계없는 메뉴들이 테이블을 채웠다. 지만은 접시를 나르면서도 미심쩍은 기분에 음식들을 흘겨봤지만, 분명 방금 저 아줌마가 만든 것이 맞다. 젠장, 이런 솜씨가 있으면 평소의 그 형편없는 반찬들은 뭐냔 말이다! 지만이 분개하는 사이, 가게 안으로 거한들이 속속 나타났다. 언제나 멋진 놈들이지만, 오늘 따라 유난히 폼 난다. ‘무슨 호텔 나이트라도 가냐? 고작 이런 허름한 해장국집에 그렇게 쫙 빼 입고들 오고 싶냐고!!’ 여름용 세미 정장을 입은 이대한과 유병우가 먼저 들어서고, 나시 티에 세미 힙합 바지를 걸친 한상식이 따라 들어왔다. 해장국 입구와 맞먹는 길이의 유병우는, 들어 올 때 고개를 약간 숙여야 했다. 주방에서 내다보던 아줌마는 그들을 못마땅하단 듯이 흘겨보았지만, 별말 없이 고개를 흔들고 다시 요리에 전념했다. “녹수는?” “알바. 새끼가 이런 날도 알바야. 요즘 들어 아주 돈독이 올랐다니까.” 상식이 투덜댔다. “그거 봄에 쓴 카드 빚이 쌓여 그렇다는데?” “씨발, 새끼. 그러게 누가 그렇게 써 대래? 연애질에 눈 뒤집혀서 펑펑 쏟아 부을 때부터 알아봤다!!” 탁! 이대한이 컵을 탁자에 내려치면서, 유병우․한상식을 동시에 노려봤다. 눈치코치 없는 자식들. 그럴 줄 알았다. 그게 지금 녹수랑 사귀는 놈 앞에서 할 얘기냐? 센티멘탈한 남자의 감성을 건드리는 발언은 하들 말란 말이다! 지만도 세차게 째려봤다. 두 놈은 쭈뼛쭈뼛 하더니, 화제를 돌렸다. 상식이 바지 주머니를 뒤적여서 뭔가를 지만에게 툭 던졌다. “뭐야?” “프랑스에게 사온 거.” “…지금, 이 쭈글쭈글한 그림엽서 쪼가리를 여행 선물이랍시고 던져준 건 설마 아니겠지!!!” “씨발, 그거라도 챙겨준 게 어딘데 큰 소리냐!! 열라 좋은데서 사온 거다!!” “어, 상식아. 그거 비행장 여행코너에 꽂혀있던 거잖아.” “유병우, 이 씹새!! 너 누구 편이야?!!” “정의의 편.” 한심한 둘의 재롱에 마음이 풀렸는지, 이대한은 권태롭게 문 밖을 응시했다. 여행 2주만에 돌아온 그들은 놀러 다녀온 사람들답지 않게 어쩐지 지친 기색들이었는데, 예년보다 빨리 돌아왔다고 한다. 대한은 돌아온 지만을 보고도, 전과 다름없이 대했다. 특별히 경계하지도, 무시하지도 않는… 아마도 녹수가 뭔가 말을 해둔 것 같다. 지만의 부모도 녹수가 다녀간 뒤로 눈에 띄게 안정을 찾은 지만을 보고, 그에게 지만을 신신당부했다. 애초 원인이 녹수였던 것은 홀랑 까먹고 말이다. “지만 학상, 이거 좀 버리고 오제?” “예이, 예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쓰레기 봉다리를 들고 가게문을 나섰다. 대충 추스르고 일어서는데, 바이크 음이 들렸다. 보니까, 옆 집─이대한의 집 앞에 일제 바이크 한 대가 멈춰 섰다. 훤칠한 장신의 운전자는 한동안 바이크에서 내리지도 않고 그 집 대문만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바이크 뒤에 달린 것은 커다랗고 새빨간 장미 한 다발. 헬멧의 남자는 망설이고, 망설이면서 그것을 들고 내려섰다. 그리고 대문 앞에 꽃다발을 소중하게 놓았다. 꽃잎 하나라도 다칠 새라, 조심스럽게. 잠시 동안, 그는 미련 많은 누군가를 생각나게 할 만큼 수없이 장미를 되돌아보았다. 헬멧에 가려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곧 바이크 음을 울리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지만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 앞으로 다가갔다. 장미다발 안에는 흰색 쪽지 하나가 끼어져 있었다. [아직… 사랑하고 있습니다.] 해장국집을 돌아본 지만은, 쪽지와 해장국집을 번갈아 보다, 다시 쪽지를 곱게 접어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는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달라질 것은… 없어. 시계는 내게 있고… 녀석은, 선언했으니까.” 녹수가 지만을 찾아왔던 날, 그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 […헤헤. 이제는 정말 대한이만 사랑할래요.] 장녹수 18번째 생일, 오후 4시의 일이었다. ♤ 히든 트랙(Hidden Track) ♤ 그린그림 ------------------------------------------------------ 감은 눈 위로 손가락을 가져가 살짝 만져본다. 이어 고른 숨소리를 내는 입가에, 오르락 내리는 가슴에, 차례로 손가락을 옮겨본다. 살아있다. 옆에서 숨쉬고 있다. 그걸로, 됐다. ------------------------------------------------------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그를 버렸다. 초라한 집 하나와 늙은 감나무만이 그에게 남겨진 전부였다. 이미 혼자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집을 나갔을 때부터. 그러니 어떻든 상관없었다. 어떻든, 어떻게 되든. 다만 살아있다는 확신을 얻기 위해 닥치는 대로 부수고 부쉈다. 살 끝에 닿는 모든 것만이 살아있다는 ‘실감’을 주었다. 거기에만 집착했고, 그것에만 몰두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이불처럼 공기처럼 특별하지 않게… 그냥 그 자리에 서서 별다를 것 없는 소소한 모습으로, 일상의 각인으로, 할머니는 앙상한 고목처럼 늘 그의 곁에 있어주었다. 그것을 잃고 나서야 알았다. 그리고, 진정한 외톨이가 되었다. 가족이 사라진다는 의미. 그것은 돌아 갈 곳, 쉬고 기댈 곳,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곳─마음의 ‘집’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그것은, 이제 자신이 어디서 죽어 나자빠져도 기억해 줄 사람조차 없고, 죽고 나서도 세상에 존재했었는지조차 모를 그것은, 차라리 공포다. 그래서, 그는 열에 들뜬 눈으로 자신을 보며 ‘대한아’란 말 따위를 지껄이는 버러지 같은 녀석의 얼굴을 짓이겨 놓고 싶었다. 지긋지긋한 벌레. 끔찍스럽다. 어느새 다가와 질기도록 달라붙어 자신 안으로 야금야금 들어오는 놈. 죽도록 미운 새끼. 아직까지도 가족의 온기를 찾아 헤매는 어린애 같은 자신을 끊임없이 일깨우는 존재, 장녹수. 그─이대한은 녀석을 혐오했다. 그러니 시작이 언제였는지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 녀석 이전에 붙어 앉아 같이 궁상떨던 한상식과 유병우까지 모여 넷이 하나로 묶인 지가 언제부터인지. 대한의 머리 틈바구니 속에, 장녹수란 벌레 한 마리가 똬리 틀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녀석에 대한 혐오감과 증오가 시간의 반복 속에서 무뎌진 것이 언제부터인지.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 대체 언제부터였는지…… 중학교, 그래… 그 때 처음 녀석이 사라졌었다. 매일을 눈앞에서 끈덕지게 달라붙던 벌레 한 마리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대한은 잠시 의아했지만 이유야 아무래도 좋았다. 시원했다. 정말 홀가분했다. 이제야말로 마음의 가장 거추장스러웠던 부분을 떨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오랜만에 일찍 귀가했다. 벌레가 확실하게 떨어져 나간 것인가를 확인하고 싶었다. 늙은 집구석에는 삐걱대는 문소리만 울릴 뿐 고요한 집안에 녀석의 기색은 없었다. 안심하기는 이르다. 내일이라도 나타날지 모른다. 그는 마루에 앉아 대문 섞인 마당을 바라봤다. 구석에는 겨울이라 앙상한 감나무가 저무는 석양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저 아래에서 녀석이 우는 것을 본 적 있다. 할머니가 땅으로 돌아간 이후 버려져있던 마당 구석 감나무의 감을 입가에 가득 묻힌 채, 녀석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있었다. 미친놈. 기분 나쁜 새끼. 정말 흉했다. 히끅대는 소리도 거슬렸다. 눈물범벅의 흉한 얼굴은, 가슴이 울컥거릴 정도로 짜증났다. 그래서 어떻게든 저 울음을 멈춰야겠다고 생각했다. 녀석이 제일 좋아하는 자신의 몸뚱이를 주면 멈추지 않을까. 대한의 손의 서툴게 녀석을 끌어안았다. 그러나 멈추길 바랐던 울음은 이내 더 커지더니 그를 부둥켜안으면서부터는 아예 대성통곡이 돼버렸다. …잊고 싶은 찝찔한 기억. 그러나 이를 시작으로, 일상 전반에 깊숙이 뿌려졌던 벌레의 흔적들이 꼬리를 물고 일제히 떠올랐다. 녀석과 얽혀서 대한의 뜻대로 되는 경우란 거의 없었다. 항상 정신을 차리고 보면 녀석의 손바닥 안… 건방지고 교활한 벌레새끼. 그는 녀석이 눈앞에 나타나면 당장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부아가 치밀었다. 이미 해는 져서 사방이 암흑이었다. 어느새 코끝이 얼었다. 손마디도 곱았다. 하지만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대한은 일어서서 집 앞의 불을 키고 다시 그대로 겨울 외마루 자리에 앉아 꼬박 밤을 지새웠다. 하아, 입김을 내며 누군가가 나타날지도 모르는 대문을 바라봤다. 아침이 되어도, 점심이 지나도 열리지 않는 초록색 대문 앞을 지켰다. 겨울 입김 속의 대문은 나른하고 몽롱한, 구석 하나가 이지러진 꿈같았다. 대한은 독감에 걸렸다. 기침도 없어 전혀 태가 나지 않았지만, 고열과 지끈거리는 두통, 가슴을 내리누르는 압박감은 그의 감각기를 마비시켰다. 주위의 모든 것이 불투명한 장막에 한 꺼풀 씌운 느낌. 꿈인지 현실인지 조차 구분이 가지 않는 몽롱한 상태. 지독한 악몽을 꾸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불러도 모른 척 가던 그는 고개를 돌리고 살짝 웃었다. 돌아본 얼굴은 녀석이다. 놈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상냥한 척, 다 주는 척, 자신을 기만하고는 그냥 버리고 가버린다. 처음 아버지를 잃었을 때 느꼈던 그 악질적인 기운이 다시 대한을 덮쳤다. 떨쳐낼수록 달라붙는 불안감의 이름은 공포. 그의 실재(實在)를 알려주는 것은 오로지 피와 손에 묻는 살덩이들… 그러나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파괴에도 예전처럼 ‘감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초조했고, 점점 더 잔혹해 졌다. “저기… 이거.” 수줍게 내밀어진 편지와 유리병이 하얀 손 안에서 가늘게 떨었다. 갸름한 얼굴의 단정한 교복차림의 여자아이는 대한이 자주 가는 바의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법 예쁘장한 얼굴은 긴장으로 빨개졌다. “오우~ 용기 한 번 끝내주네. 근데 아가씨, 내가 더 낫지 않아? 얼굴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나는 젠틀맨이라고…” 한상식이 실없이 웃으며 끼어들어서 그녀의 앞을 막고, 대한의 주먹에 아직 뚝뚝 흐르는 핏물을 감췄다. 방금 전까지 이름 모를 양아치들을 짓이기던 주먹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여학생은 앞에 나선 한상식을 얼결로 피해서 대한의 곁에 다가섰다.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마주친 새까만 눈은 여전히 빨아들일 것처럼 아름다웠다. 3개월 전… 그가 그녀를 구해줬던 그때처럼. 이대한은, 그녀가 독서실에서 돌아오던 길에 깡패들에게 당할 뻔한 것을 구해준 그녀의 왕자님이었다. 멋지고 늠름한 모습에 아름다운 얼굴. 순삭간에 그에게 매료됐다. 처음에 대학생인 줄 알았던 그가 중학생이란 것을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 자신보다도 세 살이나 어리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계속 망설이고 지켜보면서 그의 주위에 여자가 많다는 것을 깨닫고, 사실은 그때 깡패들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질 안 좋은 아이란 것까지 알았을 때는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반해버렸다. 포기가 안됐다. 사는 세계가 틀리다는 것을 알았지만, 포기가 되질 않았다. 지독한 열병처럼 낫질 않았다. 머릿속이 온통 그의 생각뿐이었다. 자신이…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열병이 계속 될수록 드는 생각. 근본은 나쁜 아이가 아니니까. 아직 어리니까. 친한 누나로 계속 옆에 있으면서 돌봐 준다면… 그러다 보면 언젠가 그도 마음을 열지 않을까. 그럼 정말, 그와 함께 소설처럼 멋진 사랑을 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불량한 소년과 그를 개심 시키는 소녀… 그런 이야기 많지 않은가. 자신과 대한이 그런 경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공상은 희망에 힘을 실었다. 그녀는 세 달 동안 마음을 담아 곱게 접은 종이학 천 마리를 유리병에 넣고, 수십 번을 고쳐 쓴 편지를 준비했다. 평소보다 공들여서 몸 매무새를 가다듬는 그녀에게, 친구들은 대체 누구냐고, 어쩜 감쪽같이 속였다며 그녀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파이팅. 힘차게 고백해서 골을 쟁취하라! 는 엄명도 내려 주었다. 그런 그들이 같이 와 주겠다는 것을, 그녀는 마음이 약해질 까봐… 아니 사실은 그를 보여주기 싫어서, 두려움을 참으며 혼자 왔다. 그는 그녀만의 비밀스러운 왕자님이었으니까. ‘그래도 파이팅!’ 친구들의 응원을 생각하며 그녀는 대한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대한아, 나…!” 가느다란 어깨를 유병우의 커다란 손이 잡아챘다. 2미터 가량의 이 거인은 좀전의 한상식과 함께, 대한과 늘 같이 다니는 친구였다. 원래는 한 명 더 있었는데… 상당히 평범한 인상의, 대한과 가장 친한 듯한 친구.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싫어하는… 대한의 친구. 그녀는 그가 언제나 대한의 곁에 바짝 붙어서, 보기만 해도 가슴 떨리는 그의 얼굴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지작거리거나, 이마를 맞대거나, 머리카락을 쓸거나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번은 귓속말을 하는 걸 봤는데, 대한의 목에 팔을 깊숙이 두르고 귓가에 입술이 닿을 만큼 바짝 대고 얘기하는 폼이 마치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처럼 보일 정도였다. 남자들끼리… 징그럽게… “오늘은 그냥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유병우의 목소리가 그녀의 상념을 깼다. 유병우는 잡은 팔을 뒤로 당기며 그녀를 끌어내려고 했다. 당황한 그녀는 대한을 필사적으로 바라봤다. “…왜? 놔둬.” “대한아, 오늘은 그만해라.” 한상식이 얼굴색을 바꾸며 다시 앞을 가로막았다. 대한은 그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다, 소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한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이리 와.” 한상식과 유병우의 어깨가 눈에 띄게 경직됐다. 상식은 그녀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너, 죽고 싶지 않으면 그냥 가라.” 의아한 듯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새하얗게 질린 상식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는 인상을 일그러뜨린 채 입술을 깨물고, 아주 나직이 다시 한 번 경고했다. “제발, 그냥, 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그녀도 긴장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오늘은 어차피 학만 전하면 되는 걸… 그의 말을 무시하고 한발 앞으로 나섰다. 눈을 꼭 감고 바들거리는 손을 대한에게로 내밀었다. 잠시 후 사라진 손안의 무게. 됐다. 전했다. 환한 얼굴을 들었다. ─툭. 피투성이 학이 그녀의 얼굴에 맞고 추락했다. 피범벅의 손이 종이학을 하나 하나 들어서 그녀의 얼굴에 던졌다. 핏기가 가신 그녀의 얼굴을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며 툭툭 던졌다. 곧 싫증이 났는지, 남은 학들은 모조리 바닥에 쏟고 빈 병을 옆에 서 있던 차의 유리창에 힘껏 던졌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박살나는 유리와 유리. “[…그때 이후로, 나는 네가 나쁜 애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됐어. 대한아. 이렇게 불러도 되지? 너만 괜찮다면 네 옆에서 오래도록 함께 하고 싶은데… 너는 참 외로워 보이거든. 그래서 내가 항상 너의 옆에 있어 주고 싶단다.]” 아무런 고저 없이 편지를 낭독했다. 비웃는 입 끝에 담배를 물리고 불을 붙이더니, 라이터를 그대로 편지에 갔다 댔다. 화르륵 불탔다가 사그라든 불조각은 소리 없이 울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 던져졌다. “꺅!!” 비명을 지르며 유병우의 뒤로 피하자, 대한은 소리 내어 웃었다. “왜 그리로 가? 내 옆에 있고 싶다며. 그 새낀 내가 아니잖아.” “그만해. 이제 됐잖… ─컥!” 대한의 손이 상식의 멱살을 눌렀다. “한 번만 더 말 자르면 너부터 조지겠어.” 음산한 경고를 남기고, 그는 유병우 쪽에 바싹 붙어서 떨고 있는 그녀를 흘낏 봤다. “넘겨.” 유병우는 움칠하더니 그녀를 뒤로 확 밀었다. “빨리 도망 가!” 그녀는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바보, 빨리 가라니까!! 윽!!” 앞을 막아주던 거대한 벽이 사라졌다. 이어, 새까만 머리의 조각처럼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이 내려왔다. 검붉게 굳었던 주먹의 상처는 새로 터진 피로 다시 붉은 색을 띠었다. 그녀의 하얀 얼굴에, 그 새빨간 손바닥은 천천히 다가왔다. 대한이 묵직한 두통 속에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낯선 차고 안이었다. 분명, 전날 지독한 두통을 못 견디고 생전 처음으로 <약>을 했다. 약이라 봤자 싸구려라, 그냥 술에 취한 것 같을 뿐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그러다 점차 머리가 무거워지면서 잠이 들고, 지독한 꿈을 꾸고… 문득 주먹이 헤져있는 것이 보였다. 여전히 아무런 통증도 없었다. 무덤덤하게 손을 터는데 한상식이 앞에 앉아 있었다. 밤새도록 그 앞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듯,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대한을 노려봤다. “죽었어.” “……?” “씨발새끼야!! 죽었다고!! 자살했어!!! 차도로 뛰어들어서 그대로 깔렸다고!!! 어쩔 거야!! 어?!! 이제 어쩔 거냐구!!! 씹새끼!! 씨발, 개, 좆같은 새끼!!!!” 히스테릭하게 외치는 상식의 목소리에 지난 꿈이 떠올랐다. 녀석이 왔다. 사흘 만에 나타난 녀석은 자신에게 뭔가 꾸러미를 내밀었다. 유리병에 담긴 종이학과 편지. 마치 그걸 만드느라 그동안 나타나지 않았다는 듯이… 녀석은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이 녀석을 깡패들에게서 구해줬던, 그가 잊고 있던 옛날이야기를 꺼내며 그것들을 내밀었다. 한상식이 농을 치며 녀석의 앞을 가로막자, 녀석은 상식을 살짝 피해 대한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를 정신없이 바라봤다. 대한은 난감했다. 늘 엉뚱한 녀석이지만, 이런 적은 없었다. 갑자기 사라졌다 나타나선 다짜고짜 선물이라니. 그것도 마치 풋사랑 고백하는 여고생이라도 된 듯이… 어이없고, 어처구니없었다. 분명 또 장난일 거야. 밟아줘야지 생각하면서도… 묘한 흥분이 일었다. 언제나 보던 눈길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평소의 녀석도 가끔 그를 홀린 듯이 바라보곤 했지만, 지금과는 느낌이 틀렸다. 뭔가 더, 미음…이 섞인… 두근. 가슴이 격하게 뛰었다. 핏줄기가 고동쳤다. 진짜일지도 모른다. “대한아, 나…!” “오늘은 그냥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유병우가 녀석의 팔을 붙들고 뒤로 끌었다. “…왜? 놔둬.” 불쾌했다. 녀석이 나에게 뭔가 말을 하려고 하잖아. 왜 막는 거지? “대한아, 오늘은 그만해라.” 왜? 녀석이 말을 하려고 하잖아. 나에게 말을 하려고… 드디어 ‘그 말’을 하려고! 이번엔 진짜로! 그렇지, 장녹수! 흥분으로 들떴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머뭇거리며 당황한 녀석의 얼굴이 어리둥절 바라본다. 이상하다는… 듯이…… 놀린… 건가. 언제나의 장난… 언제나… 언제나처럼. 제 맘대로 들었다 놓고는 모르는 척 해버린다. 자신을 바보로 만들고 무심히 뒤돌아서 버린다. 대한의 입가가 올라갔다. ‘그렇게 날 가지고 노는 게 재밌어? 그게 재밌어? 씨발, 벌레새끼. 그럼… 그럼, 진짜 거하게 놀아주겠어!’ 기억은 그게 끝이었다. “죽은 게 뭐? 그게 어쨌다는 거야.” 대한이 억눌린 입을 떼자, 상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넌, 넌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진짜냐? 진짜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상관없다. 귀찮게 앵앵대는 파리새끼가 사라졌으니, 세상도 조용해져서 좋을 것이다. 대한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피 터진 주먹을 단단하게 말아 쥐었다. ‘그게 어쨌다는 거야. 죽어서 뭐! 그딴 새끼는 죽어도 싸! 벌레새끼. 사람 데리고 장난 노는 그딴 새끼. 사라진 게 어때서! 죽어버린 게 어때서!’ 가늘게 떠는 턱이나 주먹을 무시하며, 그는 부인했다. “…병우가 대신 뒤처리했어.” 피곤 가득한 목소리로 일어선 한상식이 문을 닫으며 말을 남겼다. “그 여학생, 누구한테도 너라는 이야기는 안 했나 보더라. 다행이지?” 여학생? 대한이 돌아보는 순간 문은 닫혔다. 쾅 소리와 함께 머릿속에 낯선 장면이 플래시처럼 터졌다. 새빨간 핏덩이, 엉망인 얼굴. 웃으며 밟았다. 옷을 찢어서 녀석들에게 던져줬다. ㅍ여소에 이 바닥에서도 쓰레기 중의 쓰레기로 소문난, 벌레가 끔찎하게 싫어하던 놈들이었다. 낄낄대는 녀석들을 보며 겁에 질린 벌레는, 자신에게 울음을 터트리며 구걸하고 애원했다. “제발…! 제발!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이제, 이제 곁에 얼씬도 안 할게요…!” 입이 뭉개져 발음도 불분명한 목소리로 녀석은…… 아니…… 여…자? 새까맣고 어두운 기운이 몰려와 그를 덮쳤다. 철판을 긁어내리는 듯한 거슬리는 소음이 머릿속에 일었다. 붉은 손에 묻은 피는, 녀석의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 아버지. 나… 대한은 미친 듯이 자신의 손을 닦았다. 닦고, 닦고, 아무리 닦아도… 이름도 모르는 여자의 지워지지 않는 피는 그에게 도살자의 낙인을 찍었다. 아비를 이은 인간백정. 살인자. …떨어져버린 지옥. 대한은 지난 가을 할머니 장례식 이후 가출했을 때 만난 부자녀석들─그들의 사교모임인 <클럽>에 찾아갔다. 굴욕적이었지만 당장 그를 도와 줄 수 있는 것은 이들뿐이었다. 한국 정․재계의 실권을 쥔 윗대의 지원 하에 만들어진 그들의 후계자 모임 <클럽>은, 겉으로 드러난 사교활동 외에도 실재 여러 가지의 실무를 훈련받거나 가벼운 ‘뒷공작’을 행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직속기관인 ‘조직’은 클럽이 전국 각지에서 뽑아온 소수정예 주먹들로, 장차 자신들의 후방을 지원해줄 도구들로 키우는 미성년자 집단이었다. 실제 미성년인 점을 이용해서, 법망을 피한 온갖 더러운 짓들을 행하는 충실한 쥐새끼들. 클럽의 황태자들은 제 발로 떨어진 먹이감을 탐욕스럽게 바라보며, 이리저리 그의 가치를 측정했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실력과 가능성, 게다가 외모… 대한은 어디로 봐도 넘칠 만큼 탐스럽고 매력적인 먹이였다. “환영한다, 우리의 개가 된 것을.” 대한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언젠가 너희를 먹어주마. 세상과 함께 먹어주겠어. 시리게 다짐하며, 나락(那落) 속의 악마와 계약했다. 클럽이 나서면서 일은 완벽하게 마무리됐다. 경찰 조사도 뭐도 없었다. 수험 스트레스를 못이긴 자살자로, 대한을 사랑하던 소녀는 더럽혀지고 부서진 채 반나절만에 세상에서 지워졌다. 그녀가 왕자라 칭했던 이대한, 그는 그저 15살의 이기적이고 잔혹한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충격은 잠시, 죄악감도 잠깐이었다. 뭐든지 처음이 어려운 법. 이미 한번 찎힌 백정의 낙인은 손쉽게 남은 양심을 갉아먹었고, 굴욕감과 죄악감이 뭉뚱그려져 한번 바닥으로 치달은 대한의 이성은 그의 손을 거듭 피로 물들였다. 그를 둘러싼 갑갑한 장막은 더욱 두터워 졌고, 머릿속의 지옥도(地獄道)는 계속 깊고 커져만 갔다. 멈출 수 없는 폭주열차의 길처럼… 점점, 점점, 점점, 점점…! 한상식․유병우는 그런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곁을 떠나진 않았다. …두려워서 떠나지 못했다. “녹수…” 멍멍한 귓속에 들린 생생한 한 마디가 대한의 시선을 끌었다. 침을 한 번 삼키고 병우가 말을 이었다. “녹수랑 내일 여행가기로 했는데, 안 갈래?” 주말이었다. 녀석이 사라진지 7일째 되는 아침. 겨우… 7일. “오랜만에 바람 한 번 쐬는 게 좋지 않겠냐?” 대한이 말없이 바라만 보자, 병우와 상식이 녀석과 가기로 했다는 정동진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녀석에게도, 같은 말을 들었던 것 같다. 그때 자신은 뭐라고 했더라. “가.” 한 마리도 일축하고 대한은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아 잠을 설쳤다. 다음날 늦은 저녁, 그는 데리러 온 병우와 상식을 무표정하게 쳐다봤다. 왜, 한자리 비는 걸까. “녹수는 역에서 만나기로 했어. 어젯밤에 전화도 왔는데…” 병우가 어색해하며 말을 꺼냈다. 상식의 얼굴은 흙빛이었다. “그 새끼, 와. 온다고 했어.” 당황한 어조로 눈을 내리깔고 상식이 중얼거렸다. 대한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청량리 역 대합실에 앉아 모자란 잠에 잠깐 눈을 붙이던 대한은 인기척을 느꼈다. 시야에 들어온 유병우가 머뭇거리며 기다리던 말을 꺼냈다. “녹수 왔어. 지금 밖에서 기다려.” 밤늦은 공기 속에 시끄러운 대합실의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익숙한 실루엣. 녀석이다. 화악─ 순간 막혔던 공기가 뻥 뚫렸다. 답답했던 장막이 확 걷혔다. 대한은 의아한 듯 눈을 깜박였다. 감각이 돌아왔다. 생생하고 차가운 밤공기. 갑작스레 돌아온 감각에 대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느낌을 음미했다. 오는 내내 결심했던, 녀석을 없애자는 생각은 사라진 장막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말장난을 치며 한상식과 어울리고 있는 녀석은 사라지기 전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짙은 갈색 머리, 아직 젖살이 남아있는 뺨, 싱글거리는 눈웃음까지. 그러나 낯설다. 그가 일주일 동안 살인자의 손을 가지게 되었듯이, 녀석 역시 어둠을 품고 나타났다. 싸한 냄새. 짙은 담배향. 익숙지 않은 녀석의 체취. “문단속은 하고 나온 거야? 밥은, 먹었어? 왜 이렇게 얼굴이 상했냐?” 다정한 체 잔소리를 하면서도 당연한 순으로 건드리던 그의 얼굴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쓰다듬거나 지긋이 바리보거나 하던 일체의 행동도 사라졌다. 기차에 타 자리를 잡을 때도 언제나 그의 옆자리를 꿰차던 녀석답지 않았다. 그를 제치고 병우를 끌어 안쪽으로 들어가 앉아버렸다. 대한은 녀석을 빤히 쳐다봤다. “뭐 하냐, 앉아.” 상식이 서둘러서 대한을 끌어 앉히고 부산하게 주의를 돌렸다. 녀석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웃는다. 대한은 의자에 목을 가로누이며 눈을 감았다. 다시 눈뜨고 나면 원래대로 바뀔 지도 모른다. 아니, 바뀌어야 한다. 차가운 손이 다가와 그의 손에 보드랍고 말랑한 무엇인가를 쥐어주었다. 오랜만에 닿는 차가운 손. 처음엔 뱀처럼 소름끼치던 그 손이 스치듯이 떠나자 허전했다. 눈을 뜨고 손안의 여운을 바라봤다. 새하얀 삶은 계란 한 개. 녀석은 예전처럼 웃고 있다. 전에도 그랬지. 약간 쑥스러운 듯이 웃으며, 이 여행을 같이 가자고 했었다. 녀석이 그와 함께 뭔가를 하자고 한 것은 그게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걸 그는 파티 핑계를 대며 귀찮아했다. 어쩌면… 그것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작은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왜 왔냐고 안 물어보냐?” 조금 무뚝뚝한 소리가 나왔다. 녀석의 얼굴이 흐려지더니 곧 어정쩡하게 거슬리는 웃음을 짓고 슬며시 그를 외면했다. 마주친 창가의 그림자에도 눈을 돌렸다.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대한의 심장 언저리가 까맣게 물들었다. 바닷가에 도착하고 얼마 뒤, 병우와 상식이 그들만을 남겨둔 채 어디론가 사라졌다. 둘은 나란히 서서 새벽 바다를 응시했다. 언제나 뭔가를 조잘거리던 녀석은 입을 꼭 다물고, 검은 바다만을 정신없이 바라봤다. “담배, 언제부터 폈냐?” 대한은 계속 거슬리던 것을 물었다. 녀석은 양아치 주제에 항상 입 바른 소리만 골라하며 담배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일주일 전까지는. “지난주부터.” 딱 잘라 대답하고, 쳐다도 안 본다. 순간 힘이 들어 간 주먹을 꾹 움켜줬다. “무슨 일 있냐?” “아니?” “근데, 왜 그래?” “그냥 사춘기라서 그래.” “……그래?” “그래.” 건성건선 하는 대답조차 귀찮다는 듯이 아예 고개를 피한다. 대한은 거칠게 녀석의 어깨를 잡고 돌아 세웠다. “너, 왜 갑자기 날 무시하냐?” “무시하다니…? 아냐.” 어색하게 웃으며 말꼬리를 흐린다. 아니야? 니 새끼가 날 무시한 게 벌써 며칠 짼데? 아까부터 말 씹으며 눈 돌린 게 벌써 몇 번짼데? “웃어? 아니야? 하! 아니야?” “……그만…두자.” “뭘 그만 둬, 이 씹새끼야! 좆도 아닌게 계속 날 무시하는데, 뭘 그만둬?!!”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니 새끼가 떠나있는 동안,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나 아냐고!!! 관심도 없어?! 응?! 이젠 아예 관심도 없는 거야?! “아니야, 나 너 무시한 적 없어. 그냥… 그냥, 잠깐… 머리를 식히려던 것 뿐이야. 알잖아, 내가 어떻게 널 무시하냐?” “무슨 머리를, 왜 식히는데?” 어째서 사라진 거지? 어째서 앞에 나타나지 않았지? 왜 하루아침에 마음이 바뀐 거냐? “그냥… 나라고 언제까지 네 뒤만 쫓아다닐 수 없잖아. 앞으로 할 일 같은 것도 생각하고…” 언제…까지…… 없어? 떨어질 생각… 벌레 주제에. 내게 기생하는 기생충 주제에. 나를 버리고, 떨어질 생각이라고? 대한의 눈앞이 시뻘개지며 다시 머릿속이 몽롱해졌다. 숨을 골랐다. “그러니까, 왜, 갑자기, 그런걸 생각하냐고.” 슬쩍 시선을 피한다. 난처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고 그를 외면한다. 그래. 그렇게 고개를 떨궜지. 아버지도, 할머니도. 그리고 떠났다. “너도…냐?” 머리는 이미 포화상태. 주위가 일그러지면서 꿈에 먹혀간다. 악몽의 재림. 갈 생각이란 말이지… 벌레 주제에, 나를 버리고 갈 생각이란 말이지… 새까만 어둠이 그의 심장을 뒤덮었다. “너도, 그 인간처럼, 날 버리고 갈 거야?” 어깨에 걸친 손가락이 삐거덕거리며 피어졌다 오므렸다. “아냐!! 대한아, 그런 게 아냐!!” 새벽 겨울바다로 그가 녀석을 밀어버릴 찰나, “너… 널 버리다니, 아니야. 내가 어떻게 널 버려.” 잠식당한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목소리. “…내 세계의 중심이 너인데…” 점령당한 영토 가운데 빛이 떨어졌다. 가식적인 말 한마디에… 빛이 돌아온다. 거짓말임이 분명함에도, 언제나와 같은 빈말임이 분명함에도. 이미 몇 번을 속았는데도. 녀석이 말하면 몇 번이고 정말 같아서… 믿고… 싶어서…… 씁쓸하게 울 것 같은 눈앞의 얼굴을 바라봤다. 벌레 주제에, 그런 얼굴 하지 마라. 흉하단 말이다. 순식간에 빠져나간 어둠이 다정한 안식으로 안면을 바꾸어 대한의 손안에 머물렀다. 자신의 검게 물든 손… 새겨진 핏자국도 정화될 수 있을까… ‘그럴 리 없지.’ 이미 떨어진 지옥이다. 이미 넘어간 계약이다. 녀석의 피로 시작된. …녀석이 아니었지만. 아는가, 장녹수. 이제는 물러설 수도 없다는 것을. 너는 그 여자으 피를 먹고 살아난 거다.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살아난 거야. 네가 먼저 시작한 일이다. 너도 공범이야. 그러니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젠 정말 죽을 때까지 넌 내게 묶여 함께 이 지옥을 살아내야 해.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녀석은 한참을 말없이 서 있다가 몸을 비틀고 대한의 손을 떼었다. 몸 속의 피가 싸늘해지며 아려왔다. “아잉~ 대한아. 내가 없는 게 그렇게 싫었어~? 알았어, 녹수가 이제 다~ 시는 대한이한테서 안 떨어질게~!!!” …… 잊었다. 이런 녀석이었다. 설설 기는 척하면서 자신을 가지고 노는, 간 큰 벌레새끼!!! 대한은 머리끝까지 분노했다. 그래도, 그 한편 구석엔 안도의 기쁨이 있었다. 빛이… 있었다. 함께 지옥을 살자, 장녹수. “……워.” 입안에 삼킨 것은 차마 뱉지 못하는 말. 벌레 따위에게 그가 뱉을 수는 없는 말. 돌아와 줘서… 살아있어 줘서… 옆에 있어 줘서… “응?” “못 들었으면, 됐어.” 두 번은 못하지. 대한은 뒤돌아서, 어느새 나타난 병우와 상식에게로 걸어가며 미소지었다. “야, 장녹수. 너 기집애 하나 소개시켜 줄까?” 봄기운 특유의 나른함에 하품을 연발하던 한상식이 실없는 소리를 하며 책상 위의 장녹수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상식아, 우리 수험생이다.” “개뿔! 고등학교 입시도 입시냐? 하긴 대가리가 먹통이니 걱정될 만도 하겠지. 푸하하하핫!” “너, 바보냐? 학기말 바닥 깐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 똘빡아. 오죽하면 담임이 통지문까지 돌렸겠냐?’한상식 시험만 봐다오.’ 시험 날도 까먹고 안 나온 새끼가 누구더러 먹통이래.” 얼굴 벌개진 한상식이 벌떡 일어나 녹수의 멱살을 잡아채고 주먹으로 갈겼다. 그대로 나가 떨어졌던 장녹수는 킬킬대며 일어섰다. “말로 안되니까 주먹이냐? 무식한 새끼.” “씨발, 너 오늘 죽었어!!!!” 달려드는 상식을 장녹수는 책상을 차서 저지시킨 뒤에, 보고 있던 책을 집어던졌다. 정통 안면 강타! “쌤통이다, 새꺄! 몰상식한 한사장! 움하하하하하!” “이게 진짜!!!” “무식한 한사장~ 몰상식한 한사장~ 전교 꼴등 한사장~“ 약 올리며 이리저리 방과후의 빈 교실을 덜컹덜컹 도망 다니는 장녹수를 약 오를 대로 오른 한상식이 광분하며 쫓아다녔다. “우와아아~ 대한아, 나 좀 살려주라. 한사장이 잡아먹으려고 한다~“ 녹수는 창가 옆자리에 걸터 앉아있던 대한에게로 달려와 그의 뒤에 숨었다. 상식은 씩씩거리며 쫓아오다가 스톱. “비겁한 새끼!! 씨발, 진짜 얍삽한 새끼!!” “메롱이다, 새꺄!” 호쾌하게 웃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문득 대한과 마주친 눈이 싱긋 접혔다. 다정하게 검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 뺨을 한번 쓰다듬은 뒤 상식에게로 갔다. 상식은 그런 녹수를 징글맞다는 듯이 쳐다봤다. “녹수야. 너 차례.” 유병우가 교실 안으로 들어서며 호명했다. “어, 그래. 잘 갔다 왔어?” “응. 졸업만 하래.” “그럼 나도 갔다올게. 한사장, 나 보고 싶다고 울지 마라.” “씹새, 빨리 꺼져!” 장녹수가 사라지자 교실이 고요해졌다. 대한은 무심히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병우와 상식은 둘이 속닥거리다가 꾸벅 졸기 시작했다. 3학년 올라와서 처음 받는 면담이었다. 대한은 나머지 셋과 반이 갈려서 다른 반이었다. 어쩐지 그만 의도적으로 떼어낸 듯 했지만, 어차피 쉬는 시간이나 아침저녁으로 얼굴들을 보니까 반이 달라도 달라질 건 없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지? 벌써 30분 째다.” “내가 가서 보고 올게.” 병우가 일어섰다. 상식도 따라 일어서려는데, 대한의 몸이 움직였다. “대한이 너도 가게?” “가방 들고 와. 바로 갈 거니까.” 약간 빠른 템포로 걸음을 걸으며 대한은 교무실로 향했다. 가까이 갈수록 문밖까지 새어나오는 둔탁한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이거, 이거. 말 안 듣지, 어?!! 일어나, 썅!” 흥분해서 외치는 말끝에 다시 굵은 격타음이 울렸다. “정신상태가 글러먹었어!! 중학생이 담배가 말이 되냐?! 이게 다 저 이대한이 새끼들하고 어울려 그런 거 아냐!! 싸가지 없게 말대꾸나 꼬박꼬박하고 말야!!” 다시 퍽! “새끼야,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지는 거 몰라?! 까마귀 노는데 백로야 가지 말라도 모르지?! 머리도 나쁜 게 공부나 할 것이지…, 어디서 대가리에 똥만 차서는!!”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교무실엔 엎드려 뻗친 채 뻗어있는 장녹수와 부임한지 얼마 안된 수학선생 둘 만이 있었다. 녹수의 이마는 땀으로 머리카락이 엉켜 붙었고, 부어터진 뺨과 찢어진 입가엔 피딱지가 내려앉았다. 엉덩이 위의 교복은 피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말 들어라─. 내가 딴 새끼들은 모르겠고, 네놈 정신교육 하난 일년 안에 제대로 해 보일 테니까. 진짜, 사람 하나 제대로 만들어서 졸업시켜 주마.” 30대 중반의 수학선생은 아까보다 많이 누그러진 기세로 말한 뒤 방금 회수한 은색 지포라이터로 입에 문 담뱃불을 붙였다. “새끼가 말야, 중학생 주제에 어디서 이런 건 나가지고… 너 이거 훔친 거지?” “아닙니다.” 퍽!! 옆구리를 걷어찼다. 고꾸라졌던 녹수는 바로 몸을 일으켜 다시 엎드렸다. “바른대로 안 대? 어디서 훔쳤어!!” “훔친 거 아닙니다. 모은 돈으로 산 거예요.” “어~어. 모은 돈? 삥 뜯어서 모은 돈?” 걷어차면 일어나고 걷어차면 일어나는 반복 속에, 방금 전까지 엉덩이를 두들기던 손목만한 죽도가 간간히 다시 끼었다. 새로 부임하자마자 맡은 담임직. 대게 초임에게는 피하는 임무지만, 전에 있던 학교에서도 선도부 고문이었던 그의 경력과 학창시절 전국체전 준우승의 검도실력이 그를 학교 최고의 문제아 3인방이 모인 반의 담임으로 인도했다. 이대한이란 놈은 따로 떼어두고 나머지 셋이라도 어떻게 해보라는 학교측의 요청이었다. 그러나 처음엔 호쾌하게 장담하고 자신만만하던 그도, 막상 대하고 보니 만만한 것은 눈앞의 장녹수밖에 없었다. 유병우는 중학생이라곤 믿어지지 않는 거인이었고, 한상식은 집안이 하도 빵빵해서 건드렸다간 뒷일이 걱정됐다. 반면에 장녹수는 어쩌다 거기 껴서 어울리는 평범한 양아치였다. 자연스럽게 목표는 장녹수로 좁혀졌다. 덜컹. 갑작스런 문소리에 뒤돌아보던 수학선생은 흠칫했다. 그 곳에는 훤칠하고 잘생긴 청년 하나가 중학생 교복을 입고 무표정하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직 학기초라 말로만 듣던 이대한임에 틀림없었다. 실제로 본 이대한은 소문 이상이었다. 하도 이대한, 이대한해서 어떤가 했더니, 선도부로 갈고 닦은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도 절대 중학생으로는 보이지 안았다. 게다가… 매끈한 외모도 외모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여간이 아니다. 딱히 인상을 쓰는 것도 아닌데, 상대를 바싹 긴장시키는… ‘그래봤자 중학생이지.’ 순간이라도 중학생에게 위축되었다는 사실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넌 뭐야? 교무실이 너희 집 안방이야? 무턱대고 열어제치게! 그리고 선생님을 봤으면 인사를 해야지!” 기선제압으로 그가 일갈했다. 그러나 이대한은 대꾸도 없이 교무실을 눈으로 훑었다. “막아.” 이대한의 입이 떨이지자, 그의 등뒤로 교무실 문이 닫혔다. “안 돼!” 그때까지도 가만히 엎드려 있던 장녹수가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선생님,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오늘은 그냥 가면 안될까요?” 빠른 어조로 말을 잇는 장녹수의 뒤로 이대한이 다가왔다. 그는 녹수의 뒷덜미를 잡더니, 문 쪽으로 밀었다. “넌, 나가.” 수학선생은 당황했다. ‘지금 설마… 이 녀석… 여기 교무실에서, 설마 선생인 나를…?’ 설마… 하면서도 그는 긴장했다. 교사생활 10년째에 문제아들만 숱하게 다뤄봤어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선생님, 앞으로 정말 조심하겠습니다. 저희 이만 가볼게요. 죄송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장녹수는 그에게 서둘러 인사하며 이대한의 팔을 잡고 끌었다. “놔.” “닥쳐! 지금 제정신이야?” 소리를 낮추며 장녹수가 그를 타박하자, 대한은 흘낏 그쪽을 쳐다보더니 펀치를 날렸다. 쿠당 소리와 함께 날아간 장녹수는 책상 위에 부딪혔다. “내 앞에서 대체 뭐 하는 짓거리야?!! 너 이 새끼!!” 황당해서 넋을 잃었던 수학선생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대한에게 달려들었다. 대한은 내려치는 죽도를 낚아채서 당겼다.’억!’하며 딸려오는 선생의 손을 붙들어 뒤로 꺾고, 다른 한 손으로 그의 목을 잡아 책상 끝에 가져다댔다. “…열혈 교사. 잘 가.” 휙 선생의 고개를 뒤로 제쳤다가 모서리에 찧으려는 순간, 쿠션 하나가 사이에 끼어들었다. 세이프. “무식한 새끼, 그럼 진짜 죽어. 넌 정도란 것도 모르냐? 한사장보다도 바보야.” 헉헉대며 한숨 섞인 한탄을 내뱉던 장녹수는 쿠션을 잡았던 손을 놓고 일어섰다. “아야야, 나 진짜 아프다. 니 주먹 무지 센 거 너도 알지? 아파 죽을 것 같아. 집에 가자, 응? 내가 맛있는 것도 많이 해 줄게. 선생님께는 정말 죄송하다고 사과 드리고… 그러자, 대한아. 아야야.” 엄살을 부리며, 대한의 팔과 가슴 사이에 손을 끼고 뒤로 끌어당겼다. 처음엔 꼼짝도 안 하던 이대한은 서서히 몸을 세웠다. 풀려난 수학선생은 기진맥진해서 털썩 주저앉았다. “너… 너희 두 새끼들 몽땅 다 퇴학이야!!!” 휙─ 퍽! “큭!! …이, 이번 건 진짜다. 대한아… 뼈 나간 것 같아.” “씨발, 니가 거길 왜 껴!” “안 그럼 진짜 퇴학이니까 그러지…! 씁, 정말 아프다.” 수학선생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날린 킥을, 녹수가 온몸을 던져서 막았다. 다행히 이번에도 세이프. 이대한은 잡아먹을 듯이 아래쪽을 노려봤다. “짜를테면 짤라. 뒷일 자신 있으면.” “하하하! 얘는 참, 농담도 잘해요~. 선생님, 기분 푸세요. 저 녀석이 아직 철이 없어서 그래요. 저희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녹수가 얼버무리고 수학선생을 부축했다. 그는 언제 맞았냐는 듯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선생의 먼지 묻은 바지나 셔츠를 탁탁 털어 주고 구김까지 삭삭 펴준 뒤 의자까지 대령했다. 대한의 눈꼬리는 점점 위로 올라갔다. “어이 잘생긴 형, 스톱. 제발. 그만해라, 대한아.” 장녹수가 다시 이대한쪽에 찰싹 붙어 등이며 어깨를 쓰다듬었다. 대한은 신경질적으로 그 손을 쳐내고 선생 쪽을 일별하며 뒤돌아 나갔다.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어디 다치신 덴 없으시죠?” 장녹수는 얼굴이 시뻘개져서 씩씩대는 수학선생에게 사과했다. “니들, 니들 내가 정말 가만 안 둔다, 내가… 웁!” 수학선생의 입을 억세게 틀어막은 장녹수가, 그의 귓가에 바싹 다가가서 나지막이 속삭였다. “있잖아요, 선생님. 대한이는 건들지 마세요. 저야 볶아 드시든 삶아 드시든 상관없는데, 대한이 건들이시면… 그러면 저도 제가 어떻게 헤까닥 할지 모르거든요? 에브리바디 장수 만만세지 않습니까.” 싱긋 웃고, 슬쩍 바지 앞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포라이터를 꺼냈다. “드리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정말 중요한 거라… 되도록이면 안 쓸게요.” 고개를 한번 숙이고 다리를 절룩대며, 장녹수는 교무실 문을 나섰다. “어, 니들 아직 안 갔어?” “나와야 가지. 새꺄.” “저 새끼한텐 바라지도 않는다. 병우야, 너라도 대한이 좀 말리지 그랬냐.” “푸헤헤헤! 제일 먼저 튀어나간 게 병우 새끼다!” 교무실 앞에서 기다리던 병우와 상식에게 한 팔씩 걸치고, 장녹수는 우다다다 복도 끝으로 달려갔다. “빠샤~!!!” 멀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대한은 교무실 문을 열었다. 어딘가에 전화를 걸던 수학선생은 화들짝 놀라서 수화기를 내렸다. 찰칵, 문을 걸어 잠그며, 대한은 미소지었다. “2라운드, 시작하지.” 다음 날 학교는 발칵 뒤집혔다. 교무실이 폭격이라도 맞은 듯 엉망으로 부서진 가운데, 홀로 깨끗하게 정리된 수학선생의 책상. 그 위에 얌전하게 올려진 새하얀 ‘사표’ 한 장. 사건 장본인인 수학선생은 아침에 ‘그만두겠습니다.’란 짧은 전화 한 통을 건 것이 다였다. “대한이… 너야?” 그 소식을 접하자마자 대한의 반으로 달려온 한상식과 유병우, 장녹수를 바라보며, 대한은 포식한 고양이과 맹수의 표정을 지었다. “씨발!!! 이 철없는 새끼!!!” 쾅! 녹수는 보기 드물게 화를 내면서 대한의 책상을 걷어차고 나가버렸다. 대한은 뺨이라도 맞은 듯이 안색을 굳혔다. 곧 살벌하게 인상을 바꾸고 벌떡 일어나, 앉아있던 의자를 녹수가 나간 문에 집어던졌다. 쪼개지는 문소리. ─내가, 누가 때문에!!! “야, 야. 진정해. 저 새끼가 너 걱정해서 그런 거야.”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아. 침착해라, 대한아.” 한상식과 유병우가 재빨리 뒷수습에 나섰다. 씨근덕대던 대한은 넘어진 책상을 다시 한번 걷어차고 밖으로 향했다. 역시 벌레 새끼한테는 잘해 줘 봤자다. …클럽새끼들한테까지 가서 기고 왔는데, 씹!!! 참을 수 없는 울화에 여기저기 화풀이를 하며 쏘다닌 대한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술 취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보라색 빛의 고요한 골목은 언제 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기 박힌 따뜻한 집구석에서 다른 새끼들은 지들 에미애비한테 앵앵거리며 잘만 먹고 살겠지. 씨발, 좆같은 세상!!! 녹색 문을 걷어찼다. 꽝 소리와 함께 열리는 대문. 어차피 문단속 따위는 하지도 않는다. 가져갈 게 있어야 말이지. 피식거리며 비틀비틀 들어섰다. 마루 앞에는 운동화 한 켤레가 놓여있었다. 대한은 구두도 벗지 않고 방으로 향했다. 열어제낀 안방 문 안, 밥상을 차려두고 구석에서 쪼그려 자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자는 것도 벌레처럼 궁상맞은 새끼. 한참을 서서 지켜보던 대한은 구두를 벗어 운동화 옆에 나란히 두었다. 방으로 돌아와 상을 옆으로 치우고 이불을 깔았다. 녀석이 깨지 않게 조심조심 이불로 들어 옮기니 상처를 건드렸는지 투정 어린 신음을 뱉었다. 얼마나 맞았는지 뺨은 호빵처럼 부풀어 올랐다. 찢어진 입가는 피딱지가 앉았고, 자세히 보니 눈가에도 멍이 있었다. 매달리는 손을 떼어내자 칭얼거린다. 어느 쪽이 어리다는 거냐, 장녹수. 식은 국을 마시며 대한은 자신의 벌레를 감상했다. “…자니?” 귀 곁에서 울리는 자그맣게 잠긴 목소리. “그러지 마, 대한아. 그러지 마… 혹시라도 너 다치는 거, 나는 정말 싫다. 그것도 나 때문에 그런 거면…… 그러면……” 차가운 손이 그의 머리를 살짝 쓸어 올렸다. 대한은 눈을 뜨려 했다. “더 이상은 못 견뎌…” 눈 위로 떨어지는 것은, 벌레의 눈물. 어째서. 너를 위해서였다. 처음으로 내가 너를 위해서… 할 줄 아는 건 주먹질이라 그런 것 밖에 없어서… 그래도 처음으로 너를 위해 내가 뭔가를 한 것인데… 왜… 우는 거니.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새로 차려진 밥상만이 그의 옆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야, 진짜 빠방한 애들로 소개시켜 준다니까? 가자! 너도 사내새끼라면, 기지애 손목 한 번은 잡아봐야 하지 않겠냐.” 점심시간, 한상식은 심심했는지 또 녹수를 건드리며 여자 타령을 했다. 시큰둥이 만화책을 들여다보던 장녹수가 고개를 들고 한상식을 째려봤다. “많이 예뻐?” “어! 생각 있어? 졸라 끝내준다. 니 새끼한테는 돼지 목에 진주야.” “까는 소리하네.” “아, 아참. 다음으로 하자.” “뭐야! 왜 갑자기 발뺌이냐, 한사장!” “씨발, 다음에!! 대한이 왔냐?” 한상식이 어색하게 웃으며, 녹수의 뒤에 서 있는 대한에게 인사했다. 대한은 바지에 손을 집어넣은 채 의자를 길게 빼고 앉아서 눈을 가늘게 떴다. “교장실에는 왜? 뭐라고 하는데?” 녹수가 걱정스러운 듯 그를 바라봤다. “별거 아냐.” “정말? 괜찮은 거야?” “응.” 교장으로부터 특별 추궁을 장장 30분 동안 듣다 온 대한의 기분은 바닥이었다. 이리저리 자신을 떠보며 ‘이사장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냐’에서부터, ‘그래도 눈에 띌 사고는 치지 말아달라.’는 당부까지. 클럽의 힘이 크긴 큰 것 같다. 이런 구석의 3류 똥통 학교에도 줄이 닿아있다니. 다시 맺은 클럽과의 관계는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줬다. 어둠과 암흑, 습하고 더러운 핏빛 갱도. 클럽의 ‘개’인 조직은 모두 보호자 없는 미성년으로 이루어져서, 치외법상 할 수 있는 최악의 일들은 모두 그들 대신 자행했다. 그렇게 성년이 될 때까지 살아남으면 ‘진조직’으로 영입되어 본격적인 그림자가 되는 것이다. 한번은 지옥에 떨어져 본 녀석들로만 이루어진 <조직>. 그곳은 약육강식의 세계였다. 수단과 방법에 관계없이 살아남고 승리한 자만이 위로 올라가는, 그것만이 유일한 규칙인 곳. 대한 역시 거기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처음 그곳에 발을 들여놓은 날, 조직 녀석들은 린치를 걸어왔다. 최연소 입단자라는 것도 그렇고, 대한의 조각같은 얼굴에 무뚝뚝한 태도, 대부분이 중퇴생인데 반해 그는 아직 재학생이란 것이나, 자신들과 다르게 클럽의 열렬한 지지로 픽업되었다는 배경까지, 그들에겐 모든 것이 거슬렸던 것이다. 일방적인 폭력으로 시작된 린치는 고조되는 분위기 속에 점차 이상기류를 타더니, 급기야 놈들 중 한 명이 대한을 겁탈하려 했다. 번들거리며 입안으로 처박힌 붉은 성기(性器). 대한은 놈의 그것을 물어 뜯․어․냈․다. 곧 사람이 지른다곤 생각 못할 만큼의 끔찍한 비명이 울렸다. 당황한 놈들 중 하나가 대한을 붙들었던 손을 풀고 잭나이프를 허리에 꼽았다. 재빨리 자신의 살 깊숙이 박힌 나이프를 뽑은 대한은, 그대로 비명 지르는 녀석의 목줄기를 그었다. 손간의 칼. 뿜어져 나오는 핏물을 뒤집어 쓴 채 붉은 얼굴의 악마가 화사하게 미소지었다. 역대 최연소라는 15세의 어린 입단자는 역대 최악의 신고식을 치르고 단숨에 조직 내에서도 위험 1급수로 화려하게 등극했다. 정동진에 가기 이틀 전에 일어났던 일이었다. 하지만, 유병우나 한상식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커녕 그가 그런 곳에 발을 디밀었다는 것도 몰랐다. 대한이 닥치는 대로 폭주했던 시기였기에, 다음날 아침 그 깨끗한 얼굴에 자리한 생채기를 보고도 눈치채지 못했고, 대한 자신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후에는 새벽에만 가끔 나가기 때문에 더욱이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클럽’의 실체에 대해서 몰랐으니까. 고작 겉껍데기의 외모 따위로, 그 ‘클럽’이 자신들을 상대해 주는 것으로 알다니. 바보처럼… 어쨌든 그 일 이후, 그는 세상에는 진짜로 동성에게 물건 휘두르는 놈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 자신이 좋다며 아침저녁으로 따라다니는 벌레 새끼, 지금도 눈앞에서 깔깔대며 한상식, 유병우와 장난 노는 건방진 벌레 새끼, 장녹수도 그런 걸까… 녀석도 사내새끼에게 그런 마음을 가질까. 녀석도 자신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걸까. 더럽다. 혐오스럽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아날 정도로. 그런 걸 떠올릴 때마다 녀석의 숨소리까지 거슬렸다. 닿는 살갗조차 징그러웠다. 정말 벌레처럼 느껴졌다. 벌레보다도 징그럽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녀석이 필요하다. 차가운 녀석의 손은 뱀처럼 징그럽다가도 이불솜보다도 푸근했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얄밉다가도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친근했다. 극과 극의 상존. 녀석은 그에게 있어 언제나 혼돈, 그 자체였다. 한상식이나 유병우가 생각하는 것은 뻔했다. 특히 한상식. 그는 녀석을 ‘정상’으로 돌려놓고 싶어했다. 자난 겨울여행 이후 녀석과 한상식의 사이가 급격히 가까워지며, 이제는 친구라고 부를만한 것이 되었을 때쯤… 상식은 빨간 책․빨간 비디오․빨간 CD들을 녀석 앞에 걸신들린 듯이 늘어놓거나, ‘여자․여자․여자’를 외치며 뚜쟁이 놀음을 하기 시작했다. 우스운 것은, 그는 그럴 때면 꼭 대한의 눈치를 살핀다는 것이다. 방금 전과 같이. 대한으로선 벌레가 개심하여 이성에 눈뜨는 것이 오히려 다행인데 말이다. 더 이상 녀석과의 관계를 골치 아프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 어쩌면…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 속, 감나무 가지가 흠뻑 젖으며 아래로 처졌다. 샛노란 개나리 꽃. 빗속이라 더 선명한 노란색. 대한은 좁은 마루 위에 올라앉아, 파릇파릇 잎사귀가 돋아나는 감나무 곁의 노랑 개나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끼익─ 쇳소리를 내며 대문이 열렸다. 군청색 우산을 흔들며 좁은 대문 아래를 통과하는 장녹수의 머리에 맑은 빗방울이 튀어 내렸다. 흘러내린 빗물은 눈가로도 튀어, 장녹수가 손을 들어 물기를 지우마 마치 눈물을 닦아내는 것 같았다. ‘[더 이상은 못 견뎌…]’ “깨 있었어? 웬일로 일요일인데 집에 있네?” 방실거리며 다가온 녹수는 우산을 접어 마루 밑에 놓는 척하다가, 문득 장난기 어린 눈으로 대한을 향해 우산의 열림 단추를 눌렀다. 펑! 하고 흩날리는 물방울… “씨발, 젖었잖아!” 대한이 사납게 인상을 쓰자, 장녹수는 고개를 절래 저으며 ‘재미없는 녀석’하고는 수건을 가져다준 뒤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비빔밥 괜찮아? 나물 가져왔어.” “……” “싫어?” 대꾸없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털자, 녹수가 부엌에서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삐졌냐? 삐돌이.” “닥쳐.” “네네~, 삐돌이.” 집 밖에 붙어있는 옥외 부엌은 아궁이자리까지 남아있는 골동품이었는데, 다행히 가스렌지 정도는 있었다. 장녹수는 가스렌지의 불을 붙이고 전날 남긴 콩나물국을 뎁히며, ‘삐돌왕자 이대한’을 주제로 한 돌림노래를 불렀다. “대한이는~ 대한이는~ 삐돌이래요~ 삐돌이래요~. 랄라라라 랄라라~ 대한 삐돌 쏭~ 랄라라라 랄라라~ 삐돌 왕자 쏭~“ “내가 오늘 니 새끼 주둥아리를 안 갈면 이대한이 아니다.” 비좁은 부엌까지 쫓아온 대한이 녹수의 목에 팔을 걸고 조였다. “컥! 역시 삐…돌 왕자 이댜한~ 켁! 대한아, 자고로 사나이가 그렇게 마음이 좁아선 큰일 못한다… 아~ 해.” 팔힘을 느슨하게 하긴 했지만, 상당히 숨쉬기 곤란한 자세에 꽤나 위협적인 상황임에도 저놈의 입은 다물 줄을 모른다. 대한은 팔 한쪽을 풀며 내밀어진 국자를 받아들었다. “짜.” “엑?! 그럴 리가!” “맛없어.” 충격으로 입을 다문 장녹수를 바라보며 대한은 뿌듯함을 만끽했다. 이겼다. 봄나물 가득 담긴 바자기에 계란 후라이를 얹어 고추장과 참기름을 골고루 비비고, 위에는 김과 깨소금까지 쳐서 들고 왔다. 썰렁한 상위로 악전고투하며 다시 끓인 콩나물 국그릇과 숟가락 두 개도 가지런히 놓였다. 서툰 밥상.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부터, 장녹수는 매일 그의 집에 들려 끼니를 챙겨주었다. 어미 새가 새끼 새에게 모이를 물어다주듯 꼬박꼬박… 서툴지만 정성스럽게… 지난 겨울의 며칠을 제외하고는 하루 빼먹은 날조차 없었다. 비 오는 마당 안쪽 좁은 마루 위에서, 작은 반상을 두고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 예전에는 할머니의 자리였던 그곳에, 장녹수는 당연하다는 듯이 들어와 앉았다. “귀 파줄까?” 식후 담배 한 가치를 입에 무는데, 녹수가 상을 치우고 앉아 자신의 다리를 팡팡 치며 대한을 불렀다. 대한은 눈썹을 한쪽 치켜세우고 연기를 뿜은 뒤, 꽁초를 비 오는 마당에 던졌다. “또 까분다.” “살살 해 줄게.” 빙긋 웃으며 다시 다리를 팡팡. 대한은 잠시 무뚝뚝하게 쳐다보다, 그 위로 고개를 가로뉘었다. 사내놈이란 것이 여실히 느껴지는 딱딱한 다리베개. 조심스레 귓가의 머리를 뒤로 넘기는 차가운 손가락. 뚜렷이 느껴지는 눈길. 고요한 숨소리. 비에 젖은 마당이 옆으로 뒤집혔다. 감나무 아래 있던 노란 개나리가 그 위로 올라섰다. 세상이 바뀐 풍경. “쉬… 움직이지 마.” 속삭이는 목소리에 대한은 눈을 감았다. 그것이 눈에 띈 것은 우연이었다. 중간에 뿔뿔이 흩어져서 오랜만에 혼자가 된 대한은 압구정에 박힌 조직의 아지트로 향하던 길이었다. 화창한 날씨에 산보하는 기분으로 천천히 걷다가, 쇼윈도 안으로 익숙한 거구가 눈에 띄었다. 녀석과 함께 오락실에 간다던 유병우였다. 그 옆으로 한상식. 그 앞으로는 새하얗고 예쁜 여자아이들. 그리고… 녀석. 오락실은 오랜만이라며 한상식, 유병우와 함께 중간에 샜던 녀석이 말끔하게 차려입고 압구정동 커피숍에 앉아있었다. 어처구니 없다. 헛웃음을 치며 대한이 걸음을 옮기려는 차에, 녀석의 손이 소녀의 머리를 넘겼다. 무심코 다리가 멈춰졌다.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한 녀석은 평소 습관대로 하나부터 열까지 앞의 소녀를 챙기고 들었다. 다정하게 웃고, 농을 치고, 시중을 들어주고, 스치듯이 가벼운 스킨쉽. 마치… 대한을 대하듯이… 문득, 깨달았다. 할머니의 자리를 녀석이 차지했듯이, 녀석 안의 자신도 다른 누군가가 대신 차지할 수도 있다는 것을. 화창했던 봄 풍경은 살벌했던 지난 겨울로 돌아섰다. 그 피로 얼룩졌던 겨울의 한기가 대한을 꿰뚫었다. 얼굴을 붙들고 있는 차가운 손… 이 손을 잃을 수도 있다. 다시… 또 다시…… “뭐, 뭐?!!” 당황한 한상식은 말까지 더듬었다. 방금 자신이 들은 소리가 저 이대한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맞는 것일까. 안 그래도 장녹수에게 여자들을 소개시켜 줬던 것이 불안하던 차였다. 이대한에게 미쳐, 호모를 넘어 또라이 기질까지 보이는 녹수 새끼가 불쌍해서 그간 어울리지도 않는 뚜쟁이질을 했다. 오락실 간다고 꼬시고, 나이트로 빠지자고 꼬시고, 결국은 미팅자리까지 데리고 가는데 성공. 얼굴 구기고 한상식만 말없이 흘겨보던 장녹수는, 그에게 틱틱대는 콧대높은 여자들을 보고는 더 열 받았는지, 평소 단련된 능글맞음으로 그녀들을 놀려먹고 추근대고 약올렸다. 2차 가기도 전에 쫑 나려는 것을, 선수쳐서 메모 한 장만 남긴 채 말도 없이 사라졌다. [카사노바 한사장. 간만에 유쾌한 시간이었다. 답례로 니 새끼 헌팅 리스트를 압구정 한복판에 확성기로 까발겨 주마. ─추신:엿먹어라, 씨발놈!] 유병우도 있었는데 그 새끼는 빼고 혼자만 욕먹었다. 그야 주동자는 본인이 맞지만, 딴엔 지 생각해서 그런 것을… 나쁜 변태 새끼. 상식은 난감했다. 지난 겨울의 일 이래로, 이대한이 장녹수를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야, 대한아. 저기… 지금 말한 게… 그게 말이지…” “몰라?” “씨발!!!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아무리 나라지만, 사내새끼한테 좆 세우는 법 따위를…!!!” 우렁찬 목소리에 쏟아지는 시선들. 상식의 얼굴은 불타오르고, 대한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뭘 봐!! 눈 안 돌려?!!! 뽑아 줘?!!!” 초저녁이라 한산했던 바(bar) 안의 시선들이 성급히 흩어졌다. 쌈닭 한상식은 근방에서도 싸가지 없기로 소문났다. 대개는 알아서, 혹자는 더러워서 피했다. “도대체 애 그런 게 필요한 거냐? 저기, 녹수 새끼 때문에?” “모르면 됐어.”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한을 상식이 붙들었다. “야. 그러지 마라. 휩쓸리지 마.” 상식은 그의 시선을 피하면서 입술을 깨물고 말을 이었다. “그건 그 새끼를 위한 게 아니야. 같이 똥물 뒤집어쓰고 자진하는 꼴이지. 아직 어려서 그래. 좀만 더 참아라. 그 새끼도 시간 지나면 분명 다른 데로 눈을 돌릴 거고…” “그게 싫은 거다.” 단호하게 답하고 사라지는 대한의 등 뒤를, 한상식은 크게 한방 얻어맞은 표정으로 바라봤다. “…맙소사. 이대한, 니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건지나 아냐…” 멍하니 중얼거리며, 상식은 ‘장녹수 정상화 계획’을 접었다. [미안합니다, 무슈. 파트너가 폐를 끼쳤군요.] 장녹수를 닮았다고 생각했던, 짙은 갈색머리의 청년이 고개를 숙여 대한에게 사과했다. [그딴 자식은 빨리 차버려라. 뭐냐, 그게? 아무리 호모라지만, fuck. 어떻게 지 애인 똥구멍 번지수도 틀려?] 영어를 배울 때조차 욕부터 배워먹은 한상식이 과격하게 답했다. 갈색머리의 이탈리아 청년은 씁쓸하게 웃었다. [무슈의 파트너는 참 행복할 것 같네요. 연인은 물론이고 친구도 이렇게 아껴주다니.] [아직 호모 아니야! 씨발, 개선의 여지는 있다고! 아직!!] 투덜거리는 상식을 바라보며 청년은 웃었다. [부럽네요. 진짜…] 클럽의 일로 외국에 와서 만난 이탈리아 게이였다. 거의 부부 마냥 오래된 게이 커플이라고 소개받고 접선했는데, 몇 번 어울리다 보니 그 중 한 놈이 대한에게 추파를 던졌다. 그것도 그냥 추파가 아니라, 아예 잠자리로 스며들어온 경우였다. 덮치는 것을 그대로 반타작을 해서 거리에 나체로 묶어 놨을 때, 파트너인 이탈리아 청년이 나타났다. 그는 한심하단 듯이 기절해버린 자신의 파트너를 한참을 쳐다보다가 대한에게 풀어 줄 것을 부탁했다. [너는 용서할 수 있어?] 대한이 묻자, 그는 미소지었다. 장녹수와 꼭 같은 미소. [용서할 수 없어요. 그렇지만 떠날 수가 없습니다. 버릴 수도 없고. 무슈도 알게 될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나는 용서 못해.] [용서할 수 있다, 없다가 아닙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떠날 수 있는가… 지요.] [이해할 수 없군.] [모르는 게 더 좋을 이야기입니다.] 8월, 지중해의 태양이 눈 시리게 아픈 날이었다. 클럽의 요구로, 이대한․한상식․유병우는 휴가 시즌이 되면 매번 그들과 함께 외국으로 향했다. 이번엔 가족 입원 관계로 유병우만이 빠진 상태였다. 클럽으로부터의 초청에는 표면적인 이유인 파트너 겸 보디가드도 있었지만, 실상은 이대한과 유병우, 한상식을 국제적으로 키워보려는 투자목적이 컸다. 바로 작년까지만 해도 중학생이었던 이대한이 조직 내에서 뚜렷한 활동을 보인 것은 근 반년간이었지만, 그 이전에도 윗대조차 골치를 썩이던 굵직한 몇 건을 가볍게 ‘처리’하며 클럽과 윗대의 주목을 받았다. 생각보다도 더 빨리 효능을 보인 이 물건에 클럽의 기대는 높아졌고, 크게 키워보자는 투자욕심까지 생겼다. 물론 부록으로 딸린, 유병우나 한상식 역시 탐나는 재목이었다는 건 말할 것도 없다. 다만, 그 옆의 장녹수만은 클럽 역시 껄끄러웠다. 능력치로 치자면 나쁜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딘지 부류가 틀렸다. 어떻게 이대한들과 같이 다니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2년 전 장녹수가 일으켰던 클럽의 크리스마스 파티 난입 사건은 가끔 우스개 소리로나 나올 정도의 작은 헤프닝이었지만,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이라면 모두 그에게 묘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광기어린 눈과 입가에 가득했던 피와 살점. 이대한이 야수라면, 장녹수 쪽은 완전 미친개였다. 컨트롤이 아예 불가능한… 장녹수는 클럽에 있어서도 난해한 미스터리 영역이었다. 이대한 역시 그들이 녹수에게 접촉하는 것을 거부했다. 유일하게 이대한이 예민해 하는 부분. 그가 클럽의 조직에 스스로 들어간 것도 원인은 장녹수 때문이라는 소문이었다. ‘또, 실패인가.’ 끊어질 것 같은 인내심을 다독이며, 대한은 끊임없이 방법을 찾았다. 동성과의 섹스. 고작 그 정도의 생리적인 혐오감이나 구역질 따위는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을리라 생각했지만… 마음과 별개로 몸이 거부했다. 남자에겐 죽어도 반응하지 않았다. 우스운 꼴로 여기저기 디밀며 갖은 시도들을 다 했지만 번번이 실패. …독(毒)같은 버러지를 위해 환경개선을 하려는 숙주라니. 호모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병신이라니. 실패 끝의 씁쓸한 자조에도 멈출 수는 없었다. 해답은 그것밖에 없었다. 자신만 바뀌면 그도 녀석도 행복해 질 수 있으리라. 그렇게 믿었다. 뜨거운 열기가 고급 수제품 매장 안의 에어컨 바람으로 식었다. 그가 에스코트 중인 유수린은, 혈통 좋은 클럽 내에서도 탑 클래스의 여왕님. 변덕스럽고 오만한, 대한의 첫 여자이기도 했다. 그녀는 특이한 걸 고른다며 보석 세공점만 세 시간 넘게 돌아다니다가 이곳까지 왔다. 호텔에서도 꽤나 먼 거리. 성가시게… 기다리며 가게를 둘러보니, 보석점이라 그런지 수린의 다른 쇼핑지역보다 유니섹스 아이템들이 많았다. 반지나 팔찌, 귀걸이, 시계, 열쇠고리… 반투명한 하늘색 큐빅 안에 담긴 청록색의 에메랄드. 대한의 눈에 확 들어온 그것은 자그맣고 아름다웠다. 큐빅은 청식 팬시칼라 다이아의 부스러기들을 모아 가공한 듯 했는데, 대신 안에 박힌 에메랄드는 상질의 것이었다. 문득 그 앞에 박힌 명찰이 눈에 띄었다. “뭘 그렇게 유심히… 어머! 이거 예쁘네!” [여기, 계산.] 유수린이 다가와 말을 걸자마자, 거의 반사적으로 대한의 입에서 계산이란 단어가 튀어나갔다. 샵 매니저가 다가와서 포장을 하는 사이, 유수린은 입을 삐죽이며 대한을 노려봤다. “그거 나 줘. 내가 찍었단 말야.” “먼저 산 사람이 임자다.” “흥, 그 돈 어차피 내 카드에서 나가는 거잖아? 그러니까 내 거야.” 대한은 대꾸도 안하고 대충 눈에 띄는 붉은 브로치를 찍어서 계산했다. “자.” 귀찮다는 듯이 던져주는 브로치를 탁 쳐내고, 수린은 그를 살벌하게 노려봤다. “그거 여자 줄 거지?” “무슨 상관이야.” “그 여자 가만두지 않을 거야.” 대한이 그녀를 바라봤다. 수린은 오만한 미소를 떠올렸다. “난 내가 못 가지면, 남도 가지면 안되거든.” “까는 소리 하지마. 니가 뭔데.”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말에 수린의 눈이 충격으로 흔들렸다. 그러나 곧 앙칼지게 다시 표정을 바꿨다. “이대한, 너 뭔가 착각하는 거 아니야? 나는 지금 니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야. 명령하는 거지.” 뚜둑. 대한은 목을 한번 옆으로 꺾고, 주먹 관절을 다듬었다. 그리고 무표정하게 그녀에게 다가섰다. “뭐, 뭐야? 지금 너, 날 겁주겠다는 거야? 이게 거지같은 걸 주워서 키워줬더니 은혜도 모르고… 꺅!” 수린의 턱과 뺨 주변을 단단히 쥔 손이 그녀의 고개를 위로 올렸다. “착각은 니가 하는 거지. 니 말대로 나는 거지새끼라 잃을 것도 무서울 것도 없거든. 알잖아? 내가 어떤 놈인지.” 손아귀의 힘을 가하자 끄그극하는 소리가 울렸다. 수린의 손톱이 미친듯이 대한의 팔을 할켰지만 소용없었다. 수린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야! 이대한!! 지금 뭐 하는 거야!” 밖에서 기다리던 한상식이 허겁지겁 달려와 그를 말렸다. 대한은 눈을 가늘게 한 번 뜨고 손의 힘을 풀었다. 떨어져 나간 수린이 기침을 뱉어내며 주저앉자, 그는 곁에 앉아 그녀의 고개를 들어올렸다. “받들어 줄 때… 잘해. 오라는 데는 많으니까.” “……너어…!” 모욕감과 분노로 얼굴이 새빨개진 그녀는 목소리조차 가늘게 떨었다. 대한은 손을 뻗어 떨어진 루비 브로치를 풀어서 들고, 그녀의 날씬한 목가로 가져갔다. 따끔함에 이은 핏방울. 이윽고 방울방울 솟아오른 그녀의 피가 하얀 원피스를 물들였다. “이런, 실수야.” 대한이 싱긋 미소지었다. 백만 불 짜리 미소의 사신은 피보다 선명한 루비 브로치를 수린에게 달아주고 일어섰다. “짜를 테면… 짤라.” 히스테릭한 그녀의 비명에도 뒤도 안 돌아보고 가는 그의 바지 주머니 속에는 ‘그린우드’라는 전리품이 잠들어 있었다. 이후 귀국할 때까지 수린은 대한을 집요하게 괴롭혔지만, 그녀의 뜻대로 대한을 쫓아버릴 수는 없었다. 고작 1, 2년 사이에 무섭게 성장해버린 그는 더 이상 그녀가 주워서 데리고 놀던 중학생 양아치 소년이 아니었던 것이다. 대한은 고교 입학과 동시에 전쟁을 시작해서 반년 만에 강북학군을 통합시키고, 조직 내에서도 단번에 중역으로 떠오르며 무사신(武死神)이란 변칭을 받은 괴물이었다. 틀럽 내의 정권을 잡고 싶어하는 이들이 벌써부터 이대한의 행보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했다. 그는 말 그대로 좋은 무기가 될 테니까. 귀국 비행기 안에서 수린은 대한의 옆자리로 다가왔다. 그녀를 흘끗 본 대한은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 애 줄 거라며?” 눈을 가늘게 뜨자, 수린은 의기양양하게 그를 비웃었다. “어쩐지 요 근래 좀 조용하다 했더니, 너 호모 됐다며?” “아직 되고 있는 중이다.” 의외의 대답에 수린은 움찔했다. 대한은 표정은 지운 채 그녀를 마주 봤다. 새까만 동공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엿보이지 않았다. “그 애 이름이… 녹수야?” 입가가 비틀리면서 대한의 손이 번개처럼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제 입은 괜찮은 건가? 아예 뭉개줄 용의도 있는데 말야.” ─찰싹! “더러운 손으로 만지지 마!!! 호모 주제에!!!” 후다닥 자리를 벗어난 그녀가 외쳤다. 대한은 유쾌한 듯 웃고, 어깨를 으쓱했다. 이번에 가면 정말 호모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지금 대한은 녀석이 정말… 몹시도 보고 싶었다. 공항에 들어서자 배웅 나온 것은 유병우뿐이었다. 주머니 안의 큐빅을 둘리며 슥 훑어보아도 녀석이 보이질 않았다. 만나자마자 유병우와 투닥거리던 한상식도, 그제야 장녹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다. “어? 녹수 새끼는 어디 갔냐? 보면 까무라치게 좋아할 일 있는데…” “아까 아침에 전화했을 때는 분명히 온다고 했어. 공항에서 보기로 했거든. 그런데 핸드폰도 꺼져있더라.” 유병우의 대답에 한상식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꺼져 있어? 연결이 안 되는 게 아니라?” “밧데리가 다 된 거겠지.” 대한이 일축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머릿속은 의혹으로 가득 찼다. 이런 적은 없다. 이런 적은…… 머리 한쪽, 2년 전의 겨울이 떠올랐다. 그때도 녀석은 이유없이 일주일 동안이나 사라졌었다. 그의 손이 최초로 피에 물들었던 때. 나락으로 떨어졌던 겨울. 이제는 덤덤해진 도살자의 양심이 시작된… 한 달 만에 보는 낡은 대문이 가까워질수록 대한의 심장 박동수는 터질 것처럼 높아졌다. 손안의 큐빅을 말아쥐며, 대문을 열었다. ─끼익. 언제나처럼 을씨년스러운 소음을 내며 문이 열렸다. “짜자자잔~!! 놀랐지?!” “우왓!! 뭐야, 이 새끼!! 왜 그렇게 놀래켜?!! 아씨, 미친 새끼!” “아앗! 녹수야. 아까 왜 안 왔어!!” “카하하핫! 놀랐지?! 복수다, 이놈아! 병우한테 니가 오늘 아침까지 알리지 말라고 했다면서? 앗싸! 병우야, 미안~!! 대한아, 놀랬지?! 그지?!” “…이럴 줄 알고 있었어.” 대한이 피식 웃으며 대꾸하자 너스레를 떤다. 어딘지 들떠있는 녀석은 한달 새에 많이 자란 것 같기도 하다. 표면이 껍질이 한 꺼풀 사라진 느낌… 오랜만에 본 진갈색의 눈동자가 반가웠다. 이상하다. 시간이란 것은 이상하다. 마음이란 것은 정말 이상해. 그렇게 싫었는데 말이다. 보고 싶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녀석이 정말 보고 싶었다. 자신을 담은 진갈색 눈동자, 장난기 어린 입술, 이젠 홀쭊해진 뺨이 정말 보고 싶었다. 그를 쓰다듬어 주는 차가운 손이 그리웠다. 낯선 거리의 이방인들 사이에서 녀석의 모습을 찾을 만큼, 녀석이 그리웠다. ‘그래, 어쩌면… 너와 나, 가능할 지도 모른다.’ “왜?” 의아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녀석에게, 대한은 그의 그린우드를 던졌다. “핸드폰에 달아도 된다더군. 끈 이어서.” 막상 주고 나니 긴장됐다. 얼버무리려 고개를 숙였지만,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녀석은 한참 그것을 들여다보더니 점차 얼굴을 상기시켰다. “핸드…폰? 아, 그래. 그랬지. 아! 정말… 예쁘다. 대한아, 정말 예쁘다! 진짜 너무 예뻐! 고마워! 정말 기뻐!!” 띄엄띄엄 말을 잇다 격하게 기쁨을 표하는 녀석을 보니, 쑥스러웠다. “싼 거야.” “그래도, 진짜. 고마워. 나, 소중하게 갖고 다닐 거야.” 눈물까지 고여가며 환하게 웃는 녀석의 얼굴… 어쩐지 가슴이 저렸다. 저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에 뭐라도 하나 사 줄걸 그랬나. 상식이와 병우가 돌아가고 나면, 녀석과 긴 이야기를 해야겠다. 조금만 더 기다리라던가… 계속 같이 있자…라던가. ‘나는 네가 소중하다.’…라던가. 이제는 알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제 숙주는 벌레 없이는 숨쉬기도 힘들다. 병우, 상식이와 함께 새 집을 지어주고 싶다. 섹스 따위가 무슨 대수냐. 일단 옆에서 지켜주면 된다. 그리고 조금씩, 녀석의 곁으로 가면 된다. 그럼 언젠가는 가능하지 않을까. 시간이란 마법이 그의 마음을 돌렸던 것처럼… 대한은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안 먹어도 배부른 기분이었지만, 녀석이 이 더운 날 만든 것이니 먹었다. 자신을 생각하며 만든 것이니 다 먹을 테다… 라는 그답지 않은 결심도 했다. ‘…오늘따라 많군.’ 결국 남겼다. 역시 녀석과 얽히면 그 뜻대로 되는 법이란 거의 없다. 그래도 대한은 오랜만에 기분 좋은 포만감을 만끽했다. “얘들아, 나 또 준비한 깜짝 선물 있는데?” “허억. 이제 그만! 더는 못 먹겠다. 아무리 맛있어도 더는 안 들어가.” “미안, 녹수야. 나도 더는 못 먹겠어.” 한상식과 유병우가 손사래를 치자 녀석은 웃었다. “걱정 마라, 먹는 거 아니니까.” 녀석은 마루 앞의 마당에 내려서더니, 뭔가 기대감에 차서 그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대한과 마주친 순간, 그때부터는 정신없이 그를 응시했다. ─두근. 언젠가 봤던 그 눈이다 평소보다 뭔가 다른… 뚜렷하고 풍부한 감정의 색이 담겨있는… 혹시…… 혹시, 녀석도 자신과 같은 것을 생각하는 것일까… 그처럼 그를 그리워했던 것일까… 말해 주려는 것일까. 이번에야말로 진짜… “나, 애인 생겼어. 아주 이뻐.” 잔뜩 상기된 모습으로 벌레가 숙주에게 말했다. 마비된 머리가 그 뜻을 인식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애…인?’ 잘못 들은 것이다. 성급하게 따끔거리는 심장은 실수를 하는 것이다. 잘못 들은 거다. 잘못 들은 거야. 녀석의 재미없는 농담이다. “저, 축하 안 해줘?” ‘잘못 들었어. 다시 말해 봐. 뭐가 생긴 건지.’ 아, 새로 나온 오락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아, 놀랐구나!!! 것 봐, 내가 깜짝 선물이라고 했잖아!” 녀석이 다시 밝게 소리쳤다. ‘그것 봐라. 또 속을 줄 알았나?’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주먹 쥐었다. 재미없는 농담이다. 정말… “씨발! 뭐야!!!!” 한상식이 외쳤다. “이 씨발 변태새끼!!! 너, 죽었어. 왜 그딴 뻥을 쳐!!” 유병우도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녹수야, 지금 건 좀 심했어. 나, 나는, 순간 진짜인 줄 알았잖아. 심장마비 걸리는 줄 알았네. 하하.” 그러나 녀석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진짜야! 내가 왜 거짓말을 해! 이름은 송유진이고, 나보다 한 살 더 많아. 그리고…” “닥쳐!!!” 한상식의 새된 비명이 마당을 가로질렀다. 하얗게 질린 한상식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공포, 도래한 공포. 그래 너도 먹었느냐, 어둠이. “상식…아? 왜 그래. 다들 왜 그래?” 당황한 녀석은 불안한 눈을 부산하게 돌렸다. 대한과 마주치자, 흠칫 한다. 그의 돌처럼 굳은 심장이 천천히 움직이면서, 삐그덕 비명음을 질렀다. 땅 끝이 꺼지는 느낌. 마블링으로 섞어 도는 시야가 암흑으로 뒤덮였다. 마당 안은 숨쉬기 힘들 정도로 흉폭한 기운에 잡혀, 좀 전의 평화로움은 갈가리 찢긴 채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장녹수의 표정도 서서히 굳었다. “뭐…가 생겼다고?” 그의 안, 저 속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목소리에 실렸다. 쇠된 비명음이 머릿속을 엉망으로 울려댔다. 대한은 너무 괴로워서 그 소리를 멈추게 하고 싶었다. “대한아, 진짜, 왜들 그러는 거야? …병우야?” ‘저 입을 막으면 될 거야. 그럼 조용해질 거야. 거짓말이란 걸 알게 디면, 장난이란 것을 알게 되면 다시 조용해 질 거야. 지금이라도 녀석이 부정하면 괜찮을 거야.’ “다시 한 번 말해 봐. 잘 못 들었어.” ‘장난이지? 그렇지?’ “말해 봐, 녹수야.” ‘그렇지?’ 녀석이 대한의 곁에서 주춤 물러섰다. 겁에 질린 벌레. 겁에 질린 벌레. 겁에 질렸다…라. “장녹수, 니가 지금, 나, 이대한을, 5년 동안, 가지고 놀았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대한아. 무슨 말이야? 난, 난, 정말 모르겠어. 네가 왜 화를 내는 건지.” ‘몰라? 모른다고?’ “그럼, 다시 한 번 말해 봐. 뭐가 생겼다고?” ‘용서해 줄게. 한번은, 그래. 실수라고 용서해 줄게. 내가 잘못 들은 거다. 벌레야. 그렇지?’ “사랑하는 사람, 애인. 유진 씨.”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머릿속의 소음이 그를 먹었다. 그는 더 이상 눈뜨고 싶지 않았다. 그는 더 잇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을 끊고 편안히 그 소음에 몸을 맡겼다. 풀려난 악마는 그의 육체를 통해 녀석을 난도질했다. 오랜 기간 쌓였던 증오가 한꺼번에 터져 녀석을 덮쳤다. 거짓이었다. 거짓이었다. 거짓이었다. 모조리 거짓. 다정한 눈, 눈물, 웃음. 모두가 거짓. 녀석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저 믿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기다렸던 것이다. 녀석이 고백해 오기를… 그저 다정하기만 한 눈빛 말고, 절실함이 가득한… 그 감정을 받고 싶었다. 다른 누구보다도 바로, 그 벌레에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백하고 싶었던 것은 자신 쪽이었다. 섹스는 핑계였다. 그것만이 프라이드였으니까. 이미 심장 마지막 구석까지 녀석에게 먹혀버린 자신에게 남은 거라곤, 사내새끼에겐 죽어도 반응하지 않는다, 라는 프라이드. 그러니까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란 자기 위로. 그러니까 니가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다, 란 자기 위안. 기나긴 혼돈 끝에 그가 어렴풋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핏덩이가 되어버린 녀석의 몸에 올라타 목을 졸랐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우리에 갇혔다. “정말이지, 뭐야! 신나서 달려가 놓고는… 꼴좋네, 이대한.” 클럽에서 나온 사자(使者)를 대동한 것은 유수린이었다. 그녀는 그를 표독스럽게 훑어보며, 제안을 했다. “이번 건은 좀 컸어. 사적으로 벌인 일치고는… 뒤처리도 못하게 충동적으로 일을 치다니, 멍청하게. 목격자까지 있어서 수습하는데 꽤 많은 대가를 치렀다. 그러니까… 너도 그만큼은 해줘야겠지?” 유수린은 지난번 일에 대한 앙갚음으로 도발을 해보려 했지만, 완벽하게 닫혀있는 대한의 눈빛을 마주하려니까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저대로는 앞으로 쓸모가 없을 것 같다. 맥빠진 기분으로 간단하게 클럽의 전달사항만을 전하고 나오는데, 한상식과 유병우가 눈에 띄었다. 대한과 마찬가지로 엉망인 그들의 모습은, 마치 둥지 잃고 쫓겨난 새끼 오리들 같았다. ‘그럼 새 둥지를 줘야지.’ 수린은 미소 지으며 그들에게 걸어갔다. 녀석이 죽었다. 시끄럽게 대한을 괴롭히던 장녹수란 벌레가 세상에서 지워졌다. 어느덧 심장 중추까지 파고들었던 기생충이 뽑힌 상처는 숙주까지 잡아먹어 버렸다. 감각기가 죽어버린 숙주는 이제 귀머거리 장님의 본능만으로 하루를 살아냈다. 본격적으로 조직 일에만 전념했다. 하루의 시작과 끝이 어딘지도 모를만큼 정신없이 몸을 굴렸다. 유수린이 악의로 갖다 붙인 호스트 짓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를 쫓아 조직으로 들어온 한상식과 유병우 역시 호된 꼴을 당했지만, 그것마저도 아무 느낌이 없었다. 그는 그저… 고요하게 정체된 하루가 어디서든 빨리 끊어지기만을 막연하게 기대했다. 아무리 찾아도 빈방만 그득한 악몽이 머리를 짓눌렀다. 여럼풋이 뜨인 눈에 뿌연 안개가 보였다. 흑백 격자무늬의 방 천장. 집을 나와 들어간 호스트 바의 프라이빗 룸이다. 남아있는 것은 폐허와 피비린내의 잔향 뿐인 그 집을 피해 도망쳐 온 곳. 청량한 공기가 낯설었다. 오직 섹스와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방은 1주일에 한버 메이드가 와서 청소를 해주지만 그 날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밥과 국 냄새라니. 배가 고픈 것인가. “잘 잤어, 대한아?” 다정한 목소리. 대한은 눈살을 찌푸리며 천천히 일어섰다. “밥 먹자. 해장국 끓여 놨어.” 녀석이 미소지으며 연기를 뿜었다. “너, 장녹수야?” “응.” 꿈인가… 악몽… 대한의 손에 숟가락이 쥐어졌다. 갑자기 식욕이 돌았다. 시장하다. 정신없이 녀석이 주는 밥을 먹었다.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배가 고팠다. 먹는 동안에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 배를 채울수록 녀석이 살아 돌아오는 것만 같다. “안 죽었어?” 듣고 싶은 말을 물었다. “죽을 뻔했어.” 듣고 싶은 말을 대답한다. “죽었다고 했는데…” 부정해 주길 바라며 물었다. 녀석은 녹아 내릴 정도로 달콤하게 바라보며, 그의 뺨을 감쌌다. …차갑다. 생생한… 감촉… “누가 그래? 상식이가?” “병우도.” 대한은 혼란스러웠다. “둘 다 어딨어?” “왜?” “둘 다 찾아 와야지. 학교 안 갈 거야?” 꿈이… 아닌가. “……안 가.” “가자.” 빙글빙글 웃으며 그를 바라보는 녀석의 체취가 확- 느껴졌다. 쌉싸름한 담배향. 왼쪽 다리 아래의 깁스. ‘녀석이다! 녀석이다! 꿈이 아니다!’ 대한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또, 죽여줄까? 장녹수? 내가 그렇게 우스워?!! 날 갖고 노는 게 그렇게 재밌어?!!” 어디까지 떨어트려야겠냐! 어디까지 떨어트려야 만족하겠어!! 이미 바닥까지 떨어졌다!!! 너를 시작으로 숱하게 피를 묻혔어!!! 얼마나 더 죽여야겠냐!!! 얼마나 죽여야겠어!!! 너를 죽인 것만 두 번이란 말이다!!! “…도대체…” 장녹수의 얼굴이 일렁였다. “도대체, 왜 그게 널 갖고 노는 거야?! 친․구를 걱정하는 것이 그렇게 잘못이야?! 챙겨주는 게 그렇게 잘못이냐고!! 소중하니까 당연한 거잖아, 잘 해주는 것은!!!” 친…구. 목이 막혔다.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너무 많은 말이 하고 싶은데, 그게 목안에 걸려서 말이 되어 나오질 않았다. ‘친구… 친구라고…? 누가, 누구의?’ “좋아!! 어차피 나도 작정하고 온 거야! 너도, 상식이도, 병우도 모두 절교야!!! 씨발, 이제 됐어!! 도대체가 5년 동안이나 친구라고 쫓아다녔는데, 나한테 좀 잘 해주면 안 되냐고!!! 잘난 이대한!!! 내가 애인 생긴 게 그렇게 잘못이야?!! 씨발, 절교 당할 거 각오하고, 내 애인 남자라고 밝힐라 그랬는데!! 어쩌면 이해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랬더니 반 죽여 놓고!!” ‘이해? 장녹수 애인이 남자인데, 그게 이대한이 아니란 걸 이해하라고? 니가 5년이나 쫓아다닌 새끼는 사실 친구고, 나타난 지 한 달 만에 사귄 놈은 애인이야?’ “씨발, 이제 다 절교야!!! 나도 이제 니들 두 번 다시 신경 안 쓰고, 두 번 다신 같이 안 놀 거야!!! 어디 가서 술독에 빠져 죽든지 말든지!!! 부자새끼들 꼬랑지 핥아가며 뒤처리를 해주든지 말든지!!! 어디서 대신 칼받이 노릇 해주고 와서, 그 돈으로 노름을 해먹든지 말든지!!! 니들 몸 팔아가며 내 병원비를 대주든지, 말든지!!! 이제 다 상관없어. 잘 있어라, 이 씹새끼야!!!” ‘나는…!!’ 제 할말만 하고 돌아서는 장녹수의 등 뒤로, 대한이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너를 친구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 장녹수!! 한번도!! 단 한 번도!!!’ 절뚝거리는 녀석의 어깨를 붙들려 했다. “이딴 거 필요 없어, 새끼야!!! 먹고 떨어져라!!!” 하늘빛 큐빅이 그의 이마에 맞고서 떨어졌다. 언젠가 그가 녀석의… 아니, 그녀의 학을 던졌듯이. “대한아, 혹시…!” 확 문을 열어제치고 들어선 것은 한상식이었다. 급하게 온 듯 헉헉대면서도 머뭇머뭇 주위를 살피는 녀석이 웃겼다. 이 녀석이나 저 녀석이나. 유수린 말마따나, 둥지 잃은 새 새끼들 같다. “나랑 너랑 병우, 몽땅 절교란다.” 대한은 피식 웃고, 초라하게 떨어진 그린우드를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집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의 구석구석에는 녀석의 손길이 남아 있었다. 어느 틈에 왔었는지 깔끔하게 단장된 집. 대한은 마당 구석의 감나무를 바라봤다. 늦가을 싸늘함 속에 주렁주렁 열렸다 진 감들의 잔해. 엉망으로 울어제꼈지. 녀석… 그리고 보니 할머니 제사도 건너뛰었다. ‘미안, 할머니.’ 손질된 교복을 입고 마루 위에 앉았다. 쌀쌀했지만 괜찮다. 밤이 오고, 새벽이 되고, 동이 틀 때까지… 대한은 그 위에서, 2년 전의 그 때처럼 기다렸다. 녹색 대문이 열리고, 갈색머리의 잔소리꾼 ‘친구’가 나타나기를… ─꽝! 씩씩거리며 문을 걷어찬 장녹수가, 마루 위의 대한을 보더니 그를 향해 얼굴을 한번 콱 구겼다. 그리곤 부엌으로 가서 뚝딱 상을 차리더니 탁, 소리나게 대한 옆에 내려놓고 팔짱을 낀 채 그를 째려봤다. “절교라며?” 대한이 묻자, 휑하며 반격한다. “이제 학교 안 간다며?” “풋! …하하하핫!” 그래, 다시 시작하자.’친구‘로 남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장녹수. 이렇게 계속 옆에만 있어준다면…… “웃지 마, 나쁜 새끼야.” 벌레와 숙주는 ‘친구’로 화해했다. 대한에게 살해당할 뻔하고도, 장녹수는 예전과 변함없이 옆에 자리했다. 그의 애인과도 계속 사귀는 듯했지만 생활에 있어서 변한 것은 없었다. 녀석은 여전히 대한의 곁에 있었고, 언제나 대한을 우선시했다. 그래서 괜찮았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반 년 만에 처음 보는 녀석의 애인 송유진은, 남자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예뻤다. 청순하고 맑은 느낌, 순수 배양으로 자라난 양가집 규수 같았다. 이대한과 한상식, 유병우와 마주한 송유진이 잔뜩 겁을 먹고 움츠리자, 장녹수는 피식 웃으며 그런 유진이 사랑스럽다는 듯 끌어안고 다독였다. 그리고 부드러운 갈색 머리에, 녀석의 마른 입술을 얹었다. 기억을 통틀어 처음 보는 얼굴. 모르는 얼굴이다. 대한의 가슴에 무거운 추가 떨어졌다. ‘뺏길 거야.’ 머릿속의 악령이 속삭였다. ‘너에게서 뺏을 거다. 저 예쁜 얼굴이, 저 예쁜 몸이. 저 예쁜 눈이. 벌레의 마음을 홀려서 빼앗을 것이다. 새까맣고 음습한 너 따위는 곧 잊어버리게 할 것이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흔들었다. ‘내게 죽을 뻔하고도 돌아왔다. 그러니까, 괜찮아. 계속 옆에 있어줄 거야. 이대로가 더 좋다. 나도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후회할 거다. 지금도 후회하면서. 봐라, 벌써 벌레의 눈이 너를 떠났다. 같이 있는데도 너를 잊고 있다.’ 대한은 필사적으로 머릿속의 악령을 쫓았다. 행복해 하잖아. 나도 나쁘지 않다. 그러니까, 괜찮다. ‘하하하핫!! 거짓말!! 녀석에게 매달리는 하얗고 예쁜 손, 분질러 버리고 싶었으면서! 떼 내서 개 먹이로 던져주고 싶었지? 커다랗고 예쁜 눈깔을 파버리고 싶었잖아? 눈웃음치는 눈꼬리를 찢어놓고 싶다고 했잖은가! 나는 다 들었다, 네 소리. 만지지 마. 보지 마. 그 새끼는 내 꺼다! 하하하하핫!’ 자신을 비웃는 소리로부터 귀를 막았다. 이대로가 좋다. 친구로 남을 수도 있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니까 괜찮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향해 말했다. 하지만 마음은 이미, 깊은 갈퀴가 훑고 지나간 다음이었다. 두 번째로 녀석이 사라졌다. 완전 증발. 전날까지 멀쩡했던 옆자리가 불길함을 띄고 비었다. 애인 놈과 함께 없어진 것도 아니었다. 이번에도 이유는 없었다. 대한은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다행히 머리가 몽롱해지거나, 감각이 멀어직나 하진 않았다. 대신 초조함에 신경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찾을 수 있다. 그는 총력을 기울여 벌레 찾기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 마침내 실종 닷새 째. 녀석은 겉가죽만 조금 상한 채 무사히 귀환했다. 발견된 것이 아니라, 자의로 나타났다는 것이 어쩐지 마음에 걸렸지만 보는 순간 동요는 가라앉았다. 쓸데없는 해프닝을 벌인 꼴이 됐지만, 찾았으니 됐다. 그리고…… 더 이상은… 안 되겠다. 더 이상은… 싫다. ‘친구’라는 이름으로는, 이렇게 불안한 기분을 언제든 또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끔찍했다. 대한은 녀석에게 확신을 받고 싶었다. 자신이 녀석에게 제일로 소중하다는 확신… 영원히 자신의 곁에 있어주겠다는 약속… “대한아.” 여기저기 상한 얼굴을 들어 장녹수가 그를 불렀다. 짙은 갈색 눈이 대한을 꿰뚫듯이 바라보았다. 자애롭고, 따뜻한 그 눈은 한동안 심하게 흔들리더니 이윽고 단단히 자리잡았다. “절교다.” “……뭐…라고?” “더 이상 네 옆에 있고 싶지 않다. 이제 널 쫓아다니지 않을 거야. 너에게 말을 걸지도 않을 거고, 너를 쳐다보지도 않을 거야. 학교에서 만나도 아는 척하지 않을 거고, 집에도 안 찾아와. 니 꼬붕 짓도 이제는 안 할 거다. 절교다. 이대한.” 반년 만에 다시 떨어진 두 번째의 절교 선언. 그러나 그때와는 무게가 달랐다. ‘왜… 왜? 이번에도 변덕이야? 내가… 백정 놈이라서 그래? 내가 살인자라서? 누가 가르쳐 줬어? 응? 씨발, 장녹수! 대체 왜!!!’ 이유라도 묻고 싶었다. 이유라도 듣고 싶었다. 그러나 녀석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너를 끊겠다.’ 단호한 의지. 어떤 이유라도 돌이킬 수 없는, 어떤 변명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의지. 아버지와 같다. 또 한번 버리고 돌아서는 등까지. 그를 버렸던 아버지와 녀석의 뒤가 겹쳐진다. 세상에서 제일 기대고팠던, 이제는 그의 하나뿐인 ‘가족’의 잔상. 조그맣게 키워가던 마음의 집이 무너져 내렸다. 머릿속의 소음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지웠다. 웅웅대며 신경을 긁는 스크래치 음… 세계가 닫힌다. “이대한!! 대한아!! 정신 차려!! …!!!, …!!!” “씨발, 가서 붙들어!! …!!!, …!!!” 모든 종말이 그러하듯, 그의 붕괴도 조용히 시작됐다. 처음엔 잘 참았다. 충격이 가시고 나서는, 기대도 생겼다. 무슨 일인지는 이번에도 모르지만, 분명히 돌아올 것이다. 원래 제멋대로인 새끼니까… 놈의 장단에 일일이 발맞추어 놀아날 필요는 없다. 그렇게 자위하며 녀석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녀석은 오지 않았다.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진짜 그를 끊어버린 거다. ‘빠져나간 거야. 너를 버리고.’ 머릿속의 악령이 되살아나, 그를 조롱했다. ‘내가 말했지? 후회할 거라고. 후후후… 후하하하핫!!!! 뺏겼어!!! 빼앗겼다!!! 등신 같은 놈, 손안의 벌레까지 뺏겼어!!!’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는 절박했다. ‘…누구에게?’ 되찾아 온다. 아니면 부순다. 송유진의 학교는 겉보기도 깔끔하고 정갈했다. 등 뒤로 모인 새까만 군단은 대한의 신호만을 기다렸다. 화려한 파티에 다들 잔뜩 흥분했다. 하루하루 이를 갈며 준비했다. 그냥 간단히 두 놈 끌어다 죽이는 걸로는 성이 안 찬다. 망가트려 주겠다. 짓밟아 주겠어. 벌레 따위에게 물린 숙주의 권위를 되찾겠다. 잔혹한 기대감이 폭발했다. 그가 손을 들자, 우레 소리와 함께 새하얀 학교는 까맣게 뒤덮였다. 계획대로 안팎 양쪽으로 나눠 동시에 급습했다. 경찰서나 소방서의 전화통은 미리 뿌린 허위신고로 불이 나고 있을 것이다. 장악한 교무실은 나머지들에게 맡기고 목표물만 포획해서 체육관으로 빠졌다. 철수는 10분 뒤. 이제, 놈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병우는 맡은 대로 잘해 줬을 것이다. 녀석에게 버림받고, 분노했던 것은 대한뿐만이 아니었다. 벌레를 끔찍하게 아낀 그는 대한 못지않게 벌레의 애인을 증오했다. 송유진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의 쌍둥이 동생을 잔인하게 뭉개놓을 정도로. “유병우, 그만해!! 이대로 이 새끼 죽이면 너 앞으로 녹수새끼 절대 못 봐, 알아?! 씨발, 너라도 정신 좀 챙겨라!!” 병우를 뜯어말린 건 오히려 한상식이었다. 누가 붙들어 놓은 것도 아닌데, 송유진은 시체가 되어가고 있는 동생 앞에서 한심하게 떨고만 있었다. ‘고작 저따위가, 내 벌레를 꼬여낸 건가. 도대체 뭘로? 몸? 얼굴? 뭘로 사로잡았어? 응? 뭘로 그 새끼를 꼬셨냐?’ 대한은 유진의 앞에 섰다. 밀랍처럼 하얘진 얼굴은, 기묘하게 아름다웠다. 그래, 정말 웬만한 기집년들보다도 예쁜 낯짝이군. 흠칫거리는 유진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대한은 미소지었다. “아악!!!!!!” 정성 들여 하나하나 망가뜨렸다. 오뚝한 코, 예쁜 눈깔, 도톰한 입술… 여전히 뭔가 부족하다. “나이프.” “이대한!!” “나이프.” 놀라서 달려드는 한상식을 걷어차고, 다른 녀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넘겨받은 칼날은 어두운 가운데서도 빛났다. 체념하고 맞기만 했던 송유진의 눈에 공포가 서렸다. 마음에 든다. “빌어.” 나직한 저음에 소스라치며 유진이 고개를 들었다. “그 새끼가 널 사랑한 게 아니야, 그렇지?” 유진은 차가운 창고 바닥에 바싹 웅크리고 있던 몸을 크게 움찔했다. “그냥… 너 혼자 홀린 거지, 안 그래?” 유진의 부어터진 눈이 크게 뜨였다. 그 안에 떠오른 것은 경악. 입을 벌리고 대한을 쳐다봤다. 그는 웃으며 유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새끼가 사랑하는 건 나뿐이야.” 달콤하고 유쾌한 목소리가 울렸다. 대한의 눈에는 광기가 흘렀다. 그 순간 창고 안, 어느 누구도 숨쉬지 못했다. 오만한 군주는 자신의 바램을 확신으로 굳혀버리려 했다. “빌어. [착각해서 미안하다, 장녹수가 사랑한 것은 이대한 뿐이다.]” “아니야!!!!” 송유진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이때까지 비명 외에는 바들바들 떨기만 했던 작은 몸은, 어디서 힘이 났는지 온몸을 끌어 일으키며 대한을 향해 외쳤다. 흐르는 눈물 따위는 별개로, 폐부를 찢는 매서운 외침. “녹수 씨는 날 사랑했어!!! 내가 사랑하는 것보다 더!!! 정말 아껴줬어!!! 매일매일, 키스하고 서로 맹세했어!! 사랑한다고!! 서로에게 사는 기쁨이라고!! 서로가 있어 행복하다고!!! 만나서 다행이라고, 행운이라고!! 그렇게 우린 서로 사랑했다!!! 너 따위는 끼여들 틈도 없을 만큼!!!” 촥-! 선홍색 줄기가 흰 뺨 위를 갈랐다. 그러나 창백해진 것은, 이대한 쪽이었다. 유진의 뺨에 난 자상은 그의 가슴에 난 상처자국. 할퀴어진 자존심. 패배의 표식. 유진은 젖은 얼굴을 들어 입술을 비틀고 그를 비웃었다. “그는, 네 이야기 따위 한 번도 한 적 없었어.” 창고 문을 열고 나타난 녀석은 꼬박 한 달 만이었다.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어본 건 여행 빼고는 처음이다. 그렇게나 보고 싶었는데… 말야, 장녹수. 대한의 귓가에는 아직도 유진의 외침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사랑하지 않는다? 니가 날 사랑하지 않는단다. 저 새끼가…, 니 애인이란 놈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그랬다. 나 따위는 끼어들 틈도 없을 만큼 서로 사랑했다고. 너는 그 새끼만 사랑했고, 나는 아니란다. 그러냐? 정말 그래? 그런 거야?’ 천천히 창고 안의 면면들을 돌아보다, 대한의 발 아래 움츠리고 있는 송유진 쪽을 바라본 녀석의 얼굴이 굳었다. 이윽고 자신을 응시한 녀석은, 입가를 비틀며 그를 도발했다. 죽이고 싶다. 죽이고 싶어. 서서히 다가온 장녹수가 손을 뻗어 대한의 뺨을 쓰다듬었다. 대한은 흠칫 했지만, 피하지 않았다. 녀석은 천천히 그의 허벅지에 앉으며 마치 암컷이 수컷을 유혹하듯 그를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3년 전 할머니 장례식 날, 네 아버지가 널 버린 그 날… 니가 그를 쫓아간 것 기억해?” 흠칫 바라보자, 바싹 다가섰던 녀석의 입술이 그의 귀 뒤로 옮아갔다. 축축한 혀로 핥아진 순간 오싹했다. 명백한 섹스어필. “그는… 울고 있었어.” 가까이 내쉬는 숨결이 입술에 와 닿았다. “그는 항상 약을 가지고 다녀야 할 만큼 아팠어, 대한아.” 마치 사랑을 고백하는 듯이 감미로운 목소리… 사랑을 고백하듯이… 사랑을 고백하듯이… 사랑을 고백하듯이… “그는 널 버린 게 아니야.” 자신의 기만을 고백했다. 그의 기반을 공격했다. 증오를 무너뜨렸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나도, 널 버린 게 아니야.” ─빡!!! 녀석을 후려치고 올라탔다. 머리끝까지 차 오른 분노와 흥분으로 온몸이 마비가 될 지경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스토커처럼 징하게 붙어오는 새끼가 있는데 말이야─]“ 언젠가 술에 취해 뱉었음이 틀림없는 대한의 말을 옮기며, 녀석이 읊조렸다. 가슴을 가로지르는 격통. 대한의 눈이 크게 뜨였다. “[나는 그 새끼가 나를 쳐다볼 때면… 먹은 게 솟구쳐 오르고─]“ 나지막이 속삭이며 녀석은 자신을 끌었다. 젖은 눈으로 그를 유혹했다. 녀석의 페니스가 단단하게 솟은 것을 느꼈다. “[그 새끼 목소리로 나를 부를 때면… 귀가 썩는 것 같고─]“ 떨어져 나가려는 대한에게 다리를 감싸며 허리를 튕겼다. 녀석의 물건이 비벼지는 순간 아래에서 묵직한 기운이 느껴졌다. 발기(發起). 대한의 몸이… 녀석에게 반응했다. “[그 새끼 손이 나를 건드릴 때면… 온 몸에 소름이 돋아서─]“ 참을 수 없는 욕정이 일었다. 거칠게 녀석의 지퍼를 내리고 자신의 것도 열었다. 꺼낸 물건들이 뜨겁게 얽혔다. 신음 섞인 녀석의 자조 어린 독백은 계속되었고, 그의 탐닉도 계속되었다. 녀석의 좁은 입구를 찾아 단단해진 물건을 가져다 댔다. “[죽이고 싶어서 죽겠…는데……! 그러려면 그 새끼 몸에 손을 대야 돼서, …참고… 있어.]“ 숨막히는 입박감을 느끼며 녀석을 꿰뚫었다. 충격. 새로운 세계였다. 장녹수가 있는 곳! 대한은 휘어지는 허리를 단단하게 붙들고 서서히 움직였다. 미칠 것 같은 쾌감에 박고, 또 박았다. “[한번은 그 새끼가 우는 걸 봤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역겨웠는지,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어.]“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정신없이 녀석을 몰아붙였다. 생생했다. 생생한 체온, 체취. 녀석이다, 녀석이다. 내 벌레다. “[나는 그 새끼가 징그러워서 미치겠어.]“ 녀석에게 홀려 격한 정사를 벌였다. 온몸을 다해 유혹해오는 녀석이, 너무나도… 이성이 날아갈 정도로… 좋았다. 그러나 녀석은 볼일이 끝나자마자 다시 송유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쁜 새끼. 사기꾼 새끼. 나쁜…… 무심한, 새끼…… ‘그렇게, 그 새끼가 좋아?’ 속이 뒤집혔다. 머릿속의 악마가 다시 눈을 떴다. ‘죽여!! 없애라고!! 다시는 벌레를 홀릴 수 없게, 아예 없애버려!!’ 그의 손에 칼이 쥐어졌다. ‘그래, 없앨거야.’ 대한의 걸음이 송유진에게로 향했다. “녹수야!!!!” 한상식과 유병우가 비명을 질렀다. 돌아 본 그의 시야에, 녀석이 스스로 자신의 배에 칼을 꼽고 쓰러져 내리는 모습이 비춰졌다. 어두운 창고 속에서도 새빨간 녀석의 피. ─끼아아아아아아아 머릿속의 악마가 비명을 질렀다. 미친듯이 몸부림치며 녀석에게로 향했다. 싫어. 안 돼. 안 돼. 안 돼. 사랑한단 말이다. 뺏길 수 없었던 것뿐이란 말이다. 장녹수를 사랑한 악마의 비명이 대한의 입을 타고 꺽꺽대는 소음으로 나왔다. 후두룩히 떨어지는 악마의 눈물이 대한의 눈을 타고 흘러나왔다. “이대한… 하… 씹. 사고 좀… 치지 마라. 응?” 다정한 벌레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사라져갔다. 악마 숙주의 통곡은 커져만 갔다. 대한은 잠든 녹수의 얼굴을 바라봤다. 벌써 5개월 전의 일이다. 녀석은 그에게로 무사히 돌아왔다. 살아서, 그리고 혼자서… 잠든 얼굴이 어렸을 때와 많이 변한 것도 같다. 키도 크고, 덩치도 더 크고. 반듯한 얼굴은 완연한 성인의 것이다. 그나마 볼만했던 볼의 젖살도 없어졌다. 어디로 봐도 사내새끼. 이제는 푸르스름한 수염까지 삐죽 나는 징그러운 사내새끼다. 어떻게 이런 녀석에게 발기할 수 있을까. 혐오감이 잠시 몸 안을 긁는다. 자신까지 오염시킨 오염덩어리, 장녹수라는 벌레. 대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에도, 자신은 여전히 넘칠 만큼 녀석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중독성 강한 독(毒). 끔찍한 악몽에 잘 듣는…… 대한의 손가락이 고른 숨소리를 내는 녀석의 목을 건드렸다. 목 아래로 이어지는 판판한 살갗에는 가는 상처 자국들이 희미하게 엉켜있다. 그가 남긴 상처자국. 그를 기만했던 녀석에 대한 분노의 각인. 지금도 아파 보인다. 하지만 그 역시, 지금도 화가 난다. 자는 입술을 덮쳤다. 얄미운 말만 쏟아내는 입술인 주제에 좋은 감촉. 살며시 마주 댄 입술 아래의 턱 끝으로, 새로 돋아나 까끌거리는 수염이 느껴졌다. 그것도, 이제는 괜찮다. 숨소리가 격해졌다. 녀석의 상처 위로 새로 새겨진 붉은 표식들. 피가 멍울져서 표피로 올라온 그것들은, 간밤의 부끄러운 흔적이었다. 아직까지도 낯선 녀석과의 행위 중에 그가 이성을 잃으며 남긴 자취들. 반사적으로 몸이 달아오른다. 돌돌 말은 이불을 치우며 몸을 겹쳤다. 녀석이나 자신이나 아직 벌거숭이인 채 그대로… 머리 아래로 팔을 넣어 팔베개를 하며 끌어안았다. 허벅지에 닿는 녀석의 물건이 느껴진다. 좁은 입구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콘돔을 썼기에, 간밤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아 꽤 빡빡했다. 그래도 격하게 해댄 덕인지 구멍은 헐거워져 있었다. 일단 집어넣자 손가락을 쑤욱 빨아 당긴다. 감겨있던 속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대로 눈을 뜨면 좋겠는데… 그는 녀석의 목에 얼굴을 묻고 할짝였다. 미칠 듯이 물어뜯고 싶다. ─콰직, 입술에 닿은 몸이 크게 움칫했다. “…아파.” 목이 잠겨 허스키한 목소리의 녀석이 어깨를 밀쳤다. 대한은 이를 세우고, 피가 나올 정도로 세게 녀석의 목을 물었다. “아프다니까!” 잠에서 완전히 깼는지, 어깨를 밀어내는 손의 힘도 거셌다. 거부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대한은 그게 화가 났다. 낮게 으르렁거리며 위협적으로 목줄기를 뜯었다. 드디어 피가 배어나온다. 이대로… 죽일까… “아악!! 아프다니까!! 씨발!!!” 살점이 떨어져 나간 듯, 조금 흐르던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녀석의 고통에 찬 비명이 짜릿하게 대한의 중심을 달궜다. 밀쳐내려는 어깨 위의 손을 강하게 휘어잡고 놈의 위에 안전히 자리 잡았다. 잠에서 막 깨어났는데도 아파서인지 힘없는 녀석의 물건을, 무릎으로 짓밟아 오체를 봉쇄했다. 녀석은, 그가 움직이면서도 목을 물고 있자 통증이 더했는지 팔딱거리며 신음을 흘렸다. 입안으로 비릿한 혈향이 가득 찼다. 완전히 제 모습을 갖춘 대한의 페니스가 성을 내기 시작했다. 자꾸만 밀어내는 녀석의 손이 밉다. ‘왜! 왜 날 거부해!! 나쁜 새끼! 너 아직도 그 새끼만 사랑하냐?!! 그래?!!’ 피에 취한 것처럼 대한의 머릿속이 엉켰다. 말도 안 되는 그의 화풀이에 저항하던 손의 힘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르던 비명음도 잦아들었다. 가는 떨림이 계속되면서, 가해지는 움직임에만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입을 떼고 녀석의 얼굴을 바라봤다. 핏기 하나 없이 새파랗게 된 얼굴은 온통 눈물바다. 입가에 잔뜩 묻은 녀석의 피가 갑자기 짜게 느껴졌다. 살며시 얼굴을 쓰다듬었다. 흠칫하고 피하는 것을 붙들어 키스했다. “큭…!” 혀를 깨물렸다. 이어, 녀석은 풀려난 한쪽 손으로 대한의 머리를 강타하고, 어깨로 밀어버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씨발!!! 뭐하는 거야!! 자다가 봉창 뜯냐?!! 왜 목은 물어뜯고 지랄이야!! 아얏, 씹!!! 진짜… 죽는 줄 알았잖아!!” “너, 허지만이랑 했지.” 묻는 게 아니라 단정. 화들짝 놀라는 장녹수 새끼를 노려봤다. “내가, 미친 망둥이 같은 니 놈을 그냥 풀어뒀을 거라 생각했나?” 녀석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나를 못 믿어서 감시라도 붙였다는 거야?” “그럼 작년엔 그 꼴로 바람나고, 여행 떠나기 바로 전에 눈앞에서 새 놈이랑 붙어먹는 걸 봤는데, 내가 그런 새끼만 믿고 한 달이나 자리를 비울 수 있을 것 같았어? 니 눈엔 내가 호구로 보이냐?” “너야말로 내가 호구로 보이냐?!! 씨발, 이게 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수작이야!!” “내가… 너한테 뒤통수 맞은 게 그동안 몇 번이라고 생각해? 대체 왜 이렇게 빨리 돌아왔다고 생각하냐? 니 새끼, 공항에서 얼굴 마주친 순간부터 작살내고 싶어서 근질근질했다.” 대한의 가라앉은 목소리는, 그의 분노가 아직도 살아있음을 알렸다.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허지만이란 놈은 거슬렸다. 녹수가 마음에 들어하는 것은 둘째치고, 놈이 녀석을 바라보는 눈이 거슬렸다. 그냥 친구나 아는 형이라기엔 지나치게 다정한 눈. 마치 장녹수가 자신을 친구란 이름으로 돌봤던 때와 마찬가지로, 뭐든 받아줄 것 같은… 상식과 병우 외에는 친구라고 할 만한 게 없던 녀석은, 정신없이 놈과의 형-동생 놀이에 빠졌다. ‘재밌는 형이야.’‘지만 형이…’‘좋은 사람이다.’‘지만 형’‘지만 형’‘지만형’ ……썩을. 그래도 참았다. 행복해 하니까. 송유진도 잊은 듯이 행복해 했으니까. 그래서 놔 둔 거였다. 그러다 두 달 전에 싸웠을 때, 녀석을 달래 자신에게 보낸 것이 그놈이란 걸 알고는, 자신이 오해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게 실수였다. 방학 때면 외국으로 가는 자신들 때문에 혼자 남게 될 녀석이 불쌍해서, 인천 본가로 귀향한다는 놈의 집까지 따라가게 했다. 서울에 남아 맡은 일들을 마무리 짓고, 전날 녀석이 자랑을 일삼던 국철도 타고 나름대로 기분 좋게 인천에 도착했던, 그 단 하루사이. 그곳에서 마주친 것은 놈의 변모였다. 지만은 발정 난 수컷의 향을 풍기며, 두 눈 가득히 녀석을 깔고 싶다는 음탕한 욕구와 녀석의 마음까지 원하고 있었다. 결국 그 날, 대한과 부모가 보는 앞에서 장녹수를 덮친 그 놈은 말 그대로 녀석에게 미친 새끼였다. 죽도록 맞으면서도 녹수를 향한 시선을 떼지 못했었다. 그런 새끼를… 녀석은 자신이 없는 틈에 다시 찾아가 만난 것이다. 그것도 몇 시간이나 방안에서, 단 둘이서만…! 처음 프랑스에서 녀석이 지만의 집으로 다시 찾아갔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치를 떨었던가. 일정을 도중에 접고 한국에서 부른 다른 놈들에게 일을 넘겨주는 와중에도, 머릿속은 온통 두 새끼가 침대 위를 구르는 장면이었다. 녹수는 목에 피를 잔뜩 흘리면서도 대한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도, 무표정한 얼굴로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다. 변명조차! 또다시! ‘거짓말이라도 해!! 니 새끼 잘 하는 그 잘난 거짓말이라도 하라고!!’ 정말 이럴 때면 죽여버리고 싶다. “할 말 없어? 왜, 입 다물고 있으면 없었던 일 될 것 같아?” 까드득 이를 갈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식어버린 몸 위로 다른 열화가 치솟았다. 벌거벗은 두 남자 사이에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그래, 형이랑 잤어. 그래서? 너도 어차피 나가면 딴 여자들이랑 뒹굴잖아. 안 그래?” 떨어진 답에, 대한은 멍해졌다. 녀석은 특유의 미소로 싱긋 웃었다. “오해하지 마. 속상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해 못하는 건 아니란 이야기다. 나도, 남자니까……” 혀로 입술을 훑고 대한의 곁으로 다가왔다. 눈을 깔고, 손가락을 들어 그의 근육선을 따라 가슴부터 배꼽까지 살며시 내리그었다. “나도, 가끔… 다른 사람과 자고 싶기도 하거든. 호모라서 그런지 상대가 남자이긴 하지만.” 눈을 들어 그를 조소했다. 대한의 몸은 굳어진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짜릿했어. 지만 형도 좋았고. 형 꺼 무지 크더라. 뒤에 꽂고 흔드는데, 너무 좋아서 죽을 뻔했어. 그래서 더 해달라고 사정했지. ‘더… 더…’ 이렇게.” 아래로 내려가 자세를 잡고, 헐떡이는 흉내까지 내며 자랑했다. 적나라한 엉덩이가 대한의 물건에 닿았다. “뭐해? 꽂아, 씨발 새꺄. 비교 좀 해보게. 왜, 이제 걸레라서 싫으냐? 니 좆도 걸레면서.” “…그만해.” 탁한 음이 나왔다. 묵직하니 잠긴 그것은, 분노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었다. “왜! 비교 좀 해 보자니까?! 작살내고 싶다며! 작살내!! 사랑하는 씹새꺄!!!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내가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니 귀엔 들리지도 않지?!! 씨발!!! 그럼 죽도록 믿지 못할 호모새끼, 좆 꽂는데 밖에 더 쓰겠냐?!! 니 새끼 마음 내킬 때까지 써!!! 쓰라고!!! 쓰고!!!” 헉헉대며 분통을 터뜨린 끝에 말을 끊었다. 아직 눈물기가 남아있는 눈으로 그를 독하게 쏘아봤다. “쓰고, 버려. 버려줘라, 차라리…” 흐느낌에 지친 목소리… 녀석의 목에 흐르는 피가 선명했다. 대한의 손이 서서히 그곳으로 향했다. 장녹수는 눈을 감았다. “그럴 수 있었으면, 진작에 그랬다. 벌레.” 손은 목을 지나 녀석의 머리를 감싸고, 그의 품으로 데려왔다. 차가워진 몸을 강하게 안고, 피투성이 시트를 함께 둘렀다. 대한의 혀가 상처에 닿자 녀석의 몸이 긴장했다. 꿈틀 비트는 것을 눌러가며, 그는 정성껏 상처를 핥았다. 내가 상처 냈으니까, 내가 고쳐야지. 내 꺼니까. 이렇게 속삭이며, 달랬다. 품안에 꽉 차는 몸의 살갗이 마주 닿으며, 따스하게 숨을 쉬었다. 살갗이 닿을 때마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기분. 심장에 박힌 벌레는 이제 그의 호흡기까지 장악했다. 숙주는 졌다. 대한은 이제 녹수를 통해서만 숨을 쉰다. “사랑한다. 장녹수.” 마침내 손에 넣은 나의 그린우드. 후기(後記) ---------------------------------------------------------------- Editorial Story 즐거운 항해가 되셨기를 빕니다. 좋은 시간 되셨기를 빕니다. 언제나 행복한 하루 되시길… 감사합니다. 그린그림 올림.